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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산] LOVEBITE

무료공개


제 첫 연재물이자, 첫 책, 첫 루산 책으로 나왔던 LOVEBITE입니다.

2010년 12월 28일(무료공개를 결정하고 보니 7년 전 오늘이더라구요 소름...) 'Snowy'라는 가제로 1편을 올린 후 

피치못할 사정으로 4년여의 휴덕기를 거쳐 2015년 1월 쯤에 완결을 냈고 원온 자급자족 1회에 가져갔네요.


연재를 시작한지 벌써 7년이 지났다니... 세월무상...
연재를 시작한지 벌써 7년이 지났다니... 세월무상...


밑에 재판본의 후기까지 첨부했지만, 제게 굉장히 애틋하게 다가오는 글이에요. 

지금 읽어보니 여기저기 부끄러운 부분도 많고 고치고 싶은 부분도 많지만 더 손대지 않았습니다ㅎㅎ

행사가 엎어져 헛헛한 마음, 이제 이 글을 놓아주어야겠다는 마음, 그래도 루산 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무료공개합니다.

아직도 당시 받았던 피드백들은 종종 감사히 읽어보고 있어요. 단편병자인 제가 10편여까지 연재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피드백 주신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TT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LOVEBITE

Original : ONE-PIECE

Luffy x Sanji

Written by. 赤香



1.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있는 탓일까, 자꾸 콧잔등을 따라 조금씩 내려오는 안경을 밀어올린 상디가 잠깐 고개를 들었다. 그다지 밝지 않은 조명 탓인지 눈이 시려왔다. 문에 붙은 작은 창으로 보이는 그랜드 라인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쏟아낼 것처럼 무거운 잿빛이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 푸를 때에도 나미가 풍향을 보니 곧 눈이 내릴 것 같다며 갑판에 내놓았던 잡동사니들을 치우라고 닦달을 해댔던 것이 생각났다. 역시 나미 씨의 항해 감각은 최고라니까. 저도 모르게 입 꼬리에 슬슬 떠오르려는 미소를 억지로 집어넣고 상디는 다시 테이블 위의 노트로 눈을 돌렸다. 식료품 리스트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이따금 깃펜을 잉크에 적셔가면서 빼곡히 무언가를 적어 넣는다. 얼마 전에 섬에서 가져온 단호박 두 자루를 써넣고 옆에 (빠른 시일 내에 단호박 수프로 처분할 것!) 이라고 적었다. 우유는 있던가? 냉장고를 또 열어봐야겠군, 귀찮게. 양파는 수프에도 넣고 넣을 수 있는 곳에는 여기저기 다 넣어야지. 얼마 전에 식료품 창고 구석에서 막 푸른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양파 두 자루를 발견했을 때의 충격을 상디는 잊을 수가 없었다.

순간 몸이 부들 떨린다 싶었다. 밖을 내다보니 눈이 날리고 있었다. 갑판에 얇게 눈이 쌓인 것도 같았지만 상디는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모두들 방으로 돌아가거나, 최소한 갑판에는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부엌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메리의 흰 머리 위에도 소리 없이 눈이 내려쌓이고 있었다. 항상 위태위태하게 저곳에 앉아 먼 바다를 내다보는 녀석도 방으로 들어갔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부엌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괜히 의자가 더 차가운 것만 같다. 상디는 깃펜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조리대로 다가갔다. 제 안의 물을 다 끓인 주전자가 수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물이 끓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식사 시간이 아닌 부엌은 고요했다. 상디가 아까 설거지를 해 찬장에 뒤집어 두었던 컵을 하나 꺼내려는 참에 부엌의 문이 열렸다. 꽤나 큰 소리를 내면서.

“추워~, 추워추워추워!”

“……꼴이 그게 뭐냐.”

머리 위에 눈이 약 10cm 정도는 쌓였을 것 같은 선장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맨몸 위에 빨간 조끼와 너덜너덜한 바지만 입은 채. 고무라 뭐 얼어 터지거나 할 걱정은 없었지만, 차라리 슬리퍼라고 부르는 편이 타당할 샌들 속의 맨발이 유난히 추워 보여 상디는 저절로 눈썹을 찌푸렸다. 저 멍청한 놈이 동상 걱정도 안 하고. 끼익 소리를 내며 나무문이 닫혔다. 한숨을 쉬며 상디가 행거에 걸려있던 행주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으익, 그거 행주!"

“어제 빨고 삶아서 한 번도 안 쓴 거니까 입 다물어.”

“…….”

본능적으로 한 손을 쳐들고 그를 막으려는 자신을 무섭게 쏘아보는 그 눈에 루피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꽤 난폭했던 말투에 비해 비교적 부드러운 손길로 상디는 루피의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얇은 헝겊이 천천히, 차갑게 젖어들고 있었다. 가만히 상디의 손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만 보던 루피가 덥썩 그 손목을 잡았다. 안경 너머로 놀라 동그래진 눈이 루피를 쳐다본다.

“차갑잖아 임마.”

“안경 썼네?”

“식료품 정리하느라. 네놈이 매일 훔쳐 먹어서 요즘 관리가 말도 아니게 힘들다고.”

루피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 책으로 향하는 틈을 타 자연스럽게 루피의 손을 놓은 상디가 다시 조리대 앞에 섰다. 하릴없이 컵을 하나 더 꺼내고 코코아? 커피? 하고 묻자 당연히 코코아!! 라는 활기찬 대답이 들려온다. 가습 겸 물을 넉넉히 끓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상디는 찬장에서 코코아와 커피를 꺼냈다. 눈 오는 날은 서비스다. 코코아 가루에 물을 붓고 마시멜로우를 두어 개 띄워줬다. 갈색 수면 위에서 하얗게 녹기 시작하는 마시멜로우는 마치 처음 내리는 깨끗한 눈과 닮았다. 자신의 몫으로 커피를 타 티스푼으로 휘휘 저은 후 양 손에 컵을 든 상디가 루피 쪽으로 다가왔다.

“이건 대체 뭐라고 쓴 거야?”

“아?……숫자잖아, 바보야.”

“이게 숫자라고? 상디, 글씨 연습 좀 해야겠다. 어쨌든 코코아 고마워.”

내 글씨가 그렇게 못 봐줄 정도인가. 루피에게서 빼앗듯이 리스트를 받아든 상디가 리스트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못 읽을 정도는 아닌데… 보다 이건 나만 읽으면 되는 거니까 상관없잖아? 라는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까까지 자기가 앉아서 리스트를 정리하던 자리에 냉큼 앉은 선장을 내쫓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글씨 연습 좀 해야겠다고 말했으면서, 선장은 이리저리 노트를 뒤적인다. 별로 볼 것도 없을 텐데 뭘 저렇게. 상디는 일어서서 잔을 든 채, 코코아를 마시는 선장을 바라보았다.

“그 밀짚모자라도 쓰고 있지 그랬어. 눈 오는데"

“바보야, 눈 오는데 이 밀짚모자를 어떻게 쓰고 있냐?”

“……애초에 눈 오는데 밖에서 뭘 하고 있던 거야? 난 네놈은 방에 있을 줄 알았는데. 메리 위에 없길래.”

“응? 아, 나미의 귤나무들 덮어주고 왔지.”

“……뭐?”

순간 잔을 떨어뜨릴 뻔한 상디가 놀라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귤나무를 지키는 건 내 몫이었는데! 나미 씨한테 죽었다… 이런 폭설에 귤나무가 무사할 리가 없지. 상디 군? 귤나무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저 눈을 치우는 건 누구의 일일까? 상디의 뇌리에 귤나무를 가리키며 생긋 웃는 나미가 떠올랐다. 잠깐만. 상디는 저도 모르게 오른쪽 검지를 펴 루피를 가리켰다. 소위 말하는 삿대질이지만 그걸 기분나빠할 선장도 아니었고, 또 그게 무례한 짓이라고 깨달을 만한 정신적 여유도 상디에겐 없었다.

“네가 그걸 덮어줬다고?”

“응.”

“어……어째서?”

“상디가 분명 그걸 제일 먼저 챙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 부엌에 불이 켜져 있길래 뭐 하느라 바쁜가보다 싶어서 그냥 내가 했어. 나미가 보면 엄청 화낼 것 같아서.”

“…….”

천성적으로 나온 행동에, 딱히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은 없다고 상디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누구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추위에 떠는 귤나무를 위해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루피의 성격상 가장 타당할 텐데. 그런데, 가슴 한 구석에서부터 퍼져오는 이 묘한 감정은 대체 뭘까. 착잡해진 상디가 부엌의 천정을 올려 본다.

“그래서 네놈은 그런 꼴로, 지금까지 귤나무를 덮어주고 왔다고?”

“뭐 상관없어, 그렇게 추위를 타는 것도 아니고.”

“상관있어!”

“……깜짝이야, 왜 화를 내고 그래.”

저도 모르게 화를 내버렸다. 상디는 입술을 살짝 물고 커피잔을 세게 쥐었다. 날카로울 정도로 뜨겁게 와 닿는 온기가 낯설었다. 화상을 입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마음의 동요를 감출 수 있도록 몸의 어딘가가 눈에 띄게 망가졌으면 좋겠다고. 이 커피잔의 온도보다도 뜨겁게 와 닿는 그 마음의 무게를 이대로 모른 척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가 자각하기 전에, 더 이상 이 따뜻함에 익숙해져버리기 전에 어서 발을 빼야 한다.

하지만 그 반대편엔, 이 정도의 따뜻함은 괜찮다고 자신을 위로하는 약삭빠른 자신이 있었다. 동료로서 베푸는 친절과 그 이상의 친절을 명확히 구분 짓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반대편의 자신은 교활하게도 그 간극을 이용한다. 약속할 수 없는 내일과 예상할 수 없는 오늘을 셀 수 없을 만큼 헤쳐 오면서 쌓인 그 동료애를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합리화한다. 때때로 옆얼굴에 와 닿는 의미 불명의 시선도, 무언가를 바라듯 자신을 향하는 그 손길도 모두 동료로서의 그것이려니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안일하기만 한 대응이었다. 대응? 대응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방치했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상디는 차차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가슴 속에서 진득하게 엉겨 붙는 고통의 결정체는 그 크기를 더해갔다.

사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자신이다. 자신은 언제나 그 눈빛을, 그 손길을 멈출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후에 따라붙는 것은 심약한 변명들 뿐, 어떠한 것도 그들에게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지침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 주고 싶었지만 손을 내밀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불안해할수록 어느 면에서 안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이후로 상디는 그 고통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째서? 답은 한 가지였다.

바라고 있는 것이다, 자신 역시.

“…할 일을 빼앗아서 화난 거라면 사과할게.”

“……그런 거 아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온다. 상디는 무심코 바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려다가 이렇게 추운 날에는 환기도 용이치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곤 손길을 멈췄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자신의 주먹 속에서 구겨져 가는 담뱃갑 속에는 몇 개비의 담배가 남아 있을까. 선장이 나가고 나서 자신의 이 답답함을 풀 만큼 충분한 양이 들어 있을까? 상디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바람으로 자신의 앞머리가 조금 흔들거렸다. 곁눈질로 바라본 밖은 여전히 잿빛이고, 또 울적했다. 바다까지 잿빛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돛에 부딪히는 바닷바람은 분명 살을 엘 정도로 차갑겠지. 부엌은 조용했다. 루피는 가만히 상디를 응시한 채 코코아의 마지막 한 모금을 비워낸다. 탁, 하고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부엌에 진동했다.

“상디.”

“……응."

“요즘 어디 안 좋은 데 있어?”

“아니."

“근데 왜 그래? 요즘 들어 특히.”

“너는……”

“응?”

“너는 요즘 안 좋은 데 없어?”

루피는 의외의 반문에 잠시 생각하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정말 무언가를 심각히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손가락에 와 닿는 커피잔의 온도가 눈에 띄게 식었음을 상디는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밥도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잘 떠들어.”

“…그거 잘됐군.”

“상디는?”

“뭐?”

정면으로 마주본 그 검은 눈동자에 상디는 무심코 담배연기를 삼켜 버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자신의 입에 물려 있는 것이라곤 그 아무것도 없는데도, 이 익숙한 감정은 대체 뭘까. 불규칙하게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제법 진지한 그 눈동자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빨려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항상 보살펴 줘야 할 것처럼 어리게 굴면서도 불의의 습격처럼 자신의 마음을 파고드는 이 건방진 소년을, 상디는 밀어낼 수가 없었다. 사실 밀어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일방적인 공세는 항상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럴 때마다 상디는 희미하게 깨닫고 있었다. 반대편의 자신은 오히려 자신이 전세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더 바라고 있다고.

“상디는 어떠냐고 묻는 거야.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잘 떠들어?”

“…….”

“대답하지 못하는 건 안 그렇다는 거야?”

말문이 막힌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 잘 먹지도, 잘 놀지도, 잘 자지도, 잘 떠들지도 못하고 있다. 특히 요 근래 들어. 쓸데없는 걱정과 불안감이 모든 안락함으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사실 전혀 쓸데없는 고민과 불안일지도 모르는데 그것들에 휘말리는 밤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한 마디로 ‘얼이 빠졌다’.

“……루피.”

“응?”

“……고맙지만 이건 아냐.”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단칼에 잘라 말하는 것이 그에게나 자신에게나 익숙하다는 오만한 판단을 물리진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자신다운 길이라는 자기 위안 역시 가장 필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이 배 위에서 한 치의 감정적 망설임이라도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이 바라티에를 떠나면서부터 마음속으로 결심해 온 한 가지였다. 물론 그 마음의 방향이 레이디들이 아니라 이 선장을 향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불가해한 일이었지만. 그런 것쯤 어떻더라도 상관없었다.

“뭐가 아니라는 거야?”

“…….”

“상디. 말해줘.”

“…….”

무언으로 일관하는 상디가 답답하다는 듯 루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흠칫 놀란 상디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루피가 오른쪽 손목을 단단히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팔에 감기는 체온은 온기가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상디는 문득 주저앉고 싶어졌다. 몇 시간동안 자신을 위해, 눈이 쏟아지는 밖에서 무언가를 하고 온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이렇게 상처를 주는 말만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아직도 안일하게만 생각하고 있는 자신에게, 그리고 이 자신의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선장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잘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 하는 상디 자신은 또 다른 어린아이였다. 절제되지 못한 감정의 표출과 거짓된 몰이해. 어린아이 두 명은 끝없는 감정의 고리의 각각 다른 쪽에 매달려 눈에 보이지 않는 씨름을 하고, 그 힘에 못 이긴 고리가 끊어지려는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상디가 말을 잇지 못한 것은 순전히 꽉 끌어안는 강인한 두 팔 때문은 아니었다. 마침내 고리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나가 떨어졌다. 고리의 반동으로 각각 멀리. 더 이상 좁힐 수 없는 거리라는 것을 상디는 그 순간 절실히 체감했다. 신체적 거리와는 분명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거리감. 앞으로 두 사람이 어떻게 발버둥치든 그 거리는 절대 좁혀질 수 없을 것이라고. 몸이 가깝게 달라붙을수록, 서로 닿는 체온이 상승할수록 차갑게 식을 수밖에 없는 마음이 있었다. 루피의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그대로 녹은 눈송이가 만들어낸 작은 물방울을 발견한 순간 상디는 울고 싶어졌다.

 

***

 

“상디 군, 점심 말인데…….”

부엌문을 열고 들어오던 나미가 흠칫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불이 꺼진 부엌, 다이닝 테이블 위에 기절하듯 쓰러져 있는 인영은 분명 그 배의 요리사였다. 약 3초간, 항해사의 비상한 머리가 급속도로 회전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피곤한 건가? 어디 아픈가? 혹시 내가 다가갔다가 더 안 좋아지는 건 아닐까? 번개같이 스쳐지나가는 생각들 속에서 나미는 마침내 결심을 했다.

“상디 군?”

그 결심이란, 다름 아니라 멈춰선 그 자리에서 그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보는 것이었다. 평소처럼 정신이 있는 상디라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고개를 안 들 리는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는지, 느릿느릿하게 상디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나미는 비명을 지르며 부엌에 이미 들여놓은 오른쪽 발을 빼내어 멀리 도망쳐 버릴까 잠깐 고민했다. 그만큼 그의 반쪽 얼굴은 흙빛이었다. 차라리 처음 대답이 없었을 때 조용히 부엌문을 닫고 나가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자신을 책망해 봐도, 이미 그가 고개를 들게 만든 이상 용건은 말하고 나가야 한다. 나미는 일단 부엌 불을 켰다. 아침에 먹은 그릇들이 설거지도 되지 않은 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점이군. 일단 체크.

“아 참, 어제 귤나무 덮어줘서 고마워.”

“……그거 내가 한 거 아닌데.”

“에? 상디 군이 한 것 아니야?”

“선장이 했을 거예요. 아마.”

선장의 이야기를 하면서 묘하게 시선을 피한다. 또 체크. 나미는 부엌문을 닫고 와서 상디의 맞은편에 앉았다. 평소였다면 차를 끓여오느니, 케이크를 내오느니 부산을 떨었을 텐데 지금은 그저 자신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것도 체크. 묘하게 자신 너머의 벽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것도 같아져, 나미는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그것보다. 귤나무를 덮어준 게 상디가 아니라 루피라고? 그의 말을 곱씹어 보다가 뜻밖의 사실에 바로 전까지 기분이 나빴던 게 사라져 버렸다. 사라져 버렸다기 보다는, 잊혔다는 것이 더 맞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미는 조급하게 묻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이 요리사와 선장의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파헤치면 이 요리사는 헤어 나오지 못할 감정의 수렁에 빠져버릴 것 같다는 것 역시, 나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근데 나미 씨, 부엌엔 웬일로?"

“아니……. 점심 메뉴 물어보러 왔는데, 방해가 되면 갈게.”

“딱히 방해랄 것도…… 차 한 잔 어때요?”

“상디 군만 괜찮다면야 뭐.”

비슬비슬 일어나 조리대로 향하는 모습 역시 평소와는 다르다. 나미는 이것까지 체크해 두기로 했다. 누가 뭐래도 크루들 중 부엌에 가장 오래 있는 사람은 상디다. 그의 기분에 따라 부엌의 공기 전체가 다양하게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공기에 민감한 나미가 느끼기에 부엌은 매우 갑갑했다. 당장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나미는 웬만하면 빨리 이곳을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상한 분위기에 대해 캐묻는 건 일단 그의 상태가 호전되고 난 이후로도 충분하다고. 그 때였다.

“읏!”

찬장에서 컵을 꺼내는 뒷모습이 불안불안하다 싶었다. 때문에 나미는 그가 황급히 몸을 숙일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부엌 바닥에 흩어진 흰 도자기 파편들이 나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꽤나 당황했는지 무방비하게 몸을 굽혀 파편을 하나하나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미가 깜짝 놀란 것은 그가 맨손으로 파편을 주워 모았기 때문도 아니었고, 그가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잿빛 양말이 어느 한 부분부터 더욱 짙게 물들고 있는데,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파편을 줍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이 위태로웠다. 물이 다 끓었음을 알리는 주전자의 신호음이 마치 경고음처럼 부엌 전체를 뒤흔들었다. 문득 나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팔을 잡고 휙 뒤로 제친다. 그는 너무도 쉽게 딸려 왔다. 마치 몸의 어느 부분에도 힘을 주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나미 씨?”

“지금 뭐 하는 거야, 상디 군! 발에서 피가 나잖아!”

“아…….”

그때야 상디는 자신의 오른쪽 발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축축했다. 피가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간사하다. 자신의 몸은 정말 무엇보다도 간사하다고 생각했다. 모를 땐 정말 눈치도 채지 못 했는데 피가 나는 걸 확인하자마자 온 몸의 힘이 빠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을 타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나미가 억지로 그를 밀어 의자에 앉혔지만, 머릿속을 점령한 현기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겨우 피 몇 방울 빠져나간 걸로…. 바보 같기는. 헛웃음이 입술을 타고 흘렀다. 쵸파를 찾는 나미의 새된 목소리가 상디의 귓전에서 웅웅거렸다. 한심하다. 자신은 정말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한심한 놈이었다. 희미하게 끊겨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눈가에 새겨진 것은 부엌의 천정이었다. 눈을 뜰 때에는…….

 

***

 

“발에 박힌 파편도 파편이지만, 요 며칠 간 쌓인 피로가 극심해. 스트레스도 엄청나고. 게다가 가벼운 빈혈 증세에 영양실조까지 있네.”

상디의 발에 흰 붕대를 꼼꼼히 감으며 쵸파가 말했다. 침대를 둘러싸고 모인 크루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매우 심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배의 요리사가 영양실조라니…. 그러고 보니 그는 식사시간 마다 ‘나는 만들면서 많이 먹었으니까’ 라고 웃으며 말했었다. 그러고는 항상 한 대 피우고 온다며 자리를 떴다. 일주일 정도, 상디가 무언가를 먹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크루들은 시선을 교환하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상디의 발에서 나온 파편은 꽤나 큼직한 것이었다. 신경을 안 건드린 게 다행이야. 라고 쵸파가 덧붙인다.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어. 자칫 잘못하면 오른발을 영영 못 쓰게 됐을지도 몰라. 마지막 한 문장은 크루들의 분위기를 얼리기에 충분했다.

“쵸파, 그러니까 네 말은……. 상디가 영영 발차기를 못 하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래. 그 상태에서 조금만 잘못 움직였어도 그렇게 됐을 거야.”

