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카게오이] 비와 캔맥주

 

 

*어제 언어의 정원을 보고.

*비오는 날 신주쿠교엔에서 캔맥주 마시는 카게오이가 보고싶어서...

*굉장히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뭔가 어색하다

 

 

 

공원 입구가 보이자마자, 정수리에 선뜻함이 방울졌다. 오늘 날씨는 청명하다던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잿빛 구름 웅덩이가 잔뜩 있고, 군데군데 여린 파랑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우비, 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혼잣말 같은 건 하는 성격이 아니라 자신도 조금 놀라긴 했지만, 애초에 이런 도심 속 근린공원으로  들어온 것부터가 성격과는 반대되는 행동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오프 때마다 이용하는 시립 체육관, 그리고 전철에서 내려 체육관까지 걷는 십  분 정도의 거리 사이에 이 공원이 있다. 딱히 컨디션이 안 좋아서 땡땡이를 치고 싶다거나 어디가 아파서 도저히 연습을 못 할 정도도 아닌데  카게야마의 발걸음은 저절로 이쪽을 향했다. 알코올 반입 금지, 스포츠 용구 사용 금지. 그런 자잘한 안내 사항이 적힌 표지판을 지나쳐 요금을  계산하고-마치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가는 기분에 휩싸였다- 카게야마는 드디어 공원 안으로 발을 디딘다.

 

그 순간 누군가가 슥 지워버린 것처럼, 도심의 생활음이 자취를 감추었다. 물 흐르는 소리, 나뭇잎끼리 서로 몸을 부딪는  소리에 그저 묻히고 만 것이겠지만 꽤 신기한 경험이다. 체육관에서 울리는 서로의 구호나 공 튀기는 소리가 시끄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소리도 이쪽에 오면 그렇게 묻히고 말까. 자동차의 경적,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까지 끌어안아 버리는 이 여린 소리들. 할 수만 있다면  체육관의 한 귀퉁이로 가져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 두 방울 내린다 생각했던 여우비가 상당히 기세 좋게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앞머리 끝에 빗방울이 맺혔다가, 뚝 떨어져 발치의 흙을 적셨다. 잿빛 후드티에는 검정에 가까운 얼룩이 지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맞으면 곤란한 정도는 아니어서 카게야마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그가 발을 뗄 때마다 습기를 머금은 흙이 부드럽게 솟아올랐다가 천천히  제자리로 가라앉는다. 사부작거리는 흙 소리가 걸음마다 따라붙었다. 직선을 그리며 흐르는 물은 돌을 만나 급격한 곡선을 만들고, 그때마다 소리도  커졌다. 물 위에 내리는 빗소리와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상당히 다르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조금 걷다가 카게야마는 멈추어 섰다.  이 많은 물은 다 어디로 갈까. 거품을 일으키며 작은 낙차를 이루는 물을 가만히 바라본다. 멈추어있는 물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은 비치지 않았다.  차라리 그편이 나은지도 모른다. 분명 앞머리는 다 젖어서 이마에 달라붙어 있고, 후드티는 볼썽사나울 테니. 저도 모르게 살짝 무릎을 굽혀 물을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젖기 시작한 흙에서 축축한 냄새가 났다. 나뭇잎 위에 맺힌 빗방울은 마치  투명한 소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나마 열려 있는 하늘 덕분에 빗방울들은 저마다 파란 하늘과 햇빛을 머금는다. 어지럽다. 산란하는 햇빛은  그리 강하지 않은데도, 마치 체육관의 조명을 정통으로 바라보았을 때처럼 현기증을 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보다, 비가 눈 안에 들어가  따가움을 느꼈다. 카게야마는 눈을 질끈 감고 오른쪽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그 순간 아주 조금 빗소리가 커진 것 같았지만, 눈을 떴을 땐  아무렇지도 않아서.

 

정확히 어느 시대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일본식 정원인 것 같았다. 역사  교과서의 한 귀퉁이에서 만난 적이 있을까. 익숙한 구조의 건축. 무지개 모양 다리를 건너니 수면에 머리채를 드리운 버드나무가 자신을 비스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디선가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새는 어디서 울고 있는 걸까. 나뭇잎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까. 카게야마는 묵묵히 걸었다. 대리석 위에 맺혀있던 물이 운동화 끝에 찰박거린다. 어느새 하늘이 만든 그늘은 조금  더 짙어져 있었다. 이제 어깨 부분의 후드티는 완벽히 젖었다. 어디서든 비를 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휘 둘러보았다. 공원에 없는 게 이상한  벤치. 지붕도 있어야 한다. 

