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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오이] 계절 잃은 크리스마스

 

 

언제나 좋은 소재 주시는 담님(♥)

 

중간의 카페 이름은 요즘 감명깊게 본 모 소설(애니)에서  빌려왔다.

약간 와카타케 나나미스럽게 써 보고 싶었다.

 

 

 


굳이 우산을 써야 할까, 싶을 정도로 가느다란 비가 온종일 창문을 적셨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천천히. 봄비는 겨우내 언 땅을 부드럽게 두드리는 귀한 손님이라는 말을, 미야기에 살 때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겨울이 내려앉았다가 녹은 나뭇가지 위에도, 허전하던 동네 놀이터의 미끄럼틀  위에도 빗방울이 맺혔다. 아이들이 쓰지 않는 동안 쌓인 먼지가 빗물에 녹아났다. 곧 제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주륵 미끄러지면서도 굳이 흔적을  남기고 마는 빗물을, 나는 싫어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이려나. 

 

봄비 특유의 가볍고 건조한 냄새는 묘한 기대를 품게 한다. 곧 이 비를  맞으며 분홍빛 벚꽃이 피어날 것이다. 캠퍼스 내에 짧게나마 마련된 벚나무길은 꽤 장관이었다. 벚꽃이 만개한 밤에는 학생들이 벚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꽃놀이를 즐기는 장면이 많이 보인다.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았을까. 벚꽃을 볼 기대감에 젖으면서도, 나는 한편으로 봄비가 영 반갑지  않았다. 이 무슨 모순. 자신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여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오늘 아침 우체통에 들어있던 빨간색 봉투. 내용물은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겨울이 끝나 버렸다. 봄의 시작은 곧 겨울의 끝과  맞닿아있다.

오이카와 토오루, 도쿄에서 맞는 두 번째 봄이었다.

 

 

-

 

 

“나는 봄비가 싫어.”
“어째서?”
“그야말로, 개강! 이라는 느낌이잖아? 싫다고, 그런  거.”
“떼쓰는  거야?”
“끔찍하다고 생각할  뿐이야.”
“그게 그거지, 뭐. 네 개강을  무마하려고 봄비가 안 올 수는 없는 거잖아.”

 

시원스럽게 웃으며 스가와라는 가방에서 꺼낸 삼단우산을 펼쳤다. 얼굴은 상냥한  주제에 말하는 건 쓸데없이 신랄하단 말이지, 괜히 마파두부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입속말로 투덜거리며 나는 백팩을 고쳐멘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은 장우산을 펼쳐 빗속으로 나아가니 곧 스가와라가 따라왔다. 여기서 이와쨩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간,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라고 일축했을  테지. 그러나 스가와라는 조금 달랐다. 은근히 실례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면이 있어. 음, 있어 있어.

 

“개강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응?”
“얼굴에 쓰여 있어. 봄비가 무지하게 싫은 다른 이유가  있다고.”
“헤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람 표정 읽는 것도, 꽤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아? 

 

“머리 세팅이 안 되거든. 날씨가 이렇게  습하면.”
“호오.”
“뭐, 그거 말고도 다른 이유는 있지만, 역시  비밀.”
“비밀이 많은  남자네.”

 

저렇게 상냥한 얼굴로 말하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비꼬는 것일지도 몰라. 가능성은 충분하지. 

 

봄비가 내려앉은 곳마다 냄새가 났다. 봄이 오는 냄새, 라고 표현하면 옆의  누군가는 웃겠지만. 살짝 콧등을 간질이고는 사라지는 그 냄새.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시멘트 가득한 도쿄의 봄비에서도  흙냄새는 난다. 어쩌면 흙이 아니라 그 아래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들의 냄새일지도 모르겠다. 봄이 오는 건 좋지만 역시 봄비는 반갑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비를 싫어하느냐, 또 그건 아니다. 

 

“스가쨩, 시간 있어?”
“응?”
“세이와 대학 최고 꽃미남 오이카와 씨랑 커피 한 잔  어때?”
“수작 부리지 마,  오이카와.”