“…….”

의사가 맡은 배역은 여기까지였다. 쵸파가 붕대의 한쪽 끝을 매듭짓고 솜씨 좋게 가위로 잘라낸다. 나미가 옆의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댔다. 그 자리에 상디와 함께 있었고, 또 상디의 사고를 가장 먼저 봤고, 쵸파를 불러온 장본인이었다. 현기증이 나는 지 한 쪽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짚고 있었다. 로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수건을 적셔 상디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조로는 한 쪽 벽에 기대 선 채 팔짱을 끼고 간간히 눈길을 던졌고, 우솝은 벌써 눈물이 괸 눈을 소매로 슥슥 훔치고 있었다. 간신히 머리를 식힌 나미가 그때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선장에게로 향했다. 안 그래도 상디의 부엌에서 나와 선장에게 찾아갈 셈이었다. 너 대체 상디 군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고 멱살이라도 잡고 캐물으려 했는데 그만 요리사가 쓰러져버려 그럴 수가 없었다.

“…….”

저 녀석은 속을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상디를 내려다보는 루피의 눈길은 무심했다. 그 옆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질 않는다. 분위기나 심정 파악에는 누구보다도 민감하다고 자부하는 나미였지만 이번에 한해서는 그 어떤 분위기도 파악해 낼 수 없었다. 특히 저 선장에게서는.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침대 옆을 지키는 그 모습에서는, 동료의 부상을 걱정하는 선장 이상의 마음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선을 조금 밑으로 내리기 전까지 나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미는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것은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일말의 불안. 그리고.

뚜렷한 힘줄이 잡힌 그의 팔 끝에, 힘껏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회복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선의 씨?”

“적어도 3주 이상은 잡고 치료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 완벽히 회복되기 전에 또 무리해서 움직이면 그 때는 정말 최악의 상황을 각오해야 해.”

“……보통 파편 박힌 걸로 그렇게 오래 걸리나.”

“내가 얘기 했잖아, 조로. 신경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다고.”

조로는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쵸파가 확실히 못 박아 얘기하자 쯧, 하고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의술이나 치유에 관해서, 이 배에서 쵸파의 의견에 이견을 낼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주라는 기간이 선고되자 모든 크루들이 동시에 입을 꼭 다물었다. 그 기간에 이 막무가내 요리사를 쉬게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동안 적습이라도 있을 경우에, 그에게 싸우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 요리사는 자신의 일이라면 몰라도 이 배의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불같은 성격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크루들 중 그의 그런 성격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그가 빠짐으로서 메리호의 전력에 크게 부담이 생기지는 않는다. 물론 이는 그가 평소에 하는 역할이 작다는 소리가 아니라, 불의로 생긴 구멍을 메울 수 있을 만큼 메리호 크루들의 전력 배치가 유연하다는 뜻이었다. 이는 요리사를 설득할 수 있는 하나의 계제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계제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현재 침대에 누워서 모든 크루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상디였다.

“3주 동안 적습이 없기를 바라야겠지.”

로빈의 침착한 한 마디가 떨어지자마자 크루들은 경직되었던 몸을 조금 이완시켰다. 불가능에 가까운 소리지만, 지금 당장은 바랄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허락되어 있질 않았다. 어깨를 늘어뜨리며 나미는 계속 루피를 지켜보았다. 선장은 줄곧 미동도 없이 침대의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 어깨에 놓인 짐의 무게를 따져본다면 모든 크루들의 짐을 합친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귀 옆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평소 없이 풀죽은 것처럼 보여 문득 나미의 가슴 한 켠이 싸늘해졌다. 안개처럼 자욱하게 낀 불안감의 너머에 무언가가 서 있었다. 알 듯 말 듯 한 그 불안감의 정체는 그녀 역시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대체 뭐야, 너희 둘.

 



2.

 

눈을 뜨면 부엌의 천정이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선의실의 천정과 약품 등이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이상하게 다리가 무거워 천천히 이불을 들추고 자신의 다리를 본 상디가 숨을 삼켰다. 붕대가 매어져 있었다. 잠에서 깬 머리가 차차 몽롱한 상태를 벗어나면서 대강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아직도 발에 진득하게 감겨오는 통증은, 날카로움을 넘어서 둔하게 다리를 마비시킨다. 그냥 도자기 파편 아니었나? 문득 입안이 까끌까끌해져 옴을 느꼈다. 담배가 어딨더라.

“일어났어, 상디? 다행이다. 그치만 일어나자마자 담배는 안 돼.”

“쵸파……. 웬 붕대야?”

“파편이 신경을 간발의 차로 빗겨나갔어. 잘못하면 영영 발을 쓸 수 없었을지도 몰라.”

“……!”

발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요리를 할 수 없게 된다는 선고와 비슷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상디는 저도 모르게 붕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가볍게 와 닿는 천의 촉감이 이렇게 불쾌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정강이까지 매여 있는 붕대와 그 아래의 피부는 조화되지 못한다. 이래서야 전투는…….

“부탁 하나만 할게, 상디.”

“응?”

"3주야. 앞으로 3주만 참아 줘."

“……쵸파.”

“힘든 얘기일 거라는 건 잘 알아. 하지만, 부탁이야.”

그 순간 상디의 말문이 막힌 것은 단순히 쵸파의 간절한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몸을 조금 일으킨 덕에 바닥을 볼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한 물체를 보자, 심장도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순간 빙글 하고 천정이 돌았다. 빌어먹을 현기증이 도졌다. 온 몸이 심장이 되어 쿵쾅쿵쾅 뛰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 물건을 주워 올렸다. 가만히 손등으로 쓸어본다. 거친 느낌이, 드디어 저를 현실로 되돌려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더욱 무거운 굴레가 되어 자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것에 감긴 빨간 리본이 스르륵, 그의 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왜, 이걸, 여기에.

“그럼 좀 쉬고 있어. 모두에게 상디가 깨어났다고 알리고 올게.”

선의실의 문이 닫힘과 동시에 상디가 힘없이 벽에 몸을 기댔다. 차가운 벽의 온도가 얇은 티셔츠 너머로 사정없이 스며든다. 소름은 끼치지만 정신은 여전히 다른 곳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묻어두었다고 생각한 불안감이 다시 뾰족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손끝으로 손 안의 물건을 꼭 눌러본다. 누군가 자신의 심장 속에 손가락을 넣어 꼭 그만큼의 강도로 꾹 누른 것 같은 고통이 전신으로 퍼졌다. 자신은 ‘그’의 심장을 눌렀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에 대한 복수로, 그는 이곳에 자신의 심장을 떨어뜨리고 갔다. 고의인지 실수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상디가 다른 손으로 시트를 꼭 말아 쥐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식은땀이 차올랐다.

“빌어먹을…….”

그의 손에 들린 밀짚모자가 덩달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어이 상디! 걱정했다고!”

“미안미안. 칠칠치 못하게 컵을 깨뜨려 버려서 말이지.”

“아무튼 요리사 씨, 앞으로는 조심해 줘. 심장이 떨어질 뻔 했어.”

“로빈 쨩의 가슴을 아프게 한 제 죄가 얼마나 큰지!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말은 잘 하는 군, 망할 요리사.”

“뭐야!?”

한 쪽 발에 깁스를 한 채 나타난 상디에게 크루들 전원이 한 마디씩 돌아가며 말을 걸었다. 평소 없이 대단한 환례에 조금 쑥스러워진 요리사는 고개를 돌리고 콧잔등을 긁었다. 평소처럼 대꾸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때 우솝이 상디의 다른 쪽 손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거 루피 모자 아냐?”

“……응.”

“그걸 왜 네가 갖고 있어?”

“흘리고 간 것 같아.”

흘리고 간 것 같아. 다시 한 번 그 말을 뇌리에서 곱씹으며 상디는 들고 있던 밀짚모자에 조금 힘을 주었다. 머리 부분이 쏙 들어가는 느낌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그것보다 더 유쾌하지 않은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선장이 없다는 것이다. 루피는 어디 있어? 라고 물으려다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한 조각의 씁쓸한 농담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원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자리에서 어색해하는 사람은 자기 혼자였기 때문이다. 모든 크루들은 그저 ‘덜렁대기 잘 하는 루피가 떨어뜨리고 간 것’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고, 그들은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결국 가슴에 맺힌 이 불안감 역시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문득 아주 조금 외로워졌다.

“지금 루피는 자고 있어. 도통 눈을 못 뜨네, 아까부터 깨웠는데도.”

상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미가 입을 열었다. 어감의 묘한 울림을 눈치 채길 바라면서.

“그런가요? 하하, 녀석 답지 않네.”

하지만 상디의 반응은 덤덤했다. 나미는 쯧, 하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혀를 찼다. 분명히 그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오지랖 넓게 참견하는 것은 나미의 성격엔 맞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나미는 어젯밤 선장의 옆모습을 떠올렸다. 잔뜩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리던 그 팔도. 그 팔을 보는 순간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 그 때부터였다. 이 정체모를 불안감이 시작된 것은. 당장이라도 요리사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울 것만 같은, 선장의 소리 없는 분노에 나미는 흠칫 놀랐었다. 그러나 그 분노는 동시에 너무도 애절해 보여,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아낸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감정의 간극은 제쳐두고서라도 나미가 가장 궁금한 것은, 선장이 대체 왜 그런 표정으로 요리사를 지켜보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상디 군이 가서 깨워보지 그래?”

“나미, 무슨 소리야! 이 녀석 발을 좀 보고…….”

“됐어, 마리모. 내가 가보지.”

상디가 나미를 쳐다보며, 조로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묘한 침묵이 흐르고, 상디는 나미를 향해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그러고는 조로를 뒤돌아보았다. 조로는 영 불편한 기색으로 난간에 기대 선 채 상디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 상디는 그에게도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걱정해줘서 고맙다는 의미의 미소는 아니었다. 오히려 일말의 비웃음을 담아. 검사 그 자신이 요리사에게 잘못한 일은 없지만, 지금은 누구라도 탓하고 싶었다.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것이 눈물 나도록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웠다.

걱정하고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안 일어나면 그 깁스로 후드려 패서라도 깨워!”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나미 씨!”

 

***

 

남자방은 커튼을 있는 대로 드리우고 있어서인지, 햇빛이 거의 들어오질 않았다. 이래서야 밤인지 아침인지도 구분 못 하겠구만. 저 쪽 해먹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있는 사람 하나가 눈에 띄었다. 되도록 조용히 걸어가려 했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아, 상디는 결국 절뚝절뚝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흰색 모포를 덮고 널브러진 선장. 얼굴 끝까지 이불을 올려 덮어서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물 위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그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모포의 한 부분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으로 보아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모양이다. 구석에 놓여있던 의자를 들고 와 그물 침대 옆에 앉는다. 일어서 있기엔 아직 몸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망할 고무.”

일어나 봐라, 라는 말은 입속으로 삼켰다. 사실 일어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얼굴에 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솔직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건 아냐.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한 주제에 그 얼굴을 다시 어떻게 보라고. 허리에 감겨왔던, 평소보단 낮은 체온. 분위기에 휩쓸린 건지 그저 가슴이 아팠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자신은 분명 동요했다. 언제나 어린아이로만 보았던 그가, 소년과 남자의 경계선상에 서 있던 그가 갑작스럽게 내비친 마음에 자신은 당황했다. 언제나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안일하게만 생각해 왔다. 그런 여유로운 자신에 비해 이 녀석은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 지는 생각지도 못하고. 혼자 어른인 척, 혼자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그러나 정작 중요한 그 녀석은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상디를 괴롭게 했다.

“……뭐가 좋다고 드러누워서 자고 있는 거야.”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밟혔다. 상디가 천천히 손을 내어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 보았다. 해풍에 쓸려 거칠어진 머리카락. 전혀 머리카락에 신경 쓰지 않는 것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가슬가슬한 감촉을 남긴 채 머리카락은 상디의 손가락을 타고 떨어져 내린다. 그렇게 몇 번, 똑같은 행위를 반복할수록 자신의 가슴에 남는 것은 부스러기였다. 절제되지 못한 감정의 부스러기가 쌓여만 가고 있었다. 손을 거둬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하나도 안 좋아.”

그 순간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상디가 손을 거둬들였다. 입으로 추정되는 부분의 모포가 들썩인다. 아마 입술을 달싹이고 있을 것이다. 선장은 모포를 치우지 않았다.

“아파.”

절실한 목소리가 심금을 끊었다. 마음의 현(絃)이 끊어져 버린 것 같았다. 줄곧 팽팽히 당겨졌던 무언가가 강제로 끊어졌을 때의 허무함이 소용돌이쳤다. 묘하게 눈물이 섞인 그 목소리가 가위가 된 모양이다.. 상디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모포 너머로 감겨있을 눈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미안.”

해줄 수 있는 것은 시시껄렁한 사과 뿐. 대체 무엇이 미안한지 자신조차 감을 잡을 수 없는 주제에 상디는 중얼거렸다. 담배연기가 절실했다. 허리를 끌어안던 팔이 생각나서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양은 평소의 1할도 되지 않을 텐데, 어째서 눈이 이렇게 따가운 걸까. 방엔 아무도 의도치 않은 냉기가 흘렀다. 둘 중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사과는 함부로 하는 거 아니라고……말 했잖아.”

“……응, 알아.”

“그런데 왜 사과하는 거야, 상디.”

“…….”

드디어 선장이 모포를 치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상디가 눈을 떴다. 까만 눈동자가 일직선으로 상디를 향해 있었다. 어떠한 회피도 용서치 않을 그 눈빛에 상디는 잠깐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가 눈빛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모든 것은 피부로 전해져 온다. 거부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손을 내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이는 그 손길도, 잠시의 떨어짐도 용납하지 않는 그 눈빛도. 더 이상 자신이 바라보던 소년이 아니다. 그 사실을 눈치 채는 순간 상디는 허리가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허망함에 휩싸였다. 이제 어떻게 돌리려 해도 돌릴 수 없고, 피할 수도 없었다. 뒤통수에 닿는 조금 강한 힘에도 자신은 힘없이 무너졌다. 받아들일 수 없는 만큼 확실히 인식해 버렸다. 이 선장은 도무지 자신을 포기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의 손길이 원하는 대로 허리를 굽혀 입술이 닿는 그 순간에도 상디는 누구를 탓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3.

 

조로가 보기에 상디는 크루들 중 누구보다도 아침이 빠른 남자였다. 새벽부터 식재료 손질을 시작해, 크루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하면 벌써 부엌은 음식 냄새로 가득 찬다. 단순히 부엌 관련일 뿐 아니라, 청소 빨래 다림질 등 꽤 섬세한 손길을 요하는 작업들을 상디는 척척 해냈다. 레이디들의 손에 물 한 방울 묻힐 수 없어! 라는 슬로건이었지만, 정작 그 레이디들은 ‘상디 군은 집안일(?)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주제에 그러면서도 손은 빨라서, 척척 일을 해치워나가는 스타일이다. 사실 루피나 우솝, 쵸파 중 누군가 한 사람이 도와주러 가면 괜히 방해만 된다며 더 성질을 내는 바람에 도와주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도와주다가 뭔가를 망쳤는지, 상디가 버럭버럭 성질을 내는 소리가 배 안에 울릴 때면 조로는 낮잠을 자다 깨 멍한 머리로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그러게 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긁어 부스럼. 삼인방의 도움을 설명하는 데 이만큼 적절한 단어는 없을 것이라고, 조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녀석들을 믿은 내가 잘못이다, 당장 그거 내려놓고 꺼져!’ 라고 상디가 외칠 때마다 편하게 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로는 그런 상디가 참 사서 고생을 하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청소, 빨래, 다림질, 바느질… 그런 것들은 여자에게 맡겨도 될 텐데 굳이 자청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종종 답답하게 느껴졌다. 물론 덕분에 조로 자신은 편했지만. 게다가 가끔 시키지도 않았는데 간식이랍시고 무언가를 들고 오는 건 조금 고맙기도 했다. 이러다가 모험이 끝나게 된다면, 그리고 떨어져 지내게 된다면, 이미 적응되어버린 녀석의 요리 때문에 어떤 요리도 못 먹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

항상 그렇게 빠릿빠릿하던 요리사가 이상하게 느껴진 건 최근의 일이었다. 발 부상(이라기에도 뭣하지만)을 당한 이후로, 아니 그 이전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에 띄게 풀죽은 모습이었다. 깨닫고 보니 간식을 들고 오는 일도 눈에 띄게 줄었고, 가끔 식사에서 느껴지는 맛도 평소와는 달랐다. 혀에는 둔감한 자신이 이렇게 알아챌 정도라면 상대적으로 민감한 여자들은 어떨까, 하고 식사시간에 힐끗 눈치를 보면, 별로 이상한 표정은 없어서 제 혀가 이상해 진 것일까 싶었다. 하지만 식사 후에 갑판으로 나온 로빈과 나미가 소곤거리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요즘 상디 군이 이상하지?”

계속 수련을 하는 척 했지만, 저절로 귀가 그 쪽으로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갑판의 난간에 기대서서 바다를 바라본 채, 여자 둘은 해풍을 고스란히 맞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요리사는 뒷정리를 한다며 부엌에 처박혀서 한 시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루피, 우솝, 쵸파는 우솝이 새로 개발한 신무기를 시험한다며 갑판 한 구석에서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갑판 뒤 후미진 곳에서 바벨을 들고 근육 단련을 하는 자신을 찾는 사람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여자들도 자신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거라면, 요리사 씨 말고 선장 씨도 조금 위험하지 않아?”

로빈의 목소리가 들려, 조로는 바벨을 들고 있던 힘을 조금 늦췄다. 루피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하자 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문득 조로의 뇌리에 쓰게 웃던 상디가 떠올랐다. 자신은 나름 몸이 불편한 그에 대한 배려랍시고 나미를 제지했는데, 오히려 당사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루피에게 가 보겠다고 했다. 2층까지 올라가는 데 당장이라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것만 같은 불안한 동작. 그러나 정작 자신을 동요시킨 것은 뒤돌기 전, 그가 조로에게 보인 미소였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걱정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힘이 빠져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팔에 힘을 준다. 손아귀에 힘이 더해져서일까, 손이 조금 뜨거워진 것 같았다.

“루피도 요즘 들어 이상하긴 해. 저것 봐.”

나미가 손가락을 펴 삼인방을 가리켰다. 물론 로빈에게 말한 것이겠지만, 조로의 눈길도 어쩔 수 없이 그곳을 향한다. 구석에 모여 우솝의 신무기인 ‘파워 로켓’을 구경하고 있는 삼인방의 뒤통수가 올망졸망하다. 처음엔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조로는 잘 알 수가 없었지만, 계속 주시하고 있으려니 확실히 루피 녀석의 낌새가 이상했다. 신난 우솝과 들뜬 쵸파의 목소리만 시끄럽고 누구보다도 크게 들려야 할 루피의 감탄사는 거의 들려오질 않는다. 우솝이 이것저것 설명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맞장구치는 목소리는 쵸파의 것 뿐. 확실히 이상하군. 조로는 잠시 바벨을 내려놓았다가, 하나를 더 올리고 다시 들었다. 팔에 감기는 무게감이 확연히 달라진다. 등 근육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 이 배에서 목소리가 제일 커야 할 녀석인데, 요즘 거의 목소리가 안 들리다시피.”

로빈이 맞장구치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조로는 혀를 쯧, 하고 찼다. 여자라는 동물들은 쓸데없이 감이 좋다. 이래서야 자신이 동요했을 땐 얼마나 빨리 알아챌지가 궁금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로빈, 루피랑 상디 군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

바닷바람에 쓸리는 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누르며 나미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나도 동감이다. 조로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상디가 깨워서 나온 루피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그 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조로는 혀를 내어 입술을 살짝 쓸었다. 이만큼 들었다 놨다 하면 익숙해 질 법도 한데, 바벨의 무게는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더해지는 것만 같다. 어느새 얼굴에 땀이 흘렀는지, 혀에 소금기가 느껴졌다.

“한 번 둘을 잡아놓고 취조를 하든……루피!”

무언가가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평이한 어조로 내뱉던 나미의 언성이, 말꼬리로 가서 급격히 높아졌다. 새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놀란 조로는 저도 모르게 바벨을 떨어뜨렸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선내(船內)를 울렸다. 갑판에 금이 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던 조로는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치 슬로 모션처럼, 루피가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묘하게도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태양의 역광을 받아 루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입을 벌리고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루피가 바닷물 속으로 사라졌다. 몇 번 기포가 올라오더니 잠잠해진다. 경악이 뒤덮인 침묵이 갑판을 휩쓸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우솝이 그때야 상황파악을 한 듯 비명을 지른다.

“루피가 버튼을 잘못 눌러서, 로켓이 나가 버렸어! 어어어, 어떡하지!”

수련할 때는 검을 풀어놓았기에 다행이다. 덕분에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칫, 작게 혀를 차고 조로가 난간 쪽으로 달려가려는 찰나, 나미의 새된 목소리가 또 한 번 공기를 뒤흔들었다.

“상디 군!”

뭐…….

발에 급제동을 건 듯 멈춰선 조로의 눈에, 망설임 없이 바다로 뛰어드는 상디의 뒷모습이 보였다. 곧 하얗게 물이 부서지고, 그가 흩뿌린 물방울들이 갑판까지 튀었다. 졸지에 물벼락을 뒤집어 쓴 여자들은 가만히 굳어있었고, 조로는 욕을 씹어 뱉었다. 뛰어드는 그 순간 그 얼굴을 보아 버렸다. 묘하게 기분이 나빠져 온다. 웃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망할 요리사. 맨몸에 튄 물방울이 체온을 한꺼번에 빼앗아 가는 모양인지,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했다.

