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카게오이] 침식을 돌이켜줘 + 어린아이처럼 + 너를 삼켜내며

카게오이(←이와) '침식'3부작 (내멋대로)

*의불이라는 말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말인가보다..! (의욕불만  (의미불명

*카오 입덕 초반?에 썼던 것 같은데... 지금 읽어보니 이건 대체 아무말대잔치이다 그렇지만 카게야마 사이드는 다시 읽어봐도 꽤 맘에 드는 것 같다

* 오이카와 부상소재가 있습니다 주의




침식을 돌이켜줘 (Side. Oikawa)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물. 그 눈빛에 닿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침식, 침몰. 둘 중 어떤 단어를 써도  좋았다. 너에게 갉아 먹히든, 네 속으로 가라앉든 그것은 결국 매한가지였으니. 깨닫고 보니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우리는 맞닿아 있었다. 내  머리를 가장 안정적인 높이로 받치고 있는 너의 무릎도, 아무렇지 않게 내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는 너의 손가락도 모두 나를 산산조각내기 위한  것이다. 쨍그랑, 쨍그랑.


"아-, 오이카와 씨,  속수무책으로 깨지고 있잖아."


한숨을 깨물며 내뱉은  말에 너는 미간을 찌푸린다. 당최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다는 그 표정에 나는 또 웃었다. 차가운 북대서양 한복판에서는 케이트 윈슬렛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로맨스가 펼쳐지는데 우리는 그것보다도 차가운 침묵 안에서 조용히 흔들리고만 있다. 담담한 절망은 아마, 내가 널  사랑한다고 자각한 그날부터 나를 적시기 시작했나보다.


‘-좋아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까지 졸업한 후에, 어떤 이유로 프로는 포기하고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살던 내 앞에 돌연 네가 나타났다. 신예 선수로 한창 명성을 날리던 카게야마 토비오. 어느새 나와 비슷해진 키와 더 듬직해진 어깨에 나는,  기억 속의 너와 지금 내 앞의 너는 다른 사람이 아닐까 조그만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영 못 마주치던 눈빛을 내게 향한 그 순간. 그저 세월이  지났을 뿐, 너는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나를 좋아했다는 그 뻔한 수작질 같은 대사도. 그 와중에 중학생  때부터가 아니라니 이 얼마나 솔직한 사람이냐고 감탄하기까지 했다. 임팩트를 주려면 첫눈에 반했다는 대사가 가장 좋았겠지만, 이 꼬맹이는 정말로  고등학생 때부터 날 좋아했으니 고등학생 때부터라고 말한 것이다. 아주 살짝 기특한 마음도 들었다.


‘오, 오이카와 씨?!’


주인 마음도 모르는 눈시울은 울컥 눈물을 밀어 올렸다. 꾸역꾸역 치밀어 오는 쓴 울음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나는 까닭도 없이 울었다. 딱히 우는 얼굴을 보이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은 없다. 중학생 때는 더 흉하게 우는 얼굴도  보여줬으니. 하지만 울면서도 내가 왜 우는지 모르는 이 답답함은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까. 그것마저 알지 못한 채 나는 네 옷소매를 부여잡고  계속해서 눈물을 짜냈다. 끅, 끅. 마치 어미 새더러 자신을 봐달라고 하소연하는 새끼 새처럼 애절하게도 울었다. 너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도  못하고 가만히 굳어 있다가 나를 가만히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티슈를 건네던 네 작은 손이 세피아 색으로 과거를 훑는다. 아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 의해 자살을 포기한 케이트 윈슬렛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주뼛거리면서도 내 등을 쓸어내리는 손짓이 마치 화상처럼 뜨겁게 스몄다. 손은  커졌지만, 그 어린 동작은 그대로였다. 그 후로 약 일 년, 어정쩡한 동거 중이다.


레오나르도는 케이트를 죽게 놔뒀어야만 했다.


그리고 토비오, 너도 날 찾아오지 말았어야 해. 마음속으로만 속삭이며 나는 손을 들어 네  턱선을 훑는다. 간지러워요, 라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너의 시선은 여전히 텔레비전에 붙들려 있다. 케이트 윈슬렛이 좀 예쁘긴 하지. 객관적인  평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유치해지지 않기로 다짐했으면서도 케이트를 빤히 바라보는 네 눈빛에 살짝 질투가 난다. 말없이 두 손을 내어 네 머리를  꽉 잡자 이제야 시선을 맞춰온다. 요, 빌어먹을 꼬맹이.


“왜요, 배고파요? 뭐라도 시킬까요?”

“아니, 그런 건 됐어- 이 시간에 먹으면 살찐다, 토비오. 내일도 훈련  있잖아?”

“내일 오프라니까요. 그리고 저야 안 먹으면  되죠.”

“외로워서 싫어.”

“눈앞에서 지켜볼 건데도요?”

“그게 외롭다는 거야.”


나는 손을 내렸다. 네가 내 곁에 있을 때, 네가 날 만질 때, 네가 날 지켜볼 때 나는  텅 비어 버린다. 일 초, 아니 영 점 일 초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텅 비고 마는 나 자신을 알아차린다. 그 간극이 나를 슬프게 한다. 대체  나 자신이 뭘 바라는지도 잘 모르면서 나는 너를 내 곁에 묶어두고 있었다. 그 온기에 숨이 막혀 죽기 일보 직전이라는 걸 알고도, 네가 언제  내게서 등을 돌릴지 예측할 수도 없으면서. 그래서 바닥 없는 그릇처럼 자꾸 담으려고만 한다. 이미 내 안의 너는 차고 넘치는데, 더 담을 수도  없는데 너를 차곡차곡 밀어 넣으면서 나 자신에게 혀를 찬다. 자꾸만 내게 자신을 줘 버리는 네가 두렵다. 토비오, 정말 괜찮아? 이렇게나  줘버려도 괜찮은 거야? -아니, 난 괜찮지 않아. 조금만 더 줘. 조금만, 더. 이 무슨 악순환인지.


차라리 숨을 쉬지 않은 채 죽는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네 안에 잠긴 채 죽고 싶다고.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에 미친 나머지 나는 또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나는 욕심쟁이구나.”

“저도 만만치 않죠.”


얼른 영화가 끝나고 네가 나만을 봐 줬으면 하는 마음과, 영화가 끝난 후에 온전히 둘만  남는 시간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뒤섞였다. 거실은 불안한 빛으로 빠져든다. 그래, 오 년이 넘게 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사람을 찾아낸다는 건 보통  욕심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지. 그리고 그런 사람을 옆에 둔다는 것도 웬만한 욕심으로는 힘들다. 욕심과 이기심의 틈바구니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두 사람이 조금 가련하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다. 무슨 심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또 그 말을 올리고야  말았다.