 

벤치의 용도에 대해 잠깐 고민했다. 아니, 두말할 것도 없이 벤치는 사람이  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이 아닌 것은 앉지 못한다는 법 같은 건 없지만, 카게야마가 아는 한 벤치 사용의 우선순위는 분명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 벤치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이쪽으로 다가오지 말라고 분명한  경고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오늘의 두 번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카게야마는 벤치 쪽으로 걸었다. 다소 급한 발걸음을 자신도  느끼고 있다. 모형처럼 보이던 벤치가 실물에 가까운 크기로 보일 때쯤, 카게야마는 거의 뛰고 있었다. 여우비치고는 꽤 많이 내린다. 원래 잠깐  내리고 마는 것 아닌가. 아니면 정말 소나기인가.

 

L자 모양의 벤치에는 이미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그것도 긴 쪽에. 흠칫  놀라 그대로 몸을 돌릴까 잠깐 생각했지만, 그쪽도 이미 자신의 인기척을 알아챈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카게야마는 결국 벤치의  지붕 안으로 몸을 들이고 말았다. 겍, 하는 이상한 소리는 이미 벤치에 앉아있던 쪽 입에서 흘러나왔다. 카게야마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소리도  나오지 않을 만큼 놀란 상태였으므로.

 

“토비오?”
“어…….”
“왜 여기 있는 거야?”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인 듯, 한껏 미간을 찌푸리며 오이카와는 왼손에 들고  있던 캔을 내려놓는다. 익숙한 상표의 캔 맥주다. 

 

“그, 그거.”
“뭐?”
“여기 알코올 반입 금지잖아요?”
“모범생 같은 소리 하네. 비 오는 날 누가 여길 온다고 그래. 아,  토비오쨩 같은 얼간이 빼고. 그리고 나 술 잘 마시거든.”

 

그런 건 상관없는 것 같은데요, 것보다 당신도 비 오는 날 여기 와  있잖아요. 이 말은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 오프도 아깝다는 토비오쨩이 여긴  웬일이야?”
“……어쩌다  보니.”
“헤에.  별일이네.”

 

오이카와는 다시 캔을 들어 몇 모금 맥주를 마셨다. 지붕 위에 맺힌 빗방울이  귀퉁이를 따라 또 다른 빗줄기를 만들어낸다. 네 개의 작은 웅덩이가 벤치를 둘러쌌다. 

 

“뭐해? 앉아.”
“아, 네.”
“앉으라는 말 없이는 못 앉는 선후배 사이도  아니잖아.”
“…….”
“멀대같이 서 있지 말고 앉으라니까. 불편해서 맥주도 못  마시겠어.”

 

살짝 짜증이 담긴 마지막 말에 카게야마는 얼른 자리에 앉고 말았다. 물론  오이카와가 앉은 쪽이 아니라, 짧은 쪽이었지만. 무연히 앉아있으려니 빗소리는 더욱 커지기만 한다. 어쩌면 벤치가 자기를 거부한다고 느낀 게 이  사람 때문이었을까. 이 사람이 앉아있다는 걸 나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만히 차오르는 숨소리가 새어나올까, 카게야마는 일부러 주먹을 꼭 쥐었다. 아까 모든 걸 끌어안아 주던 빗소리는 왜 자신의 기척은  숨겨주지 않는 것인지, 야속했다. 오이카와는 콧노래라도 부를 것처럼 즐거운 얼굴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단정한 옆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다. 아니, 네트를 사이에 두고 언젠가는 보았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때는 배구 경기 도중이었으니 그 얼굴 같은 걸 천천히 볼 틈은 없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자꾸 흘끔거리지 말고.”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했다. 하긴 이렇게나  쳐다봤는데 눈치 못 채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기는 하다. 꼭 말아 쥔 주먹 안쪽에 땀이 맺혔다. 비가 오는 바람에 여름치고는 제법 서늘한 바람  한 조각이 벤치로 날아든다. 오이카와의 옆에는 제대로 장우산이 놓여 있다. 뜬금없이, 이 사람과 나는 다른 일기 예보를 본 걸까, 하는 생각이  카게야마의 뇌리에 스쳤다.

 

“오……오이카와 씨.”
“응.”
“배구……. 계속하고 계세요?”

 

맥주를 꿀꺽, 마시고는 하아, 하고 한숨인지 탄성인지 모를 음절을 내뱉는다.  그의 속눈썹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자세하게 들여다보여 카게야마는 혼자 움찔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물을 게 배구 얘기뿐이야?”
“…….”
“그래도 뭐, 한결같아서 싫진 않네. 아, 칭찬 아니니까 기쁜 얼굴은 하지  마.”
“……오이카와 씨는 종종,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응. 그러라고 한  말이니까.”

