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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오이] 연서(戀書) 1

아마도 세죠온에 나올 신간... 내가 무슨 짓을...

원작기반 쿠니X오이. 전연령가입니다...

제목은 가제+쿠니미의 짝사랑으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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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사이로 스미는 바람에 은근한 열기가 실려 있다. 그러고 보니 봄도 거의 막바지구나, 하는 감상은 태평한 느낌이 없지 않다. 당장 주위만 둘러봐도 춘추복보다 하복의 비중이 월등한데 나는 희한한 곳에서 계절을 느꼈다. 그래도 아직 맨살을 내놓고 다니고 싶지는 않은, 4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치는 이 애매한 시점은 역시 싫다. 운동장에서는 알루미늄 배트의 파열음과 누군가의 호명(呼名)이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다. 야구부가 수비 연습이라도 하는 걸까. 깨닫고 보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왼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그 왼손을 내어 창문을 닫는다. 내 머리카락의 흔들림이 잦아듦과 동시에 운동장의 소리가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적응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나는 원래 침묵에 더 익숙한 사람이므로. 


내 오른쪽 대각선 앞쪽으로 앉은 킨다이치는, 간단히 말하자면, 역시 침묵과는 거리가 있다. 입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워낙 행동이 부산스럽다. 한껏 세운 머리카락만큼이나 유난스러운 녀석. 분명 뭔가를 얘기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존재감이 엄청나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도 평소 없는 일이다. 킨다이치는 수업 시간에 연필을 드는 일이 거의 없는 녀석이다. 심지어 지금처럼 자습이 주어지면 차라리 수면을 택하지, 스스로 연필을 들고 무언가를 무섭게 써내려갈 녀석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만 3년의 교류는 내 안에 ‘킨다이치’라는 인물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그려내기에 충분했다. 


교탁에 앉아 졸고 있는 자습 감독 선생님을 한 번, 그리고 킨다이치의 비스듬한 옆얼굴을 한 번 본 후 나는 녀석이 ‘혼자만의 정체 모를 작업’에 착수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지금 그 내용을 알 수는 없고, 설령 내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해도 곧 내게 가져올 녀석이다. 상당히 귀찮은 내용이 될 것이라는 직감에, 나는 춥지도 않은 몸을 괜히 작게 떨었다.


“어이, 쿠니미.”


그 직감은 백 퍼센트 적중했다. 뇌를 정신없이 혹사한 물리 시간이 끝나고, 저지를 뒤집어쓴 채 엎드리자마자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그 목소리는 들을 필요도 없이 킨다이치다. 모르는 척하고 계속 엎드려 있으려 했는데, 눈치가 없는 건지 그 정도로 절박한 건지 킨다이치는 아예 내 저지를 홱 들어내고는 옆 의자에 앉아버렸다. 짝은 감기로 결석했으니 그에게 민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내게는 확실히 민폐다. 고개를 들고 킨다이치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내 얼굴에 잔뜩 묻어난 피곤과 짜증을 읽었는지 흠칫한 것도 잠시다. 이 뻔뻔함으로 보아 엄청나게 절박한 일이라고 그를 이해하기로 했다. 내 한계치에 가까운 관대함이라는 걸 그는 알까. 주위를 한 번 확인한 킨다이치는 끝이 뭉툭해져 버린 연필과 종이 한 장을 내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게 뭔데?”


시답잖은 거면 죽는다, 라는 눈빛을 읽었는지 녀석은 나를 흔들어 깨울 때의 기세와는 정반대로 우물쭈물. 나는 눈썹 각도를 조금 더 가파르게 한다. 


“일단 읽어봐…….”
“작문 숙제라도 해? ……시모카와 치에 님에게……. 응?”
“누, 누가 소리 내서 읽으래! 눈으로만 읽어!”
“킨다이치.”
“……으, 응.”
“이거 연애편지냐?”
“그, 말 좀 조용히 하라니까!”


귀뿌리까지 시뻘게진 락교라니, 나름대로 쏠쏠한 구경거리다. ‘연애편지’라는, 요즘 시대에 잘 쓰지 않을 것 같은 단어를 일부러 고른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단어도 단어거니와 이런 고백 방법 자체가 요즘엔 드물지 않나. 시커먼 남자 고등학생이 자습 시간에 온 힘을 다해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러브레터라니. 그리고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이거였다. 


“근데 시모카와 치에 선배라니, 진지한 거야?”
“역시 안 될까……?”


