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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오이] 연서(戀書) 3

쿠니미의 끝없는 삽질..


주장 없이 연습을 시작하고 십 분 정도 지났을까, 체육관 문이 화려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보통 이 시각에는 배구부 전용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외부인이 들어올 일은 없다. 배구공이 바닥이나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밖에서도 들리기 때문에 다른 종목과 착각할 리도 없으니, 이렇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힐 수 있는 사람은 배구부원뿐이다. 그리고 연습 현장에 부재중인 배구부원은 딱 한 명이다. 체육관 안의 인원이 너나 할 것 없이 돌아본 곳에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주장 오이카와 씨가 서 있었다. 이와이즈미 씨의 표정이 순간 엄청나게 험악해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오이카와 씨 등장! 다들 보고 싶었지?”
“어떻게 된 거야, 이와이즈미 엄마? 아들내미는 집에 가둬놓고 온 것 아니었어?”
“……난들 아냐. 좀이 쑤셔서 못 견딜 지경이었나 보지.”
“이 차가운 반응들은 뭐야?”
“말을 말자.”


이와이즈미 씨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걸 신호로 다른 부원들도 각자 하던 연습으로 돌아간다. 서운하네, 서운해! 같은 불평을 잔뜩 흘리면서 오이카와 씨는 라커룸 쪽으로 사라졌다. 


오이카와 씨의 연습량은 절대적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똑같은 시간을 연습해도 그 밀도가 달랐다. 아마 이와이즈미 씨에 의해 가택 연금을 당한 와중에도 가벼운 트레이닝은 계속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훈련에 대한 자세는 나와 정반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서브 연습을 하려고 집어 들었던 공을 괜히 두어 번 바닥에 튕긴다. 저지로 갈아입은 오이카와 씨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쿠니미쨩, 오랜만이야.”
“안녕하세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니, 뭐가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한껏 접어 웃는다. 내 마음 한구석에 따라 접힌 자국이, 박박 문질러 펴도 사라지지 않을 흔적이 남았다. 내 상태가 완전히 회복된 것을 확인한 후 오이카와 씨는 3학년 선배들 쪽으로 다가간다. 나는 공을 쥔 채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본다.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이제 와서 물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질문인데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킨다이치더러 무모하다고 힐난할 처지가 아니다. 킨다이치는 어차피 몰랐던 사람이니 관계를 망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고, 애초에 시모카와 선배는 이성이다. 내 쪽은 우리 팀 주장인데다가……. 


“어이 쿠니미, 공 좀……. 으악! 잘 보고 던져야지!”
“아, 미안.”


킨다이치가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를 누르며 잔뜩 억울한 목소리로 항의해온다. 내가 던진 공에 정통으로 맞은 듯하다. 점점 더 부정적으로 흐르는 사고를 멈춰준 것은 고마웠으나, 덕분에 내 동요(動搖)가 드러난 건 영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한순간 이쪽에 집중되었던 이목들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며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원래대로 돌아간다. 피해자 킨다이치만이 아직도 뭔가 더 할 말이 남아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이 마음을 전하지 못할 것이다. 전달은커녕, 내색해서도 안 된다. 눈치가 이렇게나 빠른 오이카와 씨 앞이니 작은 누설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이 마음은 부질없는 한때의 동요여야만 한다. 내비치는 것마저 민폐가 되는 마음이라면 철저하게 없는 것으로 만드는 편이 낫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일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건 무엇보다도 오이카와 씨에게 피해가 될 것이 뻔했다. 얼마나 자라날지 짐작도 할 수 없는 감정은 싹이 텄을 때 잘라내야 후환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러나, 싹이 텄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앓아눕고 체육관 접근금지령이 떨어져 오이카와 씨를 마주하지 못한 약 일주일의 시간 동안 나는 싹을 잘라내려 무진 애를 썼다. 싹이란 건 애초에 없었다고, 어쩌다 비슷한 자리에 난 풀을 보고 착각한 거라고 자기세뇌도 해 보았다. 그 모든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월요일 아침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어쩌면 오늘 오이카와 씨를 보지 않을까, 였으니 그 세뇌는 결국 아무런 쓸모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싹을 잘라내려 온갖 꼴사나운 노력을 하는 동안 또 다른 나는 체육관 접근금지령이 풀리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허무함과 자괴감에 그만 픽 웃고 말았다.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상상 속에서 나는 오이카와 씨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목소리도, 표정도, 자세도 평소의 나와 다르지 않았다. 살짝 올려다보게 되는 오이카와 씨의 얼굴도 평소와 똑같았다.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나는 되풀이하여 말한다. 