 

아하하, 웃으면서 역시 냉철 같은 한 마디. 역시 카라스노의 실세는 주장이  아니라 이 녀석이었을지도 몰라. 철벽이라고 하자면 또 한 명이 떠오르는데, 이 역시 카라스노였지. 이름은 뭔지 모르지만 그 검은 머리 매니저.  둘이 묘하게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다-철벽 말고도 뭔가 있나?-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곧 머리를 흔들어 봄비 몇 방울과 함께 털어버렸다. 

 

“재밌는 얘기가 생각났어.”
“재밌는 얘기?”
“사실은, 오이카와 씨가 왜 봄비를 싫어하는지에 대한 얘기야. 궁금하지  않아?”

 

스가와라는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역시 별 관심 없으려나,  나는 그만 겸연쩍어져 콧잔등을 두어 번 긁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보는 그 시선에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해버린다. 이윽고 스가와라가  입을 열었다.

 

“재미없으면 어떻게 할 건데?”

 

……역시 강적이라니까.

 


-

 

 

‘파인애플샌드’라는 이름의 찻집은, 대체 누구 취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도쿄 한복판의 카페답지 않게 골동품 같은 것이 잔뜩 쌓여 있었다. 미야기에 있다면 조금 어울린다고 생각했을까. 얇게 선탠지를 씌운 창문 덕분에,  그리 강하지 않은 햇빛마저 조금 더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앤티크 가구점에서 볼법한 괘종시계가 벽 한 면에 떡하니 걸려있다. 정각에 맞춰 뻐꾸기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어느 나라 전통의상인지 모를 옷을 입은 도자기 인형 몇 개가 카운터 위에 나란히 놓여있다. 단순히 가장  가까워서 들어온 곳인데 묘하게도 취향에 맞는다고 할까, 다음에도 또 오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모네이드 하나랑, 아메리카노 아이스 하나요.”

 

비를 잔뜩 머금은 우산 두 개는 우산꽂이에 넣고, 주위를 잠깐 둘러보다  착석한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문을 끝마친다. 창가를 등지고 앉은 스가와라의 얼굴에 옅게 역광이 서렸다. 여느 때보다도 선명해 보이는 눈물점에 잠깐  시선을 두고는 곧 거뒀다. 왼손으로는 턱을 괴고, 오른손 손가락으로는 따닥따닥, 테이블을 두드린다. 그 규칙적인 박자가 마치 봄비 내리는 소리와  닮았다고 생각한 나는 스가와라의 뒤쪽을 본다. 아까까지는 가랑비였는데, 굵어지기 시작했는지 창문에 사선이 쉴 틈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봄비가 왜 싫은데?”
“스가쨩, 집에서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기념해?”
“에? 크리스마스? 으음, 왜 갑자기 계절이 확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별것 없어. 케이크랑, 스파클링 와인 정도. 교회를 다니는 집이 아니어서 그런가.”
“지금 그걸 ‘별것 없다’고 표현하면 우리 집은 그야말로 삭막하려나.  케이크도, 와인도 없어. 그냥 공휴일이랑 똑같아.”
“헤에. 합리적이네.”
“물론 타케루가 어릴 때는, 그 애를 위해서 어느 정도 장식을 하기는 했지만  말이야.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건 형도, 나도, 물론 타케루도 받아본 적이 없어.”
“그건 어떤 의미로 대단한데.”
“유치원 같은 데서야 물론 챙기니까, 그런 데서 받아온 선물은 있지만 역시  집에선 아무런 이벤트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각각 파란색, 빨간색 컵 받침 위에 레모네이드와  아메리카노가 얹힌다. 아직 찬 음료를 마시기에는 살짝 이른 시기인지도 모르지만, 뜨거운 음료를 마실 기분은 안 들었다. 갈색 수면에 반투명한  각얼음들이 서로를 밀쳐대며 떠올라있다. 미리 꽂혀있던 빨대는 빼고, 나는 유리잔을 들었다. 손에 갑작스러운 한기가 스민다. 

