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카게오이] 화폭 너머로 저무는 해 1+2


- 카게오이 아마도 장편.

- 피폐물 예정입니다. 예민하신 분은 피해주세요!

- 형사 카게야마x화가 조수 오이카와.

- 일본 현경에 관한 기술은 상당 부분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제가 조금 늦었나요? 다행히 딱 맞췄네요.  ……네? 아뇨아뇨, 작업실에서 여기까지는 전철 타면 금방인걸요. 삼십 분 정도 걸렸나? 손목시계도, 핸드폰도 안 가져와서 정확히 얼마나  걸렸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출발할 때 시계를 봤냐고요? 아뇨, 그냥……. 짐작이에요. 통유리라서 석양이 참 잘 보이는군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오히려 감사한 일이죠. 어차피 저도 그 일 이후로는 할 일도 딱히 없고, 작업을 맡지도 않으니까요. 백수 한 명 구제하신 셈  칠까요. 절대 자학하는 취미가 있는 건 아니에요. 

 

……아,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신 게 대체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커피 한 잔 마실 여유가 났다 싶으면 참고인 수사다, 현장 검증이다,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었거든요. 향이  좋네요. 저도 좋아해요, 인도네시아 만델링. 다크 초콜릿 향이 난다는데 혹시 느끼세요? 저만 그런 건 아니었네요. 사실 초콜릿 향 같은 건 잘  모르겠어요. 그걸 따지면서 마시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음, 선생님은- 후미요 선생님은 그러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굳이 따지자면 커피보다는  홍차나 와인을 좋아하시긴 했지만요. 녹음이요? 편하신 대로 하세요. 전 신경 안 쓰니까요. 

 

오늘은 선생님에 대해 말하는 자리인가요, 아니면 저에  대해서? ……아하, 둘 다. 사실 두 주제 다 어중간하네요. 확실히 선생님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저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는 좀 자신이 없어요.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요. 평범한 줄만 알았던 이웃이 연쇄살인범이라든가, 옆자리 친한 동료가 알고 보니 산업  스파이라든가. 너무 비현실적인 예를 들었나? 그렇다고 저에 대해서 말하자니 이야깃거리가 턱없이 시시한 느낌이라서요. 뭐, 이런 시시한 이야기라도  굳이 듣고 싶으시다면야 얼마든 해 드릴 수는 있지만요. 두서없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끝까지 들어주셔야 해요?

 

그러네요……. 일단 제 소개부터 다시 할까요. 칸나즈키  후미요(神無月 二三四) 선생님의 조수이자 제자인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올해로 서른이 되네요. 아, 감사합니다. 그런 칭찬 많이 들어요. 특히  학교 다닐 때 대단했죠. 자기자랑 아니냐고요? 부정할 순 없네요. 왕년엔 한 인기 했답니다. 운동이요? 배구를 잠깐 했어요. 진지한 건 아니고,  살짝. 나름 즐겁게 한 기억은 있네요. 학창시절 부활동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요? 설마 그때 체형이 아직도 남아있지는 않을 거예요. 꾸준히 운동은  하고 있거든요. 화가라는 직업이, 온종일 앉아있는 일이다 보니 건강 망치는 건 순식간이더라고요. 그치만, 당신은 이런 얘기를 듣고자 저를 부르신  건 아니죠.

 

후미요 선생님과는 십 년 전쯤 만났어요. 아마 고등학교  3학년 때일 거예요. 성을 듣고 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저희 집은 가업이 있답니다. 요즘 시대에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죠? 화족(華族)이라나  뭐라나. 가업보다도 고리타분한 단어가 나와 버렸네요. 메이지 시대 얘기잖아요. 다행히 고분고분한 형이 앞에서 방패가 되어 주어서 ‘후계자’,  ……아 죄송해요, 생각만 해도 갑갑한 얘기라 그만. 아무튼, 제가 후계자가 될 필요는 없었지만, 둘째 아들이 하려는 게 ‘환쟁이 짓’이라는 걸  알자마자, 아마 스승이 여자라서 더 그러셨던 것 같은데, 아버지는 무섭게 반대하셨어요. 이런저런 노력 끝에 저는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답니다. 그  과정을 굳이 지금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죠.

 

후미요 선생님과 만난 계기요? 특별한 건 없어요. 당시 여자  친구와 시내에서 놀다가 갤러리 무료 전시가 있다고 해서 한 번 들어가 봤죠. 무심하게 전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점심은 뭐 먹을까? - 그런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그림 한 점이 제 시선을 비끄러매더라고요. 아, 잘 안 쓰는 단어라 낯선가요? 그런데 정말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어요. 제가 그림을 본 게 아니라, 그림이 저를 불러 세웠어요. 

 

아직도 눈에 선해요. 광활한 수평선이 캔버스를 가로로  이등분하고, 그 수평선 아래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어요. 그 그림은……. 아마 해경형 100호는 가볍게 넘겼을 거예요. 네? 아, 죄송해요. 낯선  단위죠 아무래도. 해경형 100호는 가로가 162.2센티미터, 세로가 97센티미터거든요. 제 기억에 그 그림의 가로 사이즈는 200센티미터는  너끈히 넘겼어요. 그만큼 박력도 엄청났던 것 같네요. 선생님의 붓 터치는 절대 섬세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의 이야기일 뿐,  아마 작업하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십중팔구 깜짝 놀랄 거예요. 세필을 얼마나 많이 쓰시는데요. 작업 시간도 엄청나게 오래 걸리죠. 제가 추측건대,  아마 그림 하나를 완성하는 데에는 적어도…….

