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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오이] 야행(夜行) 1

느와르를 흉내낸 조직물AU. 카게오이(쿠니)요소 있음.

* 등장인물들이 야쿠자 내지 조직원으로 나옵니다. 흔하디 흔한 조직물입니다. 

* 쿠니오이 요소가 있습니다. 

* 큰 이변이 없다면 18년 9월의 카오배포전 신간으로 나올 글. 아직 수위는 정하지 않았지만 일단은 전연령가입니다...





톡톡, 손가락 끝이 제법 비싸 보이는 테이블 위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신경 쓰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가 유독 크게도 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일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되어갈 때 보이는 보스의 습관이었다. 왼손으로 살짝 비딱하게 턱을 괴고, 오른손 손가락 끝으로 무언가를 두드리는 행위. 그나마도 지금은 박자가 여유로운 편이다. 이 박자는 그의 심사가 불편해질수록 긴박해진다는 것을 조직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보스의 뒤에 서 있는 마츠카와는 이 방에 들어오기 전, 그러니까 약 한 시간 전에 ‘최대한 위협적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라는 주문을 받았다. 다름 아닌 그의 보스 오이카와 토오루로부터. 


‘안 그래도 험악해질 분위기, 맛층이 얼굴을 찌푸리면 정말 감당할 수 없을걸.’


해사한 웃음을 머금고 스스로 자신의 입꼬리를 올리면서 자, 따라 해 보세요. 라니. 유치원생을 어르는 듯한 말투에 마츠카와는 인상을 팍 찌푸렸으나, 역시 보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오이카와는 이런 분위기가 될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마츠카와의 표정을 관리하더니, 지금쯤 오이카와의 표정은 어떨까.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자신의 위치를 매우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험악한 분위기는 오이카와 자신이 만든 것이다. 스치면 베일 것만 같은 침묵이 방 안을 팽팽하게 조이고 있다. 오이카와가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지도 대략 십 분이 되어간다. 제아무리 오이카와라도 목이 말랐는지, 일본차가 담긴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려는 찰나였다. 떨리는 목소리가 정적을 타고 떨어졌다.


“그러니까 전무님, 그 조건은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아아, 정말 타이밍 한번 죽여주는군. 마츠카와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찰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아낸다. 오이카와의 찻잔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오이카와의 비스듬한 오른쪽 옆에 앉은 쿠니미의 표정에는 별로 변화가 없었지만, 그 눈썹의 각도가 조금 가팔라졌다. 마츠카와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살짝 불쌍하게 여겼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려면 차라리 남은 시간 내내 정적을 지키든지. 무언가를 꼭 이야기해야 했다면 ‘그런 이야기’여서는 곤란했다. 아무래도 오늘의 거래처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스타일 파악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오이카와는 입에 가져다 대기 일 초 전이었던 찻잔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탁, 하는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물 한 모금도 마음대로 못 마시게 하시네, 사장님은.”
“아니, 그.”
“지금 그쪽 덕에 여기 손해가 얼마나 컸는지는 잘 아시죠?”
“아 예에, 잘 알죠. 정말 심려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앞에 테이블이 없었다면 무릎이라도 꿇었을 것 같은 비굴한 어조에 쿠니미의 눈썹이 조금 더 비스듬한 사선을 그린다. 오이카와의 아빠뻘이라 해도 믿을 나이 지긋한 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고급 요릿집 특유의 노란 조명이 반질반질한 대머리 위에 우스꽝스러운 반사광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댁들이 그런 식으로 나와?”


나긋하면서도 서늘한 이 목소리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트레이드마크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고, 흉내 내려 하지도 않는 그만의 것. 몇 번을 들어도 그 목소리에 담긴 진의를 파악할 수는 없다. 흰 손가락이 찻잔을 감싸 쥐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찻잔을 들어 그 대머리 위에 콸콸 쏟아 부을 것만 같은 긴장감이 수면 위에서 흔들리고 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저희도 죽기 일보 직전입니다. 석 달만 말미를 주시면…….”
“아……. 정말, 대책 없으시네.”


