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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오이] 당신의 기억을 더듬어

2017 카게야마 토비오 생일 축하 기념글.

- 하루 늦었지만, 카게야마 토비오 생일 축하해!

- 오이카와가 기억을 잃습니다. 저어는 기억상실증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ㅂ는 사람입니다...날조 주의!!

- 약간의 쿠로츠키 요소가 있습니다. (그냥 둘이 사귄다는 설정 뿐이지만...)

- 공백 미포함 15,163자... 나 정말 열심히도 썼다... 아마 내 단일 단편으로는 최고 기록일듯(인내심0)





잘그락잘그락, 손 안에서 굴리던 배구공 무늬 지압기가 드디어 멈췄다. 나는 무의식중에 이것을 몇 번이나 굴리고 있었던가. 흐리멍덩한 눈을 들어 벽시계를 보았을 때 시계는 이미 두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지막 전화가 밤 열두 시 오 분이었으니, 지금은 물론 새벽 두 시 반이다. 그때야 나도 모르게 잔뜩 떨고 있는 오른쪽 다리를 발견한다. 초조할 때 나오는 버릇들은 의외로 다양했다. 협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은 야속한 침묵을 지킨다. 나직하게 한숨을 씹어 뱉는다. 이제는 정말 뭐라도 해야 할 시점이다. 아직 쥐고 있던 지압기를 내던지다시피 하고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든 그 순간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기도 전에 나는 액정에 쓰인 문자부터 확인한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다리던 이름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시간에는 왜……? 밀려오는 궁금증과 그 한편의 불안감은 일단 제쳐놓고, 나는 전화부터 받기로 했다.


“……여보세요?”

- 카…… 냐?

“네? 쿠로오 씨, 잘 안 들려요.”

- 카게야마냐고!


서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고 받은 상황이니 상대가 누군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쿠로오 씨는 악을 지르듯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확인하려 했다. 나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네, 라고 한 글자만을 덧붙였다.


- 불러주는 주소로 빨리 와! 세이와 병원 응급실이야!

“네? 응급실이요? 쿠로오 씨.”

-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빨리! 누구 일인지는 네가 더 잘 알 것 아니야!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가 뚝 끊겼다. 나는 살풍경한 거실 한복판에 서서,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생각의 실타래는 끊임없이 얽혀든다. ‘누구 일인지는’. 그럴 리 없다. 두 시간 전에 통화하지 않았나. 물론 통화 내용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 두 시간 사이에 갑자기 롯폰기 중심가의 술집에서 응급실로 장소가 옮겨갈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라면 순식간에 몇 개나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머리는 그 정도의 간단한 처리도 못 해내고 있었다. 나는 결국 생각을 포기하고, 옆에 놓여있던 코트를 집어든다. 차 키를 입에 문 채 지갑을 찾으면서, 이 와중에 나갈 준비는 꼼꼼하게도 한다는 생각에 문득 실소했던가. 도어락이 잠기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정수리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맺혔다. 별생각 없이 허공을 향해 펼친 내 손바닥 위에 흰 물체가 몇 개 떨어졌다가 금방 녹아버렸다.


‘눈, 오는구나.’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아, 내가 왜 거실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핸드폰만 노려보고 있었는지 드디어 기억이 났다. 천천히 물에 젖어가는 것처럼 아까의 상황이 선명해진다. 십이월 하순의 밤은 쓸데없이 차갑고, 눈물이 맺힐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차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조금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눈물이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이 상황에 대한 불안감 때문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


- 토비오쨩, 나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아-

- 네? 오이카와 씨, 어제도 분명.

- 그게 말이지이~ 송년회가 잡혀버렸어. 알잖아, 우리 팀원들 성격.

- …….


응급실 앞의 복도는 대기하는 환자와 그 가족, 오고 가는 간호사, 의사들로 분주하기 짝이 없다. 주먹을 꽉 쥐는데 생각보다 너무 뜨거워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얼굴을 보자마자 쿠로오 씨가 캔커피 하나를 쥐여주었지. 활짝 열어놓은 문 때문에 복도의 난방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부들 떨리는 손을 꼭 모아쥔다. 손바닥의 체온은 이미 캔커피의 열에 익숙해졌는지 별다른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 옆에 털썩 앉는 기척이 나 돌아보니, 쿠로오 씨였다. 나는 캔커피를 코트 주머니에 넣는다.


“…….”

“…….”


쿠로오 씨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말이 없다. 그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문득 내 표정은 어떤지 궁금해졌지만, 굳이 거울을 보거나 남에게 물어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응급실에 빨간 불이 켜진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쿠로오 씨의 손등이 얼어서 빨갛게 터져 있었다. 나는 신중하게 속으로 할 말을 골랐다.


“어떻게 된 거예요?”

“……교통사고.”

“사고요.”

“술 먹고 혼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눈길에 미끄러진 차가 들이받았어.”

“…….”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쿠로오 씨와 팀원들을 원망하는 어조가 될 것 같아, 나는 그저 입을 다문다. 사실 나는 누구를 원망할 처지가 못 되었다. 애초에 오이카와 씨가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그렇게 마신 건 내 탓이기도 했을 테니. 몇 번이고 이마를 쓸어 올렸는지, 쿠로오 씨의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있다.


“데려다 주겠다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렸는지.”

“…….”