 

아, 죄송해요. 그만 또 혼자 추억에 젖어 있었네요.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그림. 맞아요, 그 그림. 당신도 알다시피, 후미요 선생님의 별명은 ‘석양의 마술사’잖아요. 본인은 촌스럽다고 질색을  하셨지만, 싫어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놀리듯 그렇게 부를 때마다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떠올라있었거든요. 어쩌면, 그냥 제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와서는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어쨌든, 그 그림은 바다의 석양을 표현한 작품이었어요.  수평선마저 주홍빛으로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강렬한 석양이 제 눈앞에 가득했어요. 저는 시적으로 표현하는 재주는 없으니, 그 그림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표현하기도 어렵네요. 바다는 보라색이었다가, 푸른색이었다가, 또 어느 부분은 검은색이었다가, 어느 부분은 타오르는 것처럼  새빨갰어요. 

 

현기증. 제가 그 그림을 처음 보고 느꼈던 건 분명  현기증이었어요. 얼빠진 놈처럼 그 그림 앞에 서서 오 분 정도 멍하니 보고만 있었거든요. 바닷바람 소리가 들렸다고 하면, 그리고 석양이 넘어가는  냄새가 났다고 하면 당신은 웃으시겠죠? 괜찮아요, 웃으셔도. 당시 여자 친구는 제 이야기를 듣고 포복절도했으니까요. 배구를 부활동으로 하던  평범한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의 현대미술 감상평치고는 꽤 구체적이지 않나요? 사실 석양이 넘어가는 냄새가 뭐냐고 물으셔도 곤란하지만요.

 

어라, 그 그림을 다시 접할 기회가 없었냐고요? 어째서  그렇게 물으시죠? ……역시, 기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요. 아, 기자가 아니고 칼럼니스트요? 뭐든 괜찮지 않을까요. 다섯 글자보다는 역시 두  글자가 편하잖아요. 아무튼, 예리하신 건 인정해 드려야겠네요. 맞아요. 십 년 전이면 선생님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도 아시겠죠? 선생님은  무명이었어요. 한 점 팔아 일주일을 근근이 살아가는, 흔하고 흔한 ‘예술인’ 중 한 명이었죠. 그 그림은 그 전시회에서 팔렸대요. 

 

‘토오루 군, 그 그림을 보고 나한테 온 거구나.’

 

네, 선생님은 저를 ‘토오루 군’이라고 부르셨어요. 제가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하자, 반갑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셨죠. 그리 도수가 높지 않은 은테 안경을 항상 끼고 계셨는데, 눈빛이 렌즈에 반사되는 바람에  항상 까만 눈인데도 살짝 파란색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쉬워서 어쩌나. 그 그림, 팔렸어.’

 

화가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만, 그 그림을 파는 사람이기도  하잖아요? 제가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고등학생이었다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당시 용돈을 두세 달 정도 큰 맘 먹고 모으면 선생님의  그림 하나는 살 수 있었지만, 결국 사지는 않았네요. 처음 선생님께 갔을 때, 선생님은 울면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당신은 지금 조수를 둘  여력이 없다고. 익히 예상하던 반응이었죠. 그래서, 저는 말씀 드렸어요. 조수가 아니라 제자로 온 거라고. 제 밥은 제가 알아서 챙겨 먹을  거고, 선생님은 제게 그림을 가르쳐주시면 된다고요. 

 

결국, 제가 다시 그 그림을 만나는 일은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아쉽네요. 앞으로도 그렇게 압도적이고 박력 넘치는 그림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아, 그 그림의 제목이요? 그러니까, 아마  확실히…….

 

 

 

 

화폭 너머로 저무는  해

 

 

 


“오늘 오후 두 시 반, 화가 칸나즈키 후미요 씨가  미야기 현의 자택 3층에서 추락해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칸나즈키 씨는 ’석양의 마술사‘로 유명한 화가로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라디오를 끈 건 조수석의 츠키시마였다.  패트럴 카 안을 가득 메우던 앵커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를, 무거운 침묵이 이었다. 현재 시각 오후 두 시 오십 분. 이십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방송국에서는 벌써 특보를 보도하고 있다. 이런 유명인이 얽힌 사건이라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지만, 아직 초동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이라는 건 문제가 있다. 핸들을 잡은 카게야마는 백미러를 흘끗 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코너를 꺾는다. 뒷좌석에 앉은 스가와라가 가볍게 한숨을  토해냈다. 사와무라는 자신의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차창 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팔짱을 끼고 앞을 바라보고 있던 츠키시마가,  아무렇지 않게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자살일까요?”
“으음…….”

 

사와무라가 자신의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출동 현장은 바로 칸나즈키 후미요의 자택이자 작업실이었다. 자살이네 타살이네, 여유롭게 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의미다. 

 

“앞으로 오 분이면 도착합니다.”

 

내비게이션을 확인한 카게야마가 말했다. 

 

“최대한 빨리 가자, 카게야마. 벌써 취재진으로 소란스러울  것 같아.”
“넵.”