여간해서는 남의 말을 끊지 않는 오이카와가, 대머리의 말허리를 가차없이 끊어냈다. 오이카와의 말끝에 쿠니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협상은 결렬이다. 최소한 오이카와에게 차를 마시며 생각할 일 초의 시간만 있었더라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쿠니미만 한 것은 아닐 테다. 남은 건 대머리 사장의 안위 걱정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쉽게 이성을 잃지는 않으나 맺고 끊음이 확실한 남자였다. 차일피일 이자 상환을 미루어온 것이 벌써 두 달 째였고, 쿠니미가 아는 한 그 이자는 억대를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평상시 오이카와의 인내심으로는 두 달 정도야 별 것 아니지만, 이제는 정말 한계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 


“사장님. 제가 옛날에 거래하던 정으로 마지막 여유를 드리는 겁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내일까지 마무리가 안 되면 댁 모가지는 없는 건데.”
“예?”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조아리려 준비하던 대머리가 멈칫했다. 오이카와의 말투에서 나긋함이 조금 사라져있었다. 


“쿠니미쨩, 그거 줘봐.”


오이카와가 손을 까딱하자, 쿠니미가 안주머니에서 손바닥 크기의 노트 복사본을 꺼내 펼쳤다. 깨알 같은 숫자가 가득 들어찬 그 종이를 보자마자 대머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츠카와는 그 얼굴에서 핏기 가시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 뒤로 나온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이제까지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서늘하고도 날카롭다.


“네새끼들 뒷구멍으로 빼돌리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디서 되지도 않는 수작질이세요. 뒈지고 싶어서 환장을 하셨지.”
“이, 이건…….”


무언가 말하려던 대머리는 입을 다문다. 그래, 그게 차라리 그의 안위에는 나은 선택이겠지.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얼굴도 모르는 사내가 피투성이로 사무실에서 끌려나가던 광경을 떠올린다. 그게 여기 똘마니였구나, 하고 마츠카와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오이카와의 발상인지 아니면 쿠니미의 작품인지, 혹은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장부는 그때 입수한 것이 틀림없다. 쿠니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걸 보면 이 작전에는 분명 쿠니미의 지분도 존재한다. 오이카와는 대머리의 표정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듯 담배를 빼어 물었다. 찰칵, 하는 소리는 쿠니미의 라이터 뚜껑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다. 오이카와가 내민 손에 쿠니미가 그의 안경을 들려주었다. 보란 듯 안경을 끼고 오이카와는 장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어디 보자, 아이고 사장님, 없는 살림에 스폰까지 뛰셨네. 그치, 아랫도리가 쓸모없으면 쓸모를 만드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

“딸보다 어린 연예인지망생들한테 그러고 싶으세요? 인간말종이네, 이거.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어라, 아까까지 세상모르고 날뛰던 주둥이가 왜 조용하지?”


오이카와가 상체를 쑥 내민다. 마츠카와는 대머리가 실금하는 것은 아닐까 조금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오늘 보스는 정말 작정하고 왔다. 성질 급한 놈들이 ‘그깟 대머리, 빠따로 몇 번 족치면 된다’며 자신들이 해결하겠다고 설칠 때도 오이카와는 손을 내저었다. 이렇게 ‘무대뽀’로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이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족속들에게는 확실히 신체적 폭력보다는 구체적인 협박이 잘 먹힌다. 마츠카와도, 쿠니미도 알 정도라면 오이카와가 모를 리 없었다. 억대 이자 정도에 눈도 깜박할 사람이 아닌데 어쩐지 솔선수범한다 했다. 오이카와는 이런 족속들을 가장 싫어했다. 단순히 ‘싫어한다’기보다는 생리적으로 혐오하는 것 같다, 고 쿠니미는 생각했다. 물론 겉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달큼한 담배 연기 냄새가 방 안을 메우고 있었다.


“……내일까집니다, 사장님. 정확히 우리 사무실 직원들 퇴근할 때까지, 그러니까 오후 여섯 시까지 찾아오세요. 그게 안 되면.”