쿠로오 씨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는데 보려 하지 않는다. 그 상대방에게 아까 나와 같은 기분을 맛보여주고 싶지는 않아,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그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낸다. ‘츳키’라고 저장된 이름이 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츠키시마와 사귀고 있었지. 내가 그와 츠키시마의 관계를 아는 만큼, 츠키시마와 쿠로오 씨도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의 사이를 아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두 사람이다. 나머지는 이와이즈미 씨 정도일까. 츠키시마의 얼굴도 못 본 지 한참 되었다. 다음에 볼 땐 송년회로 만나자, 하고 헤어졌던 것 같은데.


“안 받으실 거예요?”

“…….”


무언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나는 멋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막 자다 일어났는지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쿠로오 씨?

“츠키시마.”

- ……. 누구?

“카게야마인데.”

- 아, 너였구나. 쿠로오 씨는?

“옆에.”

- 거기 어딘데?

“세이와 병원 응급실 앞.”

- ……. 무슨 일 있었어?

“오이카와 씨가 사고를 당했어. 쿠로오 씨가 옆에 있었나 봐.”

- …….


핸드폰 너머는 잠시 작은 숨소리로 가득했다. 츠키시마도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츠키시마의 성격치고 뻔한 위로의 말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선수 쳐주기로 한다. 침묵이 길어지는 것은 그에게나, 나에게나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지금 올 수 있으면 쿠로오 씨 데려갈래? 좀 쉬셔야 할 것 같은데.”

- 일단 갈게.


대답을 확인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다시 그의 코트 주머니로 넣자, 픽하고 기운 빠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마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질책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야, 애인에게 이런 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겠지. 그러나 애인이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채 응급실 안에서 생사를 헤매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리는 꼴보다야 낫지 않은가. 항상 여유만만하던 쿠로오 씨의 얼굴에 이런 표정이 깃들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카게야마.”

“네.”

“……. 혹시 싸웠어?”

“싸웠다기보다는, 제가 일방적으로 화를 냈죠.”

“왜?”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


쿠로오 씨가 한숨을 쉬었다. 내뱉고 보니 너무 한심한 이유라, 알지도 못한 사이에 코끝이 시큰했다. 그까짓 생일, 일 년에 한 번이면 돌아오는 건데. 그렇다고 오이카와 씨 생일에 특별난 무언가를 해준 것도 아니면서 바라는 것만 많았다. 그저, 생일파티를 하자고 붙잡아오는 팀원들을 뿌리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보고 싶었던 오이카와 씨는 없고 집 안에 잔뜩 깔린 어둠만이 날 맞아주는 그 상황이 야속했을 뿐인데. 타이밍 좋게도 걸려온 전화에, 지금 들어가고 있어, 라는 말을 기대했는데 돌아오는 말은 ‘오늘 좀 늦을 것 같아’. 그래서, 생전 안 내던 짜증을 조금 냈을 뿐인데. 그땐 생각하지도 않고 당연하게 여겼던 내 말들이 이제 와서 나를 푹푹 찔러댄다. 생일이라는 얄팍한 핑계에 기대어 조금은 항의해도, 조금은 삐친 티를 내도 될 줄 알았다.


“……. 카게야마, 울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츠키시마가 서 있었다. 어지간히도 급하게 달려왔는지 그도 머리카락이 부스스했다. 콧잔등에 겨우 걸친 안경과 검은 점퍼. 깨닫고 보니 나는 울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한숨을 내쉬더니 주머니에서 티슈를 꺼내 건넨다. 이런 것 하나에도 중학교 시절의 오이카와 씨가 생각나 또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 안 그렇게 생겨서 수도꼭지네.”

“시, 끄러워.”


빈정거리는 말투는 역시 츠키시마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제왕'이라는 별명을 그만둬 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옆에서 쿠로오 씨가 쓴웃음을 짓는 것이 느껴졌다. 츠키시마는 나를 배려한 것인지 빙 돌아가 쿠로오 씨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심각하대요?”

“아직 잘 모르겠어. 바로 구급차가 와서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쿠로오 씨는 말을 멈추었다. 나는 말없이 유리문 너머를 바라본다. 바람이 멎었는지, 천천히 눈송이만 날리고 있었다. 가로등에 비쳐 연한 주황색으로 물든 눈이 소리 없이 땅에 쌓인다. 몇 분 정도 그렇게 셋이 앉아있었을까. 나는 버석거리는 입술을 간신히 적시고 입을 열었다.


“츠키시마.”

“왜.”

“쿠로오 씨랑 들어가 봐. 피곤하실 텐데.”

“……괜찮겠어?”

“여기까지면 충분해. 고마워. 쿠로오 씨, 고맙습니다.”


쿠로오 씨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츠키시마가 뭐라 소곤거리는 것을 듣더니 몸을 일으켰다. 밉살스럽지만 츠키시마는 눈치가 빨랐다. 쿠로오 씨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카게야마, 이거 하나만 약속하자.”

“네?”

“우리 서로 자책하지 말기로.”