 

화가 칸나즈키 후미요의 자택 겸 작업실은 미야기 현 센다이  시의 한적한 교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간벽지라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이런 상황에 급하게 출동하기에는 아무래도 불편한 곳이긴 하다. 아니나  다를까, 자택에 가까워질수록 차와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딱 봐도 언론, 혹은 경찰 관계자들이었다. 근처에 인가는 거의 없고 딱히  대중교통이 지나다니는 곳도 아니니, 단순한 구경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여러모로 유명인이 관련된 사건이면 골치가 아프다. 시원스럽게  해결되기도 힘들거니와, 해결된다 해도 잡음이 너무도 심했다. 관할서지만 도쿄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스가와라는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미야기에서까지 유명인과 관련된 사건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방송국 녀석들이 입구 쪽에 벌써 진을 치고  있네요.”
“감식반 차를 찾아봐.”
“아마 부지 안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아까 감식반의 쿠니미에게서 무전이 왔거든요.”
“그러면  우리도 부지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 세우고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겠군.”

 

사와무라의 말에 카게야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취재진  무리 앞에서 클랙슨을 두 번 울렸다. 패트럴 카를 확인한 취재진은 서로 밀치고 밀리면서도 길을 터 주었다. 공무집행 방해로 수갑을 차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츠키시마가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그나저나……. 엄청난 저택이네요.”
“단독주택이  3층이니 말 다 했지, 뭐. 젊은 작가 중에선 수입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고 하던데.”
“그런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자살을  할까요?”

 

맨 뒷좌석에서 갑자기 히나타가 튀어나오며 질문했다. 

 

“히나타, 사람은 꼭 뭐가 아쉬워서 자살을 택하지는  않아.”
“……스가, 아직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른다고…….”

 

하하, 웃으며 스가와라가 히나타에게 대답한다. 사와무라가  복잡한 표정으로 덧붙이고, 그 이후에 따라붙은 침묵은 이제까지의 어떤 침묵보다도 무거웠다.

 

“내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노란색 폴리스라인 바로 바깥에서 차가 멈췄다. 카게야마가  안전띠를 풀며 말한다. 옆에 미야기 현경 소속 차량이 두어 대 더 서 있었다. 초동을 맡은 기수대와 감식과 차량인 듯했다. 현관 입구에 낯익은  경찰관 두 명이 서 있었다. 이쪽을 보고 거수경례를 해 오기에, 1계 출동인원 전원도 어색하게나마 거수를 붙인다. 

 

“다 들어갈래?”
“아뇨, 저는 정원부터 좀  살펴보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감식반만 방해하지 말고.”

 

사와무라가 카게야마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나머지를  이끌어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아마 안으로 들어가 봤자, 경찰 인원이 너무 많아 뭘 제대로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잠깐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저택을 올려다보던 카게야마는 곧 발걸음을 뗀다. 저택 넓이에 비례해 정원도 꽤 컸다. 일본식보다는 서양식에 가까운 정원이다. 원예 쪽으로 박식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 재래종보다는 외국 식물이 더 많다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구조물들도 주로 대리석을 이용했다. 한쪽에는 작지만  어엿한 분수도 있었다. 가을이지만 작동을 멈추지는 않는 듯, 분수는 물줄기를 계속해서 뿜어 올리고 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분수대 쪽으로  다가갔다. 관리는 꽤 잘 되어 있었다. 이끼나 물 때 하나 없이 희다. 분수대 옆에는 국화가 잔뜩 피어있었다.

 

“…….”

 

작은 위화감은 지나친 완벽에서 비롯된다. 모든 구획은  정사각형이고, 국화는 빈틈없이, 그리고 제 구역에 제대로 심겨 있었다. 이파리 하나도 다른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자를 재고 긋기라도 한 듯한  구획.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반듯함이 국화 정원 안에 가득하다. 가을 하면 국화, 국화 하면 가을이다. 그리고 대충 세어도 스무  종은 넘는 국화들이 질서정연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맑은 향기도 겹치면 독이 된다. 후각이 그리 예민하지 않은 카게야마마저, 저도 모르게 코를  가리고 한발 물러서야만 했다. 

 

“이거 설마.”

 

가을이라서 국화를 심어둔 것이라면, 꽃이 지면 전부 갈아엎고  다른 식물을 심는다는 걸까? 일 년에 적어도 네 번, 그런 일을 반복한다는 건가? 카게야마는 혼란스러웠다. 적어도 자신이 전혀 모르는 세계에  발을 들여 넣었다는 느낌이 등 뒤를 와락 덮쳤다. 어쩌면, 어쩌면 화가는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밑도 끝도 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자살하는  사람의 심리 상태 같은 건 모른다. 그리고 아직 시신의 상태를 두 눈으로 파악하지도 않았다. 자살이고 타살이고 근거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어이, 카게야마. 거기서 뭐  해?”
“……쿠니미.”

 

감식과 소속 동기 쿠니미가 두어 발자국 정도 뒤에 서  있었다. 표정에 혼란이 그대로 묻어있었던 모양인지, 쿠니미는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응시한다. 카게야마는 애써 국화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이 기척은, 국화의 향기일까. 아니면 국화의 시선일까.

 

“사와무라 씨랑, 스가와라 씨는?”
“저택  안에.”
“흐음. 넌 여기서 뭐 하는데?”
“난 일단 바깥을 둘러본다고 했어.”
“정원 구경이라니, 팔자 좋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쿠니미가 진심이 아니란 건 알지만, 담담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담담하기 그지없이 말하면 역시 진의를 한 번 더 고민하게 된다. 

 

“유체는 봤어?”
“아직.”
“정말 오자마자 국화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는 거네.”
“너는 봤을 거 아냐. 어때?”
“어떠냐니.”
“그러니까.”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묻고  있는 거야?”
“…….”