“사랑해,  토비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물이 밀려  들어왔다. 차갑고 깊은 물이 나를 있는 힘껏 내리눌러, 나는 문득 숨쉬기가 힘들다.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굳어가는 손가락 끝을 네 입술에 대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지만 결국 하지 않는 너를 막는다. 나만이 사랑을 말할 수 있고, 너만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일  인분의 사랑이 완성된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안정을 기대하는 모순된 자신. 어디선가 쨍그랑, 하는 소리가 또  들려왔지만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네게는 웃는 것처럼 보였을까, 아니면 우는 것처럼 보였을까? 솔직히 자신할 수는  없다.



*


금이 가기 시작한 유리컵은 언젠가 깨지고, 비뚤어지기 시작한 직선은 어디까지나 비뚤어지기만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비뚤게 놓인 유리컵이었다. 내 손으로 나를 깨뜨리는 것은 무서워하면서, 누군가가 다가와 나를 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접 해를 가할 필요는 없다. 그저 툭, 하고 일상적인 손짓 한 번으로 나를 벼랑 끝에서 밀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와이즈미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으므로 그는 리스트에서 빠져 있었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에게는 그저 고등학교  배구부 시절 그들의 세터로 남고 싶었으므로, 그들의 이름도 뺐다.

카게야마는 어땠느냐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애초에,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그저 얄미운 마음에  리스트에서 뺐던가. 설마 그가 제 발로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평생 볼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을지도. 나는 은근히 매정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랬는데 설마 그가 나를 찾아와서 고백 같은 걸 하다니.

‘안 일어나길래 먼저 나가요. 일어나서 아침 챙겨  먹어요. -토비오’

변함없는 악필에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온다. 아침이라니, 지금 벌써 열두 시 반이라고. 멍청이 토비오. 내가 깨지 않게 살금 침대를 빠져나가 샤워를 하고  운동복을 챙겨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언뜻 본 기억이 난다. 잘 다녀오라고 한마디 해줄까 싶었지만,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빠져나오기 전에 다시  잠이 들어 버렸다. 어제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놓고 아침 인사까지 안 해주다니. 제아무리 오이카와 씨라도 살짝 미안해졌다. 그러니까 왜 하필  타이타닉 같은 영화를 보고 있었느냔 말이다. 내가 매일 자신에게 잠겨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실 아는 게 더 이상하기는  하지만.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없던 토비오는, 나와 함께  살면서 제법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줄 알게 되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했다. 침대 시트 빨래라든가, 설거지라든가,  걸레질이라든가. 저번 주말 그가 빨아서 널었다가 고이 개어 넣어둔 이불에서 옅게나마 햇빛 냄새가 났다. 더더욱 빠져나오기 싫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심호흡한다.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가습기에서 약한 소리가 났다. 건조하면 감기에 잘 걸리니까, 몸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  토비오에게는 가습이 매우 중요하다. 동거 첫날 어딘가에 처박혀있던 먼지투성이 가습기를 꺼내오는 나를 보고 토비오는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맨션을 나오자마자 내 곧장 위로 쏟아지는  햇빛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토비오가 오늘 오프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오프다. 문득 언젠가, 일주일에 한 번의  오프도 아깝다고 말하던 그가 생각나 나는 웃고야 말았다. 그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혼자서 집 근처의 작은 동네 체육관을 빌려 연습하고는  하니까. 집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내 것이 아닌 토비오의 셔츠를 걸쳤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리 불편한 정도는 아니라서 그냥 넘겼다.

“오이카와 씨?”

물통을 들고 꿀꺽꿀꺽 물을 마시던 그의 시선이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에 나를 향했다.  뒤에서 확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아쉽게 됐다. 손 그늘을 만들어 그를 올려다본다. 여기까지 나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지 어지간히도 놀란 눈이다.

“토스 연습  도와줄까?”
“……네?”

언제까지나 가라앉을 수만은 없잖아, 라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여름 햇빛을 받은 토비오의  머리카락은 새까맣게 빛나고, 나는 그 새까만 눈빛에 조금씩 젖어들고 있었다. 벼랑 끝에서 살짝 균형을 잡기 시작했다. 살짝  어지러웠다.

“오이카와 씨가 좋다면,  얼마든지요.”

환하게 웃는 얼굴에 사정없이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은 꽉 눌러 참은 채, 몇 년 만인지 모를 배구공을 잡았다. 적당한 탄력과 미지근한 가죽의 느낌. 오이카와 씨가 왕년에 배구 좀  했거든? 긴장하는 편이 좋을 거야- 나름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토비오가 전혀 웃지 않아 살짝 민망해졌다. 헛기침을 한번 하고 배구공을 완만하게  띄운다. 여름 햇빛의 파편이 날카롭게 눈을 찔러왔다. 이제야, 왜 토비오가 이불을 꼭 햇볕에 말리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안 피곤해요?”

피곤하다아, 하고 말하려던 순간 선수를 빼앗겨버려 울컥한 나머지 입을 다물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인적 없는 체육관에도 주황색 석양이 짙게 끼었다. 마지막 토스를 네트 너머로 넘기고, 너는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솔직하게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피곤해, 라고 짧게 내뱉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오이카와 씨, 배구는커녕 공 만진 것도  오랜만이잖아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보면 알죠.”
“……정말 시건방진 꼬맹이라니까.”

티가 안 날 리가 없다. 온종일 만지던 배구공을 몇 년 동안 건드리지도 않았으니 공 만지는  자세부터 까먹을 지경이다. 처음에는 자꾸 엇박자가 나서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몇 번, 몇십 번 맞춰가는 사이 서서히 박자가 맞기 시작했다.  스파이크 치고 싶다, 서브 넣고 싶어. 그런 생각은 정말 오랜만에 했는데, 네게 소리 내어 말할 기분까지는 들지 않았다.

이곳은 동네 체육관이라 샤워 시설도, 캐비넷도 변변치  않다. 집까지는 걸어서 십 분도 걸리지 않으니 차라리 집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더니 배도 조금 고픈  것 같았고, 너의 표정도 조금은 부드러워 보였다. 이대로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공을 정리하고 열쇠를 반납한 후 귀가하면 오늘 일정은 끝이다. 너는  묵묵히 공을 줍고, 네트를 걷는다. 그런 네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토비오쨩.”
“네?”
“지금 내 표정 어때보여?”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너는 고개를 갸웃하며 멈춰 선다. 내 어깨를 잡고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괜히 쌀쌀맞게 그 손을 탁 쳐내고 뒤돌았다. 망설이지 않고 땀이 옅게 밴 네 두 팔이 내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는다. 운동은 아까 끝났는데 갑자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남들이 보고 오해하면 어떡해, 하는 구차하고도 미약한 변명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박살이 났다. 네 단 한 마디에 의해서.