“…….”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요, 라며 츠키시마가 쿠로오 씨의 등을 한 대 쳤지만, 쿠로오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이렇게 약속하는 건, 초등학생 때가 마지막이었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픽 웃으며 손가락을 걸었다. 쿠로오 씨는 조금 맘이 놓인다는 듯, 피곤이 가득 묻은 얼굴로 슬쩍 웃어 보인다. 츠키시마가 떠밀다시피 하여 병원 문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다가 나는 다시 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두덩이 뜨거웠다. 자책하지 말라니, 그게 말처럼 될 리가 없다. 자학하는 취미는 없지만, 이럴 땐 내 탓밖에 할 것이 없으니. 주머니에 넣었던 캔커피를 다시 꺼내 든다. 캔커피는 이미 미지근해져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애매한 온도다. 풀탭을 잡아당겨 거의 한 모금에 털어 넣었다. 인공적인 단맛과 인공적인 카페인의 맛이 혀 위에 남아, 나는 그만 또 울고 싶어졌다.



*


- 오이카와 씨,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긴 하세요?

- 엣, 무슨 날이냐니. 당연히…….

- 모르시는 것 같아요. 지금 벌써 열두 시가 넘었는데요.

- 토비오쨩, 무슨 말이 그래. 오 분 정도 늦을 수도 있는 거지.

- 오 분 늦은 것도 제가 먼저 전화한 거잖아요. 그럼 오이카와 씨는 언제 제 앞에 나타나실 건데요?

- ……. 너 정말 왜 그래?

- 정말 왜 그러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거예요?!

- …….

- 오이카와 씨가 저를 기억이나 하실지 모르겠어요. 오이카와 씨 머릿속에 제 자리가 있긴 한 건가요?


“오이카와 씨.”

“…….”

“오이카와 씨.”


연거푸 불러봐도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다. 아직도 화가 덜 풀린 걸까. 병원 밖의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다가, 환자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급한 연락을 받고 돌아왔을 때 이미 오이카와 씨는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고 있었다. 의사는 기계적인 손짓으로 차트에 무언가를 써넣느라 바쁘다.


“카게야마 토비오 씨?”

“네.”

“환자 보호자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실례지만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룸메이트입니다.”

“잠깐 저 좀 보실까요.”


의사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그 뒤를 따르려다,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본다. 침대에 앉은 오이카와 씨는 턱을 괸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간호사가 그 팔에 꽂힌 링거 바늘을 교체하고 있었는데, 아프다든가 더 살살해달라든가 그런 말 한마디도 없이 그저 창밖만을 응시한다.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는데, 간호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엉겁결에 나도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의사를 따라나왔다. 병실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는다. 차트를 노려보던 의사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그래도 이틀이면 의식이 일찍 돌아온 겁니다.”

“…….”

“환자분 직업이 배구선수시라고요.”

“네. 대학리그에서.”

“일 년 정도는 재활이 필요할 겁니다. 휴학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재활……. 하면, 그전의 기량이 돌아오나요?”

“완벽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대부분 돌아올 겁니다. 요즘 재활 기술은 우수해요. 운동기능과 직접 관련된 부분을 다친 게 아니라서 천만다행입니다.”

“…….”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뜻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안경 렌즈 너머에서 의사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아직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네.”

“당분간은 기억이 온전하지 못할 것 같네요.”

“……네?”

“해리성 기억상실증입니다. 본인의 직업도 모르고, 주변인들에 대한 것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아…….”

“아까 오이카와 씨가 대꾸를 안 했죠. 그건 카게야마 씨를 무시한 게 아니라, 그게 자신을 부르는 거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겁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이름조차 기억을 못 하는 상태에요.”

“…….”

“상태가 얼마나 갈진 잘 모르겠습니다. 꾸준히 치료받으셔야 할 겁니다. 룸메이트라고 하셨으니, 생활에 불편한 점을 잘 봐두시고 많이 도와주세요. 그게 감당하기 힘들다면, 본가로 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


의사의 눈은 냉철한 빛을 띠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다면 애초에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서 내가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언제 퇴원할 수 있나요.”



*


“여기가 내가 살던 집이라고?”

“네. 여기가 오이카와 씨 방이에요.”


항상 입던 코트에 목도리까지 두른 오이카와 씨가 복도를 서성인다. 병원에서 의식을 찾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기본적인 정보는 전달해 두었다. 당신의 이름은 오이카와 토오루고 스물세 살,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고 스물한 살. 알고 지낸 지는 십 년 정도 되었고, 당신이 스무 살 때부터 사귀고 있었다고. 이 부분에서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는, 에, 카게야마 씨 얼굴은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닌데요. 라고 말했다. 그 부분에서 웃음이 터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또 울고 있었다. 흰 병원 이불에 내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왜 우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가 더 당황해서 미안하고 사과하며 나를 달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반말 써도 돼요?’

‘네, 원래 반말 쓰셨어요. 전 존댓말이었고.’

‘헤, 사귀는 사이였다면서 말을 안 놨구나.’

‘……선배와 후배 사이로 만난 거니까요.’

‘서로 호칭은? 아, 잠깐만. 말하지 말아봐, 내가 맞힐게.’

‘네.’

‘넌 나를 오이카와 씨라고 부르고, 아마 나는 널 토비오라고 불렀을 것 같은데.’

‘어떻게 아셨어요?’

‘토비오라는 이름, 예쁘니까.’

‘…….’

‘엑, 또 울어? 내 애인, 안 그렇게 생겨서 울보였네.’


