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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오이] 겨울과 너

키워드 리퀘로 쓴 단편.

사랑과 우정사이 / 러시안룰렛 / 동백 / 마지막 추억은 너와 함께 / 닿을듯 말 듯 / 공터

키워드 주신 리아님, 재쿠, 제시님, 유은님, 쌴삐님, 삿잉님 감사합니다♥

 

全國... 국 자 일본식 한자로 써야 하는데 깨져서 어쩔 수 없이 國으로 바꿨습니다ㅠㅠ

뭔가 굉장히 .. 개연성 없고... 짜맞춘 티가 풀풀 나지만.. 노력했습니다...ㅋㅋㅋㅋㅋ

 

 

 

 

입김마저 하얗게 얼어붙을 듯한 추위라고 투덜거리며 나는 목도리를 조금 더 단단히 둘러매었다. 목도리 한 장으로 메울 수 있는 추위는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보풀이 조금 일어난 목도리 때문에 목덜미가 근질거렸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 검지를 목도리 안쪽으로 집어넣어 긁적거린다. 장갑도 목도리도 사실 이래서 하고 싶지 않아. 춥다고 환기를 잘 시키지 않아 이산화탄소로 범벅된 교실도 싫다. 여러모로 겨울은 최악이다. 난방을 잘 해 주지 않는 체육관에서는 몸풀기도 어렵고. 실제로 크고 작은 부상이 가장 잦은 계절은 겨울이니까. 조금 과하게 긁었을까, 여린 살갗에 목도리의 섬유가 쓸렸다. 빨간 자국이 생겼을 것 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다.

 

방과 후, 의미 없는 대화들로 수런거리는 복도를 별생각 없이 나아간다. 오늘의 나는 컨디션이 조금 별로인 것 같다. 공식 대회도 끝났고, 이제 고교배구는 사실상 은퇴 상태다. 이 겨울이 끝을 고할 무렵에는 공식 은퇴가 되겠지. 결국, 전국 한 번 가보지 못하고 내 고교 시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도, 깨닫고 보면 나는 그때를 떠올려버린다. 길을 잘못 들었다던 누군가의 밉살스러운 목소리도. 뽀득,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창에 내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全國, 마지막 획을 그으려다 정신을 차리고 누가 볼세라 소매를 내어 투명한 글씨를 반투명한 풍경으로 덮어버렸다. 그 자리도 곧 희뿌연 김이 서렸지만, 누가 봐도 뭔가를 썼다가 지운 흔적은 역력하다. 바보 같아. 입술을 깨문 채 아무렇지 않게 교복 주머니에 손을 꽂는다.

 

고교 은퇴를 하기 전, 전국 대회에 한 번쯤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안일한 발상이었지만, 꼭 그만큼의 치기와 자신감으로 나는 다짐했다. 그리고 분명 그때도 내 옆에는 이와쨩이 있을 거라 믿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그 믿음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뭐 하냐, 복도에서 멍하니.”
“아, 이와쨩.”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이와쨩의 반 앞에 멈추어 서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딴생각을 하며 걸어도 절대 그의 반을 지나치는 일은 없다. 조금 신기하다.

 

“가자, 춥다.”

 

코를 훌쩍이며 앞서 걷는 그의 등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정말 놓고 갈 것처럼 휘적휘적 걷기에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따라올 거라는 걸 안다는 듯 망설임 없는 그 발걸음을, 이 뒷모습을 나는 옛날부터 꽤 좋아했다. 체육관 안 들러? 슬슬 짐 정리도 해야 하잖아. 응, 그치만 오늘은 추우니까 그냥 갈래. 그래라, 그럼.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가 복도를 걷는다. 흘러내리는 스포츠 백 끈을 어깨 위로 추어올리며 나는 그와 함께 학교를 나섰다. 신발장에서 나란히 신발을 꺼내고, 현관에서 그만 미끄러져 넘어질 뻔한 이와쨩을 보고 하염없이 웃다가 뒤통수를 한 대 맞고. 눈물이 찔끔 흐른 탓인지, 날이 추운 탓인지 나는 코를 훌쩍인다. 흘끗 쳐다본 그의 코끝도 빨갛다. 루돌프 같아, 라고 말하면 한 대 더 맞겠지.

 

어제까지 미야기에는 폭설이 내렸다. 그야말로 기록적인 눈이었다. 이틀간 휴교령이 떨어졌고, 집 앞에 내린 눈을 치우느라 타케루와 각각 빗자루를 하나씩 들고 사투를 벌였다. 설상가상, 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상황으로 그 다음 날,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예보까지 나왔기에 눈 치우는 걸 미룰 수 없었다. 얼어붙은 눈은 분명 살상 무기니까. 학교는 쉬었지만 몸은 쉴 수 없었다. 일기예보 누나는 상큼한 얼굴에 짐짓 걱정하는 표정을 띄우며 눈 소식을 알렸다. 따뜻한 코타츠에 발을 밀어 넣고, 때때로 몸 전체를 말아 넣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이와쨩도 바로 옆집이니 우리 집과 똑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 치우는 시간대가 미묘하게 맞지 않았는지, 아니면 눈 치우는 일에 동원되지 않은 건지 학교를 쉬는 동안 이와쨩은 만나지 못했다. 살짝 서운한 마음에 눈 더미를 그의 집 앞으로 잔뜩 밀어 놓았다가, 타케루의 눈빛 공격을 받고 찔끔하기도 했다. 결국, 눈 더미를 지정된 곳으로 도로 옮기며 입속말을 잔뜩 투덜거렸던가.