“……뭐, 죽고 싶어하는 얼굴로는 안 보이네요."

너는 나를 수심 4천 미터로 처박았다가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린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폐 안에 가득 찼다가 한꺼번에 빠져나간다. 나는 어쩌면 이런 대답을 바라고 네게 질문을 했는지도 모른다. 적잖이 안심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언제든 밀 것처럼 뒤에 서 있다가도 결국엔 붙잡고는 했다. 나는 네가 벼랑 아래로 밀어주기를 기대하며 내 뒤에 두고 있었던가? 이젠 더 알 수가  없다. 매일 너에게 잠겨 죽음을 생각하는 나를 네가 어떻게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대로 뒤돌아 너의 입술을 찾았다. 팔을 뒤로 둘러 네 머리카락을 마음껏 만졌다.  손가락을 타고 부슬 흘러내리는 너의 머리카락은 땀으로 젖어 있었지만 그리 개의치 않는다. 언젠간 네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와도 막지 않는  날이 올까? 내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아 오는 네 팔을 한 손으로 마음껏 어루만지며 나는 있는 힘껏 눈을 감았다. 다행히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가라앉는 것도 부서지는 것도, 네 안이라면  괜찮을지 몰라. 아니 어쩌면 네가 막아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어린아이처럼 (Side. Kageyama)


그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물소리가 들렸다.


졸졸 흐르는 경쾌한 소리가 아니다. 깊고 깊은 해저에 가라앉는다면 이런 소리를 들을까. 사방이 물로 가득 차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한 고요함이 그 눈빛 안에서 울렁거리고 있었다. 짙은 파란색이 천천히 일렁인다. 햇빛이 파고들 틈새조차 없는 견고함. 그런 주제에, 목소리는 여전히 변함없이 상냥하다.


내 앞길은 무언가 이상할 정도로 잘 풀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배구로 유명한 대학교 팀에 스카우트되고, 프로 배구팀에 일 순위 지명으로 들어갔다. 심심찮게 듣곤 했던 ‘초고교급 천재 세터’라는 별명은 어느새 ‘국가대표 유망주’로 바뀌어 있었다. 국가대표 라인업이 발표되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왜 이제야 그의 소식이 궁금해졌는지- 나는 안다. 그와 동등하게 서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나보다 앞서 국가대표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 사람이 명단에 없다. 프로배구팀 선수 명단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 사람이 배구를 포기했을 리가 없는데. 당황한 나머지 그가 소속했던 고등학교, 대학교에까지 문의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졸업생의 개인 신상은 외부인에게 알려줄 수 없다고.


외부인. 맞는 말이다. 나는 그의 세계에 외부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이유 하나만으로는 그가 내 배구 세계에 없다는 사실을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내 또 다른 선배이자 그 사람의 막역한 친구인 이와이즈미 씨를 찾아냈다. 그는 센다이 시의 문구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취미로 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떠오른 그의 표정은 뭐라 형용할 수 없었다. 오랜만이네, 라고 말했지만, 진짜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는 걸 나는 첫눈에 알아차렸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가던 동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아, 먼저 가 계세요. 금방 갈게요.’


동료들을 보내고 그는 나를 회사 옥상으로 데리고 갔다. 출입 금지 팻말이 문에 떡하니 걸려 있었지만, 다들 신경은 쓰지 않는 듯했다. 난간에 기대어 선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오이카와 때문이지? 라고 물었다. 처음부터 요점을 찔러주니 여차여차 설명할 필요도 없어 깔끔하고 좋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오 년이 넘었으니, 그가 담배를 피운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지금까지 진지하게 배구를 하고 있었다면 담배 같은 건 하지 않았겠지. 익숙하게 불을 붙이고 담배를 피우는 그의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이카와 녀석, 배구 관뒀어.’

‘……왜요?’


담배 연기와 함께 조각조각 갈라져 나오는 말. 대충 감은 잡고 있었다. 오이카와 씨는 배구를 관뒀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뒤졌는데도 찾아내지 못할 리 없으니까. 다만 그 이유는 궁금했다. 대체 오이카와 씨가 배구를 관둘만한 이유는 뭔지.


‘부상. 교통사고.’


흔한 얘기지, 라고 덧붙이며 그는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 비 오는 날 조카를 학교에 데려다 주다가, 무단횡단하는 사람을 피해 핸들을 꺾었다고 한다. 비 오는 날의 도로에 타이어가 미끄러져, 평소 같은 상태였다면 아마 가벼운 부상으로 끝났겠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일상생활은 가능하지만, 배구-특히 그의 포지션이 세터였던 것을 생각하면-같은 운동은 힘들 거라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하필이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명한 프로 배구팀과 연봉 협상을 하던 시점이었단다. 그 배구팀 이름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들었다. 지금 내 유니폼에 새겨진 그 글씨. 그 사고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 같은 팀에서 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와이즈미 씨는 꽁초를 빈 캔에 눌러 끄더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를 만나면.’


고개를 꾸벅 해 보이고 나가려는 내 뒤통수를, 이와이즈미 씨의 말이 잡아끌었다. 나는 멈춰 선다. 연락을 시도하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내 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말을 이었다.


‘-죽지 않을 만큼만 패 줄 테니까, 연락 좀 하라고 해.’


네. 짤막하게 대답하고 나는 옥상 문을 열었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이와이즈미 씨의 한숨 소리인지, 옥상에 부는 바람 소리인지는 채 알지 못한 채 나는 그의 회사를 뒤로했다.



*



나는 기어코 그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퇴근길, 만원 전철에서 내려 걸어가던 찰나 반대편 개찰구로 나가는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죄송합니다, 잠깐만요, 좀 지나갈게요.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급한 발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퇴근 시간이라 역사에는 사람이 잔뜩이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그는 걷고 있었다. 이제까지 비슷한 뒷모습을 그로 착각하고 잡아 돌렸다가 사과를 하고 보내준 적이 몇 번이었던가.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라기보다, 직감이었다. 이번이 아니라면 나는 이제 그를 찾는 노력을 그만둘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끝까지 그를 따라 걸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숨보다도 마음이 더 가빠오고 있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가 나를 모른 척하면 어떡하지? 당장 잡아 세웠을 때의 반응조차 예측할 수 없는데도 나는 그 뒤통수만을 따라 걷고 있었다.