 

“당연히 크리스마스카드 같은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 어차피 곧 연하장을  쓸 시기잖아? 쓸데없는 시간 낭비 같기도 했고.”
“너는 안 그렇게 생겨서 은근히 귀찮음을 많이  타니까.”
“아하하.”

 

은근슬쩍 독설 같은 걸 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하자.

 

“언제부턴가 익명의 크리스마스카드가 오기  시작했어.”
“오기 ‘시작했다’고? 크리스마스는  1년에 한 번뿐이잖아?”
“그러니까 말 그대로,  오기 시작했어. 그것도, 2월에.”
“잠깐,  잠깐. 짚고 넘어가자. 그게 몇 년 된 얘긴데?”
“중학교 3학년 때부터야. 따지자면 5년  전부터네.”
“그렇다는  건…….”
“오늘 아침에도 있었어.  짜잔.”

 

나는 백팩 앞쪽에서 빨간 봉투를 꺼냈다. 역시 발신인은 익명이다. 내 주소도  안 적혀있는데,  우체국 소인은 찍혀 있다. 그리고 봉투 겉면에 흰색 글씨로 선명한 ‘Merry Christmas’. 스가와라는 잠자코 손을  내밀어 내게서 봉투를 받아간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봉인, 안 뜯었네?”
“다섯 번째 보는 카드잖아. 내용은 안 봐도  뻔하지.”
“뭐라고  적혀있는데?”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이어’. 달랑 그거야. 그것도 인쇄체로. 아니 애초에 크리스마스는커녕, 한 해가 시작된 지도 한 달이 지났단  말이지.”
“학창시절 때도 집 주소로  배달됐어?”
“그땐 조금 달랐어. 분명 맨  처음엔 방과 후 신발장이었지. 집으로 올 때도 있었고.”
“단순한 장난은 아닌 것 같은데.”
“이젠, 여기보다 시간이 두 달 늦게 흐르는 곳에 사는 누군가가 보낸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니까.”
“그것참 현실성  없고 재미있는 발상이네.”
“칭찬으로  들을게.”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시선으로 나를 흘긋 쳐다본 스가와라는 다시 봉투로  눈을 돌렸다. 그 앞에 놓인 레모네이드는 얼음이 녹는 바람에 오히려 양이 더 는 것 같다. 물론 스가와라는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저러면  나중에 맛없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정작 본인에겐 없는 것 같지만.

 

“그건 그렇고, 설마 도쿄에까지 보낼 줄은 몰랐어. 정확히 표현하자면 잊고  있었거든.”
“대단한 열정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서, 내가 왜 봄비를 싫어하는지  이제 알겠지?”
“늦은 크리스마스하고 봄비하고  무슨 상관이야?”

 

스가와라는 봉투를 내려놓고,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내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나는 봉투를 집어 들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매번 나는 이 카드를, 봄비가 오는 날 받는단  말이야.”

 

 

-

 

 

맨 처음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전날 밤부터 비가 내려, 운동장 흙이 잔뜩  질퍽거렸으니까. 이와쨩 신발에 흙을 묻히는 장난을 치다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억도 난다. 우산을 들고 온 보람도 없이 봄비에 흠뻑 젖은  채 등교했다. 신발장에 신발을 넣어 놓고 각자 교실로 흩어져, 그대로 방과 후가 되었다. 신나게 뛰쳐나와 신발로 갈아 신으려고 신발장을 연 순간  나는 멈칫했다. 

 

“왜 그래?”
“이와쨩, 오늘이 크리스마스던가?”
“하아? 무슨 헛소리야?”
“그치만, 이것 봐.”

 

신발 위에는 빨간색 봉투가 놓여 있었다. 보통 연애편지는 분홍색 봉투가  일반적인데, 빨간색이라니. 조금 이례적인 방법인가 의아해했던 나는 더 큰 의아함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늦어도 한참 늦은 크리스마스카드가 내  손으로부터 이와쨩의 손으로 옮겨간다. 