알아, 쿠니미쨩. 나도 너를 좋아하지 않아. 오이카와 씨는 분명 그렇게 대답해야만 했다. 그것이 내가 머릿속으로 설정한 정상적인 시뮬레이션이었다. 그러나 내 상상 속의 오이카와 씨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저 침묵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침묵에 나는 한쪽 발을 담가버리고 말았다. 그건 내 바람이었다. 내 머리, 내 이성과는 정반대로 흐르는 소망이 ‘정상적인’ 시뮬레이션을 거부한 것이다.


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내 손 마디가 하얗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그와 똑같은 강도로, 나는 이를 악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더니, 삼십 분 일찍 끝난 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이래서 사람이 한 번 퍼지면 끝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이 일을 교훈으로 삼아 더 빠릿빠릿하게 운동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마와 목덜미는 이미 땀범벅이고, 다리 근육은 실컷 주인을 원망하고 있다. 스트레칭을 확실히 했는데 내일 훈련 전까지는 꼼짝없이 근육통에 고통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 들어가면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이십 분이고, 삼십 분이고 앉아있어야지.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고 허벅지를 두드려보자 마치 반향(反響)처럼 통증이 퍼졌다. 


“오랜만에 하니까 힘들지?”


고개를 들어보니 이와이즈미 씨가 서 있었다. 난 말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다. 그렇게 말하는 이와이즈미 씨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맺혔다. 오이카와 씨의 연습량과 정확히 비례하여 연습량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이와이즈미 씨일 것이다. 오이카와 씨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체육관에 나타났을 때에는 험악한 표정이었던 그도 오이카와 씨가 왔기 때문에 제대로 훈련을 할 수 있었으리라. 에이스의 특권이다. 물론 그게 부럽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은 많이 봐 준 거야. 집에 들어가서 쉬라고.”
“감사합니다…….”
“감사야, 주장한테 해야지. 연습을 끝낸 건 오이카와니까.”
“네에.”
“본인도 힘들었나 봐. 완전 녹초가 됐네.”


이와이즈미 씨가 턱 끝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오이카와 씨가 하나마키 씨의 등에 매달려있었다. 귀찮아, 무거워! 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마키 씨는 등에 올라탄 짐을 내려놓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나가던 마츠카와 씨가 말없이 오이카와 씨의 머리 위에 수건을 올려놓고 터벅터벅 걸어 사라진다. 3학년 선배들은 뭐랄까, 제각각 개성이 강해서 오히려 잘 뭉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와이즈미 씨가 하나마키 씨 쪽으로 다가간다. 오이카와 씨의 등을 한 대 강하게 후려치더니, 엄살 부리지 마! 라고 단호한 일침. 뭐라 뭐라 말하는 오이카와 씨의 억울한 목소리가 그 뒤를 따른다. 나에게 와서 ‘녹초가 됐네’ 라고 말한 이와이즈미 씨는 대체 뭐였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오이카와 씨와 눈이 마주쳤다.


“…….”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나 자신조차 얼마나 어색했는지 고개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줄로만 알았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걸 그랬다는 후회가 강하게 엄습한다. 오이카와 씨는 소리 없이 웃어 보인다. 그에 반비례해 내 입가는 경직한다. 오이카와 씨의 타깃은 하나마키 씨에서 이와이즈미 씨로 옮겨간 듯했다. 


“뭐 해? 체육관 정리하자.”
“아, 응.”