조용한 거리에 번진 주황색 햇빛 사이로 그의 그림자가 번졌다. 혼잡한 역을 벗어나 마을 입구로 들어오자 마치 별세계처럼 고요해진다. 언제쯤 불러 세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멈춰서 뒤돌았다. 나는 분명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리라. 그의 표정은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토비오쨩, 나 따라온 거 맞지?”
“……네.”

익숙한 목소리. 나는 얼떨결에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풋 웃는다. 어딘가 힘 빠진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우연히.”
“우연? 악연이겠지, 십 년 전부터.”

깨닫고 보니 그와 처음 만난 게 십 년 전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때부터 악연이었던 건가? 하지만 그런 의문을 입에 담으면 무슨 소리가 튀어나올지 예측할 수 없어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녁은?”
“아직…… 네, 네?”
“아직 안 먹었으면 가자. 밥 좀 해줘.”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는 다시 뒤돌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태도에도 나는 착실히 그를 쫓아가고 있었다. 따라올 걸 백 퍼센트 확신이라도 하듯 선명한 발걸음이다. 하긴, 여기까지도 따라왔는데 더 못 갈 건 또 뭐람. 이미 내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멀어진 지 오래다. 나란히 서서 바라본 그의 키는 나와 비슷했다. 고등학교 이후로 그리 크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묵묵히 따라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내 둘이 나란히 걷는 모습은 조금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반듯하게 매여 있던 넥타이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의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가방과 재킷은 거실 소파 위에 집어 던지고, 넥타이는 장식장에 올려놓은 채 그는 부엌으로 향했다. 실, 실례합니다. 나는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중학생으로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어물쩍 그런 인사를 내뱉으며 나도 그를 따라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섰다. 오이카와 씨는 그새 부엌 테이블에 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밥 좀 해 줘, 토비오쨩.”
“……네?”
“밥해 달라고. 그러려고 데리고 온 건데.”
“여자친구, 없어요?”
“있으면 널 여기까지 데리고 왔겠어?”

명쾌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부엌으로 들어섰다. 냉장고를 열었는데-

“……오이카와 씨.”
“응?”
“뭐 먹고 살아요?”

냉장고에는 과일 맛 맥주 두어 캔과 생수, 그리고 크래커 따위만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도 빠릿빠릿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오이카와 씨의 냉장고 정도는 아니다. 대체 무슨 밥을 해달라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아 냉장고와 오이카와 씨를 번갈아 보고 있으니, 오이카와 씨는 덤덤한 얼굴로 찬장을 가리킨다. 그의 손짓을 따라 찬장을 여니 햇반과 레토르트 카레가 나왔다.

“토비오쨩, 카레 좋아하지?”
“네. 가 아니라, 어떻게 아셨어요? 것보다, 이런 것만 먹으면서 사는 거예요?”
“딱히 근육을 관리할 필요도 없고, 편하잖아.”
“…….”
“잠깐 토비오쨩, 왜 네 얼굴이 울상인 건데?”

나는 말없이 햇반과 카레 두 개를 꺼내, 그나마 있는 게 다행이다 싶은 전자레인지에 그것들을 데웠다. 딱히 반찬 같은 것도 없이, 그릇 두 개와 수저 두 벌만 덜렁 올라온 저녁상. 오이카와 씨는 아무 말 없이 꾸준히 접시를 비운다. 나도 오늘 훈련은 꽤 고되어서, 오이카와 씨를 신경 쓰면서도 한 그릇을 다 비워버리고 말았다.

오이카와 씨는, 알고 있다. 그가 어떤 경위로 배구를 그만뒀는지 내가 안다는 걸. 근육을 관리할 필요도 없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차려 줬으니 뒷정리는 내가 해야지. 간만에 손님인데 차라도 마실까- 오이카와 씨는 딱히 대답을 바라지는 않는 말투로 중얼거리더니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향한다. 찬장을 열고 뭔가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통수로 그런 것들을 느끼고 있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치밀어오르는 어떤 말을 결국 느끼고야 말았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것도.

“녹차 좋아해? 티백밖에 없지만-”
“……좋아해요.”
“할아버지 같기는. 아니면 커피도 있어. 말해 두겠는데 믹스야.”
“……녹차도, 커피도 아니에요. 오이카와 씨를 좋아한다고요.”

이 건방진 꼬맹이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라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비아냥이나 화난 목소리가 들려올까봐 잔뜩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조금씩 펴며 돌아본 곳에, 멍하니 선 오이카와 씨가 있었다. 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아는 순간 나는 튕겨 나오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울고 있는지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마치 중학생 때 베스트 세터 상을 받던 그 순간처럼, 숫제 엉엉 울고 있었다. 변함없이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대용 티슈를 건네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나는 그의 팔을 잡아 천천히 당겼다. 별 저항 없이 끌려오는 몸을 안고 등을 토닥인다. 나는 어른이고, 그는 중학생이었다. 이제까지는 그의 앞에 선 내가 중학생이었지만 지금은 그 반대다. 내 옷소매를 꽉 잡은 손이 못내 신경 쓰여 나는 그저 내 품 안에서 떨리는 그의 몸을 가만히 눌렀다.


*


고독해.

라는 말을 그는 달고 살았다.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꽤 실례가 되는 말이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들으라는 듯- 밥을 먹다가도,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키스하다가도 그런 말을 했다. -왜 그렇게 어려운 말을 써요, 굳이? 외롭다거나, 쓸쓸하다는 단어도 있잖아요. 그렇게 물어본 날, 그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런 단어들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정말 혼자 있는 것 같으니까.

혼자를 택한 건 오이카와 씨 자신이다. 이와이즈미 씨는 내내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같이 살고 일주일 정도 흘렀을까, 넌지시 이와이즈미 씨에 대해 운을 띄웠을 때 그는 단칼에 잘라 안 된다고 대답했다. 이와이즈미에게 연락하면 자신은 다시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거라고. 대체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그는 할 말은 끝냈다는 표정으로 텔레비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면 고독하다는 말을 하지를 말든지요. 내가 툭하니 내뱉은 말을 그는 주워담지 않았다. 가시를 품은 말은 줍지 않는다. 치사하지만 방어적인 그의 대화 방법이었다. 사람이 이렇게나 바뀌어도 괜찮은가, 싶었지만- 동거를 시작하고 내가 유니폼을 입고 온 날, 그 유니폼을 보던 그의 시선을 떠올리면 더 토를 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어쩌고 싶은지도 모른 채 그저 그의 옆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내가 같이 있으면 조금 나은 건가, 궁금해도 부정의 대답이 돌아올까 무서워 그에게는 끝내 묻지 못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에 대한 대답을 하려 하면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러 막고는 했다.