환하게 웃는 그 얼굴에 가슴이 꽉 메었다. 평생 흘릴 눈물을 요 며칠 새 전부 흘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금 낯선 손길로 내 머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토닥토닥 두드리는 그에게서 병원의 소독약 냄새에 섞여 익숙한 냄새가 났다. 토비오라는 호칭은 중학생 때부터, 거의 우리가 만나자마자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괴롭히려고, 곤란하게 하려고 이름을 부르는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나를 얄밉게 여기면서도 내 이름만은 예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일찍 말해주었다면, 우리의 관계가 조금 더 빨리 바뀔 수 있었을까. 지금 와서는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오이카와 씨, 옷 갈아입고 나가요.”

“어디를?”

“체육관이요.”

“이 날씨에?”

“이런 날이라고 집에 파묻혀있으면 안 되거든요. 가죠.”


오이카와 씨는 따뜻한 코타츠 안에 파묻혀서 귤 까먹으면서 NHK 대하드라마를 보고 싶은데! 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나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배구 연습할 때 입는 트레이닝복을 던져준 후 방문을 닫았다. 몇 분 후 방문이 열리고 트레이닝복 차림의 오이카와 씨가 나온다. 똑같이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나를 보더니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트레이닝복까지 커플일 필요는 없잖아.”

“오이카와 씨가 선물해준 건데요.”

“대체 내 취향은……. 언제?”

“작년 제 생일 때요.”

“토비오 생일? 그게 언제야?”

“……올해 생일은 며칠 전에 지났어요.”

“아하.”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나를 봤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오이카와 씨는 신발장으로 다가가 운동화를 신었다. 다행히 아직 운동화는 맞추지 않았다. 운동화는 커플이 아니네, 라고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피식 웃고는 그가 운동화를 신는 모양을 가만히 바라본다. 처음에는 운동화를 신는 것조차 서툴렀다. 몸과 마음은 완전히 성인이지만, 생활 전반적으로 그가 가지고 있던 정보가 초기화된 느낌이었다. 젓가락을 앞에 두고 보여준 그 혼란스러운 표정에 나는 말없이 포크를 내밀었다. 물론 사흘 정도 지난 후에는 익숙하게 젓가락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신체에 깃든 정보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면 배구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체육관은 걸어서 가?”

“버스 타고 갈까요?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걸리는데요.”

“아니, 그냥 걸을래.”

현관문을 나설 때쯤 오이카와 씨가 갑자기 멈춰 선다. 뭘 두고 왔나, 하고 보는데 그 자리에 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왜요?”

“손잡고 가자.”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내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주머니 안에 넣는다.


“오, 오이카와 씨!”

“왜?”

“밖에서, 이, 이건 좀.”

“손잡는 게 뭐 어때서? 섹스도 아니고.”

“으아아!”


방금의 단어 선택은 날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얼굴이 새빨개져 단숨에 일 미터 정도는 뒤로 물러나는 날 보며, 오이카와 씨가 쿡쿡 웃었다. 이럴 때 보면 기억을 통째로 날려 먹은 사람 같지가 않다. 기억이 사라져도, 내가 그의 머릿속에 없어도 오이카와 토오루는 오이카와 토오루다. 여전히 손은 내민 채로 오이카와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슬금슬금 다가가 다시 그의 손을 잡는다.


“우리, 비밀연애하고 있었어?”

“아무래도 그렇죠. 오이카와 씨, 꽤 유명한 대학 리그 선수고요. 커밍아웃 같은 건 꿈도 못 꾸니까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아는 사람이 있긴 해요. 쿠로오 씨, 여긴 오이카와 씨의 팀원이고요, 츠키시마, 얘는 제 고등학교 동창이고 쿠로오 씨랑 사귀고 있어요. 그리고 이와이즈미 씨. 이 사람은 오이카와 씨의…….”

“나의?”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한 점 일렁임도 없는 맑고 고요한 눈동자가 내 대답을 재촉한다.


“오이카와 씨의 가장 친한 친군데요, 미야기에 있을 때부터. 오이카와 씨와 마찬가지로 제 중학교 선배기도 하고. 기억……. 안 나세요?”

“응, 아쉽게도.”


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는데, 무색할 정도로 깔끔한 대답이 돌아와 조금 힘이 빠졌다. 하긴, 연인을 잊었는데 친구를 기억한다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아마 이와이즈미 씨만 기억이 난다고 했으면 조금 서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왠지 모르게 복잡한 심경이 되어 그와 나란히 걷는다. 손잡는 건 역시 포기했는지, 오이카와 씨는 내 손을 놔주고 자신의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걷는다. 넘어지면 위험하다고 한마디 할까 하다가, 애 취급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잊은 게 너무 많네.”


한숨에 섞인 그의 목소리가 뿌옇게 공중에 흩어진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오이카와 씨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은 모두에게 전해두었다. 그러나 혼란이 올 수 있으니, 되도록 일부러 찾아오거나 만나지는 말아달라고도 당부했다. 이 이야기를 전화로 전달했을 때 이와이즈미 씨는 꽤 긴 침묵을 지키다가, 간단하게 알았다, 고만 대답했다. 상태가 괜찮아지면 다시 연락 달라며.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려 했는지 고, 까지 말하다가 그는 갑자기 침묵했다. ‘오이카와를 돌보는 건 당연히 네 몫이니, 고맙다는 말은 안 한다.’ 는 그 한 문장에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던가.


“토비오쨩, 여기가 체육관이야?”