 

“진짜 크리스마스카드네?”
“그치?”
“보낸 사람도 없잖아.”
“인기쟁이 오이카와 씨라서 연애편지에는 익숙하지만  말야!”

 

나를 잠깐 보던 이와쨩은-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 표정으로 ‘작작  해라.’라고 말하고 있었다- 봉투를 내게 돌려주었다. 나는 선 채로 봉투를 뜯어 카드를 꺼냈다. 흰 종이에 검고 두꺼운 펜으로, ‘Merry  Cristmas’가 쓰여 있다. 분명 그리 잘 쓴 글씨는 아니다. 게다가.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철자 하나가 빠졌네. h가 없잖아.”
“그러게. 하급생인가?”
“뭐가 어찌 됐든, 2월 중순에 크리스마스카드라니 제대로 된 건 아닌 것  같다.”
“날 주려고 썼다가 시기를 놓쳐서 지금  준 걸까?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앤가봐.”

 

이와쨩은 무언가 잠깐 생각하다가, 곧, 그럴지도 모르지, 라고 말하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황급히 카드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신발로 갈아 신은 다음 이와쨩의 뒷모습을 좇아 뛰어간다. 집에 와서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누가 보냈는지 힌트가 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누군가의 돌발적인 장난이었으려니, 하고 기억 속으로 묻어 넘겼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지. 설마  내가 이런 카드를 5년 연속으로 받게 될 거라고는.

 

 

-

 

 

“잠깐만.”
“응?”
“그러면 작년은?”
“작년이라니?”
“그러니까, 네가 상경한 첫해 말이야.”
“아하, 역시 예리한 스가쨩. 그때는 미야기 집 주소로  받았어.”
“그럼 올해 처음 도쿄 주소로  받았다는 소리지?”
“응. 내가 도쿄로 올라온  건 작년 3월이니까.”
“그전까지는 미야기에  있었다는 걸 알았다는 뜻인가.”
“아마도.”

 

스가와라는 처음으로 레모네이드를 입에 대더니, 살짝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게 빨리 마셨어야지. 내 잔이 반 이상 줄어들 동안 한 모금도 안 마셨으니, 그 맹맹한 레모네이드 맛이 스가와라의 입맛에 맞을 리가  없었다. 다 인과응보다.

 

“누구 짐작 가는 사람은 없어?”
“주소 불명, 발신인 불명, 필체 불명, 시기 불명이니 짐작이 갈 수가 없지  않아? 탐정놀이를 해보려 해도 단서가 너무 부족하다구.”
“일단 크리스마스카드라는 것부터 의미 불명이네. 벌써 2월  중순인데.”
“그렇지? 의도조차  모르겠어.”

 

나는 카드를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는다. 빨대를 입에 문 채 스가와라는  생각에 잠겨있다. 

 

“네가 늦게 발견했을 가능성은 없어?”
“스가쨩, 맨 첫 번째 얘기를 자세히 들었다면 그런 질문이  나올까?”
“아, 방과 후에 신발장에  들어있었다고 했지.”
“그렇답니다.”
“그럼 정말 2월 중순에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냈다는 거네. 네 얘기처럼 두  달이 늦게 흐르는 세계에서 보내왔을 가능성도 있겠다.”
“바로 아까 참 현실성 없는 발상이라고 지적하지  않았어?”
“하지만 얘기 자체가 너무 개연성이  없으니까 말이야.”
“조금 생각하는 척이라도 해  줘.”

 

습관처럼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스가와라는 레모네이드를 다 마셔버렸다. 말이  레모네이드지, 거의 맹물이나 다름없었으려나.