마치,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걸 무서워하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끝내 입을 다물고는 했다. 싱긋 웃는 그 미소는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무언가가 빠져있다. 심하게 결여되었다.

-왜, 또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봐 무서웠어?

처음 그의 집에서 잔 날 아침. 옆자리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살짝 걱정되어 이불을 박차고 나온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샤워실에서 머리를 털며 나왔다. 뭐야. 한숨을 쉬며 다시 침대에 걸터앉는 나를 보더니 그는 그렇게 말했다. 또 사라져버렸을까봐 무서웠냐고. 마치 아기를 어르는 말투였지만 더 반박할 기운도 없어 그저 입을 다문다. 꽤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는 전에 없이 콧노래를 부르며 토스트를 구워 주었다. 가장자리가 까맣게 탄 식빵을 입안에 욱여넣으며 요즘의 훈련 성과를 이야기했다. 다행히 배구 이야기에 거리낌은 없는 듯, 그가 먼저 배구 근황에 대해 물어봐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헤에, 대단하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칭찬은 상당히 값지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어딘가 찜찜한 기분에 눌리곤 했다.

그는 자신을 더더욱 깊은 곳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나는 항상 무서웠다. 아침이 두려웠다. 오이카와 씨가 정말로, 어느 날 아침에는 홀연히 사라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의 손을 꼭 잡고 자는 버릇은 그로부터 생겨났다. 토비오쨩, 어린애야? 오이카와 씨가 없으면 못 자? 우습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 행위는 그나마 내가 그의 옆에 있는 의미에 가까웠다. 일 년을 가까이 동거했고, 키스도 했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아직 없다. 그는 마치 성욕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고, 나는 운동으로 대부분 다 풀어버리는 성격이라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그냥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그가 내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마치 어린아이 같은 소원을 빌며 잠이 드는 일상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러 나가는 나와는 달리 그의 아침은 상당히 늦게 시작되므로, 그나마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나를 왜 옆에 두고 있는 걸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때마다 텅 비는 눈동자를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에게 여전히 나는 배구밖에 모르는 바보, 서브를 가르쳐 달라고 떼쓰는 중학생인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고, 나도 그도 사회의 때가 묻었다. 이제 땀이 밸 일 없는 그의 손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다 나도 모르게 입을 맞추면 간지럽다고 몸을 빼는 그의 웃음. 어딘가 공허한. 끝없는 자문자답을 계속하면서도 어딘가 위태로운 그를 떠나지 못하는 나도 어지간한 바보다. 연락처는 어떻게 알았는지 이와이즈미 씨로부터 간간이 연락이 왔지만, 나는 아직 오이카와 씨를 찾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때마다 피우지도 않는 담배의 쓴맛이 혀끝에 묻어났다.




*


오프에도 연습을 쉬면 어딘가 찜찜하다. 배구를 시작할 때부터 붙어온 습관이라 어쩔 수 없다. 오늘도 눈을 뜨지 못하는 오이카와 씨를 한번 쳐다보고, 나는 슬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나마 세간이 불었다. 밤새 켜져 있던 가습기를 조금 낮추고 아침을 먹었다. 끼니는 꼭 챙겨 먹어야 하는 타입이라, 전기밥솥을 열면 항상 밥이 있다. 오이카와 씨는 귀찮을 땐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않는 타입이었지만 나와 함께 살고 나서는 그것도 약간 바뀌었다. 내가 밥을 먹을 때 항상 앞에 와서 앉아 있더니-잘 먹는 게 신기해서 구경하고 싶다나- 언제부턴가 자신의 밥그릇에도 밥을 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도의 변화도 긍정적이라면 긍정적인 걸까. 물론 하루 세끼를 전부 챙겨 먹는 일은 아직은 드물지만.

여름 햇빛은 아침부터 뜨겁다. 동네 체육관을 빌려 혼자 연습하는 건 역시 힘들다. 지금이라도 집에 가면 시원한 에어컨과 오이카와 씨가 있지만, 그가 단호하게 날 돌려보낼 것이 뻔하다는 걸 알고, 나 역시 그렇게 돌아가고 싶지는 않기에 그저 연습을 계속한다. 혼자 있으니 토스 연습은 할 수 없고, 대신 스파이크 서브 연습을 했다. 문득 그렇게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쫓아다녀도 절대 가르쳐주지 않던 중학생 시절의 오이카와 씨가 떠올랐다. 나는 결국 그의 어깨너머로 보고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치고 꽤 잘 소화해낸 것 같기도 하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내 서브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그 원형을 제공한 게 오이카와 씨라는 것도 꽤 큰 의미다. 이렇게 말하면 오이카와 씨는 질색을 하겠지만.

미리 수돗가에서 떠 놓았던 물을 마시다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고는 깜짝 놀랐다. 여기엔 절대 안 올 거라고 생각했던 오이카와 씨가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내 티셔츠를 입고. 토스 연습을 도와준다는 말에 나는 무심코 웃고야 말았다. 어느 정도로 크게 웃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즈음 이렇게 웃은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토스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공을 멀리한 지 적어도 이 년, 아무리 오이카와 씨라 해도 그 세월은 티가 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세터와 세터가 함께 연습하고 있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오이카와 씨 마음대로 공이 움직여주지 않는지 몇 번씩 혀를 차며 짜증을 내더니 결국에는 그마저도 익숙해진 것 같았다. 저지 차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배구공을 들고 있는 오이카와 씨의 모습은, 잠시나마 고등학생 시절을 떠오르게 해서, 나는 몇 번씩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본인은 하도 공을 만져대느라 잘 몰랐겠지. 요즈음 땀을 흘린 적 없는 오이카와 씨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호흡도 잔뜩 흐트러져있다. 항상 나른하기만 했던 몸에 조금씩 긴장감이 도는 게 보였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면서도 배구공은 손에서 놓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오이카와 씨의 이런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서, 그의 옆에 있었던 게 아닐까.

피곤하냐는 내 말에 살짝 울컥한 게 눈에 보였지만, 그는 이내 덤덤하게 피곤해, 하고 대답했다.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동거 시작 이래로 이렇게 많이 움직이는 건 처음 보니까. 아마 내일은 절대 못 일어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주저앉아 물을 마시는 오이카와 씨를 잠깐 바라보다, 나는 공을 줍고 네트를 걷었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다. 저녁도 먹어야 하고. 둘 다 지쳤으니 오늘은 외식을 하자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오이카와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토비오쨩.”
“네?”
“지금 내 표정 어때 보여?”