 

점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폭도, 깊이도 알 수 없는 대화. 카게야마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빗소리는 점점 커지고, 하늘은 완벽한 잿빛이다. 그 잿빛을 그대로 받은 공원은 마치 물속에 통째로 잠긴 것처럼 고요하고,  그러면서도 수선하다. 소리는 동그랗게 퍼져 나간다. 잠잠한 물 위에 돌멩이를 떨어뜨리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다가 곧 자취를 감춘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파문이 일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오는 수면. 오이카와 토오루는, 적어도 이 벤치에 앉아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것과도 비슷한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그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찾는다. 캔을 비워냈는지 한 손으로 간단하게 구기고는 발치에  내려놓는다. 같은 상표의 다른 맥주 캔이 하나 더 놓여 있었다.

 

“물론 열심히 하고 있어. 오늘도 훈련  날인걸.”
“네? 근데  왜…….”
“땡땡이야. 비 오는 날은 컨디션 봐  가면서 적당히 땡땡이치고 있지.”
“하아…….”
“덕분에 쿠로쨩에게 잔뜩 잔소리 듣지만, 뭐  상관없어.”
“네?  쿠로?”
“아, 토비오는 모르려나. 지금 같은  대학팀이거든. 네코마의 쿠로오 테츠로. 그렇게 안 생겨서 잔소리도 잘하고 좀 귀찮은 놈이야. 그렇지만 블로킹도 안정적이고, 토스를 올려주는  보람도 있어서 싫지 않아.”
“…….”
“네 배구는 어때?”
“전…….”

 

카게야마가 우물거리면서도 입을 열려는 찰나,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으로부터 천천히 하늘을 적신다. 

 

“어릴 땐 천둥이 싫었어.”
“네?”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지만, 정작 말하는 오이카와의 옆얼굴은 더없이  진지하다. 배구는 어떠냐고 질문하더니 답은 듣지도 않고 또 자기 얘기만 한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는 건 대강 알고 있었지만, 직접  일대일로 상대하려면 역시 피곤하다. 이와이즈미 씨는 잘도 상대하고 있었구나. 카게야마는 그 순간 진심으로 감탄했다.

 

“천둥은 대개 어둡고 비가 오는 날 치잖아? 왠지 모르게 천둥이 칠 땐 항상  혼자였어.”
“…….”
“부모님도 집에 없었고, 이와쨩도 하필이면 옆에 없고. 온 집의 불을 다  켜도 소리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벽장에 들어간다거나 이불을 뒤집어쓴다거나 아무튼 별짓을 다 했지.”
“…….”

 

멀리서 또 천둥이 쳤다.

 

“크면서 자연스럽게 희석되긴 했지만 그래도 천둥이 칠 때 혼자 있는 건 역시  별로라서.”
“네에…….”
“얄밉기만 한 토비오라도, 가끔은 쓸모가 있네.”

 

자 이건 답례야, 라고 말하며 오이카와는 옆에 놓인 편의점 봉투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내 카게야마에게 건넸다. 또 똑같은 상표의 또 다른 맥주. 아무래도 편의점의 맥주 코너 한 부분을 전부 골라온 모양이다. 카게야마는 그  캔을 얼결에 받아들고 말았다. 캔 표면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손가락 사이로 스몄다. 차가우면서도 침착한 감촉. 이 사람과 비 오는 날 공원에서,  그것도 알코올 반입이 금지된 곳에서, 함께 캔맥주를 마실 거라고 고등학생 때까지의 자신은 상상이라도 했을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따라 맥주의  풀탭을 땄다.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축축한 비 냄새와 섞인 맥주 냄새는 굉장히 낯설다. 

 

뭔가가 쑥 내밀어 져 봤더니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캔이 눈앞에 있다. 영문을  몰라 눈빛으로 묻는 카게야마에게, 한숨을 섞어 오이카와는 건배, 하고 말하더니 멋대로 캔을 부딪고는 혼자 마시기 시작했다. 빗소리는 지척에서  들릴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가까워진 건 빗소리뿐만은 아닐 거라는, 뜬금없는 감상이 알코올과 함께 카게야마의 목구멍 안쪽으로 넘어갔다. 여전히  왜 마시는지는 모를 맛. 하지만 괜찮을지도,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한 모금만으로 취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근데 오이카와 씨, 역시 훈련 가보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좀 닥쳐줘,  토비오쨩.”



카게오이 + 쿠니오이 + 기타 오이른

적향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