 

***

 

망망대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바다가 있을까. 바닷물 속으로 들어온 상디는 잠시 숨을 골랐다. 갑자기 차갑게 다가오는 바닷물은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갑판에 내던지듯 벗고 온 구두가 문득 생각났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자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헤엄쳐 가면서 상디는 자신이 가라앉고 있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몸에 휘감겨오는 와이셔츠가 불편했다. 수압이 자신의 가슴을 꼭 누른다. 바다라는 생물이, 자신을 감은 채 한없이 하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일단 ‘저것’을 건지고 봐야 하는 것이다. 준비운동 없이 물에 들어와 점점 저리기 시작하는 다리가 거추장스럽다. 필사적으로 헤엄쳐 다가갔다. 감은 눈이, 뭐랄까, 고통스럽다고 하기 보단 평안한 숙면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허리 쪽을 끌어안고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도록 했다. 단단히 끌어안고 수면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데 어깨에 강한 힘이 가해져 상디는 순간 숨을 내뱉을 뻔 했다.

‘……!’

고개를 돌려 바라본 쪽에서, 선장이 씨익 웃고 있었다. 온 몸에 힘이 빠져버릴 뻔 했지만 상디는 가까스로 몸을 꼿꼿이 유지했다. 나가기만 해 봐. 이유 불문하고 일단 두 번 정도 차올린 다음에 사정을 듣겠다. 상디는 이를 악물었다. 이유 없이 억울한 느낌이었다. 몇 번이고 바다에 빠진 그를 구해주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손해 보는 느낌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급박하게 뛰어든 것도 처음이었다. 바라티에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항상 그의 ‘건지기’ 담당은 자신이었는데도.

‘…….’

상디는 일단 검지를 세워 올라간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그의 발을 가리키자 문제없다는 듯 엄지를 세운다. 쥐가 나지 않았냐고 묻는 뜻이었고, 괜찮다는 의미였다. 의식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축 늘어지면 상디 혼자 들어올리기에는 버거웠을 것이다. 함께 발버둥을 쳐 주면 쉽게 올라갈 수 있겠지. 상디는 속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루피가 어느 샌가 자신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당황한 상디가 저도 모르게 입모양으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기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젠장, 이렇게 되면 지체할 시간이 없어…. 선장은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볼 뿐이다. 얼른 올라가야 된다니까! 공허히 수중(水中)을 찔러대는 검지를 살짝 감싸는 손이 있었다. 놀란 나머지 상디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빼버렸다. 곧 둘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폐에 남은 산소가 희박했다. 일초라도 빨리 올라가야 하는데……. 빌어먹을.

막 다시 몸에 힘을 넣고 물을 차오르려 하는 순간 목을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로 앞에서 선장이 웃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짓거리야! 체온이 급격히 내려가고 있었다. 숨은 차오르고, 몸은 추워진다. 어서 나가지 않으면……. 그 순간 루피가 조금 더 몸을 붙였고, 곧 입술이 맞닿아왔다.

‘……!’

의외도 한참 의외인 상황. 의문과 경악으로 상디는 눈을 크게 떴다. 위를 향해 하늘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도 진지하게 감긴 눈. 그 속눈썹에까지 스며든 투명한 바닷물은, 그 속눈썹에 공평히 햇빛을 드리워 주고 있다. 깨닫고 보니 어느 새 선장의 팔이 단단히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분명히 자신보다 더 식어 있어야 할 그의 몸이 더없이 따뜻하게 느껴져 상디는 무너질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이라는 남자는 더없이 유약해서, 몸으로 느껴지는 한 줄기 체온에도 안도한다.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그런 곳에서 느낄 수밖에 없다. 진공에 가까운 무음이 사정없이 그들을 찍어 눌렀다.

‘올라가자.’

금방 떨어져 나간 입술이 그렇게 말했다. 상디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일단은, 올라가고 나서의 일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달래듯 중얼거리며 강하게 물을 차올렸다. 오른발에 감긴 깁스가 물에 젖었는지 제법 묵직하게 매달린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자신을 의지해 있는 체온이 문득 너무나 큰 무게감으로 다가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산소를 나눠 받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몸은 이렇게 가벼운 걸까. 상디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

 

“걱정했잖아! 너 때문에 상디 군은 또 물속에 들어갔다 왔다고!”

“미안미안- 하지만 우솝의 발명품이 나쁜 거야! 말도 없이 팔이 나왔다고.”

“그러길래 내가 버튼 함부로 누르지 말랬잖아, 루피! 누구를 탓하는 거야!”

“아- 시끄러워.”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루피를 기다리는 것은 분노에 가득 찬 나미의 주먹이었다. 로빈 역시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나미가 화내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다. 수련을 끝내고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조로 역시 난간에 기대 선 채 루피가 혼나는 양을 보고 있었다. 으아앙, 루피, 걱정했어!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아이같이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쵸파가 냉큼 루피에게 달려들었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으며 물러난 나미로 인해 상황은 종료되었다. 루피는 쵸파를 꼭 끌어안은 채 웃고 있었다. 상디 군, 상디 군도 한 마디 따끔하게 해 줘! 이 철부지 녀석, 저번에 모자 빠뜨린 지 얼마나 됐다고… 아뇨, 됐습니다 나미 씨. 나미 씨가 충분히 혼낸 것 같은걸요. 씨익 웃는 상디를 보고 크루들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상디는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어이 너…….”

와이셔츠의 단추를 끄르며 걷고 있는 상디를 조로가 불러 세웠다. 상디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물에 흠뻑 젖은 바지가 철벅 소리를 내며 갑판에 끌린다. 하지만 조로는 상디를 불러 놓고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 말을 기다리듯 그 등은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 있다. 담배를 꺼내려는지 주머니를 뒤적이는 것을 보고, 조로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담배는 젖었을 텐데.

“할 말 없으면 가 본다. 옷 갈아입고 점심 준비를 해야 돼서 말이지.”

“……야.”

미련 없다는 듯 휘적휘적, 그 긴 다리로 자리를 떠 버리는 상디를 지켜보던 조로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여전히 불편해보이는 뒷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무렇지 않게 물을 수 있을 만큼 조로는 뻔뻔한 인종이 아니었고, 또 캐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할 상디도 아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남자방으로 들어가는 상디를 뒤쫓을 만한 용기도 조로에겐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용기가 없다고 하기 보다는, 그래야 할 필요를 못 느꼈을 뿐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왠지 변명을 하는 것 같아 조로는 기분이 나빠졌다. 자꾸만 그 쓴웃음이 눈에 밟혔다.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은 조로가 뒤돌았다. 그래, 어차피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외면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자꾸 비틀려왔다. 정말로 아무 상관없어? 정말로?

끝까지 책임 질 수 없다면 관심부터 갖지 마. 조로는 자기 안의 자신에게 낮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쓸데없는 덤터기를 쓰는 것은 사양이다. 저 망할 요리사가 어떻게 되든, 자신은 자신의 목표만을 달성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저 녀석은 동료이지만, 동료 사이에서도 숨기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있을 터이다. 그것을 쓸데없이 파헤칠 만큼 조로는 한가하지 않았다. 단지 신경 쓰이는 것은.

쵸파를 끌어안고 갑판을 뒹구는 루피가 조로의 눈에 들어왔다. 우솝은 루피가 잘못 건드린 로켓을 고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루피의 입가에 엷게 떠오른 미소가 묘하게 조로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엷은 핑크색 와이셔츠로 갈아입은 요리사가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조로는 저도 모르게 요리사 쪽으로 던졌던 시선을 다시 선장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약간 긴장했다. 선장은 쵸파를 끌어안고 있었지만 전혀 쵸파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 시선의 끝이 향하는 곳으로 눈을 돌린 조로는 그만 숨을 몰아쉬고 말았다.

 

이미 닫혀버린 지 오래인 부엌문. 루피의 시선은 미동 없이 그 곳을 꿰뚫고 있었다.




4.

 

분홍색 앞치마의 끈을 허리 뒤로 돌려 꽉 묶는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어젯밤 빨래를 마치고 새벽에 일어나 다림질까지 한 앞치마는 주름 하나 없이 말끔하고, 완치되어 깁스를 푼 다리는 가볍기 그지없다. 비장한 표정으로 앞치마의 끈을 묶은 남자는 그 표정 그대로 조리대에 기대어 섰다. 냉장고 문에 포스트잇이 한 장 붙어 있다. 오리 모양의 제법 귀여운 냉장고 자석으로 고정된 그 포스트잇의 맨 위에는 <오늘의 메뉴> 라는 큰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침은 프렌치토스트와 샐러드, 베이컨, 그리고 레이디들을 위한 블랙커피.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사내놈들은 오렌지 주스나 처마시라지’ 라고 씌어 있었다. 분명 어젯밤에 오늘의 메뉴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적어 넣은 것인데도 다시 읽어보니 웃겨 상디는 피식 웃었다.

오른손으로 달걀을 깨면서 왼손으로는 식빵을 사람 수만큼 정확히 세서 포개놓는다. 이 정도는 일류 요리사라고 자부하는 상디에게 있어 매우 쉬운 일이었다. 나미 씨, 로빈 쨩은 한 장씩, 우솝, 쵸파, 마리모, 나는 두 장씩.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을 떠올린 상디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고무 녀석은? 대체 몇 장을 먹을까? 몇 년을 이 배의 요리사로 썩어나도 매 식사 때마다 예측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 선장의 위장 크기였다. 이 정도면 되겠지 싶어 자신 있게 내놓으면 턱없이 부족하다며 난리를 치고, 그 난리가 성가셔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놓으면 남아서(이건 아주 가끔 있는 일이긴 했지만) 점심 메뉴를 저녁까지 먹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한다(상디에게 이것은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레이디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불평도 매우 괴로웠다). 다섯 장? 그러고 보니 어젯밤의 불침번이……. 루피였군. 아니, 다섯 장으로는 안 되겠어. 열 장이다. 상디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 식빵 봉지를 뜯었다.

 

***

 

상디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비유이지만,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은 아침식사였다. 쵸파와 우솝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바람에 결국 두 사람(?)의 몫으로 두 장을 더 구워야 했다. 게다가 선장……. 루피를 떠올리며 상디는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개수대를 짚고 버텨 섰다. 대체 열 장이 모자라다니, 저건 사람이 맞는 걸까. ‘잠깐 너,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냐?’ 하는 나미의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선장은 히 웃으며 상디에게 빈 접시를 내밀었다. 네네, 알겠습니다……. 상디는 한숨을 푹 쉬며 그 자리에서 다섯 장을 더 구웠다. 제길, 다음 섬의 쇼핑 리스트에 식빵도 추가다. 세 자루면 일주일은 가겠지. 가끔은 자신도 느긋하게 앉아서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 크루들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루는 데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마리모 녀석처럼 깔끔하게 먹고 일어서주면 얼마나 좋……!

이런 저런 생각의 끝에 조로의 얼굴을 떠올린 상디가 조금 몸을 굳혔다. 잔업을 안 시킨 게 고마워서 ‘간식이라도 만들어다 줄까?’ 하고 물었는데, 이상한 눈길로 잠시 자신을 쳐다보더니 짧게 ‘됐다.’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이제까지 이런 일은 없었는데. 간식을 거절하는 것까지는, 성가시니까, 하고 납득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의 시선이 영 신경 쓰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조금 기분이 나빠지려 했지만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은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자신이 기분 나쁠 때 조로가 붙잡고 캐묻는다면 자신 역시 더 기분이 나빠질 테니까. 가끔은 무언(無言)의 배려도 필요한 거야. 상디가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으아악!”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그 순간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려 그만 상디는 막 집어 올렸던 접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접시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개수대를 굴렀지만 다행히 깨지는 일은 없었다. 간신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멈춘 상디가 홱 돌아본 쪽에는 의아한 표정의 선장이 서 있었다.

“놀랐잖아! 기척 좀 내고 다녀!”

“문 열고 들어와서 닫을 때까지 상디는 몰랐잖아.”

바짝 긴장한 온 몸을 진정시킨 상디가 숨을 몰아쉬었다. 루피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냉장고에 기대 서 있다. 문득 번호 자물쇠를 쳐다보는 시선이 조금 애절한 것 같다고 상디는 생각했지만, 곧 지워버렸다. 평정을 가장한 손길로 다시 개수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람 수만큼의 접시가 거품에 싸여 닦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라도 물고 있었다면……. 아니, 담배를 안 물고 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떨리는 입 주위 근육을 따라 담배가 떨리기라도 한다면, 그것만큼 자신의 동요를 잘 표현해주는 일도 없을 테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그 눈빛과, 그 마음과 마주치는 순간 마음이 무섭게 떨려오기 시작한다. 평정을 가장하는 것도 최근에 들어서야 익숙해진 일일 뿐, 처음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선장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조금 용기가 생긴다. 다음에 마주치면 정말 평소에 하던 것처럼 해야지. 하지만, 그 다짐도 저 멀리서 밀짚모자의 꼭지가 보이기 시작하면 마치 개수대 속 접시에 묻은 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차가운 물속에서 맞닿아온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아 와이셔츠 소매로 박박 닦아내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러고 나서 옷감과의 마찰로 벌게진 입 주위 뿐 아니라 얼굴 전체가 붉어지는 일을 도저히 상디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제길…….’

이런 자신의 동요와는 다르게, 선장은 평소와 똑같았다. 상디는 왠지 모르게 조금 분해졌다.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라기보다는 입맞춤에 가까웠던 그 날의 일이 다시 되풀이 되는 일은 없었고, 혼란스러워 하는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루피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식사 때마다 양(量)이 달라져 자신을 열 받게 만들고, 식후에는 우솝과 쵸파와 함께 갑판에서 시답잖은 장난을 친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 사이에 하나씩 더 끼운 ‘루피식(式) 1일 5식(食)’을 요리사에게 강요한다. 평소의 루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변화 아닌 변화를 상디는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왜 루피 아닌 자신이 이렇게 갑갑해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어쩌면 루피는 내가 아니라 냉장고가 목적인 건 아닐까? 냉장고에 기대서서 자물쇠를 바라보는 눈길을 보니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왠지 모르게, 까닭 없이, 비참해졌다.

“……용건 없으면 가라.”

그때야 핫, 하고 선장은 냉장고로부터 떼어낸 시선을 상디에게 돌렸다. 옆얼굴에 와 닿는 노골적인 시선을 느끼며 상디는 계속 접시들을 씻어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쳐다보지 말아야지. 쳐다보면 괜히 인식하게 된다. 어쩔 수없이, 긴장해 버린다. 그렇다면 아예 시야에 담지 않으면 된다. 긴장하기 전에 무시해 버리면 된다. 하지만 다른 한 편의 자신은 이 방침이 가장 안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껏 해 왔던 무시의 연장선에 불과한 것인데도.

“용건이 왜 없어!”

“뭔데, 그럼.”

“여기 있잖아.”

자신의 앞치마 앞섶을 쿡쿡 찌르는 손가락을, 상디는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조금만 시선을 올리면 그 능청스러운 미소와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그 정도의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그를 마주한다는 것인지. 안하무인도 정도가 있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잔뜩 온기를 머금은 목소리에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상디 때문에 조금 머쓱해 졌는지, 루피는 손을 거두고 헛기침을 했다.

“내가 용건이라고?”

“응.”

“……할 말이 뭔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주본 루피의 표정에는 당혹이 서려 있었다. 어라, 이게 아닌데.

“……루피. 알겠어?”

“응?”

깨끗이 씻어낸 마지막 접시를 뒤집어 놓고, 상디는 고무장갑을 벗었다. 앞치마도 벗어서 행거에 걸었다. 마지막으로 개수대 주변으로 묻은 거품을 닦아내고 드디어 상디는 루피와 마주보았다. 어느 새인가 그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었다. 물론 불은 붙어있지 않았지만.

“난 남한테 휘둘리는 건 딱 질색이야.”

“그건 나도-”

"그런데 넌 지금 날 휘두르려 하고 있어."

“…….”

“아니, 이미 난 충분히 휘둘린 느낌이야. 다른 사람도 아닌 너에게.”

“…….”

“언제까지 날 지치게 할 셈이야?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기분이냐? 즐거워?”

“나는…….”

“간식을 찾는 거라면 두 번째 서랍에 있다. 알아서 찾아 먹어.”

지나쳐 가는 상디를 차마 잡지는 못하고, 루피는 거칠게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

 

“……빌어먹을.”

찰칵, 찰칵 하는 공허한 소리로 라이터는 자신 안의 가스가 다 떨어졌음을 알렸다. 몇 번 더 시도해보던 상디가 결국 제 분에 못 이겨 라이터를 바다로 던져버렸다. 은빛 라이터가 천천히 흔들리며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제법 바람이 거칠다. 요 며칠 새 날씨가 이랬다. 그래, 마치 선장 녀석이 부엌 테이블에 앉아 코코아를 마셨던 날처럼.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열 받는 일투성이다. 뒷말은 삼켜버린 채 상디가 난간에 기대어 섰다. 가끔 식후에 레이디들이 이 자리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담소를 나누던 것이 생각났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에 눈이 시려왔다. 고무 녀석을 구하러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저 물에 몸을 던진 것이 몇 번일까. 아직도 입에 물린 담배가 바닷바람으로부터 소금기를 흡수해 가는 듯 무거워져 가고 있었다. 불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입맛이 쓰다. 담배를 두 개비는 연달아 피운 것 마냥.

“……불도 안 붙이고 담배 맛 음미 중이냐.”

찰칵, 하고 눈앞에서 불이 반짝했다. 흠칫 놀라 바라본 옆에는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것이 신기한 검사 놈이 서 있었다. 손에는 새 라이터를 든 채였다. ……고맙다. 입으로 웅얼거리듯 말하고 상디는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작은 인사였지만 조로는 들었을 것이다. 지척이었으니까. 조로도 라이터를 쓸 줄 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하지만 이 말을 밖으로 내면 돌아올 응대를 예상할 수 없어 그냥 입을 다물고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라이터는 어디서 찾았냐?”

“네 서랍.”

“멋대로 열었냐……!”

“네가 라이터를 던지길래, 가스가 떨어졌나 했다.”

“…….”

아까 혼잣말로 내뱉었던 이놈이고 저놈이고, 의 뒷말은 아무래도 ‘열 받는 일투성이’ 보다는 ‘서투른 배려 뿐’ 이라고 고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엉성한 배려도 그만 마음깊이 담아버리고 만다. 심약해졌다는 증거겠지. 문득 심란해진 상디가 깊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조로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제법 거친 바람이 상디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앞머리를 왼손으로 꾹 누르며 상디는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워댔다. 사실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선장 하나로도 머릿속이 가득 차서 다른 걸 생각할 여유도 없을뿐더러, 이런 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는데.”

“……하?”

“네놈,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너야말로……. 라고 묻고 싶었지만 상디는 꾹 참았다. 바다를 바라보는 남자의 옆얼굴이 더없이 진지해서일까, 아니면 익숙잖은 배려가 눈물 나도록 고마워서일까. 오늘 이 남자에겐 평소처럼 거친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평소였다면 ‘네가 무슨 상관이냐, 자기 앞가림이나 해라 이 마리모야’ 라고 말했겠지만. 강한 바람 때문일까, 조금 찡그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무슨 의도로 물어보는 걸까……. 하긴 내가 요즘 얼빠진 짓을 많이 하기는 했지. 다시 한 번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며 상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더. 루피랑은 무슨 일이냐.”

순간 담배연기를 뱉어내지 못한 채 삼켜버린 상디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목구멍에 매캐한 연기가 걸려, 눈물콧물이 사정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괜찮냐, 하고 조금 더 다가오는 조로를 손짓으로 제지하고 안주머니에 항상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 일단 얼굴을 닦아낸다. 목이 매웠다. 동요를 들켜버린 것 같아 속상했지만 이미 루피를 연관시켜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남의 일에 관심 없기로 유명한 롤로노아 조로가 이런 식으로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꽤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상디로서는 더 이상 도망칠 비상구도 없었다. 위험해. 진심으로 어떤 때보다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이유는 댈 수 없지만.

“이 놈이고 저 놈이고,”

“?”

“쓸데없는 배려 투성이라니까.”

기침이 멎자마자 상디가 꺼낸 말이었다. 의문을 가득 담은 채 조로의 눈썹이 조금 치켜 올라갔다. 하, 하하. 하하하. 쓰게 웃으며 상디가 반 정도 짧아진 담배를 바다로 던졌다. 라이터와 정확히 같은 위치였다. 심해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수면에 잠시 떠 있던 담배꽁초는 물을 먹어 무거워졌는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디가 조로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을 잇는다.

“나랑 너는 좀 비슷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냐.”

“네놈은 남한테 휘둘리는 걸 제일 싫어하잖아.”

“제일, 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

“나도 그래.”

“…….”

상디가 조로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 눈빛에 담긴 마음을 조로가 완전히 읽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적어도 조로는 방금 자신의 발언이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날 휘두르려고만 하는데, 슬슬 질리기 시작한다. 넌 어떠냐.”



5.