오이카와는 말을 멈추고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짧게 내뿜었다. 공중에서 회색 연기와 흰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인다. 굳어버린 대머리 사장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쿠니미가 기다렸다는 듯 재떨이를 끌어당겨 오이카와 바로 앞에 놓았다. 오이카와가 싱긋 웃는다. 


“뒷일은 알아서 감당하시는 걸로.”



*



“맛층, 표정관리 잘하고 있었지?”
“……내가 문제가 아니었을 텐데.”
“엣, 쿠니미쨩 나 몰래 험악한 표정 짓고 있었어?”
“오이카와 씨, 티 나니까 그만 하세요.”


운전석의 쿠니미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아하하, 하고 오이카와가 웃었다. 보스치고는 경박한 웃음소리에 조수석의 마츠카와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뭐, 중요할 땐 이렇게 웃지 않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오이카와. 아까 그 장부는 뭐야?”
“아, 그거. 쿠니미쨩이 수고 좀 해 줬지. 그쪽 요즘 연예계 뒤쪽에서 소문이 좀 난잡하더라고. 뒤를 약간캐봤더니 빙고였어. 그래도 상황 봐서 봐주려 했는데 괘씸하잖아.”
“쿠니미가 수고했네.”
“별말씀을요.”


검은 세단은 그야말로 오이카와에게 꼭 맞춘 듯했다. 백 팔십이 넘는 키에 다리는 얼마나 긴지 짐작도 가지 않는데, 꼬고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넉넉한 간격이 퍽 마음에 든 것 같아 보였다. 의외로 여기저기서 깐깐한 구석이 있어서 차를 바꿀 때에도 여러 사람 괴롭게 하더니 결과물이라도 마음에 들어 다행이라고, 마츠카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쿠니미가 핸들을 잡고 있는 건 절대 오이카와의 강요가 아니다. 오이카와가 처음 이 차를 끌고 나갔다 돌아왔을 때, 한 시간 정도밖에 주행하지 않았는데 차체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가득하고 보닛은 반 정도 내려앉아있었다. 경쟁 조직의 습격이라도 받았느냐며, 그런 것치고는 보스는 멀쩡하다고 온갖 호들갑을 떨어대는 조직원들과 머쓱하게 웃고 있는 오이카와를 번갈아 노려보던 쿠니미의 한 마디에 상황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심지어 차주 오이카와조차도 반론을 펼치지 못했던 그 한마디란, ‘오이카와 씨, 앞으로 핸들 잡을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였다.


“이쪽 건은 이렇게 정리됐다 치고. 그쪽은 어쩔 셈이야?”
“그쪽이라니?”
“넌 정말 알면서도 물어보는 게 습관이지.”


마츠카와가 짜증 섞인 손짓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쿠니미는 익숙하다는 듯 조수석의 창문을 조금 열었다. 후후, 하는 웃음소리는 뒷좌석에서 흘러나온다. 분명 오이카와는 마츠카와의 보스지만 나이도 같고, 오이카와 자체가 상하의식이 조금 흐리멍덩한 사람이기도 한데다 워낙 조직에서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래다 보니 사석에서는 말을 편하게 하는 사이였다. 조직원들 내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노유키(野行) 말이지.”
“……쯧.”


역시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능청스러운 건지, 속을 긁으려고 작정한 건지. 이와이즈미는 어떻게 이런 녀석이랑 이십 년을 붙어있었는지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 이러는 자신도 근 십 년을 함께 해왔지만. 떠올려보면 징한 세월이다. 마츠카와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오이카와는 굳이 그에 제동을 걸지는 않는다. 오이카와가 다리를 바꾸어 꼬는 기척이 났다.


“글쎄, ‘덩치’의 세력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조금씩, 이 아닌 것 같던데.”
“그치만 우리가 나설 명분이 없는걸. 겉으로는 평화롭잖아, 거기도.”
“카게야마가 거기로 간 지 얼마나 됐지?”
“음…….”
“오 년입니다.”