 

재차 확인하듯 쿠니미가 카게야마를 똑바로 노려본다.  카게야마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건 감식반으로서는 장담할 수 없지. 너희가 동기를  찾아내고, 참고인을 부르기 시작하면서 밝혀지는 것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현재 유체에서 밝혀낼 수 있는 사실은, 3층  작업실에서 떨어져 하필이면 대리석 바닥에 정통으로 두부를 부딪치는 바람에 심각한 외상으로 사망했다는 것뿐이야. 누가 억지로 떠민 흔적도,  누군가와 싸운 흔적, 그러니까 방어흔도 현재로서는 찾아볼 수 없어.”
“두 가지 가능성 모두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군.”
“대체로 추락사라는 것이 그렇잖아.”

 

쿠니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시월 특유의 찬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빠져나간다. 

 

“복장은?”
“네가 보면 알겠지만, 평상복. 외출복은  확실히 아니야. 실내화를 신고 있었고.”
“지금 보러 갈 수 있어?”
“그건 상관없는데.”
“……응?”
“네 상사가  부르는데, 안 가 봐도 괜찮아?”

 

쿠니미가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현관 입구에서  손짓하는 스가와라가 보였다. 쿠니미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 살짝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뭐 건진 거 있어?”
“아뇨,  딱히.”
“유체부터 보러 갈까.”
“넵.”

 

사와무라와 츠키시마, 히나타는 아직 저택 안에서 참고인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갑갑해, 라고 말하며 스가와라는 씩 웃는다. 저택 외벽을 따라 반 바퀴 정도 빙 도니 유난히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 나타났다. 작게 파란색 천막도 쳐져 있다. 아무래도 취재진이 큰 카메라를 들고 설쳐대니 유체를 노천에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카게야마는 천막 문을 열고, 스가와라에 이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천막으로 돌아온 쿠니미와 눈이 마주쳐, 살짝  목례로만 인사했다. 감식 작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듯, 철수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

 

흰 대리석 바닥은 이미 갈색으로 물들었다. 여자 하나가 그  위에 엎드려있었다. 허리 정도 오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이미 핏물과 함께 엉키기 시작했다. 현경 밥을 먹은 지 오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솔직히 적응하기 힘든 광경이다. 장갑 낀 손으로 입 근처를 누르며 유체에 다가간 카게야마는, 으레 하는 것처럼 양손을 모았다.  충격으로 튕겨 나온 듯, 프레임이 뒤틀릴 대로 뒤틀린 은테 안경이 유체 왼쪽에 떨어져 있다. 마치 있을 자리를 잃고 황망해하는 듯한 안경.  감식반원 중 누군가가 그것을 집어 들어 투명한 비닐봉지 안에 넣는다.

 

“풀숲 쪽에 떨어졌다면 살았을 텐데, 하필이면 대리석 바닥  쪽으로 떨어졌네.”
“죽을 생각으로 떨어졌다면 ‘하필이면’은 좀 안 어울리는 단어군요.”
“아하하, 역시 독설 하면 감식과의 쿠니미가  우리 츠키시마 뺨을 후려치지.”
“츠키시마가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는 발언입니다만, 스가와라 씨.”
“높이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
“네, 말씀 그대로 대리석 바닥이 아니었으면 목숨은 건졌을지도 모르지요. 물론 이후의 인생은 장담할 수 없지만요.”
“작업실  바로 아래가 대리석 바닥인 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게 중요하겠네.”
“고인만 알고 있는 사실이네요.”

 

쿠니미와 스가와라는 이상한 곳에서 대화 코드가 맞고는 했다.  뜬구름을 잡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싸우는 것 같기도 한데 그 속에서 착실히 서로의 이익을 취하는 구조였다. 물론 카게야마는 몰랐다.  츠키시마가 알려준 사실이다. 

 

“대충 현장 감식은 끝났으니, 감식반은 철수할까  합니다.”
“응, 수고 많았어. 이리하타 과장님께도 감사 인사 부탁할게.”
“네.”
“카게야마는 저택으로 가 줘. 다이치보고  잠깐 나오라고 전해줄래? 아무래도 유체가 옮겨지기 전에 다이치도 한 번은 봐야지.”
“아……. 네.”

 

카게야마는 잠자코 천막 문을 열고 나왔다. 고작 몇 분  있었던 걸로 머리가 조금 무거웠다. 그야 그렇다. 좁은 천막에 몇 사람이 숨을 쉬고 있었고, 신선한 공기 공급은 바랄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허리를 곧게 펴고 심호흡을 하니 어느 정도 머리가 맑아진다. 아직 콕콕 쑤시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누르며 카게야마는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자극취. 휘발유? 아니, 이 집주인의 직업을 고려하면 역시  시너 냄새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아무리 환기를 해도 집안 전체에 밴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이런 냄새를 거의 맡을 일 없는  일반인이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쓰고 나아간다. 서양식 저택 아니랄까봐, 친절하게도  신발을 그대로 신고 들어오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고-혹은 사건- 현장이니, 흙발 그대로 출입할 수는 없어서 비닐봉지를  덧신기는 했지만.