마대자루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온 킨다이치가 내게 하나를 내민다. 훈련이 끝난 뒤 체육관 바닥을 닦는 것은 1학년의 일이다. 이건 체육계의 암묵적인 룰이랄까, 아무튼 3년 만에 하는 것이라 학기 초에는 꽤 낯설었다. 아무리 여러 명이라 해도 체육관은 꽤 넓다. 킨다이치와 나란히 걸으면서 나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어이, 킨다이치.”
“응?”
“그거 어떻게 됐냐?”
“그거라니?”
“편지 말이야.”
“아, 편지.”


킨다이치는 잠깐 멍청한 표정으로 체육관 천정을 올려보고는, 다시 나를 보고 웃었다.


“안 됐어.”
“아, 그러냐.”


위로의 말을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 나는 그저 입을 다문다. 의외로 킨다이치의 말투는 담담했다.


“아주 정중하게 거절당했지. 테니스 대회도 얼마 안 남았고, 연하는 취향이 아니라신다. 마음의 여유가 없대.”
“아하…….”
“오히려 그런 말을 듣고 나니까 좀 후련하더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질러보길 잘했어.”
“…….”
“편지 같이 고민해줘서 고마워. 너만 아는 얘기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다?”
“내가 어딜 가서 그런 얘길 하겠냐. 아무튼, 수고했어.”


킨다이치는 내 대답이 맘에 든 것처럼 빙긋 웃더니 조금 속도를 높여 내 앞으로 치고 나간다. 벌써 세 발짝 이상 떨어져 걷는 킨다이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나는 묵묵히 원래 속도를 지켰다. 킨다이치와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만 있다. 되도록 줄이려고 했던 한숨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나온다. 역시 킨다이치도 안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한결 후련해 보여, 나는 그를 연민하는지 부러워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멈추어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속이 쓰려 왔다. 잘못 먹은 것도 없는데, 괜히 속이 쓰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킨다이치보다도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었다. 심지어 킨다이치는 이미 모든 것을 털어내었다. 번민의 굴레에서 벗어난 친구를 위로하고 격려해주기에는, 내가 처한 상황이 훨씬 심각했다. 킨다이치에게 따지고 싶었다. 너 때문에, 네 편지 때문에 나는 이런 고뇌를 시작했는데 왜 너는 이미 다 떨쳐내고 마음 편해진 거냐고. 물론 말도 안 되는 떠넘기기이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오이카와 씨와 잘 될 거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지만, 역시 쓰려 오는 속은 어쩔 수 없다. 내내 눌러 삼키고만 있던 감정이 역류하기 시작함을 느낀다. 나는 잠시 마대자루에 기대선 채 숨을 골랐다.


“쿠니미쨩, 아직 아픈 거야?”


이런 기습도 그의 특기다. 내 안으로 깊이 침잠해있던 나를 단숨에 뭍 위로 끌어 올려버린다. 다소 난폭하고, 배려심 없는 배려. 나는 어쩔 도리도 없이 갑작스러운 직사광선 속에 방치되어버린다. 자연스럽게도 머리 위에 올라와 있는 손.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이 나를 버겁게 했다. 나는 있는 힘껏 무표정을 가장한다. 


“아뇨, 다 나았어요.”
“그래? 멍하니 서 있길래, 또 어디가 아픈 줄 알았지.”
“그러는 오이카와 씨야말로 아프셨다면서요.”
“그건 아픈 것도 아냐. 그날 쿠니미쨩이 정말 아파 보였는데.”
“기억도 안 나는데요.”


또 그런다, 또. 라고 말하듯 오이카와 씨는 어깨를 툭 쳤다. 이런 작은 것들이 나를 초조하게 한다. 바로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동작들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킨다이치가 연애편지를 갖고 내게 다가올 때, 끝까지 자는 척하고 화를 내서라도 그 편지를 보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편지를 보지 않는다 해도 내 마음이 끝까지 그늘 밑에 숨어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요컨대 계기는 작지만 분명했고, 그 계기가 무엇이든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 있는 힘껏 부정하고 무시하려 해도 씨앗은 이미 내 속에 존재했다. 