 

스스로도 자신이 쓸데없는 과민반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모를 리 없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어째서 그 과민반응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여기까지 질문이 넘어오면 그에 대한 답은 쉽사리 꺼낼 수가 없었다. 그저 자존심이 상해서? 자신을 둘러싼 기류가 이상하다는 게 꺼림칙해서? 아니, 그것은 충분한 답이 되지 않았다. 도출할 수 있는 답은 딱 한 가지뿐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경솔하게 그것을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신경질적으로 주머니를 뒤지던 남자는 곧 팔을 늘어뜨렸다. 갑판 특유의 나뭇결이 손에 쓸려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크루들이 모두 내린 배는 조용했다.

 

***

 

새로 발견한 섬에 정박한다고 했다. 배는 멈춰 있었고, 배 주위로 하얗게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배를 멈춰놓기 위해 바다 속으로 떨어뜨린 쇠사슬이 물에 쓸려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흰 모래와 비취색 바닷물. 언뜻 물 밑으로 쓸려온 물풀들이 투명한 녹색으로 비치고, 나무에서는 처음 보는 새들이 불청객에게 방문 사유를 묻듯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섬은 무인도 같아. 바캉스 겸으로 오면 딱 좋았겠네. 라고 나미가 지침을 들여다보며 말했고, 그녀가 자신을 쳐다볼 때까지 기다려 상디가 파수를 자처했다. 나미 씨, 전 오늘은 쉬고 싶은데요.

-어라, 안 내릴 거야, 상디 군?

-네, 몸이 좀 안 좋아서. 무인도라 식량을 구할 수도 없을 테고.

-……. 쵸파한테 얘기는 해 봤어?

-좀 쉬면 나을 것 같아서요.

-아깝네. 상디 군도 기분전환 겸 내리는 게 좋지 않겠어?

나미는 한참 상디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 상디 군이 정 그렇다면야 내가 뭐라고 하겠어. 푹 쉬고 있어. 저녁 먹기 전까진 돌아 올 테니까. 상디는 우솝이 제 몸만큼 큰 배낭을 짊어지는 걸 곁눈질하면서 나미의 말을 들었다. 조로가 검을 차면서 뭐라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아마 내리지 않고 잠이나 자려고 했지만 저 빌어먹을 요리사 때문에 귀찮게 됐다는 말이겠지- 상디는 개의치 않았다. 쵸파는 약초를 캐오겠다며 작은 주머니를 챙기는 참이었다. 밀짚모자를 오른손에 든 루피가 시선에 들어왔을 때, 상디는 그만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시선의 파편조차 스치고 싶지 않았다. 담배를 찾는 손가락이 조급하다고, 자신마저 눈치 챘는데.

나미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몸은 건강했다. 여느 때만큼 상태가 좋았다. 기브스를 풀고 난 이후로 특히 다리가 가벼워진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강점이었다. 아무래도 기브스 그 자체가 굉장한 스트레스가 된 것 같다. 상디는 구둣발로 갑판을 탁, 탁 울렸다. 발에 와 닿는 느낌이 좋았다.

섬에 내리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무인도라 식량을 구할 가능성도 거의 없었고, 쓸데없이 조를 짜서 움직이다가 불편한 상대와 마주칠까봐 껄끄러웠던 것이다. 그 불편한 상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장 한 명뿐이었다. 그러나 어제부로 한 명이 늘어났다. 머릿속의 리스트에 나머지 한 명의 이름을 적어 넣고 상디는 결국 담배를 꺼냈다. 은빛 케이스 안에 정렬된 담배 여섯 개비. 오른손으로 한 개비를 집어 들고, 왼손으로 뚜껑을 닫는다. 여름섬답게 따가울 정도로 쨍쨍한 햇빛이 은색 케이스에 되비쳤다. ……빌어먹을 놈들. 쌍으로 뭐 하는 짓이야.

부엌 청소를 하고, 거의 한 달 전부터 쓰기 시작했던 식료품 리스트 정리를 마무리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몸이며 정신이며 혹사시키고 싶었다. 그래야만 했다.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라 또 혼자 청승을 떨기엔 혼자만의 시간이 아까웠다. 원래부터 부엌이야 상디가 잘 정리해 놓고 있었으니 별로 청소할 것도 없었지만, 큰 맘 먹고 부엌과 연결된 식료품 창고까지 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 문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밖을 쳐다보자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다. 아직 모두가 돌아오려면 조금 남은 것 같으니, 저녁 준비나 해볼까. 상디는 잠시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부엌문을 열고 갑판으로 나선다. 그 때 섬에서 나오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

머리 위로 그늘을 만들고 그 그림자가 누구의 것인지 파악하려고 애쓰는 상디를 그 쪽도 보았는지, 조금 걸음이 빨라졌다. 확실히 정박 당시보단 조금 바람이 거칠어졌다. 기온도 내려간 것 같았다. 이런 데서도 일교차냐. 작게 혀를 차다가 상디는 그대로 몸을 굳혔다. 눈 주위가 짧게 경련했다. 자세히는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은 머리를 손으로 꾹 누르고 있었다. 머리에 얹힌 뭔가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막으려는 듯. 왜 혼자 돌아오고 있는 걸까. 아까 전까지 혼자 실컷 몸을 혹사시킨 피로가 한꺼번에 덮쳐오는 것만 같았다.

“상디!”

저도 모르게 뒤돌아서서 부엌문을 열려는 상디의 등에 루피의 목소리가 꽂혔다.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상디는 멈춰 섰다.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빌어먹을. 그러나 그대로 모른 척 하기에는 그 목소리의 울림이 너무도 절실해서.

“상디!”

몇 번씩 안 불러도, 네 목소리는 충분히 크다고. 상디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웃을 여유가 남아 있었는지는 차치해 두더라도, 왠지 웃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탁탁탁, 하고 급한 발소리가 흰 모래에 묻혀 조금은 둔하게 들려왔다. 백사장을 한달음에 달려온 그 발소리가 고잉메리호에 올라오고, 그 기세로 조금도 쉬지 않은 채 상디의 뒤까지 달려왔다. 몰아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상디는 저도 모르게 왼손을 올려 제 머리카락을 훑어 올렸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되어. 뒤 돌아봐야 할까. 뒤, 돌아봐야, 하겠지.

“……상디.”

마지막으로 상디의 이름을 부른 목소리가 멈췄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그 고동은 바로 뒤에서 힘차게 뛰었고, 바람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이 고요한 배에서 상디는 그 고동을 너무도 잘 들어 버렸다.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문 손잡이에 올려 있던 오른손이 스륵, 떨어져 내렸다.

“나는 상디를 휘두르거나 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알고 있다, 멍청아. 떨어져 내린 오른손을 그대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어 상디가 찾아낸 것은 담배 케이스였다. 고개를 조금 떨어뜨린 채 담배 케이스를 열고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선장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호흡을 고르고 있다. 등 뒤로 느껴지는 그 움직임이 사무치도록 상디의 가슴에 닿아왔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무릎에 손을 짚은 채 온 몸으로 숨을 쉬고 있겠지. 대체 어디서부터 달려온 걸까, 이 철부지 선장은.

“…….”

그러나 상디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호흡이 잦아들기만을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담배의 끝이 석양에 맞닿아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선장의 호흡이 평소의 그것과 차차 같아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뱃전에 부딪히는 물소리는 정박 때와 다르지 않은데. 나머지 크루들은 섬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기어 나올 기미조차 없었다.

“상디.”

나를 억지로 뒤돌아보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은, 너만의 서투른 배려일까.

상디가 어깨를 떨어뜨렸다. 요 며칠 새 마음과 다르게 몸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서투르기 그지없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상디는 잘 알고 있었다. 한 치의 감정적 망설임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선장의 본의(本意)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한 것은 상디 자신이었다. 두 살 많다든가, 인생 경험이 그만큼 풍부하다든가 따위의 인생론이 아니다. 적어도 자신은 이런 감정의 동요를 ‘그’보다는 자주 겪어보았고, 나름대로 그에 대한 대처는 충분히 익혔다고 자부해왔다.

“……미안해.”

그러나, 역시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이 남자의 위장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딱히 대처랄 것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좋아해. 나도. 그럼 사귀자? 이런 뻔한 이야기로 갈 수는 없었다. 등 뒤에서 사과를 해 오는 목소리도 역시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으리라. 자신은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신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아이러닉하게도, 서로에 대한 필요가 둘을 멀리 떨어뜨리고 있었다.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선장은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몰랐지만, 적어도 상디는 그렇게 생각했다. 쓸데없는 감정이 끼어들어 망설이게 되는 것은 시간 낭비였고 감정 소비였다. 그들이 서 있는 이 곳, 바로 ‘바다 위’에서는 특히 더.

“뭐가 미안한데?”

그것만큼은 잘 알고 있다. 선장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사과를 하고 있다는 것. 선장이 이렇게 나올 때마다 자신은 결국 져 주고 넘어갔다. 상디 군, 루피 응석 좀 그만 받아줘. 하고 나미가 말했지만 어째서일까, 상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의 생명을 맡고 있었다. 수중(水中)에서 만큼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그가 자신을 의지해 올라갈 때 상디는 까닭 없는 안도감을 맛보았다. 자신은 그의 생명을 맡고 있다. 단지 이 한 줄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의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

그 ‘무언가’는, 신념이라든가 긍지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곳에 함께, 동등한 위치에 존재할 수 있다는 유대감 같은 것과도 조금은 달랐다. 크루들 중 아무도 못 하는 것을 자신은 해낸다. 수중에서 만큼은, 그는 자신에게 생명을 맡긴다.

“루피.”

제 이름이 불리자 조금은 긴장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 사과하는 이유를 모른다 해서 자신이 화를 낼 이유는 없다. 애초에 화가 나지도 않았고, 루피가 사과할 일도 없었다. 그의 사과가 그저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한 치기어린 임기응변이었다 해도 상디는 그에 대해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그거야말로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서로 다가서려고 노력하는 두 사람에게 통할 약 같은 건 아무데도 없었다.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상디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루피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니코틴이 몸속을 도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긴장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고마워.”

그래서 자신은 대신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로 했다. 그가 주춤했다. 뜻밖의 상황이라 놀란 것이리라. 상디가 웃었다. 우리 선장은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하단 말이지. 천천히 뒤를 돌자 약간 겁을 먹은 듯 평소보다 동그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왼쪽 주머니에서 휴대용 재떨이를 꺼낸 상디가 담배를 지져 껐다. 그리곤 눈앞의 선장에게 마지막 담배 연기를 있는 힘껏 내뱉었다.

“켁켁……! 뭐 하는…… 으악!”

“루피!”

아무런 방비 태세도 갖추지 못하고 있던 선장은 기습 공격에 얼굴을 가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물러 선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발을 헛디뎌 몸이 뒤로 꺾이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져 갑판에 머리를 박아 버리고 말 판이었다. 놀란 상디가 앞뒤 재지 않고 내민 손을,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루피가 잡아챘다. 루피의 팔이 늘어나야 할 필요는 없었다. 반동을 이용해 제대로 선 루피의 머리에 상디의 주먹이 직격했다.

“뭐하는 짓거리야! 놀랐잖아!”

“담배 연기를 뿜은 건 상디였잖아! 진짜 놀란 게 누군데!”

“네 놈이 균형을 잘 잡았어야……!”

그때야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또 한 대 더 때릴 듯 주먹을 치켜들었던 상디가 피식 웃고 주먹을 내렸다.

“……미안하다.”

“상디, 땀 맺혔다.”

“눈앞에서 사람이 떨어질 뻔 했는데 당연한 거 아니냐?”

“그 짧은 시간에……. 우와 신기해.”

“방금 네 놈이 저 갑판에 머리를 박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라. 뭐 솔직히 박았어도 별 이상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솝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메리호의 갑판보단 네 머리가 단단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라는 뒷말은 삼킨 채 상디가 다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 새 맺힌 식은땀 때문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목덜미에 붙었다. 아무튼 사람 깜짝 놀라게 하는 데에는 재주 있다니까.

“고마워.”

“뭐?”

“손 내밀어 줬잖아.”

문득 마주본 그 미소는 등 뒤로 떨어지고 있는 저녁 해보다도 눈부시고 강렬해서, 상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만 두어 번 깜박였다. 제 손아귀에 맺힌 땀을 바지에 슥슥 문질러 대충 닦은 루피가 상디의 머리에 턱하니 손을 올렸다. 평소였다면 당장 쳐냈겠지만, 왠지 그 손이 여느 때보다도 크고 따뜻한 것 같아서 상디는 그대로 서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슬쩍 파고드는 손가락이 저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앞으로는 까닭도 모를 일로 사과하지 말고, 이런 감사 인사나 많이 해라.”

입으로 나오는 말이 거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제껏 이렇게 살아왔고, 이제껏 그에게 이렇게 대했으니까. 갑자기 따뜻해진다거나 상냥해진다는 것은 그들에게 익숙잖은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들이 보든 보지 않든 이제껏 해온 것이 이런 태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꿀 의사조차 없었다. 겉으로 전해지는 말투가 거칠어도 항상 그 속의 진심이 무엇보다도 따뜻하다는 것은 이 배의 크루들 전부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 감사 인사를 할 일을 상디가 많이 만들어 주면 되겠네.”

“네 놈의 하루 다섯 끼를 군말 않고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평생 감사받으면서 살 자격은 충분하다고 보는데.”

“아, 그건 그런가.”

상디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섬에서 사람들이 걸어 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상디 군, 배고파아! 저녁! 네, 나미 씨!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상디는 경례 자세를 취해보인 후 재빨리 부엌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차례차례 승선(乘船)한 크루들이 부엌 앞에 멍하니 서 있던 루피를 의아한 듯 불렀다.

“어이 루피, 거기 서서 뭐해? 저녁 먹으려면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은데.”

“응, 나도 알아.”

루피가 깡충 뛰어 바로 갑판에 당도했다. 크루들은 제각각의 수확을 들고 있었고, 특히 쵸파는 주머니를 제 몸만큼이나 채워서 들고 있었다. 오, 쵸파, 대단한데! 바보, 칭찬해도 하나도 안 기뻐! 앞으로 약초 걱정은 없겠네. 응, 두 달 분은 될 거야. 잘 가공해야지.

“루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새로운 섬이라고, 모험이라고 좋아 했잖아?”

“아,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그냥 왔어.”

“별일이네. 나무열매라도 따 먹지. 상디 군 오늘 몸이 안 좋다고 했는데 또 귀찮게 한 거 아냐?”

“에이, 아냐. 그리고 상디라면 괜찮아.”

“뭐? 무슨 근거로?”

“그게…….”

무언가를 말하려던 루피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크루들의 의심어린 눈길을 한꺼번에 받으면서 루피는 그대로 뒤돌아 선수상(船首像)에 냉큼 올라앉는다. 출항 준비를 하느라 닻을 올리는 쵸파와, 메리 호의 여기저기를 점검하는 우솝, 이미 갑판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잘 준비를 하는 조로, 섬 해안 근처에서 주운 돌에 새겨진 고대 문자를 해석해보겠다는 로빈, 그리고 갑판 한 가운데 선 채 이 섬에서 쌓인 로그를 확인하는 나미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흰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는 루피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닫힌 부엌문이었다. 문에 붙은 작은 창 너머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그게, 오늘은 상디의 웃는 얼굴을 봤으니까. 크루들 앞에서 바로 목까지 넘어온 말을 다시 집어삼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메리에게 조금 더 몸을 기대고 루피는 더 크게 웃었다. 저 문 너머에서 요리를 하고 있을 남자도 조금은 웃고 있길 바라면서.




6.

 

“……뭐라고?”

“무슨 일이 있던 거냐고 물었다.”

천천히 손을 든 상디가 양쪽 눈 주위를 문질렀다. 피곤이 역력한 기색이었지만 바로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추궁하고 있는 조로는 자리를 떠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넌 대체 왜 이래, 또. 선장이 잠잠해지나 싶었더니 이번엔 또 이 녀석이 문제다.

“무슨 일이고 자시고,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으면 할 말도 들어가겠다.”

“…….”

양해를 구하지 않은 채 담배를 빼어 물었다. 유일하게 담배를 피울 때 양해를 구하지 않는 크루가 이 녀석이었다. 귀찮은 건 피차일반이고,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하나하나 시비를 걸 만큼 쪼잔한 녀석도 아니라는 것을 상디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로는 여전히 입을 한일(一)자로 꾹 다문 채 눈앞의 상디 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본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지 상디 자신조차 확신할 수는 없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쉽게 꺼내지 못하는 표정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마리모 녀석이 이렇게 애매한 표정도 지을 줄 안단 말이야? 새삼스럽게 신기해졌지만, 그런 기색을 내비쳤다가는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 될 것 같아 상디는 입을 다물었다.

“루피야 원래 감정기복이 심한 녀석이기는 하지.”

“그런데?”

“거기에 요즘 묘하게 네 녀석이 얽혀있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다.”

담배를 든 손가락이 제멋대로 떨고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썹이 단호했다. 상디는 속으로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뭐냐. 내가 신경 쓰이는 거냐, 선장이 신경 쓰이는 거냐. 둘 중 어느 쪽이라도 지금 자신에게 매우 성가신 상황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냥 이 상황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다. 자신을 배제한 채 상황이 돌아간다는 것에 대한 혼란. 그거야말로 사춘기에 접어든 계집애들의 고민이잖아. 문득 이것저것, 모든 것이 우스워졌다. 이렇게 동요하는 조로를 보는 것도 꽤 새로운 느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뭐가 재밌어서 웃고 있냐.”

“아, 아니. 별로.”

그만 그 웃음이 표정으로까지 나와 버렸나, 상디는 빠르게 표정을 바로잡았다. 요즘 들어 얼굴 근육이 느슨해졌는지, 쓸데없이 감정을 표출하는 일이 많아졌다. 선장 같은 둔감파(派)앞에서는 상관없지만, 이렇게 묘하게 예민한 녀석 앞에서라면 조금 곤란하다. 조로의 눈썹 사이가 조금 더 좁아졌다. 이젠 정말로 조금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폐로 흘러들어가는 담배연기가 전에 없이 달곰씁쓸하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나를 거기에 엮어 넣으려는 건지 잘은 모르겠는데,”

“…….”

“설령 네 말이 ‘진실’이라 해도 네가 참견할 부분은 아니지 않나, 마리모 군?”

미간이 좁혀지는 것은 끝났다. 조로는 정말로 분노하고 있었다. 와이셔츠 속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상디는 침착하려 애썼다.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인식시켜 줘야 한다. 어디까지가 자신에게 허용된 한계 범위인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주제넘게 고개를 들이밀지 않을 테니까. 선장과 관련된 일이라면 일단 팔을 걷어붙이고 보는 사람은 상디 자신뿐이 아니었다. 그런 것마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라도 그 의문을 꺾어놓아야만 했다. 더 이상은 참견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였다. 그리고 적어도 그 경고가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한 정도에서 끝나지는 않았다.

“‘진실’인가?”

“글쎄, 그런 것까지 말해줘야 할 의무는 나에겐 없는 것 같은데.”

콰당! 하는 엄청난 충돌음이 들렸다. 나무 바닥에 부딪힌 뒤통수가 얼얼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낀 상디가 얼굴을 찌푸렸다. 목을 감싸 쥔 강인한 손가락의 주인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득한 액체가 관자놀이를 따라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놀리는 게 도를 지나쳤나. 가까스로 눈을 뜨자 오히려 평온한 얼굴의 조로가 보였다. 이 남자는 그랬다. 분노가 도를 넘으면 오히려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한다는 것을 상디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까불지 마.”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으르렁거렸다. 문득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대체 ‘선장’이 무엇이기에 자신과 이 남자가 이렇게 대치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남자의 뒤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담배가 보였다. 이미 난리통에 불은 꺼진 지 오래였고 가느다란 연기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깝네, 하고 생각하는 찰나 자신의 목을 움켜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왔다. 차차 숨 쉬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 전에 이 남자의 흥분을 빨리 가라앉혀야겠다고 생각한 상디가, 그의 팔에 손을 올려놓았다.

“……어이, 거기 주제파악 못하는 마리모.”

“…….”

“네가 선장을 얼마나 위하는 지는 익히 잘 알고 있어.”

“…….”

“그의 반이라도 나를 위할 수 있다면 이제 슬슬 그만 해 둬라.”

“…….”

눈과 눈이 마주쳤다. 분노가 사그라지고 있었다. 동시에 손아귀에서도 힘이 빠졌다. 천천히 그 손을 옆으로 치워낸 상디가 쿨럭, 하고 기침을 했다. 한꺼번에 산소가 통하자 폐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저 손아귀에 목이, 그야말로 생명줄이 잡혀 있었다고 생각하자 그때야 조금씩 몸이 긴장한다. 조로는 무릎을 꿇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방금 제가 제 혈기에 못 이겨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제야 파악한 거겠지. 상디는 몸을 일으켜 앉은 채 새로 담배를 꺼냈다.

“……빌어먹을.”

머릿속의 리스트에는 아직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작게 욕을 씹어뱉으면서 그 중 아랫사람의 이름 밑에 밑줄을 쭉 긋고 상디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랫사람이란 다름 아니라 지금 자신의 앞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이 남자였다. 어이, 정신 차리고 있냐? 라고 말하며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었지만 몸에는 털끝만큼도 힘이 남아있질 않았다. 자신이 차가워지는 만큼 이 남자는 분노한다. 설령 그 분노가 어디를 향해있든 결국 검의 끄트머리는 자신에게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상디가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넌 대체 뭐에 화내고 있는 거냐. 아니,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건 자각(自覺)하고 있는 거냐.