쿠니미가 대답했다. 오이카와의 말을 가로챈 꼴이 되었지만 이 역시 탓하는 사람은 없다. 오이카와에게는 애초에 대답할 의사가 없었고, 쿠니미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보스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야기가 나오면 유독 말수가 적어진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오이카와는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관리를 하려 해도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눈썹은 어쩔 도리가 없다. 쿠니미는 핸들을 쥔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마츠카와 역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어졌다. 차 안이 어색한 정적의 한가운데로 빠져들 때쯤, 오이카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노유키 쪽, 지금 당장은 괜찮을 거야.”
“어떻게 단정해?”
“토비오가 있잖아.”
“……?”
“쿠니미쨩은 어떻게 생각해?”
“……뭐, 오이카와 씨 말이 맞겠죠.”


이렇게 쉽게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요, 라는 말은 삼킨 채 쿠니미는 핸들을 잡은 채로 어깨를 으쓱한다. 오이카와는 웃었다. 


“우리가 걱정할 건 ‘덩치’보다도 토비오쨩일걸. 적어도 삼 년 내에 그렇게 될 거야.”
“그런 와중에 이렇게 태평해도 돼, 보스?”
“우리한텐 쿠니미쨩이 있잖아.”
“제발 그런 소리 마세요.”


오이카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쿠니미가 불평을 달았다. 이건 분명한 놀림이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 섞였을지도 모르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 증거로 오이카와는 웃고 있으니. 쿠니미로 말하자면 카게야마와 비교되는 것이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오이카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뭐, 그쪽의 히랏치가 잘해줄 테니까.”
“히라츠카?”
“응. 지나치게 사람이 좋아서 탈이지만.”
“오이카와 씨 입에서 ‘사람 좋다’는 말이 나오다니, 낯서네요.”
“그 사람은 잔정이 많은 스타일이라. 물론 그게 매력이긴 하지.”
“우리 보스의 매력도 좀 찾아볼까.”
“…….”
“…….”
“뭐야, 이 정적은? 맛층, 쿠니미쨩, 너희 지금 짰지? 시선으로 짜고 친 거지?”
“아니에요.” “아닌데.”
“오이카와 씨는 슬퍼……!”
“도착했으니까 눈물은 닦고 내리세요.”


쿠니미쨩이 제일 차가워, 키운 보람이 없네, 라고 쓸데없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쿠니미는 대꾸 없이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보다 조금 앞서 조수석 문을 열고 나온 마츠카와가 건물 쪽으로 걷는다. 쿠니미와 오이카와도 그 뒤를 따랐다.



*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날이 떠오르곤 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날의 색깔이 눈꺼풀 안쪽에 누군가 때려 박은 것처럼 새겨져 있다. 그날의 색이라 해도 온통 잿빛투성이지만. 


도로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는 도시의 색과 하늘의 빛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잿빛이었다. 눈이 온 다음 날, 갑자기 기온이 살짝 올라가는 바람에 눈 녹은 구정물들이 온 거리로 흘렀다. 차라리 비가 내렸다면 도시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라도 들었을 텐데, 사람들의 구둣발 아래 녹은 눈은 원래의 흰색을 간직하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또 체감 기온은 더럽게 낮아서, 오이카와는 코트 깃을 잔뜩 세우고도 춥다고 투덜거렸다. 이와이즈미는 잠자코 걸었으나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흰 입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빌딩 숲 사이로 부는 칼바람은 쓸데없이 날카로웠다. 칠 년 전 어느 날의 일이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함께 걷고 있었다. 꽤 중요한 거래를 끝내고 복귀하던 중이었다. 한적한 거리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인파에 섞여들었다. 그래도 사람들 틈에 섞이니 조금은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던가. 구체적인 대화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저녁은 뭘 먹을까, 보스가 그 전에 복귀하라던데, 하는 시시콜콜한 대화 정도였을 것이다. 2월 중순을 막 넘기고 하순으로 접어들 즘의 계절감은 겨울이라기에는 쳐지고, 봄이라기에는 어색한 느낌이다. 눈 녹은 물이 구둣발에 철퍽거리는 바람에 오이카와는 적잖이 짜증을 냈다. 며칠 전 큰맘 먹고 새로 장만한 구두였다. 그러게 이런 날에는 신지 말랬지, 하고 이와이즈미가 타박 아닌 타박을 주었다. 자신은 뭐라고 변명했더라. 아마 대답할 말을 찾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와이즈미가 누군가의 손목을 낚아챈 것은.