 

“한 잔 더 시켜도 되지?”
“상관없지만, 계산은 어느샌가 내 몫이야?”
“어라, 난 세이와 대학 최고 미남이 내주시는 건 줄  알았는데.”
“하여간, 한 마디도 안  져요.”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착실하게 메뉴판을 다시 펼쳐 들었다. 스가와라는 쭉  훑어보더니, 체리에이드를 주문했다. 역시 조금 추워지는 것 같기도 해서 나는 이번엔 따뜻한 라떼를 마시기로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밥집에 데려갈 걸 그랬다. 

 

“생각하는 척이라고 해도 말이야. 네가 말한 것처럼 단서가 너무  부족하잖아.”
“그럼 이건 어때? 내 추론을  듣고 적합성을 따져주는 거야. 사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지금 짐작 가는 사람은 한 명 있거든.”
“흠……. 아까 그렇게 단서가 부족하다고 할 땐 언제고. 어쨌든,  말해봐.”
“날짜는 각각 달라. 아무튼, 봄비가  오는 날이라는 것만 기억나고, 날짜에 일관성은 없어. 넣어두는 장소는 신발장, 집. 첫 번째는 신발장이었고 그 뒤로는 쭉  집이었어.”

 

내 말 중간에 두 번째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스가와라가 살짝 고개를 숙여  마스터에게 인사하고, 내 눈앞으로 라떼 잔을 내민다. 이번에는 기필코 얼음이 다 녹기 전에 마시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표정이다. 머그를  손으로 감싸 쥐니 아까와는 정반대의 온기가 퍼졌다.

 

“첫해 이후로는 학교로 직접 가져다주기 곤란한 신세였던 거겠지? 그러니까,  내가 졸업한 후에는 나와 학교가 달라진 사람이야. 적어도 키타이치에서 세이죠로 함께 진급한 동급생은 아니라는 거지. 아, 지금은 카드가 놓인  장소로만 추측하고 있는 거야.”
“계속해봐.”

 

나는 라떼를 한 모금 삼켰다. 따뜻한 우유의 부드러운 맛 뒤로 치고 올라오는  쓴맛. 

 

“내 고등학교 삼 년 동안은 쭉 미야기 집으로 카드가 왔어. 중학생 시절은  겹치면서 고등학생 시절은 겹치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그 사람이 무슨 사정이 있어서 도중에 유급을 했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닌  이상.”
“그건  그렇지.”
“그런 특수한 사정은 제쳐놓고, 가장  타당한 추론은, 나와 키타이치 1년이 겹쳤으나 그 이후로는 다른 학교로 진급해서 날 학교에서 만날 일이 없었던  사람.”
“잠깐…….”

 

 

뭔가 할 말이 있어보이는 스가와라를 한 손으로 막고, 나는  말을 잇는다.


“그리고 올해는 도쿄 자취방으로 카드가 왔다는 건, 이후 내 행방을 알고 집  주소마저 알 수 있을 정도로 나, 혹은 내 근처 인물과 커넥션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겠지.”
“…….”
“이것저것 종합해본 결과, 이 카드의 발신인은 내 중학교 후배 카게야마  토비오, 그리고 이번에 이걸 전해준 사람은 그 카게야마의 고등학교 선배인 스가와라 코우시라는 결론이 나왔어. 수신인 주소도, 발신인 주소도  없는데 우체국 소인이 찍혔던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주소가 쓰인 스티커를 붙였다 뗀 거야. 이 카드가 미야기에서 출발했을 때는 발신인 카게야마  토비오, 수신인 스가와라 코우시였을 거고.”
“……소인 생각을 못했네.”
“엥, 진짜야?”
“전부 술술 말해놓고 뭘 놀라? 맞아, 이번엔 내가 전달해준 거야. 카게야마  부탁으로.”
“뭔가 너무 순순히 인정하니까 맥이  빠지네.”

 

나도 모르게 앞으로 잔뜩 기울이고 있던 상체를 소파 등받이로 턱 기대버렸다.  솔직히 허점이 너무 많은 추론이라, 사실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스가와라가 부정하면, 그래 그럼 대체 누구지, 하고 넘겨버릴  심산이었는데.