“……어이, 마리모. 넌 대체 뭐에 화내는 거냐.”

“…….”

“뭐라고 말이라도 해 봐. 사과까지는 안 바랄 테니까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거다.”

“…….”

“하긴, 네게 변명을 바라는 게 더 웃긴 일이겠지만.”

혼자 떠드는 자신이 무슨 피에로라도 된 것 같았지만 상디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현재 현실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지 조차도 의심이 되었다. 설마 방금 날 패대기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약간 고개를 수그린 채 조로는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어이, 빌어먹을 검사. 여보세요? 계십니까?”

“상디.”

깜짝이야. 머리를 두드려 보려고 가까이 다가갔는데 순간 제 이름이 불려 상디는 앉은 채 조금 뒤로 물러났다. 적응 안 되게 웬 ‘이름’이야, 망할 놈. 담배 끝에 매달린 재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달랑거리고 있었다. 재빨리 휴대용 재떨이를 꺼내 재를 떨어낸 상디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로가 고개를 들었다. 이미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완벽한 평소의 얼굴이었다.

“……방금 건 미안했다.”

“그래. 알면 됐어.”

사실 정말로 ‘된’ 건 아니었다. 상디도 조로도 서로에게 묻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있었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평소처럼 가볍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뻣뻣하게 건넨 사과를 어색하게 받아준다. 그 이후로는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지직, 하고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마저 들릴 듯한 침묵이었다. 돛에 걸린 한 조각 해풍만이 고요를 흔들어 대고, 간간히 들리는 바닷새의 소리가 그 동요(動搖)에 끼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

“내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

할 말을 잃은 채 상디는 물어뜯던 담배 끝을 놓았다. 진솔한 울림이 깃든 말이었지만, 그리고 방금 자신의 귀로 똑똑히 들었지만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 검사가 지금 농담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똑바로 마주치는 눈과 눈이 그 사실을 확실히 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검사 그 자신은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을까. 속을 돌아다니던 담배연기가 어느 한 곳에서 꽉 멈춘 듯 답답해져오기 시작했다. 막 터널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갈림길로 접어든 사람의 막막한 심정처럼.

“……너 그게 무슨 말,”

“무슨 말인지는 잘 알고 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대답에 상디는 더욱 긴장하는 자신을 느꼈다.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어쩌면 루피 이상으로 자신을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의 감정을 움직이는 게 다름 아닌 ‘너’라서 화가 난다.”

“…….”

그리고 검사는 일어섬으로서 대화의 끝을 알렸다.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상디를 내려다보면서. 그러나 그와 동시에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얼굴로 상디에게 또 다른 고뇌의 시작을 알린 것 역시 검사였다. 이미 필터만 남은 담배가 힘없이 갑판 위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입 주위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배 전체에 내려앉은 석양이 무거운 덩어리가 되어, 떠나는 조로의 뒷모습에 감기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만든 상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척거리는 발걸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속으로 몇 번의 욕을 되뇌어도 더러워져 오는 기분은 여전하다.

“젠장…….”

머리카락에 끈적하게 감겨오는 것은 분명 피였다. 몸을 굽혀 바닥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다행히 피가 묻어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마스트에 기댄 채 숨을 고르자 그제서야 고통이 천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요 며칠 피 보는 일 많구만. 농담조로 지껄여보아도 마음 속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긴장은 여전했다.

“…….”

방심하고 있었다. 주의해야 할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는데도.

***

 

“상디, 대체 이게 뭐야!”

“어두워서 잘못 보고 마스트에 부딪혔어. 심각해?”

“지혈부터 좀 해야겠다.”

알코올을 적신 솜을 핀셋으로 집어 들고 순록은 상디의 이마를 천천히 닦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이 다친 것 마냥 잔뜩 찌푸리고 있는 얼굴을 상디는 지켜보았다. 감정 표현이 서투르고 수줍음을 많이 타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심하게 감정이입을 해 버리는 선의가 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고 있자면 묘하게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엄청 아팠겠다. 눈은 뜨고 다녀야지, 상디. 내가 오늘 늦게까지 깨어 있어서 다행이지, 자고 있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리고 다쳤으면 바로 왔어야지 왜 한참 있다가 온 거야.

“아니, 바로 오려고 했는데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여간 세게 부딪힌 게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누구랑 싸우기라도 했어?”

“응? 아니, 싸우다니. 이렇게 진심으로 다치게 할 만큼 누구와 싸울 리가 없잖아.”

“상디는 조로랑 매일 티격태격하니까 보고 있는 내 쪽이 걱정 된다구.”

몸을 돌린 채 선반에서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선의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상디가 쓰게 웃었다. ‘티격태격’이라는, 의외로 귀염성 있는 단어로 설명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 순간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눈은 진심이었다. 그 분노를 정면으로 받아낼 만큼 자신도 조금은 뻔뻔해진 것이리라. 흰 붕대를 들고 쵸파가 뒤돌아보았다.

“상디. 요즘 몸이 많이 상하는 것 같아.”

“……미안.”

“나한테 미안할 건 없어. 상디 자신에게 미안해야지.”

“…….”

고개를 숙인 상디에게 선의가 다가왔다.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두르는 꼼꼼한 손길이 느껴졌다. 다행히 내상(內傷)은 없는 것 같아. 다음부턴 어두울 때 조심해서 다녀야 해. 치료가 끝난 후 그 특유의 보람찬 목소리로 쵸파가 진료를 마무리 지었다. 수고했다. 그의 모자를 툭툭 건드리고 상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띵 하고 울리는 것 같았지만 내색해선 안 된다. 눈앞의 이 작은 순록이 또 난리를 쳐 댈 것이 뻔하니까. 씨익 웃은 채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긴 채 상디가 의무실을 나왔다. 문 너머에서 상디의 상처를 치료하느라 이것저것 벌려놓은 도구들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방에 들어가서 자야 할까. 웬만하면 루피나 조로 모두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내 자신에게…….”

아무렇지 않은 쵸파의 한 마디가 자꾸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내 자신에게 미안해야 한다. 라. 자꾸 다른 녀석들에게 미안해지고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천성인걸까, 아니면 과업인 걸까. 담배 연기 대신 한숨을 몰아쉬고 상디는 부엌으로 향했다. 난방도 안 되고 잘 데도 마땅치 않지만 방에 비한다면 오늘은 그 어디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후.”

부엌에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 내일의 메뉴라도 생각해 두어야 할까. 하지만 내일의 메뉴는 아까 쵸파를 찾아가기 전에 이미 끝내 놓았다. 테이블에 앉아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한 상디가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리고 낮게 숨을 삼켰다. 누군가가 이미 앉아 있었다.

“상디.”

“……방에서 안 자고 여기서 뭐 해.”

“그러는 상디는 왜 여기로 들어와.”

선장이었다. 차라리 방으로 들어갈 걸, 이라고 상디는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무 대답이 없자 강하게 손목을 잡아끄는 힘이 느껴졌다. 상디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옆 의자에 앉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창문이라고는 문에 붙은 작은 창밖에 없는 부엌에, 푸르스름한 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루피는 상디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의 회피조차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올곧은 시선으로. 옅은 물빛으로 빛나는 그 머리카락 끝에 문득 손을 대어보고 싶었지만 상디는 손을 올릴 수가 없었다. 대신 루피가 손을 올렸다. 방금 쵸파가 매어 준 붕대 끝을 따라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상디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

왜 다쳤어? 라고 물어보면 변명할 말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지만, 선장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붕대를 손가락 끝으로 덧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 없이 진지한 눈빛에 상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변명거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애초에 변명은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 남자의 앞에서 거짓말은 할 수 없으니까. 순간의 위기를 모면할 순발력도 아무런 위용을 자랑하지 못했다. 붕대의 끝에서 떨어져 나온 손이, 오른쪽 무릎에 올라와있던 상디의 오른손을 잡았다.

“상디.”

“……왜.”

“아무것도 아냐.”

살짝 갈라진 목소리, 그러고는 조금 강하게 자신을 잡아끄는 힘. 순순히 몸을 앞으로 당기면서 상디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맞닿는 입술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맞닿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전혀 조급해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이 느낌은 경험해본 적이 있다. 며칠 전 물속에서의 키스와 꼭 닮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상디는 눈물을 참느라 선장이 쥐고 있지 않은 쪽 손을 꼭 말아 쥐어야만 했다.




7.

 

“전투다!”

선장의 목소리가 배 안에 울려 퍼졌다. 적이라고 하기에도 뭣하고, 그냥 현상금을 노리고 해적 사냥질을 하던 작은 배였다. 그런 주제에 크루는 꽤나 많아서, 밧줄을 매고 메리호의 갑판까지 기어들어온 것은 가상하다고 칭찬해 줄만했다. 덕분에 메리호의 갑판은 전장(戰場)이 되어 있었다. 우솝이 나중에 꽤나 울겠구만, 이라고 생각하던 상디가 뒤로 다가오던 적 하나를 뒷발차기로 멀리 날려 보내고 그 틈을 이용해 담배를 빼어 물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 피우는 담배도 각별하지만, 전투 중에 피우는 담배를 그는 더 좋아했다. 딱히 여유를 부리려는 의도는 아니고, 조금 더 기분을 상승시켜 준다고 할까. 하나의 습관처럼 된 일이었다. 슬쩍 둘러본 크루들은 착실히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특히 우솝의 활약이 눈부셨다.

‘저건…….’

얼마 전에 루피를 바다로 날려 보냈던 신무기가 보였다. 우솝은 수리하는 김에 조금 개조했다고 말했다. 과연 그 전보다는 더 전투에 적합해보였다. 상디는 내심 감탄했다. 팔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튀어나와 근처의 적을 전부 바다로 밀어 넣는다. 그것도 꽤나 멀리 날려 보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쓸모 있는 발명을 해냈군,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적이 있었다.

“읏!”

이래서 전투 중에는 한 눈을 팔면 안 된다니까. 괜히 우솝의 로켓을 탓하며 상디는 몸을 살짝 돌려 다시 왼발을 내질렀다.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로 떨어지는 적이 보였다. 작게 손을 흔들어 줄 만한 여유도 있었다. 대충 상황은 정리되어 가는 것 같았다. 나미의 크리마 택트도 한 몫 하고 있었다. 레이디들은 레이디들끼리 착실히 하나하나 쓰러뜨려간다. 여자라고 얕봤다가 나가떨어지는 적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솟아난 로빈의 손들이 적들을 바다로 밀어 넣어가고 있었다.

‘그러면…….’

마스트로 눈을 돌리자 풍선처럼 몸을 부풀린 선장이 보였다. 거리로 계산하니, 아마 선장이 떨어지면 그 사정거리 안에 자신이 포함될 것이다. 짧은 순간 안에 판단을 마친 상디가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선장과 눈이 마주쳤다. 슬몃 웃고 있었다. 그리고 선장이 뛰어내렸다. 대충 훑어봐도 한 스무 명 정도는 그 밑에 깔렸을 테다. 물론 미리 피해있던 밀짚모자 크루들은 그 안에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끝이네.”

상디와 마찬가지로 조금 물러섰던 나미가 크리마 택트를 집어넣으며 쾌활한 목소리로 전투의 끝을 알렸다. 여기저기 솟아나 있던 로빈의 손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탁탁, 구둣발로 두 번 갑판을 울린 상디가 바지주머니에 꽂고 있던 손을 꺼내 재킷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냈다. 갑판 구석에 떨어져 다시 원래 몸으로 돌아온 선장이 씨익 웃고 있었다. 아마 그에게 이 전투는 작은 여흥거리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로가 쓰고 있던 두건을 벗어 다시 팔에 감았다.

“상디 군, 곧 점심시간이지?”

“네. 부엌에 가봐야겠네요. 뒷정리 부탁한다, 너희들.”

“잠깐만, 요리사 씨!”

전에 없이 다급한 로빈의 목소리가 상디를 불렀다. 네? 하고 뒤돌아본 상디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무심코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낸 상디가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나가떨어져 난간에 등을 부딪쳤다. 척추를 따라 격통이 달렸다. 무의식적으로 먼저 발목을 확인한다. 두 쪽 모두 괜찮았다. 아직 아물지 않은 머리의 상처가 터져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젠장, 뭐야 이거……. 힘겹게 눈을 뜨자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쵸파가 보였다.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였다.

“쵸……파, 대체 이게 무슨…….”

“상디! 으아아아앙, 얘들아 상디는 괜찮아! 그게, 미처 못 떨어뜨렸던 놈이 돛대 뒤에서 뛰쳐나오는 바람에……. 이제 괜찮아. 조로가 날려버렸어.”

“쵸파, 잠깐만.”

가물거리는 의식의 끈을 잡아당긴 것은 선장의 목소리였다. 머리의 상처를 확인하는 손길이 느껴져 상디는 살짝 얼굴을 찌푸린다. 저도 모르게 그의 조끼 자락을 조금 잡아당겼다. 상처를 살피던 손길이 멈칫하더니 머리에서 발목으로 옮겨갔다. 부드럽게 만져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화끈거리는 온몸에 서늘한 손이 닿아 기분이 좋았다.

“상디, 괜찮아? 눈 뜰 수 있겠어? 쵸파, 일단 지혈부터.”

“으, 응! 그대로 상체를 들고 있어줘. 새 붕대를 가져올게.”

선의실로 다다다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옆에 앉아 짧게 숨을 들이쉰 루피가 상디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제게 기대게 만들었다. 루피의 머리에 얹혀있던 밀짚모자가 작게나마 상디의 머리 위에 그늘을 드리웠다. 힘 빼, 하는 목소리가 들려 상디는 자연스럽게 온몸의 힘을 뺐다. 루피가 조급하지 않은 손길로 이마의 붕대를 풀어냈다. 소금기 어린 바람이 상처에 스치자 상디가 조그맣게 신음을 흘렸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간신히 눈을 떠 쳐다본 루피는 피가 엉겨 붙은 금빛 머리카락을 이마에서 세심하게 떼어내고 있었다.

“…….”

그리고 상디가 눈을 돌렸다. 저 멀리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조로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눈을 돌렸다. 상디가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고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왜 그래, 상디? 하고 묻는 선장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조금 고개를 흔들 뿐,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여기, 루피!”

“고마워. 내가 할게.”

“에, 하지만…….”

“나한테 기대어 있으니까 내가 하는 편이 쉬울 거야. 줘, 쵸파.”

“그러면 부탁할게.”

상디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제 무릎으로 내려 눕게 만든 루피가 쵸파에게서 소독약과 붕대를 건네받았다. 알코올이 묻은 솜으로 피를 닦아내고 거즈를 꼼꼼히 두른 후 가위로 잘라낸다. 마지막으로 붕대에 감겨 버린 머리카락을 빼내고 다시 루피가 붕대와 약을 쵸파에게 주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상디?”

“……응.”

“그나저나 루피도 꽤나 하네. 언제 배웠어, 그런 건?”

“기본이지, 히.”

몸을 일으킨 상디가 작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루피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려다가 멈칫하고 대신 등을 두드린다.

“다음부터는 앞을 잘 살필 것.”

“……그래.”

우와, 난 상디 군이 루피한테 저런 충고를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라고 기가 찬 듯 중얼거리는 나미의 목소리에 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일어선 상디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다시 한 번 고마워, 라고 작은 소리로 인사했고 루피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는 것으로 전투가 ‘정말’ 끝났다. 옷을 갈아입고 식사 준비를 하겠다며 상디가 남자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쵸파가 입을 열었다.

“요즘 상디가 너무 자주 다치는 것 같아. 뭐 큰 부상들은 아니었지만.”

“그러게. 왜 그런 걸까.”

“이유는 각각 다른데……. 아무래도…….”

“얼빠진 사람 같아.”

단호한 나미의 한 마디에 크루들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컵 파편에 찔린 것, 마스트에 부딪힌 것(사실 이것은 조로 때문이긴 하지만, 크루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오늘의 부상은 남아있던 적을 알아채지 못한 실수였다. 상디가 평소만큼 집중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인가, 하고 우솝이 중얼거렸고 나미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무래도 더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얘기를 좀 해 봐야겠어.”

그리고 나미의 의견에 반론을 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이번 섬에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내릴 거지, 상디 군?”

“네. 슬슬 육지를 밟아야죠. 장 볼 것도 이만큼 있고.”

“잘 생각했어. 쵸파, 닻 내리자!”

식료품 리스트를 정리하면서 또 사 두어야 할 목록까지 정리해 놓았다. 얇은 수첩 하나로 나온 목록을 손에 들고 상디가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날씨가 좋았다. 상처도 회복 속도가 빨라 이미 붕대를 풀고 작은 반창고만 붙이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 두꺼운 옷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방에 들어와 옷장에서 그가 꺼내 든 것은 처음 개시하는 와이셔츠였다. 흰 색에 소매 끝단에만 검은색으로 스트라이프가 들어가 있었는데, 가지고 있던 검은색 커프스를 끼우면 그럭저럭 깔끔해 보여서 무난히 입을 수 있을 것 같아 산 옷이었다. 거울에 전신을 비춰보고 뭔가 허전한 것 같아 한참을 고민하던 상디가 손가락을 튕겼다. 역시 흰 와이셔츠에는 넥타이지. 검은색 스키니 타입 넥타이까지 깔끔하게 매고 다시 거울 앞에 서서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혼자 패션쇼 하냐.”

“뭘 모르시는군. 넥타이는 남성 패션의 종결이라고.”

“…….”

“네놈은 또 그 티셔츠냐.”

돌아본 곳에는 시큰둥한 표정의 조로가 서 있었다. 또 그 흰 티셔츠에 복대야, 하고 생각한 상디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렇게 편하게 말을 주고받기에는 아직 어색했다. 평소에 그다지 친밀하게 말을 섞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나마 어색함을 중화시켜주고 있었다. 흠, 하고 상디는 포인 핸드 노트로 매듭지은 넥타이 끝을 조금 잡아당겼다. 실크라 떨어지는 선이 깔끔하지만 좀 흐물흐물한가. 광택이 너무 심한 것도 같았다. 거울 너머로 따갑게 와 닿는 시선에 상디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애초에 잘못은, 감정을 확실히 하지 않는 저 쪽에 있다고.

“하다못해 티셔츠라도 갈아입고, 복대만이라도 좀 빼는 게 어때?”

“어차피 장만 봐 올 텐데 그런 게 필요한가.”

“네놈의 패션 감각은 눈 뜨고 봐줄 만한 게 못 돼서 그런다, 왜.”

“그렇게 멀끔하게 차려입고 섬에서 얼마나 놀아대려고.”

“남이사.”

일부러 옷장 문을 큰 소리를 내며 닫고 상디는 침대에 던져두었던 식료품 목록을 집어 들었다. 식빵에 별(★)표시와 함께 강조의 의미인 밑줄이 두 개 그어져 있었다. 어느 새 옆으로 다가온 조로가 고개를 빼어 리스트를 보고 있었다.

“식빵이 그렇게 중요하냐?”

“당연하지! 너 아침에 루피가 토스트 먹는 거 못 봤…….”

아무 생각 없이 내뱉다가 상디가 말을 멈추었다. ‘그’의 감정을 움직이는 게 ‘너’라서 화가 난다. 라고 그는 말했었다. 아직도 그 가라앉은 분위기를 생생히 기억하는데, 입이라는 놈은 방정맞기 그지없어 주인의 의지를 가끔 제멋대로 무시하고 말을 꺼내 버린다. 조로 앞에서 웬만하면 루피 얘기는 하지 말자고 생각했었는데. 어색한 곳에서 말을 끊어버린 상디가 슬쩍 조로의 눈치를 봤지만 이상할 정도로 조로는 평소와 똑같았다. 그저 흠, 그런가. 한 마디만을 내뱉었을 뿐이다. ……혹시 나 혼자 과민반응 한 건가. 상디가 무심코 뒷머리를 긁적인다.

“상디 군, 조로! 뭐해, 빨리 나와!”

“네, 갑니다 나미 씨!”

밖에서 상디와 조로를 찾는 나미의 목소리가 들려와, 상디는 수첩을 오른손에 든 채 문을 열었다. 이미 상륙 준비를 완벽히 끝낸 크루들이 갑판에 모여 있었다.

“나는 일단 로그가 쌓이는 걸 기다려야 하니까 시간이라도 때울까 싶어. 오늘 밤에는 쌓일 테니 출항은 내일이 되겠네.”

“나는 오늘 할 게 없는데, 같이 있어도 될까 나미?”

“물론이지, 쵸파. 로빈은?”

“고서점이나 들러볼까 생각중이야. 끝나면 나도 항해사 씨와 합류할게.”

“좋아. 그러면 루피랑 우솝은…….”

“나는 메리호를 수선할 자재를 사와야 하니까 조금 먼저 배에 돌아올 거야. 아까 전투중에 갑판이 엉망이 됐잖아.”

“나는 오늘은 장 본 짐 들어주기 담당 할래!”

“……뭐?”

순간 크루들의 심상찮은 시선이 전부 루피에게 향했다. 정작 본인은 평소처럼 히, 하고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시선들은 전부, 장보기 담당인 상디에게 꽂혔다.

“아니, 짐 담당은 오늘은 나다.”