“아, 네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벌써 체육관 앞에 도착해있었다. 오프일 때 우리 둘은 이 체육관을 찾곤 했다. 체육관이라고는 하지만 시설이 그렇게 좋거나 큰 것은 아니어서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집 가까이에 있는 데다가, 돈을 조금만 내고 예약하면 개인적으로 빌려서 쓸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 포인트였다. 오이카와 씨는 눈을 조금 찌푸리고 팔짱을 낀 채 체육관 건물을 올려보고 있었다.


“작은 건지, 큰 건지 알 수가 없네.”

“작은 편이죠, 체육관치고는. 들어가요.”


미리 예약해 둔 덕에 난방이 가동되고 있었다. 날이 추우면 근육이 잔뜩 경직해서 제대로 훈련을 할 수가 없어서 부탁해두었다. 점퍼를 벗어 한쪽에 개어 두고, 창고로 들어가 공이 잔뜩 담긴 바스켓과 네트 따위를 들고 나온다. 오이카와 씨는 체육관 복판에 선 채 천장을 올려보고 있다. 네트 설치를 도와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나온 기척을 알아채자마자 그가 다가와 네트를 집어들었다.


“저기에 끼우면 돼?”

“네에……. 어떻게 하는지 기억나세요?”

“대충 끼우면 되겠지, 뭐. 어린애도 아니고.”

“같이 해요.”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오이카와 씨는 아무래도 그편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네트 한쪽 끝을 잡고 나에게서 멀어진다. 곧 두 사람 사이가 팽팽해졌다. 각자 잡고 있는 네트 끝을 흰색 설치대에 걸고 다시 만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재활시설이 우수하다 해도 실전 감각은 미리 익혀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나도 계속 훈련을 해야 하니, 그 김에 가볍게라도 함께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오이카와 씨도 본업이 배구선수였다는 말을 듣고는 내 제안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오이카와 씨, 서브 넣는 것 기억나요?”

“하나하나 기억나냐고 물어보는 것도 지치지 않아, 토비오쨩? 난 배구 룰조차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상황이라고.”


조금 뾰족해진 말투에 나는 뜨끔한다. 최대한 조심해서 말한다고 했는데도 또 안 좋은 부분을 건드린 모양이다. 죄송해요, 하고 작게 사과한다. 오이카와 씨는 크게 마음 쓰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저어 보였다.


“토비오, 서브해봐.”

“네?!”

“방금 네가 물었잖아, 서브 기억나냐고. 네가 하는 걸 보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지.”

“아무리 그래도 부끄러운데요…….”

“왜?”

“왜냐하면, 제 서브가.”


오이카와 씨의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거라서요, 라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오이카와 씨는 시키고야 말겠다는 표정으로 씩 웃으며 나를 손짓으로 재촉한다. 영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일단 그가 건네는 배구공을 들고 서비스 에어리어에 선다. 도움닫기를 위해 뒷걸음질쳐서 물러날 때, 나는 오이카와 씨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공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잠시 이마에 댄 후 심호흡. 공을 허공에 던져 올린 후 나도 따라 뛰어올랐다. 탕,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배구공이 날아 건너편 엔드라인 안쪽을 맞고 튕겨 나간다. 오랜만에 오이카와 씨 앞에서 한다고 조금 힘이 들어갔나 싶었지만, 그럭저럭 봐줄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오이카와 씨가 무언가 말을 할 줄 알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본 곳에,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은 오이카와 씨가 있었다.


“오이카와 씨?!”

“아, 윽……. 흐윽.”

“죄송해요, 오이카와 씨. 제가 잘못했어요.”


불규칙하게 떨리는 그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고 자책한다. 나는 왜 이리 성급하게 그를 끌고 체육관으로 왔을까. 그가 아무리 보고 싶어 한다 해도 내 서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마른 호흡이 계속해서 체육관 바닥으로 덩어리지어 떨어진다. 과호흡 증세였다.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의사로부터 들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체육관에 비닐봉지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급한 대로 그의 입 근처를 내 손바닥으로 감싼다. 어느 정도 공간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손가락 사이로 그의 숨결이 스며 축축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오이카와 씨, 하나에 들이쉬고 둘에 내쉬는 거예요. 하나, 둘. 하나, 둘.”


나는 천천히 숫자를 센다. 벌벌 떨리는 손이 허공을 내젓다 내 허벅지 쪽의 트레이닝복을 아무렇게나 구겨 쥐었다. 손톱이 닿은 부분이 얼얼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괴로워하지 마세요.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폐 안쪽으로 밀어 넣고,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숫자를 세어나간다. 그 등의 떨림이 잦아들수록 나는 목이 메어 온다. 그러나 티를 낼 수 없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계속해서 숫자를 센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기에.



*


“오이카와 씨, 저녁 드세요.”

“안 먹을래.”

“저녁을 드셔야 약을 먹죠.”

“…….”


저녁 준비라 봐야 전기밥솥에서 밥을 푸고 인스턴트 된장국을 데웠을 뿐이다. 오이카와 씨가 약을 먹으려면 꼭 밥을 먹어야 하기에 내가 저녁 준비를 했다. 오이카와 씨는 들어오자마자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옷을 갈아입는 기척도 나지 않았다. 저녁 준비를 대강 끝내고 그의 방문을 두어 번 노크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려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오이카와 씨는 이쪽에 등을 보이고 모로 누워있다. 침대 생활이 불편하다는 그는 다다미 위에 두꺼운 이불을 펴고 생활했다. 상대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그는 이불을 뒤집어써 버린다. 흰 베개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있던 머리카락이 이불 속으로 숨었다.