 

배구부 이야기, 어제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 이야기 같은 것을 시시콜콜 늘어놓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하굣길의 반 정도를 지나고 있었다. 길 한복판의 눈은 대부분 치워져 있었지만 나무 위에 쌓인 눈은 하얗게 얼어붙은 채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꺾인 가지들도 눈에 띄었다. 겨울 공기는 쓸데없이 햇빛 입자를 잔뜩 품은 채 잔설 위에 스며든다. 다소 건조하다 싶은 공기마저 눈에 반사된 햇빛 때문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여린 빛 조각들을 보며 까닭없는 애틋함을 느낀다. 열심히 반짝거림을 훑는 내 눈에, 이질적인 반짝임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아.”
“뭐야?”
“흰 동백.”

 

공터에 누군가가 심어놓은 동백나무들. 흰 눈에 가려 미처 보이지 않았던 흰 동백이 눈에 띄었다. 반질반질 윤이 흐르는 짙은 초록빛 사이에 흰 꽃잎이 숨어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나도 모르게 다가가는 발걸음을 그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이와쨩은 흰 동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여기 핀 건 나도 처음 보는데.”
“예쁘다기보다, 뭔가 가녀리네. 보통 동백이라고 하면, 흰 눈 아래 맺힌 새빨간 꽃잎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 말이야.”
“보통은 그렇지.”
“흰 동백은 눈 밑에 숨어있는 것 같아.”
“그래서 꽃말이 비밀스러운 사랑인지도.”
“……어?”
“……뭐.”
“이와쨩이 꽃말 같은 걸 알고 있어? 그것도 흰 동백?!”
“또 맞고 싶지.”

 

아니, 그치만 정말 의외인걸. 나는 굳이 놀란 표정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왜냐면 정말로 놀랐으니까. 이와쨩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지만 저건 분명 부끄러워하는 표정이다.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시선을 피하는 이 엇갈림은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흰 동백은커녕 붉은 동백의 꽃말도 모르는 사람인데. 그가 은근히 섬세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흰 동백의 꽃말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벌리고 있었던 입을, 그가 직접 손가락을 내어 턱을 밀어 올려 닫아 주었다.

 

“누구한테 써먹으려고 알아둔 거야? C반의 미스즈쨩?”
“죽는다. 그런 거 아니야. 식물도감 보고 안 거라고.”
“뭐어, 그렇다고 생각해줄게.”
“…….”

 

영 불만스러운 그 표정을 보면서 묘하게 이지러지는 마음. 알 도리가 없다. 그가 흰 동백의 꽃말을 안다고 해서? 아니, 아마 며칠 전 옆 반의 어떤 여자아이로부터 그가 고백을 받았다고 해서. 이것이 정답이라는 건 안다. 평정을 가장하여, 그래서 뭐라고 대답할 거야? 라고 물었을 때 그는 시원스러운 대답을 내지 않았다. 장난으로라도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한 번쯤 여자 친구를 사귀어보는 건 어떠냐고 말하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말은 입 밖으로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그 후로 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아마 거절한 것 같다고 추측할 뿐이다. 나는 굳이 그에게 확인하지 않았고, 그도 굳이 나에게 확인시켜주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몇 번씩 빨간 꽃이 피었다 졌다. 그러는 동안 이틀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 여자아이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나는, 그를.

 

몇 번씩 되뇌면서도 그 뒷말은 차마 잇지 못했다. 마치 全國, 다음에 당연히 나와야 하는 進出을 끝내 쓰지 못했던 것처럼. 그 뒤를 이어버리면 그를 향하는 내 마음을 단편적인 것으로 한정 지어버릴 것 같아서, 굳이 그다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근 이십 년을 지내온 소꿉친구이자 베스트 파트너 정도면 충분했다. 그래서 항상 반투명한 관계를 불투명한 말로 닦아내 버리곤 했다. 저질러버리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마음 끝까지 욱여넣어 끄트머리조차 보여주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 나는 이와쨩을, 되도록 오래, 할 수 있다면 죽을 때까지 웃는 얼굴로 보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닿을 듯 닿지 않는 마음의 끄트머리를 눈 속에 파묻고는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눈이 녹고 내가 이와쨩과 떨어지게 되면 이 마음도 자연히 녹아 사라지리라 생각했으니. 그럼에도 지독한 욕심쟁이인 나라서, 우정이라는 기막힌 가면을 쓰고도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을 유예하는 나날이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불긋하게 물든 내 손끝이 흰 꽃봉오리를 툭툭 건드렸다. 공터는 귀울림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나는 잠시 내가 혼자 이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역시 그렇지는 않았다. 흰 동백의 꽃말을 아는 이와쨩, 그리고 흰 동백이 되어 그의 앞에 서 있는 나. 어쩜 꽃말조차 더럽게 정확히 맞아떨어지는지. 감추려고 감춘 건 아니야. 그저, 조금 더 적절한 관계가 이미 있으니까. 새어나오는 마음을 억지로 붙잡아 가둔 채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아이의 이름을 괜히 꺼냈다고 후회하면서, 무연히 꽃봉오리를 건드리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 실제로 둘 다 입을 다문 건 일 분도 되지 않을 텐데. 시간마저 얼어붙은 듯한 착각은 분명 자책에서 비롯되었다.

