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쿠니오이] 여름이 지나간 자리

2018.1.31 쿠니오이의 날



리퀘박스 :) 늦가을 배경으로 짝사랑을 포기하는 쿠니미.

사실 늦가을 배경은 아니게 되어버렸고... 연서의 배드엔딩 느낌으로 써보겠다고 했던 것도 없던 일이 되어버렸지만 ㅠㅠㅠㅠ 

어째 연서 이후로 쓰는 쿠니오이들이 대부분 해피엔딩이 아니라서 좀 미안하네요

많이 짧습니다! SS예요. 문단 나누는 방식에 변화를 좀 줘 봤는데... 안 하는 것으로ㅠㅠ

쿠니오이 기념이라기에도 민망하지만 썼으니 그냥 올리는 것으로ㅠㅠ 여러분 쿠니오이 맛있어요...



어쩌면 이 마음은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내 신발코가 유독 선명했다. 항상 비스듬히 아래를 보고 걷는 습관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은 그 각도가 평소보다 조금 더했다. 내 시야를 벗어날 듯 벗어나지 않는 당신의 발뒤꿈치. 더 멀어질 것 같으면서도 결국 그 거리를 지키고야 마는 꾸준함. 

나는 당신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꼭꼭 씹어 삼켰다. 아마 그러면서도 조금 더 크게 한숨을 내쉬면 당신이 지금이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마음 한편으로는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기대감 따위, 전혀 의미 없는 것인데도.


마음을 그대로 말로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기껏 내 마음을 확실히 알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런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제3자가 확실히 정해주는 편이 더 명확하지 않을까. 그러나 분명 어떤 결정을 듣더라도 나는 반발할 것이 확실하므로, 이쪽도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다. 어중간한 자기 확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는 언제까지 당신의 뒤꿈치만 보고 걸어야 할까. 그렇다고 내게 당신의 앞으로 돌아가 당신을 멈출 만큼의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 단순명쾌한 논리를 나는 어쩌자고 자꾸 원망하고 마는 걸까.


정확한 숫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더웠다는 여름이 드디어 끝을 고했다. 매일 자체 불쾌지수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면서도 나는 배구부 연습을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이카와 씨는 별다른 말을 해 주지는 않았으나, 이따금 내 옆얼굴에 와 닿는 시선이 평소보다 부드러움을 느낄 때면 나는 들릴 리 없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고, 혹여 정말 시선이 부드러웠다 해도 그것은 딱히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었다. 살갗에 와 닿는 바람에서 희미한 열기가 사라지고, 대신 꼭 그만큼 희미한 냉기가 스미기 시작했다. 어느 계절이든 끝과 시작은 맞붙어있다. 항상 팔뚝 위로 걷어붙였던 저지 소매를 끝까지 풀어 내리면서 나는 이번 여름을 떠올린다. 

아스팔트 위에 되비치는 뜨거운 햇볕, 체육관 조명을 받아 더 희게 빛나던 오이카와 씨의 팔, 그리고 그 위에 맺힌 땀방울. 여름이면 유독 우렁찬 기합 소리. 오이카와 씨가, 아니면 이와이즈미 씨가 간혹 용돈을 털어 돌리던 아이스크림. 끈적하게 녹아 손가락 위를 뒤덮은 아이스크림의 잔해. 잔뜩 열어놓은 체육관 문으로 들어오던 여름 냄새. 그 모든 것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여름의 흔적이 남은 자리를 더듬어 당신을 찾는다. 

끔찍할 정도로 선명했던 나의 여름에 당신의 지분은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신이 아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만, 내 여름은 분명 이제껏 보내온 어느 여름보다도 뜨거웠다. 그리고 빨리 끓는 것은 빨리 식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묵묵히 내 여름이 식기를 기다렸다.

빨리 끓는 건 빨리 식는다. 그럴 테지. 나는 담담히 속으로 되뇌어본다. 빨리 끓은 마음이라 빨리 식을 줄 알았다. 내 예상이 멋들어지게 빗나가고 나서야, 어쩌면 이 마음은 의외로 천천히 끓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글쎄,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콕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거슬러 올라가 읽어보려다 왠지 무서워지는 마음에 곧 그만두었다. 중학교 1학년 때가 나오면 정말 걷잡을 수 없어질 것만 같아서. 1년 끓인 마음이 완전히 식는 데 꼬박 1년이 걸린다면, 나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오이카와 씨를 지울 수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절망하는 것보다야 아예 기원조차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 낫지 않은가. 꽤 차갑고 건조해진 가을바람을 맞아 까슬하게 일어난 내 입술을 매만지며 나는 그런 안일한 결론을 내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무언가가 쑥 내밀어 졌다.


“이거.”

“……이게 뭔데요?”

“립밤. 아무한테나 안 빌려 주는 거야.”

“…….”