 나는 지우개질을 몇 번이고 견뎌낸 탓에 우툴두툴하게 일어난 종이를 심각하게 노려본다. 맨 위의 이름 쪽은 깨끗했다. 이거야 수정할 일이 없으니 당연하겠지. 킨다이치는 잔뜩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인 채다. 진지하냐고 물어보는 건 조금 너무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교내 인지도라면 오이카와 선배와 투 탑을 달리는, 아니 쌍벽을 이루는 여자 테니스부 주장 시모카와 선배라니. 킨다이치가 이 선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을뿐더러-진작 알았다고 한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편지를 쓰는 행위로 무언가를 쟁취할 거라는 빈말조차 쉽게 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게 문제였다. 분명 애인은 없는 걸로 아는데, 그렇게 인기가 많은데도 애인이 없다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마치 우리 주장처럼. 


“안 될 것 같지만, 아니 날 째려보지는 말고.”
“그렇게 단언하는 게 어디 있어!”
“난 헛된 희망은 불어넣지 말자는 주의라서.”
“…….”
“쓰는 걸 도와줄 수는 있는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라.”


맹렬한 지우개질 끝에도 살아남은 몇 개의 문장이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대강 훑어본 나는 말없이 종이를 주인에게 되돌려준다. 종이를 받아드는 손길이 멈칫거린다.


“……도와주는 거 아니었어?”
“쉬는 시간 십 분으로 될 게 아니야. 오늘 훈련 끝나고 하굣길에 라멘 사.”
“으, 응! 고마워!”


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는 참이었다. 나는 어쩌자고, 남의 연애편지 쓰기 프로젝트에 동참했을까. 그것도 킨다이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편지의 결과는 사실 그의 진심을 종이 위에 옮겨놓기 전부터 뻔했다. 그야, ‘세이죠의 요정’이라는 다소 민망한 별명도 나름대로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는 선배니까 전망이 좋을 수가 없다. 애초에 시모카와 선배가 킨다이치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면 아마 이 특이한 헤어스타일 때문이겠지. 킨다이치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들떠 보이는 그의 뒤통수를 지켜보며, 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쇼유 하나랑, 돈코츠 하나 주시는데, 돈코츠에 면 사리 하나 추가해주세요. 두 그릇 다 숙주는 많이 주시고요!”


하굣길의 라멘이란 말하지 않아도 정해져 있다. 엄청나게 맛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값어치를 못 하는 것도 아닌 동네 라멘집. 다행히 훈련 후의 어정쩡한 시간대라 세이죠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커녕, 손님은 우리 둘이 전부였다. 머릿수건을 둘러쓴 주인이 컵과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방석 위에 자리를 잡은 후에 나는 가방에 손을 넣어 킨다이치의 편지를 꺼낸다. 그 편지는 미리 내 가방에 넣어두었다.


“안녕하세요, 시모카와 선배. 절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주제 파악은 하고 있구나.”
“그렇게 신랄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컵에 물을 따라 바치던 킨다이치가 노골적으로 상처받은 표정을 했지만, 나는 일부러 그 얼굴을 보지 않고 종이를 계속 읽어 내려간다.


“배구부의 1학년 킨다이치 유타로입니다……. ……서브 넣는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너 시모카와 선배가 서브 넣는 것 본 적 없지?”
“멋있는 서브는 우리 주장 것밖에 본 적 없는데. 언제 또 여자 테니스를 보고 있었대?”
“오이카와 씨의 서브? 멋있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어?”
“그럼, 나는 그런 감상도 없는 줄 알았냐.”
“그야 너 평소에 오이카와 씨에 대해서는 자주 얘기하지 않으니까.”
“……. 얘기할 일이 없었으니 그렇지.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게 누구 연애편지인지 알지?”
“넵.”


짐짓 미간을 팍 구기고 종이를 눈높이 정도에서 흔들어 보이니, 킨다이치는 물수건을 내 앞에 놓다 말고 고개를 푹 숙인다. 주방에선 조리가 한창인지 파 써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눈은 편지의 다음 문장들을 훑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에는 오이카와 씨의 서브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입학하자마자 배구부에 들어와서 오이카와 씨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 서브를 다시 본다는 생각에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에도 그의 서브는 정평이 나 있었다. 그 후로 삼 년이 흘렀다. 파워든 정확성이든, 혹은 유연성이든 그의 배구는 한 걸음 나아가 있을 터였고 그 일보(一步)는 서브에 압축되어있을 터였다. 삼 년 만에 나를 다시 보았을 때 그의 표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배구를 그만두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는 얼굴이 아니었던 것 같기는 하다. 한 달도 되지 않은 기억은 군데군데 흐릿해져 있었지만, 그 서브만은 인상의 한 구석을 강타하고 지나갔다. 