 

“대체 왜?”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느새 스가와라는 체리에이드 마지막 모금을  마시고 있었고, 내 잔은 한 모금밖에 줄어들지 못했다. 깨끗이 비운 잔을 내려놓고 스가와라는 상큼하게도 웃었다.

 

“그건, 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올해 도쿄 자취방 주소로 카드를 보낸 게  결정타였어. 듣고 있어?”
「네.」
“묻고 싶은 건 꽤 많은데, 천천히 들어보기로 할까. 카드는 왜 보내기  시작한 거야?”
「……그 대화를  들었거든요.」
“그  대화라니?”
「이와이즈미 씨랑, 오이카와 씨가  탈의실에서 했던 대화.」
“저기, 그렇게 말해도  그거 조금 있으면 십 년은 되는 얘기잖아? 자세히 말해주지 않으면 난 몰라.”
「오이카와 씨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안 챙긴다는 그  대화요.」
“아. 내가 그런 얘기를 학교에서도  했던가.”
「마침 미술 시간에 크리스마스카드  만들기 수업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그걸, 준다는 발상까지는 좋다 이거야. 근데 왜 봄비가 오는  날이야?”
「네?」
“봄비가 오는 날 나한테 전달한 거잖아.”
「그랬나요.」
“하아?”
「처음엔 분명 12월 24일에 맞춰서 오이카와 씨의 신발장 안에 넣어  놓았어요.」
“……?”
「그런데 그, 하필 25일은 학교를 쉬고, 26일부터가 겨울방학이었던  거예요.」
“아.”
「저는 보충수업이 있었거든요. 영어랑, 수학이  낙제라서.」
“참  잘했어요.”
「아무튼, 그래서 28일에 오이카와  씨의 신발장을 열어보니 정말 카드가 그대로 있었어요. 이대로 둬봤자 언제 가져가실지도 모르고,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고. 그래서 그땐 그대로  회수했어요.」
“그런데?”
「3학기가 시작되고 영 아쉬웠거든요. 오이카와 씨 곧 졸업이시고, 저는  세이죠로 갈 생각은 없었고. 물론 배구야 계속하실 테지만.」
“그래서 뒤늦게나마 신발장에 넣어 두었다?”
「……네.」
“꽤나 귀여웠네, 토비오쨩.”
「감사합니다.」
“아니, 칭찬 아니야.”
「…….」
“그런데 고등학교 이후로도 쭉 보냈잖아.”
「아, 네. 처음엔 분명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항례 행사처럼  되어버려서.」
“그래서 시기도 안 맞는  크리스마스카드를 계속 보냈다고?”
「안 되는  거였나요?」
“안 될 거야 없지만, 계속  익명으로 보낼 필요는 없었잖아!”
「제 이름을  적어 보냈어도 오이카와 씨, 별로 안 좋아하셨을 거잖아요.」
“그거야 물론, 그렇지만.”
「그러니까요.」
“으, 뭔가 열 받아. 나름 소중한  추억이었는데.”
「……죄송합니다.」
“순순히 사과하지 마.”
「네.」
“나, 빨리 챙기는 건 좋아해도 늦게 챙기는 건 싫어해. 뒷북치는 것  같잖아.”
「…….」
“그리고 익명도 싫어. 협박장 같단 말이야.”
「그건 평소에 찔리는 게 있…….」
“좀 닥쳐줄래, 토비오?”
「네.」
“그리고 역시, 우체통보다는 직접 보는 게  좋아.”
「네.  ……네?」
“올해 12월 25일에는, 직접 들고  찾아올 것. 안 그러면 안 받아줄 거니까. 알아들어, 멍청이 토비오쨩? 그럼 나는 이만!”
「어, 저기, 오이카와 씨? 오이카와 씨? 여보세요?」

 

“……진짜 끊었잖아? 아니 그것보다.”

 

 

-

 

 

"근데 왜 하필 비가 오는 날에만 준 거야, 이  녀석은?"

 

 

-

 

 

"……내가 비 오는 날에만 카드를 넣어 놓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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