“오이카와 씨.”

“안 먹는다고 몇 번을 말해.”

“그럼 저도 안 먹어요.”

“마음대로 해.”


이불에 묻힌 목소리는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작다. 나는 가만히 이불에 싸인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웨이트를 덜 했다고 그새 조금 가늘어진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데, 그는 고집스럽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마에 그의 머리카락이 닿아온다.


“제가 잘못했어요.”

“……토비오쨩이 뭘.”

“오이카와 씨를 데리고 체육관에 가서, 제 서브를 하는 게 아니었어요.”

“…….”

“화 푸세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요.”


오이카와 씨가 내 팔을 잡아 내리고 뒤도는 기척이 났다. 그의 이마가 내 가슴팍에 닿았다. 항상 아침에 깨어났을 때 우리 둘은 이런 자세였다. 어쩌면 우리 둘에게 가장 편한 자세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은 오이카와 씨가 나를, 어느 날은 내가 오이카와 씨를 끌어안은 채 깨어났다. 오이카와 씨는 아침부터 답답하게 뭐 하는 짓이냐며 핀잔을 주곤 했지만, 그 눈꼬리에는 따뜻한 아침 햇빛이 맺혀있었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다. 완벽하게 매끄럽고, 따뜻한 접촉이 이전과 똑같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뻔했다. 이쯤 되면 츠키시마가 말한 수도꼭지를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토비오.”

“네.”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그가 웅얼거린다. 입술 움직이는 모양새가 그대로 느껴졌다. 키가 엇비슷하게 커 버린 게 짜증이 난다며 언젠가의 그는 표정을 잔뜩 구겼지만, 사실 나는 그보다 아직도 일 센티미터 정도가 작았다. 그도 알고 있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기억이 언제쯤 돌아올 것 같아?”

“…….”

“지금의 내가, 네가 알고 있던 나와 다르면 어떻게 하지?”

“…….”

“차라리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있어.”

“오이카와 씨…….”

“일 년이 뒤처지는 것도 싫어. 몸이 조금씩 굳는 게 느껴져. 너는 도약하는데 나는 지상에 매여있잖아.”

“……같이, 같이 하면 되잖아요.”

“아하하.”


힘빠진 웃음소리 끝에, 그가 나를 더 꽉 끌어안는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가 조금 위로 올라온다. 잔뜩 거칠고 못 박힌 손가락이 내 뺨을 쓸었다. 조명이 없어서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암흑 속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가 기억을 잃은 후로 처음 하는 키스였다. 언뜻 입술 사이로 소금기가 느껴졌다. 집요하게 아랫입술을 쓸어대는 혀에 나는 이길 수가 없다. 내 목을 꽉 끌어안고, 머리카락 속을 헤집는 그의 손가락에 정신을 차리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새 나는 그의 위에 자리를 잡고 말았다. 여기서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나는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숨만 내쉰다. 오이카와 씨가 입을 열었다.


“토비오쨩, 뭘 망설여. 처음은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요.”

“섹스할 때도 환자 취급이야?”

“……그건…….”


불은 여전히 꺼져 있지만 오이카와 씨가 얼굴을 찌푸렸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나는 또 우물쭈물하고 말았다. 오이카와 씨의 손이, 내 기초체온보다 항상 약간 낮아 조금 차갑다 싶은 손이 내 티셔츠 안쪽으로 불쑥 들어온다. 잔뜩 움츠린 내가 재미있는지, 그는 조금 더 과감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 쪽을 쓸던 손이 점차 위로 올라온다. 젓가락조차 낯선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가 맞는 건지. 나는 참지 못하고 무게중심을 잃는다. 상체가 확 쏠려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말았다. 특유의 체취가 확 강해졌다. 이럴 땐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그의 목선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뜨리자, 간지러운지 가볍게 흘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럴 생각으로 들어왔던 건 아닌데. 내 망설임을 알아차린 듯 그의 손이 갑자기 급격하게 아래로 향한다.


“읏!”

“토비오, 흐, 딴생각 하지, 마.”

“제가 오이카와 씨를 두고 딴생각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간신히 쥐어짜 낸 내 목소리를 듣고,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는 어느새 내 왼손을 쥔 채 손가락 하나하나를 핥아나가기 시작했다. 따뜻하고도 미끈한 감각에 나는 몸을 떤다. 기억을 잃기 전의 오이카와 씨는 이런 애무를 한 적이 없다. 혀를 잔뜩 세워 손바닥부터 손끝까지 핥는 느낌에 소름이 잔뜩 끼친다. 이미 배는 맞닿아있었다. 또 진 것 같은 기분에 조금 분해졌지만, 내 아래서 스스로 티셔츠를 벗어 던지는 오이카와 씨를 보았을 때 이미 그런 생각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오이카와 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을 찾아갔다. 제일 먼저 2월쯤 이와이즈미 씨를 기억해냈다. 차례차례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해가 바뀌어 여름이 지날 즈음엔 거의 완벽하게 이전의 오이카와 씨로 돌아와 있었다. 재활도 매우 순조로웠다. 배구 기량이야, 애초에 공백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훌륭하게 메워졌다. 공식 시합에 나설 수는 없었던 시간마저 오이카와 씨에게는 체력 비축의 기회였다. 그는 내 경기를 보러 오거나, 팀원들의 연습에 참여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복귀를 준비했다. 날로 호전되는, 그리고 그 속도가 굉장히 빠른 오이카와 씨의 상태를 보고 주치의는 감탄했다. 그리고 내게 정말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어찌 보면 가장 큰 문제가.