오이카와 씨가 내민 작은 원통형 물체가 립밤이라는 걸 내가 모를 리 없다. 이게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이걸 왜 내게 건네느냐 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오이카와 씨도 모를 리 없을 것 같은데 그는 굳이 ‘립밤’이라며 물체의 정의를 이야기해주었다. 잠자코 받아든 채 오이카와 씨를 올려본다. 함께 귀갓길을 걸은 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처음 마주보는 그의 눈동자. 옅은 다갈색 눈동자가 저녁 해를 담아 평소보다 조금 더 붉게 빛났다.


“제가 써도 돼요?”

“쿠니미쨩,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


간접키스 따위의 유치한 단어를 떠올릴 틈도 없이, 그는 내 손에서 도로 립밤을 빼앗아 들고 뚜껑을 열었다. 달큼한 바닐라 냄새가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온다. 선입견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보통 남자들은 무향을 사용하는데 오이카와 씨의 립밤은 가감 없는 바닐라향이다. 그리고 그게 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려,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지 마, 입술 갈라져. 피 나도 오이카와 씨는 모른다?”


왜 웃는지 이유는 묻지 않고 그는 내 턱을 치켜든다. 예고 없이 닿아온 피부에 나는 조금 긴장했다. 입술에 와 닿는 매끄러운 느낌. 립밤이 내 입술 위를 두어 번 왕복한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그는 도로 립밤 뚜껑을 닫았다. 뚜껑을 닫았는데도 어디선가 계속 바닐라향이 나서, 대체 뭘까 했더니, 내 입술 위였다.


“립밤 하나 들고 다녀야겠다.”

“있는데 자꾸 잃어버려요.”

“아하하, 나도 그래.”


접점을 찾아 즐겁다는 목소리로 말하면, 듣고 있는 나는 또 눈을 내리깔고 마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떨려오는 마음을 감추려 무진 애를 썼다. 내가 그를 속인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건지조차 의문이었지만. 

착실히 가장자리부터 무너져 내리는 그 복판에 선 채로 나는 닿지 않는 당신의 등을 향해 몇 번씩 마음속으로만 손을 내밀었다. 실제로 손을 내밀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지겹도록 되풀이한 상념,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던 당신의 온도. 유독 뜨거웠던 나의 여름과 일찍 찾아온 가을.


알고 있어요. 입 모양으로만 말해본다. 혀끝에 씁쓸한 바닐라향이 묻어났다. 

이 정도 지켜봤다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당신을 향하는 이 마음은 결국 형해화하고 만다는 것을. 성큼성큼 걷는 당신의 발자국을 좇아가기만 하는 이 입장으로는, 당신 옆에 나란히 설 수 없다는 것을. 소리 없는 혼잣말로는 당신이 돌아봐 주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누구도 변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 갈림길.”

“……네?”

“갈림길이라고. 나는 이쪽. 쿠니미쨩은 저쪽이지?”


선택의 여지 없이 단호한 갈림길 앞에 선 채, 오이카와 씨는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다. 이대로 나는 내 갈 길을, 오이카와 씨는 그의 갈 길을 가면 된다. 그리고 이 갈림길 앞에 선 나는 지금의 내 처지와 너무도 비슷한 상황에 그저 할 말을 잃는다. 내 침묵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오이카와 씨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할 말 있어?”

“……이번 여름, 유독 더웠죠.”


오이카와 씨의 고개 각도가 더욱 비스듬해졌다. 눈동자에 당혹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입안이 말랐다. 나는 나를 스치는 바람에서 때늦은 열기를 찾아보려 노력한다. 어쩌면 내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멍청하고도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아.


“쿠니미쨩이 더 힘들어하는 것 같긴 했지. 그래도 이제 여름은 다 지나가서 다행이야. 이제 저녁나절엔 좀 추우니까. 근데, 그 싫어하는 여름이 끝났는데 쿠니미쨩은 아직도 기운이 없네?”

“…….”


나는 웃었다. 억지로 웃어보려 했는데 아마 평소와 비슷한 웃음이었을 것이다. 아주 조금, 입꼬리를 끌어올리기 힘들었던 것 빼고.


“끝나서 다행이네요.”

“응. 그런데, 여름이 왜?”

“그냥, 가을이 와서 좋다, 싶어서요.”

“나도 좋아. 조심해서 들어가. 내일 보자.”


싱긋 웃는 당신의 얼굴에 나는 아무런 말도 덧붙일 수 없다. 자신의 길을 골라 걷기 시작하는 등 뒤에다 쏟아내고 싶은 말이 목구멍을 가득 메웠다. 뱉어내지 못하는 말들이 내 속으로 가득 가라앉았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라 좋아했는지도 모르지. 역시 허전하기는 하네.

나를 스쳐 그에게로 향하는 바람에는 역시 가을 냄새만 가득하다. 이윽고 집을 향해 뗀 발걸음마다 시렸다. 어쩌면, 이라니.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미 내 여름은 끝났다. 내 손으로 끝냈다. 그는 가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매정한 뒷모습을 가만히 손끝으로 덧그리다가 채 매듭짓지 못한 채 손가락을 떨어뜨린다. 입술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나는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둥글게 몸을 말고 누운 어린아이였다. 

어쩌면 여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카게오이 + 쿠니오이 + 기타 오이른

적향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