‘어린 게 손버릇이 나쁘잖아.’


이와이즈미의 것이 아닌 흰 손가락이 무언가를 꼭 쥐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제가 이 년 전 이와이즈미의 생일에 큰 맘 먹고 선물한 지갑이다. 이와이즈미는 그 손가락을 펴고 지갑을 빼냈다. 오이카와는 반사적으로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한참 시선이 내려간 곳에는 앳된 얼굴의 소년이 서 있었다. 제대로 손질하지 못한 지 한참 된 머리카락과 볼이 쏙 들어간 얼굴은, 그가 집에 들어가지 못한 지 적어도 일주일은 넘었으리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뭐야, 소매치기?’
‘응. 방금 내 지갑을 빼가려 했어.’
‘이거 놔……!’


이와이즈미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소년은 있는 힘껏 손목을 빼내려 노력했지만, 악력으로는 조직 내에서 비길 사람이 없는 이와이즈미다. 결국, 해방은 미수로 끝났다. 핼쓱하다 표현해도 그리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마른 손가락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방황한다. 그것이 쿠니미 아키라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와이즈미야 무뚝뚝하면서도 원체 연민이 많은 남자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때의 자신은 무슨 바람이 불어 쿠니미를 거두었는지 아직도 오이카와는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자기가 이와이즈미에게 선물했던 지갑을 훔치려 한 시건방진 꼬마를.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은 이와이즈미의 선택을 존중한 것뿐이지만.


‘네가 선택해.’


갈 곳이 없다면 데려가 주겠다, 다만 신세 좋은 팔자를 누릴 수는 없다. 이와이즈미는 소년에게 하나의 제안과 하나의 조건을 함께 내밀었다. 나중에 이와이즈미의 말로는, 수금원 같은 것으로라도 써먹으려고 했단다. 대신 선택은 소년의 몫이었다. 쿠니미는 눈을 내리깔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술을 깨문 채 뒷골목 어느 께를 가리켰다. 이와이즈미가 미간을 찌푸리고 자초지종을 독촉했다. 


‘뭐야?’
‘한 명 더 있어, 요. 쓰레기통 옆에. 병원에 가야…….’


급조해낸 존댓말에 오이카와는 무심코 웃어버리고 말았다. 적개심은 옅어졌지만 애써 숨기고 있는 불안이 그 떨리는 손끝에 여실히 묻어났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곳에 오이카와 씨를 혼자 보낸단 말이야? 하여간 이와쨩도 참 냉정해, 있는 대로 투덜거리면서도 오이카와는 쿠니미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오이카와가 질색하는 냄새가 가득했다. 벽을 짚은 손가락 끝에 불쾌한 냉기가 스몄다. 결국, 몇 발자국 걷지도 못하고 오이카와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았다. 아무래도 이 구두는 오래 신지 못하겠다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이 냄새는 닦아도, 닦아도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표식인 쓰레기통은 그리 멀지 않았고 그 옆은 넝마로 가득했다. 대체 여기에 뭐가 있다는 건지. 무심코 구둣발 끝으로 넝마를 헤집는데 뭔가가 툭, 떨어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오이카와의 눈에 드디어 사물을 정확히 구분할 능력이 돌아왔다.


‘손가락?’