“보호자 분이 정말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아, 아뇨. 저는 딱히.”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곤 하니까요.”

“그런데 선생님.”

“뭐 문제가 있나요?”

“네. 오이카와 씨가……. 절 기억하지 못해요.”

“예?”


순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의사가 반문했다. 아코디언커튼 너머로 짙게 단풍이 든 나뭇잎이 흔들린다.


“정확히는, 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건 또.”

“다른 사람들은 다 완벽히 기억해냈는데 저만 그렇거든요. 알고 지낸 게 십 년인데, 오이카와 씨에게 카게야마 토비오의 기억은 딱 십 개월 치에요. 선생님, 이렇게 특정 기억만 안 돌아오는 경우가 있나요?”

“글쎄요……. 기억을 잃기 전에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아니, 그 일에 대해서 여쭤보려는 건 아니고요. 그런 경우에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무의식적……. 거부요.”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거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아직 기억이 덜 돌아왔을 뿐입니다. 좀 더 기다려보죠.”

“네에…….”


모니터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의사를 뒤로 한 채, 나는 사무실을 나왔다. 오이카와 씨가 기억을 잃은 뒤로 어느새 계절은 세 번째 바뀌어 완연한 늦가을이다. 병원을 나오는 순간 돌풍이 불어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계절은 네 번째 변화를 예고한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또 다른 겨울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


- 토비오? 벌써 집이야?

“네. 들어왔는데요. 오이카와 씨는 어디에요?”

- 나 오늘 송년회가 생겼어. 조금 늦게 들어갈 것 같은데.

“……하아.”

-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조금 눈치를 살피는 듯한 목소리. 나는 기어코 억눌러두었던 한숨을 쉬고 만다. 이제껏 그에게 사고 경위는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다. 쿠로오 씨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도 모르는 일이다. 오이카와 씨가 기억을 잃은 뒤로 그에게 내 생일을 이야기해준 적도 없다. 오이카와 씨의 생일을 챙길 때 그가 넌지시 내 생일을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 생일도 그냥 조용히 지나갈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필 내 생일에 또 송년회라니 이걸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옆에 쿠로오 씨 계세요?”

- 쿠로쨩은 오늘 츳키- 와의 기념일이라고 가 버렸어.

“그럼 오이카와 씨도 그냥 오세요.”

- 뭐? 왜?

“우리도 기념일이라고 해요. 술자리 가지 말고, 그냥 오세요. 부탁이에요.”

- …….


오이카와 씨는 내 말투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은 듯,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의 작은 침묵이 꽤 날카로웠다. 이런 걸 데자뷔라고 하던가. 이렇게 그를 보내면 안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쥐어짜 내듯 말한다. 제발, 제발 이번만은 내 말을 들어주기를 바랐다. 억지를 부린다고, 어리광을 부린다고 생각해도 좋으니 오늘만은 그냥 들어와 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 그래, 알았어. 토비오쨩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회식에 가서 뭐가 즐겁겠어.

“…….”


맥이 탁 풀렸다. 핸드폰을 든 손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그만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잡아낸다.


- 대신 부탁이 있어.

“뭔데요?”

- 데리러 와줘.

“어디 계세요.”

- 학교 체육관이야. 막바지 스트레칭 중. 여기서 기다릴게.

“금방 갈게요.”


나는 전화를 끊고, 코트를 걸친다. 오이카와 씨의 학교는 걸어서 삼십 분 정도 거리에 있다. 차를 가져갈까 하다가 오래간만에 산책이나 할까 싶어 차 키는 두고 가기로 한다. 핸드폰 배터리를 확인한 후, 문을 열고 나섰다. 코끝에 겨울 특유의 싸늘한 공기가 잔뜩 맺혔다.



*


오이카와 씨의 학교는 배구로 특히 유명한 곳이다. 체육관 하나를 배구팀 전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굳이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체육관 안에서 흘러나오는 조명 덕분에 해는 졌지만 그리 어둡다는 느낌은 아니다. 딱히 사람들의 목소리나 공 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들은 회식 장소로 옮겨간 모양이다. 나는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이 문을 여는 건 처음이 아니다. 오이카와 씨의 연습 장소에 몇 번 찾아온 적이 있으니, 적어도 낯선 곳은 아니었기에 가능한 용기였는지도 모른다.


“토비오, 왔어?”

“네. 옷 갈아입으세요. 집에 가요.”

“문 잠그고 이리 와봐.”


의아했지만 일단 오이카와 씨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오이카와 씨는 코트 한복판에 서 있었다. 저지 차림의 오이카와 씨가 배구공을 든 채 씩 웃는다. 문득 고등학생 시절, 민트색 저지를 입은 오이카와 씨가 그 위에 겹쳐 보여 나는 눈을 비빈다. 뿌옇게 번지는 시야에 체육관 특유의 조명이 비집고 들어왔다.


“리시브 한 번 해볼래?”

“네?”

“저 쪽 가서 서 봐. 오이카와 씨, 나름 열심히 연습했거든.”

“…….”

“팔 스트레칭하는 거 잊지 말고. 부러질지도 모르니까.”