 

“어, 혹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걷던 카게야마는 누군가와 부딪힐 뻔해서  급제동했다. 자신보다 약간 키가 큰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고개를 들면 무언가가 크게 바뀔 것 같은 예감이 관통한다. 분명히 이 목소리는  낯익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목소리는 지문과도 같아서,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아마 기억이  정확하다면 눈앞의 사람도 짐작이 간다.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

 

형사로서의 직감이라고 할까, 아니면 날카롭게 별러진  육감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 비슷한 종류의 느낌이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고개를 들면 안 된다. 아는 얼굴과 마주쳐버린다.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무표정으로 앉아있으면 그 배로 신경질적인 얼굴. 분명 지겹게 마주했던 적이 있다. 언제더라. 아마, 중학교 시절 취미로 했던 배구부  활동. 틀림없다.

 

“역시, 토비오쨩이네.”
“……오랜만입니다, 오이카와  씨.”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무언가가 흐름을  놓쳐버렸다. 






2. 


- 피폐물? 미스터리 추리물...?

- 형사 카게야마X화가 조수 오이카와.

- 인물들의 텐션이 다소 낮습니다. 원작보다는  확실히.

- 본문에 등장하는 사건은 모두 픽션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 일본 현경에 대한 서술은 오류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 위 사항 중 하나라도 예민한 사항이 있으신  분은 주의해주세요.

 

 

 

 

……커피가 다 식었네요. 항상 그래요. 무슨 일이든 때가  있는 법이죠. 이걸 때때로, 정말 새삼스럽게, 혹은 뜬금없이 느낄 때가 있는데요. 후미요 선생님은 홍차를 좋아하고 꽤 까다롭게 고르시긴 했지만,  티백도 종종 드셨거든요. 작업 중이실 땐 바쁘니까 제가 끓이는 일이 많았어요. 혹시 홍차 티백을 몇 분 우려야 하는지 알고 계세요? 조금씩  다르기는 한데 대체로 3분이에요. 너무 오래 담그고 있으면 수색도 예쁘지 않고, 떫은맛도 왕창 우러나오거든요. 선생님은 별말 없이 드시긴 했지만  제가 못 견디겠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하나 장만했죠. 티타임용 시계를. 정확히 3분 있다가 빼낼 수 있게 말이에요. 물론 컵라면 끓일 때도  유용하게 썼답니다.

 

아, 죄송해요.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제가 이래요. 내키는  대로 이야기하다가 자주 옆길로 새거든요. 시계 얘기는 어쩌다 나왔더라.

 

선생님의 무명 시절이요. 딱히 특별할 건 없네요. 어쩌다  그림이 팔리면 그달은 괜찮았고, 그림이 팔리지 못하면……. 하하. 솔직히 모자란 것 없이 자란 어린 시절이 있어서 그런지, 처음에는 꽤  힘들었어요. 홍차며 커피가 다 뭐예요, 사치죠. 끼니를 거른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갖춰서 먹은 적도 없었어요. 집에서는 성화였죠. 한  번은 형이 연락도 없이 작업실로 찾아오더니,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말없이 제 짐을 캐리어에 막 쑤셔 담는 거예요. 그 와중에도 화구는 안 싸던 게  눈에 밟혔네요. 형은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결국, 제가 생전 처음으로 형에게 손을 올렸던 기억이 나요. 아마, 꽤 아팠을  거예요. 저 이래 봬도 중고등 시절 배구부 에이스였으니까요. 후후. 선생님이 집에 안 계셔서 다행이었지, 아마 선생님이 그 꼴을 보셨다면 전  아예 집안과 의절했을지도 몰라요.

 

……네, 맞아요. 그 시절에는, 정말 저와 선생님  둘뿐이었어요. 아마 둘 다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화폭 너머로 저무는 해  2

 

 


“헤에, 형사님?”
“‘님’자는 빼주셔도  됩니다. ……일단은, 미야기 현경 소속이에요.”
“장하네, 장해.”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는 주제에, 눈빛은  어린아이가 보면 놀라 도망갈 정도로 차가운 이 간극은 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카게야마는 무의식적으로 반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선다.  오이카와는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무시하는 것인지, 간격을 더 좁히거나 벌리려는 시도는 딱히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건 언제부터 생긴 습관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갈색 털 실내화를 신은 발. 화장실을 갔다 나온 것인지  손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오이카와는 회색 브이넥 셔츠에 흰색 카디건을 걸친 차림으로, 정장을 입은 카게야마를 슬쩍 훑어보았다. 

 

“어떻게 고등학생 때랑 변한 게 하나도 없네,  토비오쨩은.”
“오이카와 씨도 그리 달라진 건 잘……. 모르겠는데요.”
“오이카와 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잘  생겼으니까.”
“네에…….”

 

한껏 눈을 휘어 접은 눈웃음은 분명 그때의 오이카와와  똑같다. 뒤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웃음을 보면 사실 뒤에 숨겨진 생각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십 년 전의 카게야마는  그랬다.

 

“아무래도 초면인 척하는 게  편하려나.”
“네?”
“자살인지 타살인지 조사하고 있을 것 아니야? 나는 제1 용의자일 거고.”
“…….”
“나랑 아는  척해서 토비오에게도 좋을 일 없을 것 같으니, 모르는 척하자는 거야.”
“네.”
“이 집, 오늘따라 인구밀도가 너무 높단 말이지.  평소엔 한적해서 쓸쓸하기까지 한 집인데. 나는 이만 방으로 돌아갈게. 싫어도 또 봐야겠네.”