“어이, 쿠니미.”
“어, 응?”
“뭐 해? 라멘 불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앞에는 쇼유 라멘이 놓여 있었다. 젓가락을 든 킨다이치가 나를 의아한 얼굴로 빤히 바라보고 있다. 라멘이 나오는지도 모르고 오이카와 씨를 떠올리고 있었나? 나도 모르게 몰려오는 한심함에 고개를 두어 번 젓고, 테이블 위에 잔뜩 꽂혀있던 젓가락을 하나 빼내어 쪼갠다.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불길한 느낌. 아니나 다를까 내 눈앞의 젓가락은 완전한 불균형 상태였다. 


“……쯧.”
“일단 불기 전에 먹어.”


편지 첫 구절부터 오이카와 씨가 생각난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젓가락을 부러뜨린 것도 그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새 젓가락을 꺼낼까 하다가, 그것마저도 부러지면 정말로 표정관리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짝짝이 젓가락을 쓰기로 했다. 킨다이치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으나 곧 알아서 분위기를 살폈는지, 신 나게 자신 몫의 돈코츠 라멘을 흡입하기 시작한다. 물론 나는 라멘 한 그릇을 먹고 집에 가서 또 저녁을 먹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평균 남고생보다 많이 먹는 편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운동 후의 라멘 한 그릇 정도야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다 소화된다. 익숙한 맛의 쇼유 라멘을 한 젓가락 집어먹고, 나는 다시 문제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시합이 끝나면 항상 팬에 둘러싸인 선배의 모습에……. 이거 다 경쟁자들이잖아?”
“그렇지, 뭐.”


반은 체념한 듯한 표정의 킨다이치. 그 앞의 라멘은 벌써 반 가까이 줄어들어 있다. 아무래도 ‘시모카와 치에 님’은 테니스 버전, 덧붙이자면 여자 버전 ‘오이카와 토오루’라 해도 과언은 아닌가 보다. 그러고 보니 항간에 둘이 친하다는 소문이 있다. 복도에 선 채 둘이 이야기를 하는 모습도 두어 번 본 것 같다. 하긴, 우리 주장이 안 친한 여자가 있겠느냐만. 이유도 없이 자꾸 떠오르는 오이카와 씨의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 그리고 밥값을 하기 위해서 나는 이 연애편지에 대해 총평을 해야 했다.


“일단 편지가 너무 저자세야.”  
“고백하는 편지를 고자세로 쓸 수는 없잖아?”
“저자세고 고자세고, 이렇게 비굴한 연애편지를 받으면 내가 여자라도 사귈 마음은 안 들어.”
“여자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쿠니미.”
“……너보다는 잘 알 것 같으니까, 맡겼으면 좀 닥쳐주지 않을래?”
“으, 응.”


쪽지를 건네고 나는 남은 라멘을 먹기 시작했다. 이미 킨다이치의 라멘 그릇은 바닥을 보이고 있다. 초조한 듯 그는 물컵을 꼭 쥐고 나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조금 부담스러운 눈빛이라 평소 같았으면 면박을 주면서 치웠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봐주기로 했다. 잔뜩 풀이 죽은 숙주가 바닥에까지 깔려있다. 적잖이 불은 면 위로 숙주를 건져내며, 나는 말을 잇는다.


“냉정하게 말해서 너도 가망이 없다는 걸 아는 도전이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미친 척,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을 써 봐. 어디서 베낀 것 같은 어쭙잖은 문구는 오히려 감점이야. 내가 시모카와 씨면, 뭐야 이 기분 나쁜 편지는, 하고 그 자리에서 버릴 것 같은데.”
“……시모카와 씨는 너 같은 냉혈한이 아니야!”
“듣고 보니 좀 기분이 나쁘네. 너, 사람을 겉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오이카와 씨도…….”
“오이카와 씨?”
“……아니, 됐어. 가자. 사람들 오겠다.”


서브에서 시작된 오이카와 씨 연상은, 아무래도 오늘은 이대로 멈춰줄 것 같지 않았다. 여간해서 마음처럼 굴러가지 않는 뇌를 탓하며 나는 뺨 안쪽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문다. 나 자신이 무던히도 지겨워져서 더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킨다이치의 대답은 듣지 않고, 옆자리에 놓았던 저지와 책가방, 스포츠 백을 들고 일어선다. 멍하니 나를 올려보던 킨다이치도 급하게 짐을 싸서 일어났다. 먼저 나가 있겠노라 말하고 터벅터벅, 가게 바깥을 향하는 와중에도 나는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오이카와 씨의 연상은, 정말 서브에서 시작된 것이었나? 혹시 그전부터 계속 떠올리고 있었던 건 아닌가? 