사람의 손이었다. 그때야 넝마라고 생각했던 그 물체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이월 중순이라고는 해도 겨울인데, 모포 조각 같은 것으로 대충 몸을 둘둘 만 소년이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있었다. 악취에 익숙해진 코는 그에게서 나는 냄새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일단 그를 둘러업었다. 덜렁 딸려오는 몸은 그가 쿠니미보다도 더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간단명료하게 전달했다. 등이 축축하게 젖어 옴을 느끼자마자 아, 내 코트……. 하고 이를 악물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이와이즈미는 축 늘어진 쿠니미를 부축한 채 버티고 있었다. 두 소년은 나란히 병원으로 실려갔다. 쿠니미는 수액 한 병을 맞고 원래의 기력을 회복했으나, 쓰레기통 옆의 넝마 소년은 조금 더 오래 앓았다. 오이카와는 팔자에도 없던 보호자로 병원 차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그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자기소개를 들을 때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쿠니미쨩 처음 만났을 때?”
“…….”


담배를 물려주려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가만 쳐다보다, 쿠니미는 그 담배를 자신의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내뱉고 아직도 저를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발견하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한다.


“뭐 할 말 있으세요?”
“그 담배, 내 것 아니야?”
“제 건데요.”
“뺏어서 피우라는 거지?”
“알아서 피우세요.”
“왜 또 화났어.”
“화 안 났어요.”


끝이 없는 논쟁은 서로를 피곤하게 할 뿐이다. 오이카와는 쿠니미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빼내어 제 입술 사이에 끼웠다. 침대 위에서 마주 볼 때의 열기가 가신 눈은 한층 더 나른한 빛을 띤다. 베개 위에 턱을 괸 채 그 눈빛으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쿠니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굳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격렬하게 몸을 움직인 후에 피우는 담배는 평소보다 조금 더 달면서도, 어딘가 쓴맛이 났다. 쿠니미쨩 맛이 나네, 하고 웃음을 섞어 말해봤으나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누운 채로 담배를 피우면 재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럴 걱정은 필요 없었다. 위태로워지기 일보 직전에 쿠니미는 담배를 빼내어 재떨이에 재를 떨고, 제가 한 모금 빨아들인 후 다시 오이카와의 입술에 끼워준다. 언제나 그랬듯. 


“옷을 입으시든, 이불을 제대로 덮으시든 둘 중 하나는 하시죠.”
“왜, 또 유혹당할 것 같아?”
“오이카와 씨가 감기에 걸리면 제가 더 고생하니까요.”
“아무튼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그래서 쿠니미쨩은 반반한데도 애인이 없는 거야.”
“오이카와 씨한테 그런 걱정을 듣고 싶진 않은데요.”


뭐가 그리도 웃긴지 쿡쿡, 낮은 웃음소리가 담배 연기에 섞여들었다. 오이카와는 담배의 마지막 모금을 빨아들이고, 깊게 내뱉는다. 필터 일보 직전까지 아슬하게 타들어 간 담배 끝이 빨갛게 빛났다가 곧 사그라졌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담배꽁초만 들어 보이자 쿠니미가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쿠니미는 언제나 오이카와의 의향을 읽고 있는 것처럼, 적절하게, 그리고 지나치지 않게 모든 것을 해결해 주곤 했다. 입안의 혀 같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쿠니미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오이카와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오이카와 씨.”
“응.”


기껏 불러놓고도 쿠니미는 그 뒷말을 쉬이 잇지 못했다.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적잖이 노곤하게 풀려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뒷말을 꺼내도 될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쿠니미만이 알 일이다.


“몇 시에 깨워 드릴까요.”
“다섯 시 정도…….”
“주무세요.”


맨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 올리는 감촉이 좋았다. 어쩌면 쿠니미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알람 시각을 물어보려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오이카와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섹스와 그 후의 니코틴, 그리고 맨살에 와 닿는 이불의 조합에 버티는 것이 신기한 것일 테니. 아무런 후희 없이 쿠니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났다. 이마저도 쿠니미다운 배려다. 오이카와는 저절로 감기는 눈꺼풀에 별다른 저항 없이 그대로 잠들었다. 잠결에 문이 닫히는 소리를 언뜻 들은 것도 같았지만, 그 뒷모습에 작별인사를 고할 겨를은 없었다.

 


 




카게오이 + 쿠니오이 + 기타 오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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