뒤돌아선 그곳에는 어느새 일어선 오이카와 씨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쭉 생각해오던 걸 전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약간 당황한 빛이 어린 눈동자가 내 시선을 피하더니, 내 손을 탁 쳐내고 뒤돌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맥없이 딸려오는 몸은 어쩌면 내가 이렇게 끌어당기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툭하면 고독을 말하고, 툭하면 사라지겠다고 말하던 그의 입에서 자기 표정이 어떠냐는 질문이 나온 지금이야말로 말할 때다.

“……뭐, 죽고 싶어하는 얼굴로는 안 보이네요.”

나는 그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그렇게 고했다. 사라지지 말아 주세요, 오이카와 씨. 귀울림과도 같은 망망대해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아 달라고. 당신이 나를 어떤 의미로 옆에 두고 있든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니, 내가 당신 옆에 있는 이유를 알아 달라고. 정신적으로 다시 일어선다든가, 배구를 다시 시작한다든가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건 그것대로 됐으니 더 깊은 곳으로 빠지지만 말아 달라고, 마음속으로만 외쳤다. 소리 없이 외치던 내 입은 곧 그에 의해 막혔다. 내 머리카락을 헤집는, 살짝 초조함이 묻어나는 그 손길을 느끼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당신을 건져 올리겠다든가, 부서진 조각을 맞춰 주겠다든가 하는 건방진 생각은 애초에 없다. 점점 빠져들고 있는 건 내 쪽이므로. 그저 그 텅 빈 시선과 텅 빈 사랑의 말을 견딜 수 없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당신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내가 답답하다. 우리가 서서히 가라앉는다면 결국 나는 당신을 띄워 올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매일 밤 꼭 잡는 손에 사라지지 말라는 간청을 담고 있다는 걸 당신은 알고 있을까. 그 손길이 항상 내 입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는 사랑의 말이라는 것도 알아주기를,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를 삼켜내며 (Side. Iwaizumi)

담배만큼이나 익숙해진 드링크제의 뚜껑을 비틀어 열고, 맛을 느낄 새도 없이 한번에 털어 넣는다. 특유의 시큼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가 식도를 통해 빠져나갔다. 적어도 하루에 한 병씩은 먹는 것 같은 자양강장제에 과연 효과가 있는 것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습관처럼 또 서랍을 열어 찾고야 마는 것이다. 빈 병은 일단 모니터 옆에 세워 둔다. 타닥타닥, 타자 치는 소리와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사무실 안에 가득하다. 침침한 빛을 내뿜는 모니터는 빨리 다시 이쪽을 보라고 성화다. 텁텁한 입맛을 다시며 컴퓨터를 들여다보려니, 누군가 툭툭 어깨를 건드렸다. 고개만 살짝 틀어 보니 바로 옆자리에서 일하는 동료 마미야다.

“뭐야?”
“밥 먹으러 가자고.”
“벌써 점심시간인가?”
“시계는 좀 봐 가면서 일하세요, 이와이즈미 사원. 하여간, 일벌레라니까.”
“오늘은 뭐 먹지? 우동이나 먹을까?”
“카레 어때? 요 앞에 정식집.”
“그거, 그저께 먹었잖아.”
“그럼 덮밥.”
“우동 먹자니까.”
“그건 어제 먹은 거거든?”

메뉴로 티격태격하는 걸 들었는지, 점심 드시러 가세요? 같이 가요! 라고 말하며 끼어든 몇 명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느새 시곗바늘은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아홉 시에 출근해서 서류 두 개만 검토했을 뿐인데, 언제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갔지. 회사 안의 어딘가에 시간을 빨아 먹는 요괴라도 있는 건 아닐까, 학창 시절이라면 곧장 발휘했을 상상의 날개를 뻗치다가 곧 그만두었다. 띵, 하는 무기질적인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회사 로비를 곧장 걸어나가려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

회사 안의 시간 빨아 먹는 요괴보다도 비현실적인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굳게 다물린 입매와, 단호하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십 년 전 그대로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일단 멈춰 선다. 그가 다른 사람을 보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전에 약속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건 상당히 그답다고 해야 하는지, 이제 사회인인데 그 정도 매너도 없느냐고 한 마디 해줘야 하는지. 동시에 그의 용건이 뭔지 듣지 않아도 지겹게 알고 있어서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칠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든다. 정장을 입고 왔다면 기함할 노릇이었겠지만 그래도 유니폼 저지는 좀 아니지 않냐. 본인에게 말해도 뭐가 잘못됐는지는 전혀 모르겠지. 오랜만이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반가움을 담아보려 했지만, 역시 이런 깜짝 이벤트에는 익숙지 않다.

“아, 먼저 가 계세요. 금방 갈게요.”

마미야가 의아한 눈길로 카게야마와 나를 번갈아 본다. 나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그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

 

[하지메 군, 침착하고 들어. 토오루가…….]

오이카와의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나는 너무도 무심하게 받아버렸다. 보나 마나 요즘 팀과의 연봉 협상 건으로 징징거리는 전화일 거라고 단정 짓고는. 그래, 연봉 협상은 잘돼 가냐. 아무리 초짜라도 너 정돈데 그렇게 후려치지는 않겠지? - 그렇게 준비했던 모든 말이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차분하지만 충분히 패닉에 젖은 오이카와의 어머니 목소리가, 그의 사고를 알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채, 그런 와중에도 반차는 착실하게 쓰고 나는 회사를 뛰쳐나왔다.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차는 생각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정수리에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져 고인다. 오른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 액정에도 빗방울이 맺혔다. 병원은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고 말하며 지갑에서 나오는 대로 지폐를 건네고 뛰어내렸다. 잔뜩 비로 젖은 아스팔트에 구둣발이 미끄러질 뻔했지만 몸을 가누자마자 다시 달렸다. 더 빨리 간다고 뭐가 바뀌지 않는 것도 아는데,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오이카와, 오이카와 토오루요. 몇 호실인가요?’
‘아, 지금은 수술 중이네요. 응급실 앞에서 기다리세요.’

사무적인 간호사의 목소리가 그나마 내 정신 중 반절 정도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벽에 기댄 채 간이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그의 어머니와, 그 옆에 서 있는 그의 형. 둘 중 누가 먼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된 거예요?’
‘교통사고.’