일단 손사래를 치고 보는 상디를 구원해준 것은 조로였다. 하지만 그 구원은 상디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 이번에는 상디를 포함한 크루들 전원의 시선이 조로에게 꽂혔다. 평소 짐 담당으로 상디가 부르면 죽도록 귀찮아하면서 결국 다른 사람(예를 들면 우솝이라든지)에게 시키기 일쑤였던 조로가 자청해서 짐꾼을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으리라. 특히 좋든싫든 오늘 하루를 같이 보내야 할 운명에 처한 상디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조로 네가? 웬일이야?”

“별로, 몸이 찌뿌둥했을 뿐이야. 가자, 빌어먹을 요리사.”

“치사해 조로! 오늘은 내가 할 건데!”

“루피 너는 그 모험인지 뭔지나 해. 심심하면 우솝이나 도와주든가.”

덤덤한 목소리로 내뱉은 조로가 상디의 오른손에서 수첩을 슥 빼내어 먼저 걷기 시작했다. 야, 야! 하고 나미가 불렀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결국 상디가 어설프게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상디 군? 하고 불러보는 나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꽤 멀리 나가버린 조로를 뒤쫓느라 상디는 오른손을 휘휘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


“……무슨 꿍꿍이냐?”

“저기 빵집.”

“롤로노아 조로 씨.”

“식빵 세 자루, 밑줄 두 개에 별표.”

“…….”

도통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줄 것 같지 않은 조로를 한참 선 채 노려보다가 어쩔 수 없이 상디가 빵집의 문을 열었다. 아무 말 없이 조로가 그 뒤를 따랐다. 여전히 구매 리스트는 조로의 손에 들린 채였다. 담배라도 피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빵집 안이라 함부로 담배를 빼어 물 수도 없었다. 주인이 자루 세 개에 가득 식빵을 담는 것을 지켜보던 조로가 리스트를 한 장 넘긴다. 나미에게서 받은 돈으로 상디가 계산을 하고, 이따 찾으러 올 테니 일단 맡아두라고 주인에게 신신당부했다. 아직 번화가의 초입일 뿐인데, 지금부터 식빵 세 자루를 끌고 다닐 수는 없었으니까.

“다음은 고기. 뭐냐 이 밑도 끝도 없는 구매목록은.……아아.”

“눈치 챘냐.”

그러고보니 묘하게 글씨가 다르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조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기’ 라고 달랑 두 글자가 적힌 그 페이지는 루피가 써 넣은 것이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상디의 눈에 정육점이 들어왔다.

“가자.”

“어딜?”

“정육점이지, 당연히. ‘고기’라고 적힌 것 안 보이냐?”

“그 다음 장은 ‘과일’인데. 내가 과일을 사러 가는 편이 효율적인 것 아닌가.”

“네가 나만큼 과일의 신선도를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 보냐? 얌전히 따라와.”

조로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상디의 뒤를 따랐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발소리를 들으면서도 상디는 마음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이렇게 평소처럼 해도 되는 걸까? 이 남자는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오늘 짐 당번을 자처한 걸까. 뭔가를 말하려나 싶어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도 평소와 똑같았다. 이래서야 기운이 빠져버리잖아, 라고 생각하지만 별 말 안하는 게 오히려 고마운 것 같기도 하고. 바지 주머니 속으로 찔러 넣은 두 손에 땀이 고여 미끄러웠다. 상디가 정육점 문을 열었다.

 

***

 

쇼핑이 끝난 것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였다. 쇼핑한 짐들을 상점가 입구의 라커에 넣어 놓은 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상점들은 이미 한껏 불을 켜고 야간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거리 사이로 내려앉은 어둠을 밝히는 것은 전구의 인공적인 불빛이었고, 낭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네, 하고 중얼거린 상디의 어깨에도 전구의 약한 불빛이 묻어 있었다. 흰 와이셔츠는 어둠 속에서도 그 때 그 때 받는 빛의 색에 따라 다른 색으로 떠올랐다.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가, 노란색으로 물들었다가. 그 변화를 지켜보자니 묘하게 눈이 아파와, 조로는 차라리 땅을 보며 걷기로 정했다. 그 때 상디가 말을 걸어왔다.

“배 안 고프냐?”

“뭐, 조금.”

“저녁이라도 먹을까? 돈은 조금 남았네.”

“배에 돌아가서 먹지.”

“배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 우솝도 나가서 먹고 올 테고. 내가 없으니까.”

“…….”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내가 살게.”

“딱히.”

상디도 입을 다물었다. 이미 둘은 번화가를 조금 지나쳐 있었다. 마을인지, 인가가 많이 모여 있었다. 번화가와는 달리 한적한 길이었다. 낮에는 거리에 나와 놀고 있던 아이들도 어느새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고, 가끔 집의 창문 너머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기도 했다. 길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는 둘밖에 없었다. 휘황찬란한 전구불이 사라지자 그때야 별과 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하현이군, 이라고 생각한 조로가 조금 싸늘한 밤바람을 느꼈다. 문득 옆을 바라보니 상디가 담배를 물고 있었다. 담배 끝에 붙은 불이, 그가 빨아들일 때마다 작게 점멸한다.

“그래서, 뭐냐.”

“뭐가.”

“루피를 막으면서까지 짐꾼을 자청한 진짜 이유가.”

“…….”

상디가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곧 공기에 섞여 사라지는 잿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로는 아무 말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길가에 앉았다. 풀이 옷자락에 쓸려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디선가 풀벌레가 우는 것도 같은데,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상디가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 같기도 했다. 무성한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도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바로 옆인데도 서로의 표정을 잘 볼 수가 없었다. 번화가의 떠들썩한 소리가 저 멀리서 번져오고, 인가에서 들려오는 작은 대화 소리가 밤공기에 녹아 있었다.

“별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가끔은 이러는 것도 좋다 싶었을 뿐이지.”

“……답지 않은 일을 하시는군.”

“네 놈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데. 잔뜩 멋 부리고 나와서 웬일로 여자도 안 꼬이고.”

“……네 놈처럼 시커먼 남자가 옆에 붙어 있는데 어느 레이디가 좋다고 오겠냐.”

“내 탓인가.”

“네 탓이다.”

그리고는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반팔 티셔츠를 입은 조로의 팔을 본 상디가 춥지 않냐고 작은 소리로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용 재떨이를 꺼낸 상디가 담뱃재를 떨어냈다. 밤바람이 풀을 쓸어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어디선가 달큰한 풀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숲 안에는 꽃도 피어 있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상디의 손목을 붙잡아 오는 손이 있었다.

“……!?”

“너, 요즘 줄곧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뭐? 그러면 내가 정신을 빼놓고 다니기라도 한다는 거냐?”

“적어도 나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 나……. 상디가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오른손에 들린 담배가 무연히 연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그 이유가 선장이라는 건 아직은 나밖에 모르는 것 같다.”

“…….”

“틀렸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왜지?”

왼손 검지로 제 머리카락을 꼬고 있던 상디가 조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성가시다는 듯이 제 손목을 붙잡고 있던 조로의 손을 쳐낸다. 구름에 가려있던 달이 드러나면서 그 순간 조로는 상디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네 놈도 그 이유 중의 하나니까.”

“…….”

“시치미 떼지 마라. 오히려 난 네 놈 때문에 골치가 아파 돌아가실 지경이라고.”

“…….”

“네 얘기나 들어보자. 뭐냐? 너 때문에 나만 정신병자 취급당하는 건 억울하고. 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 괴롭히는 건데?”




8.

 

“……얘기하지 않았나, ‘그’의 감정을 움직이는 게 ‘너’라서 화가 난다고.”

“아니, 그건 해명이 되지 않아.”

거칠게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상디가 말했다. 또렷한 말투였다. 단어 하나하나를 똑바로 새겨들으라는 듯 천천히, 강조를 넣어서. 조로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말이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변명조였다. 그리고 말하는 자신도 느끼는 것을, 눈앞의 이 요리사가 모를 리 없었다. 모든 것을 매듭지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조로는 직감했다. 지금 매듭짓지 않으면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것이 제멋대로 뒤틀려, 다시는 손으로 풀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다시 한 번 묻겠어. 똑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나도 어찌될지 몰라.”

“…….”

“대체 ‘누구’ 때문에 화가 난 거야?”

‘누구’ 라는 단어에 유난히 강조를 넣은 것을 조로가 모를 리 없었다.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이럴 때조차 두 사람은 강한 척 하는 데에만 익숙해서 최대한의 기세를 살리려고만 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문득 우스워졌다. 대체 왜 요리사는 자신의 화가 향해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걱정하고 있는 걸까? 아니, 걱정이라는 단어는 조금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신경 쓰고 있다 정도의 단어가 어울릴 것이다. 사실 조로는 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선장과 요리사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가 신경 쓰인다는 것이었다. 그 중의 누구 때문인지 같은 것은 생각해볼 여유조차 없었고 또 생각해 봐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었다.

“왜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뭐?”

“지금 네가 걱정해야 할 것은 누구 때문에 화가 났는지가 아니라, 내가 왜 신경을 쓰고 있는지에 대한 것 아니냐.”

상디가 몇 번이고 사용한 ‘화’ 라는 단어가, 조로는 솔직히 조금 가소로웠다.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고? 완벽히 초점이 빗나간 말이었다. 신경은 쓸지언정 자신은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상디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몇 번 움찔거리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조로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죽일 기세로 사람을 몰아 놓고, 자신의 틈을 찔리면 그대로 물러나버리는 그의 성향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쓸데없는 말을 던져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계속 상황 파악 못한 채 따지기만 한다면 한두마디 쯤 날카로운 말을 해줄 용의도 있다.

“그럼 다시 묻겠는데.”

“……지치지도 않냐.”

“정신병자 취급당하는 건 싫거든.”

“…….”

“넌 대체 왜 신경을 쓰는 건데?”

“불편하니까.”

“……뭐?”

“불편하니까, 라고 말했다.”

무심코 조로의 얼굴을 쳐다본 상디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옆얼굴은 차라리 평온해보이기까지 했다. 자신을 갑판에 패대기쳐,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게 만든 것이 바로 며칠 전 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대체 조로라는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걸까. 같은 배에 타서 나름 전우(戰友)라고 불릴 수 있을만한 관계를 구축해온 세월동안, 그래도 조금은 이 남자에 대해서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디는 그 생각이 오만이라는 것을 지금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전혀 알 수 없는 남자다. 얼이 빠진 듯 하면서도 날카롭고, 멍청한 듯 하면서도 통찰력이 있다. 그리고 항상 느슨한 표정을 짓는 주제에, 이런 날카로운 말도 던질 줄 안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것인지 상디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불편……하다고.”

당황에 젖은 자신의 목소리가 바보 같음을 알면서도, 상디는 목소리의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되물으려던 말이 그 동요 때문에 혼잣말처럼 꼬리를 늘어뜨려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가져다 댄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계집애 같아서 짜증난단 말이다. 별 것 아닌 일에 당황하는 너도, 들떠있는 선장도.”

“…….”

조로가 일어섰다. 상디는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계집애, 짜증, 당황, 들떠……. 방금 자신의 귀로 들은 단어들인데도 쉽게 머리로 입력되지 않는다. 문득 속에서 토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역겨웠다. 상처받는 일은 없다. 저런 말로 상처받는 것이야말로 ‘계집애’같은 일이니까. 하지만 방금 그 말을 내뱉은 사람이 조로였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 둘이서만 얘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조금 심한 말은 나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뭐야? 대체 뭐야, 저 녀석?

한참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던 조로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상디도 일어서려 했으나 온 몸에 힘이 빠진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로는 항구 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디를 기다려줄 마음은 없는 듯, 평소의 보폭보다 조금 크게 성큼성큼 걷고 있다. 일어나서 조로를 졸래졸래 따라갈 만한 철면피를 상디는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뒷모습이 마치 따라오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상디는 할 말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이 아까보다 오른쪽으로 조금 이동해 있는 것 같았다.

 

***

 

“…….”

정박시켜놓은 메리 호에 올라서려던 조로가 걸음을 멈췄다. 부엌의 불이 켜져 있었다. 지금 부엌에 있을만한 사람은 그 요리사밖에 없는데. 갑판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두워서 누구인지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쪽도 조로를 눈치 챈 듯했다. 난간에 기댄 채 이쪽을 향해 있는 것이 보였다.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약한 빛이 역광을 만들어,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다. 조로는 조금 빨리 걸어온 턱에 빨라진 숨을 고르고 계단을 올랐다. 저쪽은 느긋한 자세로 조로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약 세 발자국 정도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섰다.

“……루피.”

“웬일이야, 조로?”

“너는 왜 여기에.”

“……조로, 상디 짐 들어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상디는? 짐은?”

“…….”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오히려 가볍게 말한다. 조로가 칫, 하고 작게 혀를 찼다. 배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필이면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이놈이 기다리고 있을 건 또 뭐야. 팔짱을 낀 채 루피는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대답해 주기 전까지는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한 시선. 문득 당황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상디가 그 위에 겹쳤다. 조로는 허리께에 차고 있던 검 세 자루를 풀어 난간에 기대게 했다. 쩔그렁, 하는 무거운 쇠붙이 소리가 고요한 배에 울렸다. 루피가 그 쪽으로 흘긋 시선을 돌렸지만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조로를 쳐다본다.

“마을에 있다.”

“왜? 같이 돌아오기로 한 거잖아.”

“……마음이 바뀌어서.”

그대로 루피를 지나쳐 방으로 돌아가려는 조로의 어깨를 잡아오는 손이 있었다. 평소만큼의 악력은 들어있지 않지만 충분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힘. 조로는 조금 긴장하는 자신을 느꼈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선 채 조로가 다시 몸을 돌렸다. 선장은 밀짚모자를 눌러쓴 채 아직도 자신의 어깨를 놓지 않는다. 가볍게 그 손을 떼어내자 의외로 쉽게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대신 자신을 조여드는 시선의 강도는 더해지고 있었다. 조로는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깊은 곳까지 기어들어와 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후회, 같은 멍청한 단어를 떠올릴 여유는 없었다. 선장은 진심으로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 그리고 아마 상디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조로는 숨을 고쳐 쉰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빠를 테다.

“루피.”

“응.”

“너, 그 요리사랑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

자신을 파악하려는 눈길을 조로는 그대로 받아냈다. 밀짚모자 아래로 보이는 안광(眼光)이 전에 없이 서늘했다. 혼자 들어오는 자신에게 상디에 대한 일을 물어볼 때부터 대충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선장의 솔직한 대답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조로가 온 몸의 긴장을 조금 풀었다. 선장이 밀짚모자를 벗어 등 뒤로 넘긴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보다도 주위의 공기가 더 긴장하고 있었다. 팽팽히 조여드는 침묵이 깨진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

“상디에게도 그 질문 했어?”

“……그래.”

“그렇다면 상디에게 듣는 게 빠를 텐데, 왜 내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는 거지.”

“쉽게 대답을 해 줬다면 네게 묻는 일은 없었겠지.”

“네가 참견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요리사도 그렇게 말하더군.”

선장의 한쪽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조로는 놓치지 않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어, 라고 말하는 듯한 여유 넘치는 미소. 그 순간 무언가가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임계점을 아슬아슬하게 넘을락 말락 하는…… 분노?

“내게 다시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내 대답도 그거거든.”

“…….”

조로가 오른손을 꽉 쥐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부엌의 문이 열렸다. 갑자기 환해지는 불빛에 조로는 눈을 찌푸렸다. 부엌을 등지고 서있던 루피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눈썹 하나 까닥치 않는 선장에 조로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그 무언가를 억지로 눌러 죽인다. 여기서 자신이 흥분할수록 루피는 가라앉을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엌을 열고 밖으로 나온 것은 로빈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는 것을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가,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띠운다. 한 손에는 부엌의 뒤집개를 들고 있었다.

“저녁 다 됐어! 늦은 저녁이지만, 검사 씨도 어떨까.”

“로빈, 미안하지만 난 나중에 먹을래.”

“음? 선장 씨가 배고프다고 차려 달라고 했잖아.”

“갔다 올 데가 생겨서. 조로나 챙겨줘.”

“나야 상관없지만, 이 밤에 어디를?”

“금방 올게.”

다시 한 번 조로를 노려보고, 루피가 조로를 지나쳐 가려다가 멈춰 섰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루피가 작게 말했다.

“이야기는 상디를 데리고 온 다음에 마저 듣겠어.”

그 자리에 굳은 조로를, 루피가 두어번 툭툭 치고는 달려 나갔다. 뒤집개를 손에 든 채 로빈이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의아한 시선을 조로에게 돌렸다.

“검사 씨? 안 들어오고 뭐 해?”

“아……. 응.”

터벅터벅 조로가 걷기 시작했다. 조로가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밟을 때까지 로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볶음밥인지, 아무튼 기름 냄새가 열린 부엌문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별로 식욕은 당기지 않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일까, 조로는 부엌으로 들어섰다. 로빈이 그가 들어가기 쉽게 옆으로 살짝 비켜주고는 이어 들어와 문을 닫는다. 두 사람 분의 볶음밥 접시와 냅킨, 수저 등이 테이블 위에 세팅되어 있었다. 들고 있던 뒤집개를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은 로빈이 다시 돌아와 의자를 빼서 앉았다. 조로도 기계적으로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은 채 로빈이 먼저 숟가락을 움직였고, 가만히 있던 조로도 숟가락을 들었다. 일정한 크기로 작게 썰린 채소들이 가지런하다. 갑자기 상디가 만들던 볶음밥이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 세게 머리를 흔들어 그 영상을 털어버리고 조로가 볶음밥을 입에 넣었다.

“요리사 씨는? 짐 들기 담당을 자처하지 않았어?”

“……그랬지.”

“흐음.”

로빈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숟가락과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진다. 로빈의 볶음밥은 나쁘지 않았지만 기름이 너무 많이 들어간 것도 같다고 조로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요리사의 볶음밥이 훨씬 더 맛있다는 뜻도 아닌데 왜 자꾸. 다른 생각을 하는 자신이 무던히도 지겨워져 조로는 말없이 볶음밥을 입에 퍼 담았다. 쓸어 담는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를 만큼 급하게.

“체하겠어.”

“…….”

얼굴을 들고 조로를 빤히 쳐다보던 로빈이 짤막하게 한 마디를 던졌고, 조로는 옆에 있던 컵을 들어 그 안의 물을 한 번에 비워버렸다. 얼음 조각도 한 번에 넘어갔는지 식도를 긁는 느낌이 났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로빈은 깔끔하고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접시를 비워간다. 그러다가 조로는 문득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급히 프라이팬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프라이팬은 비어 있었다. 조로의 숟가락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진 것을 눈치 챘는지 로빈이 그를 쳐다본다. 정말 사소한 일이지만 왜일까, 신경이 쓰였다. 결국 조로는 궁금했던 점을 솔직히 입에 담았다.

“어이, 검은 마녀.”

“어머, 눈앞의 미녀를 보고 마녀라니. 실례야.”

“……어쨌든. 궁금한 게 있는데.”

“뭘까?”

“너. 루피랑 같이 먹기로 한 거 아니었나.”

"그럴 예정이었지."

“그런데…….”

조로는 다시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의 접시를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평소 루피가 한 끼에 먹는 양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로빈이 아직도 루피의 양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식사 때마다 얼마나 더 먹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루피의 접시와 루피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의 눈길을 조로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적게 준비했다고? 분명 또 만들어야 할 귀찮은 상황이 이어질 거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싶어 일어나 프라이팬 안을 들여다보는 조로를 로빈은 말리지 않았다. 역시 프라이팬에도 밥풀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천천히 뒤돌아본 조로를 마주보며 로빈이 다시 한 번 웃는다.

“막 준비하고 있을 때 당신이 돌아왔어. 갑판에 몰래 피워 놓았던 귀로 들었지.”

그러고는 로빈은 자신의 오른쪽 귀를 가리키며 웃었다. 조로는 웃을 수 없었다.

“요리사 씨의 짐꾼을 자처한 주제에 혼자 왔더라고? 그리고는 선장 씨와 싸우기 시작했어. 거기서부터 알았지. 선장 씨는 오늘 여기서 저녁을 먹지 않겠구나, 라고. 분명 당신이 어딘가 떼어놓고 왔을 요리사 씨를 찾으러 갈 테니까.”

깨끗이 비운 접시를 들고 로빈이 일어섰다. 의자가 나무 바닥에 쓸려 끼익, 하는 소리를 낸다. 조로는 조리대 앞에, 정확히 말해서 프라이팬 앞에 선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눈치를 챌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역시 ‘마녀’ 라는 별명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군. 개수대에 접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로빈이, 몸을 돌려 조로를 마주보았다. 그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조로는 이유 없이 등을 따라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저 눈빛이 온몸을 옭아매는 기분이 드는 것인지는 자신도 잘 몰랐다.

“그러면 왜 당신의 요리까지 준비했는가, 하는 건 묻지 말아줘. 정말 당연하고 시시한 거니까.”

그러더니 로빈은 냉장고를 열어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우유팩과 비슷한 용기에 포장되어 있는 것이었다. 유통기한을 확인하듯 이리저리 돌리더니 아, 그럴 필요가 없지, 하고 작게 중얼거린다. 상디가 유통기한이 지난 것을 냉장고에 넣어놓았을 리 없다는 의미의 말이라는 것을 조로는 놓치지 않았다.