 

오이카와는 한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고, 가던 방향으로  사라진다. 자신을 스쳐 지나간 오이카와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게야마는 가볍게 한숨을 쉰다. 방으로 들어간  듯, 2층에서 가벼운 문소리가 들렸다. 참고인 조사는 목격자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한다. 목격자는 사흘에 한 번, 집안일을 도와주러 오는  도우미였다. 아마 오이카와의 차례는 오늘 밤, 아니면 내일 아침이 될 것이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궁금한 것은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그 중 아무것도 묻지는 못했다. 애초에 오이카와가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묻는다고 순순히 가르쳐줬을  것 같지도 않지만, 한 마디쯤 던져볼 걸 그랬나. 아직 스가와라처럼 웃으며 정보를 빼내는 기술은 없다. 십 년쯤 더 근무하면 생길지도 모르지,  하고 히나타는 말했지만 카게야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십 년은커녕 이십 년이 지나도 저렇게는 될 수 없다는 걸.

 

‘스가와라 씨가 담당이면 재밌겠네.’

 

어딘가 느긋한 머리로 이런 생각을 하는 찰나, 누군가가 등을  툭 친다. 깜짝 놀라 뒤돌아본 곳에는 같은 계 소속 동기, 츠키시마가 서 있다. 검은 테 안경을 보는 순간 유체 옆에 떨어져 있던 은테 안경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런 데서 뭐 해?”

 

분명 조금 전에도 다른 누군가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았던 것  같은데, 누구더라. 

 

“아, 화장실 가고 싶어서.”
“화장실은 바로 저기야.  일단 사용 허락은 받아뒀어.”

 

츠키시마는 턱짓으로 바로 앞의 문을 가리킨다. 고마워, 라고  말하고 발걸음을 떼려는데 츠키시마가 다시 불러 세웠다.

 

“카게야마, 혹시 여기 문하생이 몇이나 되는지  알아?”
“어……. 아직 모르겠는데. 방금 유체를 보고 온 참이라서,”
“하나밖에 없대.”
“응?”
“그렇게나 유명한  화가면, 적어도 두셋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군.”

 

딱히 중요한 이야깃거리로 불러 세운 건 아닌 듯, 츠키시마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쌩하니 거실 쪽으로 향한다. 그 뒷모습까지 잠자코 지켜본 후에 카게야마는 드디어 화장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볼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복도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이유를 어떻게든 만들어야 했다. 오이카와의 손가락 끝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을 보고, 화장실에 다녀왔나,  하고 생각했던 게 목적지로 변해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렸다. 

 

화장실은 청결했다. 베이지색과 흰색의 주조로 이루어졌고,  작은 인형 같은 소품도 붙어 있었다. 근원지는 알 수 없지만, 꽃향기 같은 것도 난다. 카게야마는 세면대로 다가가 물을 틀었다. 투명한 물방울이  살갗에 튀고, 선뜩하리만치 차가운 물줄기가 흰 세면대 위로 쏟아져 내린다. 남의 화장실을 빌려 쓰는 주제에 오래 쓸 수도 없고, 손만 간단하게  씻고 나오려는데 그 순간 오이카와의 손이 떠올랐다. 뚝뚝 떨어져 복도 위에 자리를 잡던 물방울들. 자리를 뜨기 전 오이카와는 그 물방울들을 다  자신의 발로, 실내화로 닦아냈다. 단순히 보면 복도 위에 떨어진 물을 닦는 것이었지만, 카게야마의 눈에는 어쩐지.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느낌.’

 

그 물방울이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것이 아니라면 아마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자신의 몸이 남긴 흔적은 전부 없애고 지나치는 철두철미함인지, 혹은 단순한 예의인지.  그는 키스가 끝난 후에 상대방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는 버릇이 있었다. 조금 더 여운을 오래 남기고 싶기도 했고, 그 손길은 다정하다기보다 살짝  신경질적인 느낌이어서 몇 번 카게야마가 표정을 구겨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대체 왜 수건으로 손을 닦지 않은 걸까.’

 

복도에 떨어진 물방울을 발로 닦고 지나갈 정도라면 애초에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 수건으로 손을 닦았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만져본 벽면의 수건은 보송보송했다.

 

“…….”

 

오이카와 씨가 이 화장실에서 나온 게 맞는 건가. 카게야마는  화장실 한복판에 멍하니 선 채,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

 

 

친구의 권유로 들어간 배구부에는 굉장한 사람이 있었다. 당시  어휘가 짧았던 카게야마는 그를 ‘굉장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지만,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사실 그 단어 외에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필  처음 체육관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광경이 오이카와의 스파이크 서브 장면이었으니, 떠올려 보면 그때 이미 시선과 함께 마음도  뺏겼는지 모른다. 

 

3학년 한 명이 공을 든 채 엔드라인보다도 몇 발자국 뒤에  섰다. 배구라면 손목으로 받는 리시브밖에 모르던 카게야마는 그가 왜 그렇게 뒤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입 다물고 보고 있으라는 감독의  말에 수많은 의문점은 그저 입속으로 삼킨 채 공을 든 선배의 움직임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입에서 엇, 하는 한 음절이 흘러나온 건  그가 도움닫기를 시작할 때였다. 공을 허공으로 던져 올린 후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가 싶더니 그는 공을 쫓아 뛰어올랐다. 도저히 중학교  3학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힘과 정확성. 반대편 네트로 경쾌하게 날아간 공을 어느 2학년이 주워오는 것으로 그의 서브는 끝났다. 