그의 형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얼마나 됐어요?’
‘수술실에 들어간 지 삼십 분 째야. 아니, 한 시간인가.’

나도 회사에서 몇 시에 뛰쳐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그들도 몇 시부터 기다렸는지는 정확히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다. 나는 말없이 아주머니 옆에 앉았다. 가끔 문이 열렸다 닫히면서 간호사들이 들락날락했지만 붙잡고 경과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몇 시간이나 기다렸을까, 간이침대에 실린 오이카와가 나왔다. 곧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리 심한 부상은 아니라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가, 그의 직업이 배구 선수라는 말에 살짝 어두워지는 의사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마음은 먹구름에 싸인다. 막연한 불안감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


그가 의식을 찾았다는 말을 듣고 다시 병원에 갔다. 사실 그가 의식 불명인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뭐라도 사가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멜론 하나와 그가 평소 좋아하는 우유빵을 한 아름 사서 들고 갔다. 그는 개인실에 있었다. 얼굴 보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이카와 주제에 개인실이라니 호강하네, 하고 한 마디 툭 던져주려고 마음먹고는 문을 열었다. 오이카와의 어머니가 틀어 놓았는지 귀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먼저 귀에 들어오고, 피부로는 촉촉한 공기가 느껴졌다. 건조한 약품 냄새. 링거 액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만 같은 무기질적인 고요함. 공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클래식 음악이 버젓이 흐르고 있는데도 이 공간은 건조한 나머지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이카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을 때, 드디어 어디선가 균열음이 들렸다.

“이와쨩?”
“…….”

내가 아까까지 무슨 시답잖은 농담을 준비하고 있었더라? 머리가 하얗게 비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멜론과 빵 봉투를 적당한 곳에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멀거니 서 있었다. 내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오이카와는 그저 쓴웃음만을 머금고 있다. 오른손에는 붕대가 감겨있고, 왼손에는 링거 바늘이 두 개 꽂혀있다. 이불 밑으로 숨은 다리에도 분명 붕대가 잔뜩 감겨있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문제는 붕대나 링거 따위가 아니었다. 날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텅 빈 시선. 평소 부르는 호칭대로 부르는데도 이전과는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이리 와서 앉아. 오랜만에 보네.”

열어둔 창문 사이로 미지근한 바람이 들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지분거렸다. 햇빛을 보지 않아 살짝 창백해진 얼굴에  그의 앞머리가 만들어낸 그늘이 어렸다.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가, 멜론과 빵은 적당한 곳에 놓아두고 그가 손짓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그새 손가락이 더 야위었다. 링거 바늘이 꽂혀있어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불 위에서 움찔거리는 손끝을 바라보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야 만다. 

“……오늘 아침에 의사가 왔었어.”
“그러냐.”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더라.”
“……재활은?”
“가능성 없는 건 아니지만 섬세한 신경이 다치는 바람에 정말 힘들 거래.”
“…….”

나는 입술을 짓씹는다. 무단횡단을 했다는 그 사람을 찾아와 바닥에 패대기치고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이 머리끝을 울렸다.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 정도로 머리가 뜨거워져 있었다. 꽉 쥔 주먹 틈으로 손톱이 파고든다. 부스럭거리며 이불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눈앞에 힘없이 웃는 오이카와의 얼굴이 있다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이카와의 우는 얼굴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힘 빠진 웃음이다. 옛날부터 그랬다. 절대 이 녀석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했고, 그래서 옆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다. 그 덕분인지 이 녀석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지낸 약 이십 년의 세월 동안 그런 힘 빠진 웃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름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보아 버리면 이제껏 쌓아온 모든 것이 우그러진다. 다 마신 음료수 캔처럼 납작하게 찌부러지는 나 자신. 눈동자가 시뻘겋게 충혈되는 것이 느껴졌다.

“근데 내가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
“그때 핸들을 꺾지 않고 그대로 사람을 받았다면 나는 배구를 계속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눈뜨자마자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이야.”
“……오이카와.”
“응.”
“배구, 계속할 거지?”

나는 그에게 굴레를 씌우려 했던가.

“글쎄, 이제 놔줘도 되지 않나- 생각해.”

그는 산뜻하게 피해버렸다.

“애초에, 이렇게 된 건 배구가 날 놓은 게 아닐까.”

배구, 계속할 거야? 라는 질문이 아니라, 계속할 거지? 라는 확신형의 질문이 무색해졌다. 더는 배구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는 기척이 났다. 나는 그가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만큼, 그가 배구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정말로 그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는 배구를 포기했고, 동시에 나를 떠났다. 놀랍게도 내가 확신한 두 가지가 한꺼번에 산산조각이 났다. 오이카와는 말 그대로 ‘사라졌다’. 가족과도 연락을 끊은 채 혼자 도쿄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가 정말로 나와의 인연을 끊으려 했다면 내가 그 가족에게까지 찾아가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와 직접 닿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오이카와도 이미 진작 알아차렸으리라. 

그런 내 앞에, 놀랍게도 카게야마가 나타났다.

아무리 고교와 대학 시절 주목을 받는 선수였다지만, 프로 입단도 하지 못한 오이카와의 소식이 매스컴에 크게 오르내리지는 않았다. 카게야마도 미처 소식을 못 들은 듯했다. 니코틴이 스민 혀가 오랜만에 오이카와의 이름을 내미는 순간,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던가. 벌써 오이카와와 연락이 끊긴 것도 이 년. 카게야마가 어느 팀에 들어갔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 팀이 오이카와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이대로 두 사람을 만나게 해도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것마저 주제넘은 생각이란 것을 알기에 나는 잠자코 카게야마를 보냈다. 옥상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나는 두 개비째를 입에 물었다. 하늘은 눈물이 배어 나올 정도로 파랗고, 담배는 전에 없이 썼다. 


*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찾아냈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를 찾아낸다 한들, 그게 나에게 그리 큰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그들의 일은 그들의 일이고, 오이카와와 나의 일은 오이카와와 나의 일이다. 두 일에는 오이카와라는 교집합이 존재했으나 나는 그 교집합에 기대면 안 됐다. 이것이 카게야마에 대한 경쟁심인지, 혹은 우월감인지 알 도리도 없이 나는 그저 살던 대로 살아나갔다. 카게야마가 회사에 찾아왔던 사실마저 잊을 즈음 나는 그의 연락처를 입수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당시 카라스노 주장을 만난 덕이다. 카게야마는 배구 외의 모든 일에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면이 있어, 그때까지 연락처가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카게야마에게 연락을 할 일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혹시 몰라 연락처를 받아 두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망설임의 끝에 전화해 보았다.