“뭐야, 쿠니미 아니야?”


비스듬히 숙이고 있던 시야 끝에, 익숙한 운동화 코가 잡혔다. 그보다도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을 인식한 건 그다음 일이었다. 이와이즈미 씨의 목소리. 그렇다면 옆에는 너무도 당연히 이 사람이 있을 터다. 지금만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나와, 고개를 들어야 이상해 보이지 않을 거라는 나. 분명 오늘 방과 후 훈련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시답잖은 농담을 하다가 이와이즈미 씨에게 한 대 얻어맞는 모습도, 내게 진지하게 토스를 올려주던 옆얼굴에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쿠니미쨩? 그럼 킨다이치도 있겠네?”


‘쨩’즈케의, 의미 없는 다정함은 역시 그만의 것이다. 나는 까닭 없이 울컥하는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러고 보니 3학년은 남아서 훈련을 더 한다고 했지. 하나마키 씨와 마츠카와 씨는 없고, 주장과 부주장 두 사람만이 다정하게도 서 있었다. 나는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며 고개를 다시 숙였다 들었다. 더 할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마침 가게 포렴을 걷고 킨다이치가 나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엇, 선배들도 라면 드시러 오신 거예요?”
“응, 영 출출해서. 너희는 먹고 나가는 거야? 아쉽네, ‘좋은 선배’ 타이밍인가 했더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바보카와.”
“왜, 나 그 정도로 박한 선배는 아니란 말이야. 아무튼, 다음엔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봐. 오늘은 아쉽지만 바이바이.”


내 마음을 안 건지, 오이카와 씨는 이와이즈미 씨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가게 안으로 사라진다. 눈치는 더럽게 빠른 사람이니 아마 내 표정과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읽었을 것이다. 눈치도 없는 킨다이치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다 대고 꾸벅 인사를 한다. 나는 저지를 걸치며 애꿎은 입술을 몇 번 씹었다. 표정관리, 표정관리. 평소 무표정의 반만이라도 지키려 했는데, 얄궂은 얼굴 근육은 꼭 이럴 때 맘대로 되지 않는다. 하필 이럴 때 만날 건 뭐람.


“집으로 바로 가냐?”
“응, 그러려고. 더 밖에 있을 이유도 없고.”
“그래, 난 들어가서 편지 좀 고쳐봐야겠어.”
“……힘내라.”


기분이 별로인 와중에도 그 편지를 수정한다는 킨다이치의 정성에는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게 된다. 라멘집에서 조금 걸으면 갈림길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쓸데없는 잡담을 조금 나누고 헤어졌다. 아무리 여름이 가까워져 오는 늦봄이라 해도 저녁나절은 조금 쌀쌀하다. 


나 자신도 알고 있다. 결론이랄 것은 하나밖에 없다. 나는 오이카와 씨를 신경 쓰고 있다. 이제까지 몰랐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조차 신랄한 내가. 이제야 눈치를 챘다. 킨다이치가 그 연애편지를 내게 내밀지 않았다면 나는 조금 더 내 감정을 유예할 수 있었을까? 설사 내가 이 감정을 유예한다 한들, 무엇이 바뀌었을까. 이제 와서 킨다이치를 원망할 마음도, 쓸데없이 오이카와 씨와 닮은 점이 많은 시모카와 씨를 원망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굳이 원망할 대상을 찾으라면 그 편지에서 오이카와 씨를 떠올리고만 내 자신이리라. 


“이게 대체……. 하아.”


혼잣말의 끝에 습관처럼 내뱉은 한숨은 속절없이 저녁노을을 따라 흩어진다. 집까지 걸어가는 십 분이 징그럽게도 길다. 어쩌면, 아마 헛된 바람이겠지만 아마도 어쩌면, 내일 다시 오이카와 씨를 보면 아까처럼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뒷수습은 어떻게 해야 할까. 눈치 빠른 오이카와 씨는 분명 무언가를 알아차렸을 텐데.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거짓말이라도 하면 그에게 통할까. 차라리 아프다고 며칠 부 활동을 빠져볼까. 시답잖은 상상을 하는 사이에 내 발걸음은 멈추어 있었다. 아무튼 이 감정이 한때의 동요로 끝나는 일이 현재의 내가 바랄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상황이겠지. 하지만 더 알 수 없는 건 내가 그쪽을 바라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속절없는 그 기대에 조금이나마 희망을, 아니 조금 간절해지는 바람을 걸어보기로 하며 나는 남은 오 분을 위해 다시 발에 힘을 주었다. 당연히 다 소화될 줄 알았던 라멘이 잔뜩 얹혔는지, 명치 부근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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