“……그런 선장을 따라서 요리사 씨를 데리러 갈 만한 용기와 염치는 당신에게 없었고, 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

 

약하게 풀냄새가 났다. 나무 잎사귀가 밤바람에 쓸려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십 분쯤을 여기저기 돌아다녔을까, 싸늘한 바람에도 루피의 이마에는 약하게 땀이 맺혀 있었다. 소리 내어 그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지만 찾고 있는 것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번화가를 지나쳐 인가의 초입에 들어섰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집들의 불도 하나둘 꺼져가기 시작한다. 가로등도 없는 마을이라 달빛이 전부였다. 오늘은 분명 보름달일 텐데 구름에 가렸는지 달이 보이질 않는다. 잠시 멈춰서 별을 쳐다보던 루피가 다시 바쁘게 다리를 움직였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날도 추워지고 있었다. 그 때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익숙한, 빨간 불빛이었다. 상디……! 자신도 모르게 반색을 한 루피가 그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상디.”

이곳이 인가라는 것을 인식한 루피가,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막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혔다. 천천히 그 쪽을 돌아보는 얼굴에, 그리고 그 금빛 머리카락에 달빛이 비쳤다. 입에 물려있던 빨간 불이 조금 밝아졌다가 사그라든다.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커진 눈이 루피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밤바람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앞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루피.”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고 상디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선 루피가 그의 얼굴을 꽉 잡는다. 밤바람 때문인지 볼이 차가웠다. 상디가 황급하게 담배를 왼손으로 뺐다. 자칫하면 루피가 담뱃불에 데었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피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렇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렸다는 것은 알까? 담배를 땅바닥에 떨어뜨려 짓밟은 상디가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올려 그의 볼을 건드려 보았다. 미동 없는 시선이 올곧았다.

“야, 루…….”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러보려 한 상디의 말문을 막은 것은, 자신의 허리를 꼭 끌어안아 오는 그의 팔이었다. 얼마 동안을 뛰었는지, 팔에 엷게 땀이 맺혀 있었다. 나란히 겹쳐진 심장의 고동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상디는 잠자코 팔을 내려뜨렸다. 바람에 스치는 검은 머리카락이 턱과 목을 간질였지만 목이 꽉 메어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몰아쉬는 숨과 작게 들썩이는 어깨가, 이제껏 그가 얼마나 열심히 자신을 찾아 다녔는지를 알려주는 듯 해서 괜히 마음이 저릿했다. 후, 하고 조금 길게 내쉬는 숨결을 느끼자마자 상디는 생각할 것도 없이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꼭 그 만큼의 힘으로 끌어안았다.



9.

 

“왜 이제야 돌아오는 거야! 한참 기다렸잖아!”

“죄송합니다, 나미 씨. 둘 다 길을 잃어버려서 말이죠…….”

“참 나, 조로가 끼어있는 것도 아닌데 길을 잃는다는 게 말이 돼?”

“나미, 너무 그러지 말라고. 우리도 엄청 고생했으니까.”

“루피 넌 입 다물어! ……그런데 왜 둘이 같이 있는 거야?”

선장과 요리사가 짐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배에 오른 것은 이미 메리호가 출항 준비를 모두 끝낸 다음이었다. 나미의 지시만 내리면 닻을 올릴 수 있도록 쵸파는 그 옆에서 대기 중이었다. 이층 갑판 위, 부엌 앞에 선 채 로빈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미(後尾)에서 여느 때처럼 낮잠을 자는 모양새로 눈을 감고 있던 조로가 슬쩍 눈을 떴다. 이리저리 쌓인 나무상자들 사이로 나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허리 위에 양 손을 올린 전형적인 화내는 포즈. 조로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지만 개운치 않았다.

“조로 저 길치 녀석이 멋대로 가버려서 오히려 제가 길을 잃었지 뭐예요.”

“상디 군 답지 않기는. 오히려 조로는 제대로 찾아 왔잖아.”

“하하, 그러게나 말이에요.”

멋쩍게 웃는 요리사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조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여름섬의 오후의 햇빛은 날카롭게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온다. 차라리 들어가서 잠을 잘까 했지만 여름철의 희미한 열기가 묻은 바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곧 해가 기울면 견딜 만하겠지. 엷은 소금기가 바람에 실려 온다. 입을 벌리면 짭짤한 소금 맛이 날 것만 같은 묵직한 바람. 깍지 낀 팔에 와 닿는 난간의 차가움이 낯설었다. 정말 길을 잃었을까? 아니, 이 해안에서 마을의 초입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다. 선장이 요리사를 찾아낸 것으로만 짐작해도 충분히 걸어서 오고 갈 수 있는 거리다. 선장과 요리사가 어제 무엇을 하다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기어들어오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다만 조로는 상디의 말투가 묘하게 거슬렸다. 변명을 하는 듯한 말투. 신경을 곤두세운 귓가에 나미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다들 상디 군 기다리다가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야. 아침 먹자.”

“네-엣! 곧 준비하겠습니다! 루피, 거기 짐 들고 따라와.”

“응.”

루피가 내려놓았던 짐을 어깨에 짊어졌다.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선 상디가 담배를 빼어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은 채, 먼저 훌훌 가버린 루피를 뒤따른다. 부엌으로 걸어가는 도중에도 둘의 시시덕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고, 이윽고 부엌문이 닫혔다. 그 둘이 들어갈 수 있도록 잠시 옆으로 비켰던 로빈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미가 섬에서 쌓인 로그를 마지막으로 체크한 뒤 쵸파에게 손짓했다. 닻을 올리라는 의미다. 인간화한 쵸파가 도르래를 끌어올리고, 무거운 소리와 함께 모래 속에 파묻혀있던 닻이 모습을 드러낸다. 로빈이 나미의 옆에 섰다. 조금 비스듬히 서 있었던 탓에, 조로는 로빈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다.

“로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두 여자는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것임에 틀림없다. 또 어디선가 낮잠이라도 자고 있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미가 조금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조로는 나미의 목소리를 확연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응?”

“왜 루피랑 상디 군이 같이 들어온 걸까?”

“말하자면 긴데, 사실 나도 확실히는 잘 몰라.”

“조로는 어제 혼자 들어왔어?”

“아마도.”

“로빈은 어제 서재에서 조사할 게 있다고 먼저 들어갔었잖아?”

“그랬지.”

“그럼 조로가 언제쯤, 왜 혼자 들어왔는지 알고 있는 거 아냐?”

“내가 아는 건 얼마 되지 않아. 선장 씨가 볶음밥을 해달래서 부엌에 있었거든.”

“그 녀석은 또 왜 그렇게 일찍 들어온 걸까?……가 아니라, 어제 루피도 있었어?”

나미가 깜짝 놀라 로빈을 돌아본다. 이제 조로는 마주본 두 여자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눈을 완전히 뜨지는 않았다. 실눈을 뜬 채로 귀만 활짝 연 상태라고 하면 맞을까. 아무튼 귀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킨 채 두 여자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열심히 키를 돌리는 쵸파 덕에 배는 점점 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나아갈수록 소금기가 짙어지는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로빈이 잠시 간격을 두고 말했다.

“응. 의외로 금방 돌아왔어. 그런데 곧 요리사 씨를 찾으러 나간다고 하던데.”

“상디 군이 어린애도 아니고 왜 찾으러 나가?……아니, 떼어놓고 온 건 조로 아냐?”

“둘이 함께 나갔으니 일단은 그 말이 맞다고 봐야겠지.”

“그럼 대체 왜…….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글쎄…….”

순간 로빈이 조로 쪽을 쳐다보았다. 나미는 그녀가 조로 너머로 보이는 작은 섬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조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스치는 눈길이 자신의 시선을 붙잡은 채 똑바로 보고 웃었으니까. 입꼬리에 부드럽게 떠오른 미소는 그러나 금방 사라져버렸다. 조로는 눈을 감았다. 로빈의 마지막 말이 유난히 생생하게 귓가에 울렸다.

“……뭐, 평소 하던 대로 투닥거리기라도 하지 않았을까?”

 

***

 

“오늘 아침에 대충 배는 손봤어. 원래 어제 하려 했는데 자재를 사왔더니 날이 너무 어두워졌더라고.”

“그럼 당분간 걱정은 없는 거지?”

“물론이지, 이 우솝 님께서 손수 보수했으니까!”

숟가락을 내려놓고 우솝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우와, 대단해! 라며 눈을 반짝거리는 쵸파 이외의 크루들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지만. 야, 코쟁이. 이거나 마저 먹고 자랑해. 라고 말하면서 우솝의 앞에 상디가 또 하나의 접시를 내려놓았다.

“상디! 나도 더 줘!”

“고무 넌 벌써 많이 먹었잖아!”

팔을 길게 늘여 상디의 다른 손에 들린 접시를 잡아채려는 선장의 얼굴에 정확히 상디의 발이 꽂혔다. 언제나의 식사 시간마다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미 식사를 끝낸 레이디들은 커피잔을 앞에 둔 채 웃으며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다.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루피가 팔을 저었지만 상디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이익, 더 먹을 거야! 안 된다고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말싸움(과 몸싸움)을 제지하고 나선 것은, 언제나처럼 나미였다.

“뭐, 상디 군. 짐을 들어준 것도 루피고, 조금 더 줘도 괜찮지 않아?”

“나미 씨는 어리광 들어주지 말라고 하시면서 가끔 보면 저보다도 더해요.”

“어차피 상디 군도 조금 더 있으면 냄비 째로 루피한테 줄 거였잖아.”

잠시 동작을 멈춘 상디가 머쓱하게 웃었다. 역시 나미 씨는 이길 수가 없다니까요. 루피의 얼굴에 올렸던 발을 치우고 조리대로 걸어가 냄비를 들고 왔다. 냄비 받침을 내려놓고 그 위에 냄비를 올려두었다. 우와, 신난다! 라고 소리치며 냄비로 달려드는 루피를 조금 부러운 눈빛으로 우솝이 쳐다보고 있었다. 우솝 너는 내가 장담컨대 그 접시에 있는 거 다 먹고 나면 배불러서 그 냄비는 부럽지도 않을 거다. 케이스에서 담배를 집어 들며 상디가 말했다. 그리고 루피, 부엌 바닥에는 흘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 나중에 청소하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이어 투덜댔지만 선장은 이미 냄비 바닥까지 고개를 처박고 있어, 그 귀로 어떤 소리가 흘러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상디가 고개를 내저었다.

조로 앞의 접시는 언제나 그랬듯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소리 소문 없이 당사자는 자리를 떠 버렸다는 사실이다. 빈자리를 지그시 바라보던 상디가 짧게 한숨을 삼켰다. 이런 찜찜하고도 거북한 분위기를 원한 건 아닌데,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자신이 힘들었던 것만 기억이 날 뿐, 딱히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기심을 터이다. 손에 들고 있던 후추병을 테이블 위에 내랴놓고, 조끼 앞섶을 풀어헤친 채 배를 두드리는 선장을 가만 바라본다. 분명 어젯밤 선장은 조로를 만났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당사자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답답할 뿐이다.

상디는 크루 중 마지막으로 우솝이 나가는 걸 곁눈질로 확인하며 담배를 빼어 물었다. 선장은 조금 얼굴을 찌푸렸지만 별 말은 하지 않는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빈 그릇들을 수거해서 개수대에 넣는데, 웬일로 선장이 그릇을 양 손에 가득 들고 졸래졸래 따라온다. 그러다 또 깨뜨려먹는다, 라고 중얼거렸지만 못 들은 척 하기에 내버려 뒀다. 선장의 서투른 배려는 천성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확실히.

“어이, 고무.”

“응?”

“어제 조로 녀석이랑 무슨 얘기 했어?”

“아……. 별 얘기 안 했는데.”

“거짓말하지 마.”

눈에 보이는 거짓말에 상디는 문득 실소했다. 개수대 안에 접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뒤를 돌아 본 선장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잔뜩 묻어 있었고, 말해서는 곤란한 대화라는 사실은 그 표정 한 조각으로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딱히 캐물어볼 마음도 들지 않아 한숨을 쉬며 재떨이를 꺼내 담배를 비벼 껐다. 선장은 아예 대놓고 상디의 눈길을 피하고 있다. 살짝 열이 받아 상디는 루피의 머리통을 잡아 자기 쪽을 보게 했다. 그리고 놀랐다. 그 표정이 생각보다 많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상디.”

“뭐냐, 그 표정은.”

“난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

“난 네가 필요할 뿐이야.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야.”

“……누가 뭐랬냐, 바보.”

“그러니까 상디도 그렇게 고민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

루피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 가만히 내려놓을 때까지 상디는 그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더없이 진지한 표정의 선장은 한 마디의 변명도 용납하지 않았다. 변명을 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 순간 상디의 입술 새로 흘러나온 건 짧은 한숨뿐이었다. 저런 눈빛을 마주하면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모든 사고가 정지한다. 그의 오른손은 아직도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잡고 있었다. 며칠 전, 아니 몇 달 전, 아니 몇 년 전일지도 모른다. 식어빠진 코코아 냄새가 떠돌던 부엌이 문득 떠올랐다. 상디는 가만히 자유로운 왼손을 그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오른쪽 손목에 가해지던 힘이 조금 약해진다.

“난 망설이고 있지 않아.”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확실하게 말했다. 천천히 선장은 상디의 오른쪽 손목을 들었다.

“응.”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대답하고 그는 입술을 상디의 안쪽 손목에 가져다 대었다. 물기 어린 감촉에 상디는 살짝 어깨를 떤다. 허리에 힘이 빠져 후들거리며 주저앉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갓 이빨이 난 어린 동물처럼 미숙하고도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소년의 불의의 기습은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것도 포함이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떼고 한 번 웃은 후 아무 말 없이 부엌을 나가버리는 선장의 뒷모습을 상디는 한참동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 손목을 눈앞까지 들어 들여다보았지만 조금 붉어진 것 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손목의 붉은 자국이야 하루면 없어지리라. 하지만.

“……망할 놈.”

상디는 한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약간 어지러운 기분이었지만 어딘가에 몸을 기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른쪽 손목을 가볍게 감싸 쥐고 고개를 숙인다. 익숙한 부엌 바닥이 보였지만 오늘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낯설었다. 눈앞에 무언가가 자꾸 어른거려 눈을 꾹 감아버렸다. 손목의 자국은 하루면 사라지겠지만, 마음의 자국은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자, 간식.”

“…….”

“뭐야, 그 얼빠진 표정은? 감사하다고 무릎이라도 꿇어야지.”

한손에 샌드위치 접시를 들고 나타난 요리사를, 검사는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양손에 들고 있던 바벨을 저도 모르게 놓치는 실수를 했지만 상디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디 더 해보라는 듯 아예 팔짱을 낀 채 난간에 기대서서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만 있는 것이다. 샌드위치 접시는 그의 옆에 놓여 있었다. 문득 화가 치밀어 오른 조로가, 손에 들고 있던 바벨을 도로 내팽개쳤다. 꽤 큰 소리가 났지만 요리사의 말린 눈썹은 꼼짝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기선제압은 절대 당해주지 않겠다는 태도다.

“무슨 수작이야?”

“너도 실컷 내 신경을 소비하게 만들었으니, 나도 똑같이 해주겠다는 거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다잖냐.”

상디는 오른쪽 주머니에서 은색 담배 케이스를 꺼내 자연스럽게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조로는 미간을 있는 힘껏 좁혔으나 그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후회하고 있지?”

조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그 말투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 하고 뱉어낸 담배 연기가 파란 하늘로 올라가는가 싶더니 곧 흔적도 없이 흩어진다. 뭘? 이라고 되묻고 싶었으나 그 짧은 말에도 자신의 동요를 들킬까봐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깊이 끼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자신을 쳐다보던 요리사의 그 눈길, 괜한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말하듯 빈정거림을 가득 담았던 눈길에 오기가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후회하고 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둘이 뭘 하든 끼어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 때 그 도발에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도, 물에 빠진 선장을 건지러 뛰어들던 때의 그 미소를 보지만 않았더라도 선장의 그 서늘한 안광을 온 몸으로 받아낼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입 아프게 떠들어봤자 무엇하랴. 귀찮은 일 싫어하고 골치 아픈 일 싫어하는 자신이 왜.

“너랑 무슨 말을 했냐고 선장한테 물어 봤는데, 대답을 안 해 주더라고.”

“별 말,”

“시답잖은 말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지만.”

채 말을 끊기도 전에 요리사는 재빨리 말의 뒤꼬리를 채갔다. 그래도 영 신경 쓰인단 말이지, 라고 여유작작한 어조로 뒷말을 잇는 상디를 보면서 조로는 더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정말 이 요리사의 존재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왜 부탁하지도 않은 샌드위치를 들고 와서 시비를 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의 수련시간을 방해하는 주제에 말을 빙빙 돌리면서 손 안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뻔한 수작질이라 코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더 할 말 없으면 가 봐라. 이쪽은 수련 시간도 부족해서 말이지.”

“계집애 같아서 짜증난다고 했었지.”

“…….”

도대체 언제 입에 담았던 말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정말 사정 편한 기억력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조로는 솔직히 그랬다. 뒷말을 재촉하기보다도 바벨을 다시 들고 상디를 등졌다. 여전히 매캐한 담배냄새가 짭짤한 해풍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너도 똑같아, 빌어먹을 자식아.”

“…….”

“이 말도 기억나냐? ‘선장의 반만이라도 나를 위해줄 수 있으면 그만해두라’했던 거.”

조로는 말없이 바벨을 앞뒤로 두어 번 흔들었다.

“너희 둘이 쌍으로 날 괴롭히는 것도 이제 질렸다.”

다시 담배를 빼어 물었는지, 잠시 그쳤던 담배 연기가 다시 흘러오고 있었다. 조로는 속으로 잠시 풍향을 욕했다.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어야 이 담배냄새를 맡지 않을 텐데. 등줄기에 얽히는 긴장감은 바벨의 무게에 상디의 시선까지 더해졌음에 틀림없다. 육지인지 섬인지에 가까워오는지 바람에 다른 냄새가 섞였다. 조로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이 녀석이 무슨 말을 바라고 온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조로는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그만 하련다, 지쳤어.”

“나도 마찬가지다.”

“뭐?”

조로는 바벨을 천천히 내려놓고, 꼭 그만큼 천천히 뒤를 돌았다. 여전히 난간에 기대 선 요리사가 보였다. 그 푸른 눈에 담긴 감정을 전부 읽어낼 수는 없다. 상디는 조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요리사의 말끝은 이미 조로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라는 말을 조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이 배 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요리사의 저 말조차 사실은 대답을 원하고 꺼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 얽히고 설켜버린 감정들이 더 이상 손 쓸 도리도 없이 여기저기 내팽개쳐져 있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끊지 않고 풀어낼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섬세한 계집애들이 아니라 더 그런지도 모른다. 조로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표정을 보여준 요리사놈이 잘못했다고 몇 번을 자기합리화해보아도 날로 어두워지는 요리사의 표정은 조로에 대한 무언의 공격이었다.

“……그만하지.”

조로가 툭 내뱉었다. 요리사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쨍한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파도 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없는, 조용하다면 조용한 날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배가 멈췄다. 어느 섬에 정박한 모양인지 닻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너희 둘이 무슨 관계든 상관없다.”

거짓말한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는 듯 상디가 픽 웃는다. 개의치 않고 조로는 말을 이었다.

“미안했다.”

상디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사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고,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전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의 계기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다. 확실히 그 때부터였다. 컵 파편에 발을 다치고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날. 자신을 걱정해주던 조로에게 쓴웃음을 던졌더랬다. 그 미소를 보고 조로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했을 때 조로가 제게 그런 미소를 던졌더라면 인정사정없이 발을 날려버리고 말았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검사의 이러한 집착이 생겨났다면 그 태도의 책임 중 적어도 반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그래, 굳이 따지자면 바로 전전날 밤의 일이었다. 계집애 같다는 말에 발끈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이렇게 냉정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있었다. 상디는 자신의 이러한 사고방식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이런 사고를 통해 앞으로의 해결책을 찾아낸 일이 더욱 많았기 때문이다.

선장과 둘만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둘만의 문제일 수가 없었던 것은, 망할 검사 녀석이 너무나도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까이 들어오려고도 했다. 자신은 그것을 막아보려 했다. 통하지 않는 도발인 것을 알면서도 ‘네게 그것까지 설명해 줄 의무는 없다’든가 ‘네게 그런 것을 알 권리는 없다’든가 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하면 검사 녀석이 스스로가 하려는 짓을 알고 물러날 줄 알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오판이었다. 그렇다 해서 자신만 책망해서도 안 된다고 상디는 알고 있었다. 다만 자기의 탓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뿐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어 버린 것에 자신의 잘못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비참하고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각오로 올라왔기에 조로의 입에서 선뜻 나온 사과 한 마디는 반가우면서도 미안하고, 그러면서도 찜찜한 것이었다. 더 큰 폭풍이 몰아칠 것이라 생각했는데 가랑비로 끝나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부분이겠지만, 맥이 탁 풀려버릴 정도로 간단하게 끝난 것에 조금은 미련도 남는다. 그렇게 치고 박고 싸우던 게 마치 몇 년 전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난 후이기 때문일까.

“뭐, 우리 검사님은 생각보다 델리케이트하다는 걸 이번 일로 잘 알게 됐어. 이제 뭘 해도 왕따는 안 시킬게. 됐지?”

“죽인다.”

“……나도 미안하다.”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금속음을 내면서 상디가 말했다. 적잖이 웃음이 섞여있는 목소리였다. 조로는 대답 없이 다시 뒤돌았다. 자리를 뜨는 발걸음 소라를 등으로 받으며 다시 한 번 바벨을 들었다. 그새 땀이 식어 피부에 와 닿는 바닷바람이 제법 차다.