“언제 한 번 후배님 몸보신 좀 시켜줘야 하는데.”
“고생이나 안 시키시면 다행이죠.”
“얼레, 나 같은 선배가 또 있는 줄 알아? 하여간 아주 복에 겨웠어!”


나 때는 말이야, 하고 마음에도 없는 설교를 늘어놓으려는 모습에 나는 조용히 자리를 뜬다. 흙으로 덮자. 덮고 묻고, 더 깊숙이 감춰야 한다. 싹이 빛을 보려 용을 쓰기 전에 최대한 깊이 숨기자. 아무에게도 보여서는 안 된다. 씨앗의 존재를 눈치채는 것은 나뿐이어야 한다. 다행히 오이카와 씨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내가 농땡이를 부리는 동안 체육관 바닥은 이미 말끔해져 있었다. 바닥에 비치는 희미한 내 모습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창고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킨다이치를 보고 속도를 조금 더 높인다. 


*


카라스노와 연습경기를 하게 되었다. 분명 저번에도 연습경기를 한 번 했었는데, 그때 카게야마는 카라스노를 통틀어 ‘우리’라고 칭했지. 킨다이치가 그걸 보고 분하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분명 모든 것은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킨다이치도, 카게야마도, 나도 겨우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키타이치 시절과는 달라졌다.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물으면 꼭 집어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토비오쨩, 항상 실수 패턴이 똑같잖아. 훈련은 제대로 하는 거야?”
“……제대로 하고 있어요.”
“공식전에서 이대로만 나와 준다면 바랄 게 없겠는데. 우리 쪽의 낙승일 테니까.”
“절대 쉽게 지지는 않을……. 아니, 안 질 겁니다!”


카게야마의 약점은 오이카와 씨다. 중학생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해사하게 웃으며 속을 박박 긁는 오이카와 씨의 패턴에, 카게야마는 알면서도 말려들 수밖에 없다. 그 대화는 오이카와 씨의 페이스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오이카와 씨는, 그 대화를, 그리고 카게야마를 지켜보는 것을 즐기고 있다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이제는 다른 학교, 코트 건너편에 서 있는 존재인데도. 킨다이치나 나를 대하는 태도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안다. 그래, 잘해 봐. 기대할게. 웃음을 참으며 손을 흔드는 오이카와 씨의 뒷모습을 망연히 서서 바라만 보고 있는 카게야마의 표정이 거슬렸다. 


솔직하게 말하자. 거슬리는 건 오이카와 씨의 표정이었다. 우리 중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에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에게 나는 아직 후배에 불과했지만, 그에게 카게야마는 후배면서도 코트 위에서 마주 보고 나란히 선 적이었다. 단순히 위치의 문제가 아니다. 실컷 카게야마를 약 올린 후의 오이카와 씨의 표정이란. 즐거우면서도 어딘가 복잡한,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그 표정에 나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를 부러워하는 건지, 질투하는 건지 알 수조차 없는 나 자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익숙하기 그지없는 체육관의 공기가 견딜 수 없이 싫어졌다. 결국,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체육관을 나왔다.


체육관 뒤로 돌아가 외벽에 등을 기댄다. 해 질 녘의 시멘트벽이 전달하는 온도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평소보다도 짙은 노을이 서쪽 하늘을 출발하여, 막 온 하늘을 뒤덮으려 하고 있었다. 그 기점에는 새빨간 태양이 있다. 가까이 가면 큰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안다.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사실인데도, 왜 자꾸 다가가려 하고 있는지. 이제까지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큰 한숨을 내뱉고 나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계속 움직인 탓인지 다리가 풀려있다.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 마지막 세트를 끝냈으니 아마 카라스노가 돌아가는 소리일 것이다. 슬슬 들어가 봐야 하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내 옆에 서는 기척이 들렸지만,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


“그새 지친 거야?”
“오이카와 씨.”
“카라스노는 돌아갔어.”