 

“가자.”
“이와쨩.”
“응?”
“……집, 놀러 가도 돼?”
“상관없지만, 뭐 하려고?”
“저번에 보다만 만화책도 있고.”
“그래라.”

 

언제나 이렇게 시원스러운 대답이 떨어질 걸 알면서도, 지레 주뼛거리는 내가 있다. 그는 먼저 발걸음을 떼다가,

 

“아, 역시 다음에.”
“뭐?”

 

내 덧붙임에 도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문득 내 표정이 궁금해진다. 웃고 있을까? 여느 때처럼?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그의 집에서 웃고 떠들며 놀 수는 없을 것 같았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내 머리 위의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갔나. 정수리에 차가운 눈이 후두둑 떨어진 듯한 감각에 언뜻 웃음이 난다. 사실 내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알고 있다.

 

“너 오늘 이상하다.”
“응?”
“그냥, 뭔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에 저절로 쓴웃음을 깨물며, 역시 이와쨩은 못 속이는구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오늘의 나는 이상하다. 아까부터 그랬다. 이왕 이상한 김에 더 이상해지기로 했다.

 

“이와쨩, 러시안룰렛이라는 거 알아?”
“엉?”
“느와르 물에서 종종 보이는 건데. 탄창에 총알을 하나만 장전하고 돌아가면서 한 발씩 쏘는 거야. 언제 실탄이 발사될지는 아무도 몰라. 방아쇠를 당겨봐야 아는 거지.”
“…….”
“이와쨩은 모르겠지만, 나 사실 이제껏 방아쇠를 당겨왔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
“방금 미스즈쨩의 이름도 방아쇠였거든.”

 

말하면 안 돼, 말하지 말라고. 속으로는 미친 듯 외치는데 빌어먹을 입은 멈추지 않는다. 마치 현기증과도 비슷한 감각. 몇 년째 방아쇠를 당기던 내 총에서 마침내 실탄이 발사된 걸까. 어쩌면 그의 입에서 흰 동백의 꽃말이 나온 순간인지도 모른다. 수없이 딸깍, 딸깍 소리만 나던 총은 그가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발사되었다. 비밀스러운 사랑이라니, 내가 더 이상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겨우내 쌓인 눈과 잎 사이에 숨어있던 꽃잎, 그리고 사랑과 우정 사이에 숨어있던 나.

 

“그래서, 누가 죽었냐.”
“응?”
“네가 방아쇠를 당겨서, 누군가가 죽었냐고 묻잖아.”
“……우리가 함께했던 날들?”

 

하아, 하고 그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허공에 희뿌연 숨이 흩어졌다. 나는 어쩔 줄 모른 채 그저 서 있다. 그가 바라던 대답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 수 있다.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을 때의 반응이니까. 마치 무언가를 잘못해서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손이라도 맞잡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네 옆에 내가 없었던 적이 있어?”
“어…….”
“대답해, 망할카와.”
“없, 없는 것 같아요.”
“네가 어떤 바보 같은 짓을 해도,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해도, 그 뭔지 모를 방아쇠를 당겨도 내가 없었던 적이 있냐고.”
“없습니다.”
“그럼 됐잖아.”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아이스크림 사서 가자. 집에 부모님 안 계셔.”
“기분, 안 나빠?”

 

답답한 소리 하네, 하고 그는 표정으로 말했다.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어서, 나는 그만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어쩌면 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울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날카롭게 뺨을 엔다. 갈 곳 없이 떠돌던 마음이 목구멍 너머로 쏟아져 나오려다가, 채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도로 안쪽으로 흘렀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아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옆에 있었다. 서로가 옆에 없는 시간이 없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이런 걸로 기분 나쁠 정도면 네 옆에 이제까지 어떻게 있었겠냐.”
“…….”
“미야기에서의 마지막 겨울이잖아.”
“방학 때마다 내려올 건데…….”
“…….”
“무, 물론 따지자면 마지막 겨울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있어. 후회할 짓은 하지 말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내 손을 잡아오는 그의 손에, 무심코 모든 것을 기대고 싶어진다. 언제나 지나치게 멋있는 게 탈이라니까. 나는 말없이 그의 손을 꼭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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