특유의 여유작작한 말투는 완벽히 오이카와 씨다. 왠지 울컥하는 마음에 나는 어깨를 풀며 오이카와 씨의 반대쪽 코트로 향한다. 리베로는 아니지만, 리시브에는 자신이 있다. 오이카와 씨는 서비스 에어리어에서 몇 미터 정도 더 뒤에 서 있었다. 스파이크 서브는 오이카와 씨의 주특기로, 한 게임에 서비스에이스를 두 개 정도 따는 건 예삿일이었다. 물론 기억을 잃은 직후에는 그 정도 위력을 발하지 못했지만, 그 전 자신의 영상을 보고 끊임없이 연습하여 구십 퍼센트 정도는 따라잡은 듯했다. 오이카와, 진짜 독하더라. 쿠로오 씨가 혀를 내두를 때,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매일 밤 기억을 잃기 전 자신의 영상을 돌려보는 오이카와 씨를 본다면 쿠로오 씨는 어떤 얼굴을 할까.


오이카와 씨가 배구공을 들고, 이마에 가져다 댄다. 그때 문득 등 뒤에 소름이 달렸다. 누군가가 내 등을 잡아채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나는 카라스노의 저지를 입고 있었다. 분명 이 느낌은 익숙한 것이다. 세이죠와의 시합, 오이카와 씨가 서브를 넣을 때와 완벽하게 같다. 다급하게 오이카와 씨, 하고 부르려는 순간 이미 그는 도약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높게.


날카롭게 공기를 찢어내는 파열음이 귓가에 울렸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이 내 옆 바닥을 맞고 튕겨 멀리 날아가 2층 난간에 부딪히고는 떨어져 내렸다. 오이카와 씨는 제자리에 비딱하게 선 채, 한쪽 허리에 자신의 손을 짚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공을 받아내지 않은 나를 질책하는 표정은 아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그 서브는 나를 향해 오지 않았다. 나는 리시브 자세조차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우리 둘은 애초에 합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오이카와 씨가 서브 준비자세를 취할 때부터, 내가 코트 반대쪽에서 그를 바라볼 때부터 서로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 씨.”

“…….”

“왜……. 말씀 안 해주셨어요.”

“…….”

“언제부터예요?”


오이카와 씨가 흐릿하게 웃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코트에 주저앉아버린다. 오이카와 씨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 각도의 시선도 익숙한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 씨에게 십 년의 내가 돌아와 있었다. 오이카와 씨가 네트 밑을 통과해 내게 다가오는데, 일어나기는커녕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토비오.”

“…….”


그가 무릎을 꿇고 선 채 가만히 나를 끌어안았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통화를 끝낸 다음이었어.”

“……네?”

“너와 통화를 끝낸 다음에, 엄청나게 머리가 아팠어. 코트 위에 쓰러지는 바람에 팀원들이 도와줬는걸.”

“그거.”

“응. 일 년 전과 똑같은 통화였지. 기억났어.”

“저는, 오이카와 씨가 절 기억해내고 싶지 않아 하신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아마 죄책감이었겠지.”

“네?”

“네 생일에 송년회랍시고 늦게 들어간데다, 걱정까지 시켜버렸다는 죄책감에 나는 도망만 다니고 있었던 거야.”

“…….”

“굳이 따지자면 꼭 송년회 시즌에 토비오의 생일이 있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뭐…….”

“토비오쨩, 미안,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의 손바닥이 내 뺨을 감싼다. 나는 말없이 그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쳤다. 눈물 때문에 내 시야가 부옇게 흐려진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얼굴도 눈물로 말이 아니었다. 잘생긴 얼굴이 눈물로 범벅되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아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에 눈물이 스민다. 둘 다 울며 웃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는다. 오이카와 씨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오이카와 씨, 이제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응, 그럴게.”

“기억 다 찾아줘서 고마워요.”

“…….”


오이카와 씨가 내 품을 벗어나, 내 이마에 입 맞추었다.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입술을 찾는다. 이마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찝찔한 맛이 났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그가 기억을 잃고 난 후의 첫 키스와도 비슷한 맛이 났다. 내 옷깃을 꽉 부여잡는 손길에, 우느라 숨이 부족하여 허덕이는 호흡이 바로 내 아래에 있다. 어느새 내 무릎 위에 올라앉은 그의 얼굴이 조금 더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살짝 눈을 떴을 때 체육관 조명 때문에 역광이 진 오이카와 씨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이미 누구의 눈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한창 입을 맞추다가 그가 갑자기 입술을 뗐다. 바로 전까지 붙어있던 온도를 잃은 내 입술은 허망하게 벌어진다.


“나머지는 집에 가서 할까? 이 년 만에 돌아온 토비오쨩의 생일도 축하해야지.”

“…….”


불만스러운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내 뺨을 톡톡 두드려온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다시 그의 허리를 바짝 잡아 밀착시킨다. 꺄악, 뭐 하는 거야! 하는 비명은 갈 곳 없이 내 입술 사이에 머물렀다. 애써 내 어깨를 밀어내려는 부질없는 손길은 곧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더욱 강하게 내 목을 끌어안는다. 결국, 이럴 줄 알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즐기기로 했는지, 아랫입술을 살짝 물어오는 그 움직임에 나는 더운 숨을 뱉어냈다. 토비오쨩이 시작했어,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은 더할 나위 없다. 그의 허리를 조금 더 꽉 끌어안으며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더 감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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