10.

 

“끝났어?”

“나미 씨…….”

갑판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상디는 주춤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를 맞이하듯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만면에 미소를 띤 그녀의 눈빛에서 ‘절대 놔 주지 않겠다’는 뉘앙스를 읽은 것은 아마 틀리지 않았으리라.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이제 정말 끝났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조금 의외였다.

“오늘은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네?”

“알고 보니 이 섬, 패션으로 유명하다잖아? 쇼핑이나 좀 하려고.”

지도 한 장이 척 상디의 눈앞으로 내밀어졌다. 확실히 옷가게가 많아 보이긴 했다. 상호로 보아 대개 여성복을 취급하고 있는 듯했다. 뭘 도와달라는 건지,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상디는 나미를 바라보았다. 대답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 특별 남자친구로 인정해 줄게!”

“……네에?”

 

***

 

정확히 다섯 시간 후, 두 사람은 섬의 카페 한 구석 4인용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나머지 두 의자에는 갖가지 색깔의 쇼핑백이 놓여있다. 원피스, 블라우스, 스커트, 바지, 하이힐, 샌들……. 한 가게에서 30분은 기본이요 가격이 더 싸면 아까 나왔던 가게로 돌아가기까지 했다. 특별 남자친구라는 건 좋은데 설마 이런 일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조금 뻐근해오는 어깨를 주무르고 싶었지만 바로 앞에 생글생글 웃는 나미가 있어 어깨까지 손이 올라가질 않는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괜히 허세를 부리는 남자의 심리란 이런 게 아닐까, 상디는 잠시 고민했다.

“이제 당분간 옷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그렇겠죠.”

온종일 따라다닌(?)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나미는 그에게 셔츠 한 벌과 넥타이를 선물했다. 평소 그녀가 돈 쓰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아는 상디는 그야말로 감지덕지. 심지어 커피까지 사준다니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왜, 저번에 상디 군이 발을 다쳤을 때 있잖아?”

“네?”

커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던 상디가 반문한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그 때를 회상한다. 분명 컵 파편에 발을 찔렸을 때 자신의 바로 앞에는 나미가 있었다. 이후로 그 일에 대해 한 번도 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 그 사실조차 까먹고 있었다. 뭣보다 그 후로 무슨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어야지……. 상디는 다사다난했던 때를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 그 때 많이 놀랐죠. 죄송해요.”

“아니아니, 내 얘기가 아니야. 그건 둘째 치고.”

손사래를 치며 나미가 웃었다.

“상디 군이 쓰러져서 누워 있었을 때 말이야. 루피 상태가 많이 이상하더라고.”

“……네?”

“무표정이었는데, 음, 확실히 나는 알아. 굉장히 화내고 있었어.”

“…….”

나미는 여유롭게 테이블에 손을 뻗어 각설탕을 집었다. 상디는 그 동작들을 멍청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각설탕을 집어넣고 티스푼을 들어 휘휘 젓는 그녀의 표정은 평온 그 자체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상디는 말없이 자신의 커피를 휘휘 저었다. 이미 많이 식어 김은 더 이상 올라오지 않는다. 흔들리는 갈색 수면 위에서 자기 자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루피랑, 상디 군.”

일부러 비우고 있었던 머릿속이 순간 그 때의 일로 가득 차버렸다. 그 일이 물러난 후에는 깨끗한 화이트 아웃. 당황해서 입을 열려는 상디를 나미가 한 손을 들어 제지한다.

“내가 참견할 일도 아닌 것 같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난 루피 녀석이 상디 군을 괴롭히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지 뭐야. 왜냐하면 그 이후로 상디 군 상태가 굉장히 이상했거든. 굳이 내가 읊어주지 않아도 잘 알겠지?”

“……네에…….”

“뭐, 내 생각이 어디까지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 해결된 거야?”

“뭐, 어느 정도는요.”

“조로도?”

“……전부 다 알고 계신 것 같네요.”

“말했잖아, 다 아는 건 아니라고.”

나미는 한 번 웃어 보이더니 여유롭게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반도 줄지 않은 자신의 잔을 바라보던 상디가 한숨을 쉰다. 애초에 얼렁뚱땅 넘어간다는 것 자체가 이 항해사의 앞에선 통하지 않는 전술이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다 해결됐다니 다행이네. 정말, 분위기를 싫어도 읽을 수밖에 없는 나도 좀 배려해달라고.”

“하하.”

머쓱하게 웃은 상디가 잔을 들었다.

“사실 그러고 나서 너희 둘을 붙잡아서 멱살이라도 붙잡고 얘기를 해야 하나 싶었어. 우왕좌왕하던 사이에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만큼 정리가 된 게 다행이네.”

“뭐, 어쩌다 보니 정리가 됐다고 할까요. 제가 한 건 없는 것 같지만.”

“하여간 시커먼 남정네들이 더 한다니까. 굳이 불러낼 필요도 없었네.”

나미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다 마셨으면 이제 돌아가자, 상디 군. 저녁은 배에서 먹고 싶으니까. 자연스럽게 쇼핑백을 한 무더기 들고 일어서는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상디에게, 나미의 날카로운 한 마디가 꽂혔다. 억지로라도 그녀의 손에서 쇼핑백을 빼앗으려 드는 상디의 동작을 원천봉쇄해버리는 문장이었다. 덧붙여, 이 말을 할 때 그녀의 표정이 상당히 즐거워보였던 것은 상디의 착각이 아니리라.

“이제 이런 것도 용서하지 않을 녀석이 있잖아?”

 

***

 

“좀 떨어져.”

“왜?”

“왜냐니, 설거지하는 데 불편하니까.”

“내가 해도 되는데.”

“……말을 말자.”

거품 묻은 수세미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상디가 한숨을 쉬어도 허리에 감긴 팔은 절대 풀리지 않는다. 사실 풀릴 거라고 생각하고 한 말도 아니기에 상디는 그다지 상심하지 않았다. 그저 담배 한 개비가 절실해졌을 뿐이다. 어깨가 무겁다했더니 언제부터인가 녀석의 턱이 올라와있었다. 팔을 벌리는 반경이 굉장히 좁아져서 그릇을 닦는 것도 제한적인 동작만으로 해내야만 한다. 최근 급격하게 피부가 맞닿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사람들이 없을 때에 한해서. 예를 들어 이렇게 모두가 자리를 뜬 밤의 부엌이라든가, 세탁실이라든가 아무튼 인적이 없는 곳에선 백이면 백이었다. 상디는 말없이 마지막 접시를 뽀득, 소리 나게 닦고는 찬장에 올려두는 것으로 설거지를 끝냈다. 그가 뒤돌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팔이 풀렸지만 상디는 뒤돌지 않았다.

“어이, 고무.”

“응?”

“넌 대체 언제부터 내가 좋았던 거냐?”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해서 던진 질문이었는데 쉽게 답이 돌아오지 않아 맥이 탁 풀렸다. 상디는 뒤돌았다. 진지한 얼굴이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새까만 소년의 눈동자가 맞부딪혀올 때의 중압감이란 역시 대단해서, 저도 모르게 다시 시선을 피할 뻔했다. 하지만 끝까지 따라붙는 눈길에 상디는 체념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도통 뭐를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는 눈빛. 그저 이쪽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더 읽어낼 수가 없다. 여기선 이런 질문을 던진 자신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말을 말자, 하고 도로 뒤도는 상디를 꽉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

또 다시 허리에 감겨오는 팔.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그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봐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 순식간에 옮겨오는 체중에 상디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했다. 허리에 무언가 부딪혀오는 느낌이 들었다. 싱크대다. 선장이 멈추지 않고 계속 밀어붙여오는 바람에 상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싱크대에 앉아버렸다.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선장의 얼굴은 빌어먹게도 잘 내려다보인다.

“뭐…….”

“뭘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어.”

“…….”

더없이 진지한 얼굴은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쓸데없이 이런 때만 박력 넘치는 것도 반칙이라니까, 라고 속으로 씹어뱉었지만 선장에게 들릴 리 없었다. 투덜거리면서도 상디는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내어 선장의 머리카락에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검은 머리카락이 아쉬웠다. 언제부터 이런 애틋함이 생겨버린 걸까? 항상 철부지라고만 생각해왔던 이 남자에게 언제 이런 감정이 생겨버린 걸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정답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익숙해져버린 손길과 익숙해져버린 목소리, 익숙해져버린 말투. 습관이란 무서워서.

“밥을 해 줘서는 아니겠고, 설마.”

“내가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럼 못 한다는 거냐?”

“내가 상디에게 그 질문을 똑같이 했다고 생각해봐.”

그러니까 그걸 모르겠어서 너한테 물어본 거야, 라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문득 깁스를 한 상태에서 그를 구하러 물에 뛰어들었던 날이 생각났다. 아, 아마 그때부터였던 듯하다. 물속에서 그가 자신에게 모든 걸 맡길 수밖에 없다는, 새삼스럽다면 새삼스러운 그 사실을 깨달은 바로 그때. 그의 서투른 배려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 역시 그를 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선장은 이미 예상하던 바인 듯, 씩 웃고만 있다. 상디가 얼굴을 붉히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럴 때만 쓸데없이 날카롭다. 평소의 허술하면서도 천진한 모습은 정작 나오길 바랄 땐 나오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계속해서 그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피차일반이군.”

한 마디 툭 내뱉고 상디는 먼저 허리를 숙였다. 언뜻 시선 너머로 장난스럽고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쳐지나간다. 자신의 손가락이 그 흑발 사이를 헤집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입술이 맞닿았다.




8-1.

 

“로빈, 좋아한다는 게 뭘까?”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던 손가락이 딱 멈추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보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갑판엔 티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던 로빈과, 난간에 기대 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던 루피 딱 둘만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자신이 들은 말이 맞는 걸까 고민하던 로빈에게 결정타가 날아왔다.

“뭘까?”

로빈은 손끝으로 더듬어 책갈피를 찾아 그 페이지에 끼우고 결국 책을 덮고야 말았다. 의외의 인물에게서, 의외의 질문이 나왔다. 먹는 것과 모험 외에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 같았던 이 선장님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아무리 로빈이라도 조금 놀랐다. 진지한 표정으로 봐서 진지하게 대답해줘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방향의 대답을 해 줘야 선장이 만족하고 물러날지 그것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알아?”

로빈이 그저 바라보고 있자 자신의 질문을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선장은 친절하게 사족을 달았다. 순수하게 호기심에 가득 찬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던 로빈이 훗, 하고 웃었다. 요 며칠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선장이 뭔가 이상하다는 대화를 나미와 나눈 적이 있는데 그게 이런 일까지 불러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무래도 최근의 일들은 선장의 이런 고민들로 인해 벌어진 듯했다. 앞뒤사정을 전혀 몰랐지만, 이 정도의 추론은 일도 아니었다. 조금 재미있어진 기분에 로빈은 턱을 괴고 선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뭐, 아프면 걱정되고,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보고 싶고, 괜히 관심을 끌어보고 싶고, 그런 거면 되는 거야?”

선장의 질문에 답이 들어 있었다. 로빈이 알기에는 요 사이 배에서 ‘걱정될’ 정도로 아팠던 건 요리사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전부 다 아는 주제에 남들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더 확정하고 싶었던 거라고, 로빈은 생각했다. 참 답지 않은 일을 다 하네, 우리 선장님도.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여기선 감이 왔다는 티를 내지 않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입을 다문다.

“뭐,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좋아한다, 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관시은 있는 것 같은데?”

적절히 그 수준에 맞추어 대답해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대충 선장도 모든 걸 이해했으리라. 선장의 표정은 한층 복잡해진다. 밀짚모자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한 손으로 꾹 누르면서도 시선을 먼 바다에 던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다.

“응, 고마워.”

영 떨떠름한 표정이면서도 일단 그걸로 수긍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해온다. 뭐, 별 것도 아닌데. 라고 웃으며 대답했지만 로빈은 열심히 지난 며칠을 떠올리고 있었다. 요리사와 선장의 사이가 이상하다던 항해사, 얼이 빠져 여기저기 부상을 입어 오던 요리사, 평소와 달리 짐꾼을 자청하던 검사. 그런 거였구나. 선장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로빈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 지었다.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할까?”

“응?”

“아마 우리 둘만 이 배에서 저녁을 먹을 것 같은데.”

“상디가 많이 늦을까?”

“쇼핑 리스트를 봤는데 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던걸?”

“그럼 볶음밥이면 돼.”

라져, 라고 말하며 로빈이 다시 웃었다. 방금 대화로 선장이 누구를 신경 쓰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 버렸다.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었다.

 

***

 

감시용으로 선두에 피워놓은 귀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남성의 발소리, 그것도 약간 묵직한 것으로 보아 상디보다는 조로에 가까울 터였다. 그렇다는 건, 검사가 요리사보다 먼저 배에 돌아왔다는 것이 된다. 로빈은 채소를 썰던 손을 잠시 멈췄다. 어쩌면 이렇게 예상대로 움직여주는 건지, 이쯤 되면 이 모든 일은 자신이 쓰고 있는 플롯이라고 해도 설득력 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갑판에 핀 귀는 선장과 검사의 언쟁을 가감 없이 자신에게 전달해주었다.

“참 쓸모 있는 능력이란 말이야.”

보기 드물게도 혼잣말을 흘리며 로빈은 잔뜩 꺼내두었던 채소를 딱 2인분 제외하고 도로 냉장고에 넣었다. 선장의 양에 맞출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기억이 옳다면, 검사의 위는 확실히 선장보다는 작았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로빈이 팬에 기름을 두르고 채소를 쓸어 넣는다. 빨리 선장이 요리사를 데리러 가도록 하고, 갑판 한 가둔에서 벙 쪄 있을 검사를 데리고 들어오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pilogue

 

"……참 나. 이게 뭐야."

거울에 목덜미를 비추며 상디는 한숨을 쉬었다. 목덜미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곳에 선명하게 보랏빛 멍이 맺혀 있었다. 그나마 한 군데로 참아준 게 다행일까. 이렇게 선명하게 남기는 것도 힘들다던데, 대체 얼마나 집요하게 달라붙었으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남길 수 있는 건지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렇게 물어보면 또 뻔뻔한 낯짝으로 ‘얼마나 달라붙었는지는 나보다 상디가 더 잘 알 것 아냐?’ 라고 반문할 것이 뻔해 관두기로 했다. 멍하니 거울을 보는 사이에 칫솔에 묻혔던 치약이 세면대에 떨어져 살짝 짜증을 내며 다시 치약을 짠다.

손목에 붉은 자국을 낸 이튿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식당으로 들이친 선자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상디의 손목 안쪽이었다. 당연히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적잖이 실망한 표정의 선장에게 ‘왜, 그게 며칠이나 갈 줄 알았어?’ 라고 물은 것이 실수였다. 마치 얼마나 가는지, 상디 피부의 회복력이 강한지 자신의 힘이 강한지 실험이라도 하듯 연달아 여기저기에 키스마크를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면서 오늘의 메뉴보다도 오늘은 어떤 식으로 가려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쇄골이 보이는 브이넥이나 티셔츠 류는 절대 입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둘만 있을 땐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하겠다며 불쑥불쑥 들추는 바람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도장도 아니고.”

혼잣말을 하다가 상디는 문득 얼굴을 붉혔다. 키스마크는 독점욕의 표시라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에이, 설마. 그냥 얼마나 오래 가나 궁금한 것뿐이겠지. 애써 웃어보려 했지만 한 번 들기 시작한 불길한 생각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설마.”

수건을 일부러 목에 둘러 최대한 가려 보면서 화장실을 나온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나날을 보내야하는 걸까. 오늘도 한숨은 떨어질 날이 없다.

 

***

 

“재밌잖아.”

“……뭐?”

“재밌으니까.”

또 목덜미로 입술을 가져다 대려는 선장을 재빨리 저지하고 도대체 왜 이렇게 키스마크에 집착하느냐고 물었다. 선장은 동작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다가 저렇게 대답했다. 재밌다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는 걸까. 어떤 상식으로 이해해야 남을 물고 빠는 게 재미있을까. 백번을 생각해도 자신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상디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남기는 너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감추는 나는 죽을 맛이라고.”

“왜 감추는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일 있냐.”

나미 씨의 눈빛이 얼마나 매서운데, 라고 덧붙이려다가 상디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꺼내서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거 꽤 아프다고.”

“아파?”

“한 번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선장.”

상디는 담배를 빼어 물었다. 그 정도 힘으로 빨아들이는데 안 아픈 게 더 이상한 것 아니냐, 라는 말은 속으로만 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선장은 큰 자각도 없이 하고 있는 모양이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이려는 찰나 선장이 입을 연다.

“그래도 싫은 건 아니지?”

“뭣…….”

“그치?”

대답은 애시당초 필요 없었다. 씩 웃은 선장이 상디의 손가락에 들려있던 담배를 빼냈다. 그거 장초, 라고 말하려던 말이 그대로 먹혀버리고 말았다. 실눈을 뜨고 바라본 장초는 선장에 의해 무참히 재떨이행이다. 아깝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이미 그의 입술은 목덜미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 성질을 낼지, 한 대 쳐버릴지 잠깐 망설이던 상디는 말없이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닿은 따뜻한 입술이, 차가운 피부 위에서 웃었다.

 


After Talk(2016. 7. 31 재판본 후기)


제가 LOVEBITE를 재판하는 날이... 진짜 오기는 오네요. 안녕하세요, 적향입니다. 네 번째로 인사드립니다. 사실 후기도 복붙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게 더 귀찮을 것 같아서 그냥 새로 쓰기로 했습니다. 표지도 새로 만드는데 후기 까짓것! 새로 쓰죠 뭐!

각설하고, 이 글의 시작은 2010년 12월 28일(6년 반 전이네요 소름)... ‘오늘 버스타고 집에 오는 동안 이어폰을 꽂은 채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정말 문득 아무도 없는 부엌에 혼자 앉아서 뭔가를 쓰고 있는 산지가 떠올랐다. 물론 조명은 조금 희미한 편이고, 안경(!) 을 쓰고 있어야 하고. 산지가 뭘 쓴다면 그건 당연히 식료품 리스트겠지.’ 라고 적어두었네요. 그 이후로는 정말 내용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내키는 대로 써 나간 글인데 많은 분들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어요. 4년 동안 너무 바빠서 강제 휴덕이고 거의 절필 상태였는데도 피드백 주신 많은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가끔 이 글로 루산에 입덕하셨다는 분들이 계셔서 너무 행복했어요8ㅁ8 감사합니다. 사실 글을 쓰면서 목표로 두고 있었던 건 ‘감정의 이해와 표출에 따른 갈등의 조성' 이었는데요……. 잘 됐는지는 모르겠네요. 크윽.

2015년 2월 원온 1회에 낸 파일을 잃어버려서, 블로그(2011년까지 올린 부분)에서 긁어오고 뒷부분은 책을 보면서 직접 타이핑을 쳤는데요(아 이거 진짜 고문이더라구요). 앞부분과 뒷부분의 문체?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나서, 5년 사이 제 글이 적지 않은 부분에서 바뀌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어요. 이게 뭐... 발전인지, 퇴보인지는 확정 짓지 못하겠지만요.

일단, 유독 많이 다친 상디 미안하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캐붕시킨 조로도 미안하다... 전에 후기에 썼는지 모르겠는데, 사실 중간까지는 삼각관계를 만들고 싶었어요. 결국 삼각관계로 돌입하기 일보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선로를 틀었지만...

아, 그리고 블로그 연재분과는 뒷내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너무 갈등갈등갈등 구조만 반복돼서 쓰던 제가 지치더라구요. 분량도 너무 길어지는 데다가 오히려 긴장감이 떨어지는 느낌에, 적당히 쳐내느라 고민을 좀 했었습니다ㅠㅠ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비문도 조금 고치고, 어색한 곳도 고치고. 신간 마감과 겹쳐서(미리미리 해둘걸)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책을 낸다면 기필코 단편집...ㅠㅠ

루산은 점점 마이너가 되어가는 기분이고(상디의 해 어디갔어!)... 탐라에도 모님과 모님 모님 빼면(????) 파시는 분도 거의 없는 것 같구... 이러는 저도 올해 타 장르에 발을 담갔고... 하, 하지만 그래도 원피스 안에선 루산이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흑발과 금발 넘 좋아요... 대식가 선장님에겐 요리사가 꼭 필요하다구요...ㅠㅁㅠ

후기를 두 개째 쓰려니 이제 쓸 말도 생각이 나질 않네요. 아참 조로가 들고 운동하는 기구가 덤벨인지 바벨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슴니다... 이렇게 쓰고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잘 모르겠네요. 후기도 여기서 줄여야겠따.

아무튼, 재판인데다가 그리 재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심지어 연애하는지도 잘 모르겠는 이런 책 관심 가져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동인 행사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 요즘이지만, 꼭 즐거운 행사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참, 한창 바쁜 중에도 내 첫 개인지 캘리 써준 ㄴㄹ, 8년 동안 내 덕질 찡찡 다 들어준 ㅈㅎ고맙다. 첫 책 준다고 약속해놓고 재판의 기회를 빌려 이제야 줘서 미안하다 사랑한다 ㅠㅠ♥

더운 여름날 몸조심하시고, 시원한 행사장에서 만나요! 감사합니다!

 

2016. 7. 31

적향(赤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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