[누구세요?]
“이와이즈미인데.”
[아, 이와이즈미 씨. 안녕하세요.]

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다행인지, 예상대로인지.

“혹시 오이카와 찾았냐?”
[아뇨, 아직.]

훈련이 너무 바빠서 그럴 틈도 없었어요, 라고 카게야마가 덧붙였다. 거짓말 같지는 않아서, 형식상의 안부인사를 몇 마디 달아두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 한 달 정도 지났을까. 불현듯 동하는 마음에, 민폐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카게야마의 번호를 불러냈다. 안부인사 후, 오이카와 이야기를 묻는다.

[아……. 네, 아직.]
“그러냐.”

간단하게 찾는다는 게 무리겠지. 짤막하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끊으려는 순간, 낯익은 음악 소리가 들렸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소리인데 한때는 지겹게도 들었던 소리. ZARD 노래의 한 소절이 저쪽 전화 너머에서 아주 짧은 시간 흐르다 끊어졌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찾아냈고, 지금 둘은 같이 있다는 사실을. 

중고생 시절의 오이카와는 ZARD의 노래를 곧잘 듣고는 했다. 보컬 목소리가 좋다며 내게 몇 곡 들려주기도 했다. 영 내 취향은 아니라서 계속 듣지는 않았지만, 그의 핸드폰 벨소리로 설정된 노래는 지겹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통화 상대가 나라는 사실을 알고, 내가 그의 벨소리를 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쳐 급하게 벨소리를 껐음이 틀림없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괜히 전화 너머의 침묵마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지금 나와 통화를 하는 카게야마의 옆에는, 오이카와가 있다. 이 년, 아니 삼 년 동안 연락을 끊은 오이카와가. 빌어먹을.

“……아, 저녁 시간에 미안하다. 끊을게.”
[네.]

담백한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긴다. 정신을 차려보니 핸드폰을 쥔 손마디가 하얗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화가 난 건가? 아니면, 실망한 건가? 아니면 배신감인가? 텅 빈 담뱃갑을 왼손으로 우그러뜨리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본 채 한숨을 커다랗게 쉬었다. 카게야마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 아마 오이카와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방금 통화에서 상대가 나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받자마자, 이와이즈미 씨? 하고 크게 확인하듯 내 이름을 말했다. 아마 상대가 나라는 걸 알리려는 뜻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역시 거짓말을 하는 건 오이카와 쪽이다. 핸드폰을 침대 아래로 집어 던지고, 이불을 덮은 채 가만히 심호흡했다. 그리고 자문한다.

나는,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걸까.

지금 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이카와를 볼 수는 없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가 어떤 사이가 되었는지도 난 모른다. 그들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로 남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내가 끼어들면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 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뭣보다도 오이카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런 내게 뭐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오이카와가 날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간다. 날 보면 따라 붙는 학창 시절의 배구를 직면하는 게 무서운 것이다. 카게야마를 보면 떠오르는 건 배구의 그리 좋은 순간이 아닐 테지만-그리고 직접 배구를 함께 했던 것도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니까-, 나와는 기쁜 순간이든 슬픈 순간이든 항상 함께 했던 것이 문제다. 나는 오이카와의 배구 인생 그 자체다. 마찬가지로 오이카와도 내 배구 인생의 그 자체다. 배구를 떠날 수밖에 없던 그에게, 배구 기억의 집합체 같은 내가 나타나는 건 정말 트라우마의 절정 같은 느낌일까. 냉정하게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역시 오이카와 녀석은 패주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눈앞에 나타나면 얼굴 양쪽을 전부 쳐버리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아니, 치지 않을 테니 제발 나타나기만 해 달라고 빌기도 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만이라도 물을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 모순된 갈등이 무색하게도 오이카와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 후로도 몇 번 카게야마에게 전화했다. 역시 오이카와는 못 찾았다는 대답뿐이었지만, 일요일 저녁에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콩트 프로그램의 소리를 듣는다든지, 물을 켜 놓은 채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린다든지 하는 기척으로 오이카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담담히 오이카와를 삼켜냈다. 너무 커서 목구멍 너머로 넘어갈 수 없었지만, 애써 삼켜냈다. 이제는 정말 없는 사람 취급하며 살아야 하는 때가 온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

 

회사 비품 캐비넷을 열고 상자 안에 손을 넣었지만, 텅 비어 있었다. 그때야 내 책상 위에 뒹구는 드링크제 빈병 다섯 개가 눈에 들어왔다. 하아, 한숨을 쉬면서도 새 상자를 뜯어 기어코 드링크제를 하나 꺼내고야 만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뿌옇게 흐려오는 모니터를 노려보며 뚜껑을 따서 원샷. 선배, 이제 그거 슬슬 효과 없지 않아요? 내성 생겼을 것 같은데. 지나가던 후배가 걱정 반 놀림 반으로 말했지만 쓰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간이 책장 위에 놓인 조간신문 스포츠면에는 배구 국대가 세계 대회를 위해 어젯자로 출국하는 사진이 작게 실려있다. 눈여겨보지는 않았지만 저 사이에 카게야마가 끼어있으리라. 

“오늘은 뭐 먹을까?”

매일처럼 이 시간만 되면 내 뒤에서 어깨를 치는 마미야.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메뉴를 생각하는 대신,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에게 신문을 내밀며 그 사진을 가리켰다. 카게야마는 역시 작게 나와 있었지만, 얼굴은 구별이 되는 정도였다.

“그거 알아?”
“뭘?”
“얘, 내 후배다.”

아, 그러냐. 근데 얼굴은 잘 안 보이는데? 눈을 찌푸리며 마미야가 말했다. 난 낄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때 내선 전화가 울렸다. 로비 직원 번호가 찍혀 있었다. 

“네, 이와이즈미입니다.”
[아, 로비의 시모츠키인데요.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네? 뭐, 상관없는데요.”

뭔데? 마미야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눈짓을 하고 나는 다시 내선 전화로 신경을 돌렸다.

[그게, 영업부 이와이즈미 사원을 찾는다는 분이 계셔서요. 혹시 점심 드시러 갔나 하고 전화했어요.]
“어, 지금 나가려고 하긴 했는데. 찾아온 사람 이름이 뭔데요?”
[어,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와이즈미 씨, 듣고 계세요?]

나는 정체 모를 직감에 수화기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씨라고 전해달라네요.]

삼켜내려던 순간 얄궂게도, 그가 정확히 목구멍 언저리에서 멈춰 서는 것이 느껴졌다.



카게오이 + 쿠니오이 + 기타 오이른

적향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