 

그의 이름이 오이카와 토오루이고, 현재 배구부 주장이라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배구를 할 때의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고, 그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났다. 본인 말로는 절대 진로로 삼을 생각은 없고 그저 취미라고만 했는데, 세상의 모든 취미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직업인들이  나설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카게야마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의 재능은 신기했다. 놀라웠고, 그리고 복사하고 싶었다. 매사에 딱딱하고  흥미를 잘 느끼지 못하는 카게야마가 배구에 전념한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은 꽤 놀라워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침 일찍 나와서, 저녁 늦게까지 남아서  연습해도 그를 보는 눈빛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똑같은 사람이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바로 주장이었다. 이 사람은 내가 배구 국가대표로  나간다고 해도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거야. 카게야마는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다.

 

배구는 생각보다도 재미있었다. 연습하면 실력이 눈에 보이게  늘어나는 것도 꽤 뿌듯했다. 하지만 여간해서 그의 서브는 복사할 수 없었다. 배구 연습의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스파이크 서브. 자세만 보고  따라 하는 건 역시 한계가 있었다. 분명 오이카와만이 아는 요령이 있을 것이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카게야마는 결국 공을 들고 오이카와에게  다가갔다.

 

“응? 뭐야, 토비오쨩?”

 

토비오쨩이라니……. 부모님으로부터도 들은 적 없는 낯간지러운  호칭에 카게야마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어쩌면 이 사람은 내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이런 식으로 불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들었지만, 곧  마주친 환한 미소 앞에서는 그 의심조차 의미가 없었다. 이때 이후로 모든 상황이 똑같았다. 씨앗을 묻어둔 것도 잊은 채 방치했던 흙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피어난 새싹을 보는 기분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마주할 때마다 되새겼다. 결국 ‘에이, 까짓 거 언제 심었는지 뭐가 중요해.’  하고 생각해버리는 상황의 반복. 그 속에서도 착실하게 새싹은 커져만 간 지 오래였다. 

 

“저, 서브 토스 요령  가르쳐주세요.”
“뭐?”
“오이카와 씨의 스파이크 서브, 정말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어째서 가르쳐줘야  하는데?”
“네?”
“내가 토비오에게 서브를 가르쳐주면 뭔가 이익 보는 게 있냐고 묻는 거야.”
“그런 건…….”
“그건  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 불공정이라는 단어가 좀 어려운가?”
“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한 번의 거래를 통해  서로가 얻는 이익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는 거지.”
“그렇긴…… 한데요.”
“토비오쨩, 지금 속으로 ‘그깟 서브 한 번 가지고 말도  많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나.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은 이런 규칙을 기본으로 이루어져 있거든. 뭐, 이해 못 해도 상관없어. 내가 토비오에게  서브 요령을 가르쳐주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오이카와는 걸치고 있던 저지 자락을 휘날리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정말 서브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은 채 근처 고등학교로 진학해버렸다. 고등학교에서도 배구부는 계속하고 있다는 소문이 봄바람을 타고  카게야마가 있는 곳까지 흘러들어왔다. 1학년 주제에 엄청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든가, 하지만 집이 출판계로 매우 유명한 집안이기 때문에 가업을  물려받아야 할 것이라는 소문, 이어 형이 있기 때문에 회사를 물려받지는 못할 것이라는 추측까지. 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뭐, 사실 카게야마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들이기도 했고. 다만 그의 집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후, 왜  그가 '이익' 운운하며 서브 가르쳐주기를 거부했는지는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게야마는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절대 배구를  생업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이렇게 확신하는 데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본인이 입버릇처럼 주워섬기기는 했지만, 그의  재능과 실력을 보면 직업으로 하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카게야마가 확신하는 것은 오이카와가 모든 것에 가지는 태도  때문이었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임하는 주제에, 언제든 발을 빼버릴 것 같은 초연함이 있었다. 공을 대할 때의 자세부터 그랬다. 연습 중이나  경기 중에는 여자친구보다 더 소중하게 만지면서도,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가장 먼저 바스켓에 공을 집어넣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오이카와였다.

 

“……여기까지는 웬일이야?”
“할 말이  있어서요.”

 

카게야마 중학교 3학년, 그러니까 오이카와가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급하던 때, 결국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하교길을 찾았다. 낯선 교복과 낯선 스포츠백이지만 틀림없는 오이카와였다. 답다고 해야 할지,  답지 않다고 해야 할지 오이카와는 혼자 하교하고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던 터라 어느 교정에나 피어있는 벚꽃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하필이면  바람이 강한 날이라, 두 사람 모두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휘날리고 있었다. 바람이 길거리에 흩어대는 작은 돌풍으로 꽃잎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던 오이카와가 결국 입을 열었다.

 

“설마 서브 가르쳐달라고 온 거야? 그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는 않아요. 저 배구부도 관뒀고.”
“엑? 열심히 했잖아?”
“그냥, 재미가  없어져서요.”

 

이유는 알지 못했다. 오이카와 때문이라고 해도 아주 틀린  기분은 아니었지만,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전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뿐이다. 모든 일에 쉽게 질리고, 딱딱하던 그때의  자신으로.

 

“아, 그래. 아쉽네.”

 

역시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투는 그때의 오이카와와 똑같다.  슬그머니 안심하는 자신을 느끼고, 카게야마는 쓴 침을 꿀꺽 삼켰다.

 

“오이카와 씨.”
“응?”
“서브가 아니면,  연애라도 가르쳐주세요.”
“…….”
“…….”
“저기 혹시, 오늘 만우절 아니지?”
“만우절에서 이 주일은  지났어요.”
“그, 그건 그렇지. 그러면……. 설마 말 그대로 연애를 교습해달란 말은 아니겠고.”
“네.”
“하아…….”