영차, 하는 소리와 함께 오이카와 씨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내 옆에 앉아버렸다. 차가울 텐데요, 하는 내 말은 그의 웃음소리 밑으로 가라앉는다.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


당신 때문이니 좀 안 보이는 데로 가주시면 안 될까요, 라는 말이 목구멍 바로 안쪽까지 튀어 올랐다가 사그라졌다. 아마 애매한 동의로 보일법한 침묵을, 나는 가까스로 지켜낸다. 어떤 말을 내뱉든 어떤 표정을 보이든 이 사람에게는 안심할 수 없다. 하다못해 한숨 한 조각도 가볍게 뱉을 수 없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들킬 것 같아 나는 자꾸만 움츠러든다.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야?”
“……아뇨, 딱히.”
“아직도 오이카와 씨를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내가 속이고 싶은 건 오이카와 씨가 아니라 차라리 나 자신이다. 


“오이카와 씨.”
“응.”
“이건 비밀로 해주세요.”
“뭔데?”
“킨다이치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헤에,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힘들 것 같았어요.”
“왜?”
“상대는 인기인이었거든요. 킨다이치랑은 딱히 접점도 없고.”
“응.”
“연애편지를 썼는데.”
“푸핫.”
“왜 웃으세요.”
“아니, 귀여워서. 아무튼, 그게 쿠니미쨩의 컨디션하고는 무슨 상관인데?”
“그냥…….”
“그냥? 아닐 텐데. 뭔가 생각이 들었던 것 아니야?”
“정중하게 거절당했대요.”
“역시 그랬구나.”
“네. 그래서, 역시 인기인 상대는 힘들구나, 하고.”
“쿠니미쨩이 좋아하는 사람도 인기인인가 봐?”
“……좋아하는 사람 없는데요.”
“그래, 그렇다고 치지 뭐.”


멍청하게 대답을 망설이고 말았다. 이미 오이카와 씨는 내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단정 지었다. 또 오이카와 씨의 페이스에 말려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나는 몰래 입술을 깨문다. 설마 본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상대가 인기인이라서 힘들었던 건 아니겠지.”
“네?”


오이카와 씨가 불쑥 내뱉은 한 마디에, 나는 숨을 삼킨다. 


“상대가 인기인이든 아니든, 그게 둘의 연애에 영향을 끼치진 않을 거야.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쿠니미쨩 답지 않은 생각이네.”
“저 다운 게 뭔지 모르겠는데요.”
“또 뺀다. 잘 알면서.”
“…….”
“인기인이든 아니든, 그 사람과 나의 일대일 관계가 중요한 것 아니겠어?”
“그건……. 그렇죠.”
“킨다이치가 실패한 원인은 그 사람이 인기인이라서가 아니라, 킨다이치와 상대방이 일대일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야. 상대방이 킨다이치를 잘 몰랐을 수도 있지.”
“……아마, 잘 몰랐을 거예요.”
“거봐. 그럼 이제, 쿠니미쨩의 고민도 풀렸나?”
“제 고민 아니라니까요. 그냥 최근에 있었던 일이라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그래, 그래.”


오이카와 씨는 먼저 일어나 손을 내민다.


“뭐 해, 땀 흘리다가 이런 데 앉아있으면 또 감기 걸린다. 이제 집에 가자.”
“오이카와 씨가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악, 오이카와 씨 팔이 아프네! 쿠니미쨩 빨리 안 일어나주려나!”


짐짓 다른 곳을 바라보며 소리를 치는 통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손을 잡고 일어선다. 후배의 고민을 해결해준 선배 특유의 뿌듯한 웃음 같은 것은 없었다. 이 사람은 어떤 때 보면 한없이 가볍다가도, 또 어떤 때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진중하다. 이런 틈새가 모여 이 사람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르지. 평생 다가가지 못하고 이 정도의 간격을 지키게 되는 걸까. 손을 뻗는다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아직 내 마음도 확실히 정하지 못했으면서, 그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은 아닐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체육관으로 먼저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는 힘 빠진 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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