 

오이카와는 연극적으로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는 한숨을  쉰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웃고 있었다. 마치, 카게야마의 입에서 언젠간 이 말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는 듯이.

 

처음부터 이 감정이 연애감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그의 서브를 눈앞에서 봤을 때의 충격이 너무나 커서,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충격이 동경으로, 동경이 사랑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보다 조금 늦게 사춘기가 왔음을 깨닫고, 첫 몽정을 한 날 꿈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오이카와 토오루가 나왔다는 사실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금 기특할 정도로 자신은 그 사실을 빨리 깨달았다. 

 

그래서, 정말로 오이카와가 ‘서브가 아니면 연애라도  가르쳐달라’는 어린아이 떼 같은 억지를 수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

 

 

“사고사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서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 이번엔 교대로 핸들을 잡은  츠키시마가 말했다. 계장이 올 때까지 사와무라와 히나타가 현장에 대기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일단 서로 복귀하기로 한 것이다. 뒷좌석에 앉은  스가와라가 쯧, 하고 혀를 찬다. 

 

“자살이라기엔 유서도, 신변을 정리한 흔적도 없고,  타살이라기엔 주변에 동기가 없어도 너무 없네. 그렇다고 사고사로 종결지어버리면 후폭풍이 엄청날 것 같아.”
“이 정도의 유명인이니 어떤  결론이 나도 후폭풍은 크겠죠.”
“츠키시마, 유명인과 관련된 사건은 이게 처음이지?”
“네.”
“나는 관할서지만 도쿄에서  근무해본 경험도 있고, 경시청 수사에 협력한 경험도 있거든. 그중에 인지도로는 탑 쓰리 안에 드는 AV 배우가 죽은 사건이  있었어.”
“…….”
“물론 탑 쓰리고 뭐고, 다 필요 없는 거지만 말이야. 너희도 무슨 사건인지 대충 알 거야.”
“그녀를  스토킹하던 열성 팬이 저지른 그 사건 말씀이죠?”
“그래, 팬이라고는 지칭할 수 없는 잔혹함이지. 처음엔 그거 자살로 종결  예정이었거든.”
“네?”

 

조수석의 카게야마가 깜짝 놀라 뒤로 고개를 돌리다가,  안전벨트에 막혀 어정쩡한 각도로 멈춰 선다. 스가와라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태로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자살이 아니라는 정황 증거는 많았어. 열려있던 현관문,  부자연스러운 시기에 고장 난 폐쇄회로 카메라, 사라져버린 고양이, 그리고 이틀 후의 병원 예약까지. 상식적으로 자살할 사람이 이틀 후에 병원을  예약하지는 않잖아.”
“일반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도저히 결정적 증거가 없는 거야. 목을 매서 죽는 건 가장 일반적인 자살  방식이잖아. 목격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 인물 중에 동기가 있는 사람도 없었고. 언제까지고 계속 수사를 질질 끌 수는 없었지. 세간의  이목도 있으니까.”
“…….”
“아무래도 자살이 아니겠느냐는 담당 형사의 말에, 피해자의 부친이 경시청 안에서 자살 시도까지 했어.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서 살기는 했지만. 언론에 안 흘러나가게 처리하느라 위에서도 꽤 골치였을 거야. 결국, 그 담당 형사는 옷을 벗었고. 그  대책 때문에 다들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경시청으로 전화가 한 통 왔지.”
“혹시 그게.”
“응, 범인이었어. 자신이 고양이를 데리고  있다고 하더라고.”
“피해자가 키우던 고양이요?”
“확인해보니 같은 고양이가 맞았어. 진술에 따르면 고양이로 인질극을 벌였다고  하더라고. 지금 자기 눈앞에서 목을 매지 않으면 고양이를 천천히, 최대한 잔인하게 죽이겠다고.”
“…….”
“이미 거듭된 스토킹과  지명도 하락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녀는 우리가 익히 아는 선택을 해버렸던 거야. 하지만 범인이 데려가서 한 달 넘게 방치한 고양이도 결국  죽고 말았고.”
“정말 별 미친놈들이 많네요.”

 

조용히 듣고 있던 츠키시마가 씹어 뱉었다. 카게야마의 귀에는  분명 이 가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스가와라는 제 무릎을 검지 끝으로 톡톡 두드린다.

 

“여러모로 유명인과 관련된 사건은 힘들어. 이목도 많고,  위쪽에서도 최대한 잡음 없이 처리하려 하니까.”
“그러면…….”
“아무런 이상도 없으면 아마 곧 사고사나 자살로 발표가 나겠지. 내  생각은 그래.”

 

츠키시마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코너를 돌았다. 곧 현경  건물이 눈앞에 나타난다. 안전벨트를 풀면서, 카게야마는 당시 신문 기사 제목 몇 개를 떠올렸다. 용의자 자진 출두로 유명 AV 배우 교살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설마 저런 뒷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이 사건은 과연 어떤 제목을 달고 세상으로 나올까.  고독한 화가의 자살? 아무도 모르던 ‘석양’의 그림자? 단순한 사고사? 뭘 상상해도 저절로 씁쓸해지는 기분을 멈출 수는 없었다.


 






-


나 정말 형사물 좋아하는구나.... (새삼

결말까지 다 생각했던 건데(글 텐션이 엄청나게 높음) 벌써 쓰기 시작한지 1년이 된 글이라 뒷내용이 잘 기억이 안남....



카게오이 + 쿠니오이 + 기타 오이른

적향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