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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오이] 야행(夜行) 5

네임버스 / 느와르 AU. 쿠니오이 요소 있음.

4편부터 5편까지 텀이 한 달이나...!

라고 생각했는데 옛 장르에서는 연재 텀이 4년인 적도 있었으니 이 정도는 세이프 아닐까 (아님)





정신을 잃은 동안 긴 꿈을 꾸었다.



꿈이라기에는 선명하고, 기억이라기에는 희미한 영상들이 뇌리를 헤집었다. 이제는 다 잊었다고 생각한 유년기의 기억도 부분부분 자리를 차지했다. 카게야마에게 과거를 다시 마주하는 건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시선 한 조각조차 던져주지 않던 7년 전 어느 겨울날까지 떠올렸을 때는 몸이 먼저 깨어나려 애썼다. 누워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애써 구부리려 했지만 야속하게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이 기억만큼은 퍼내고 싶지 않았는데. 등 언저리가 차갑게 식는 느낌은 분명 저를 받치고 있던 벽돌담의 냉기다. 가장 끔찍한 게 가장 선명할 필요는 없잖아, 외쳤지만 입은 말라붙기라도 한 듯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뒷골목의 악취, 누군가의 낮은 말소리. 저 멀리서 오고 가는 발소리, 온몸을 적시는 눈 녹은 구정물. 비참할 틈도 없이 처절했다. 며칠 동안 입에 댄 먹을거리라고는, 닷새 전 쿠니미가 내민 빵 쪼가리가 전부였다. 손을 대면 부스러져 내리던 그 빵 쪼가리에서 맛 따위를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나마도 두 소년은 부스러기를 흘릴세라 조심스럽게 입안에 밀어 넣고, 손바닥 위에 남은 부스러기까지 털어 넣었다. 카게야마는 그 빵이 어디서 났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쿠니미도 굳이 출처를 덧붙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두 사람이 함께 나오려던 것은 아니었다. 무턱대고 새벽을 틈타 창밖으로 나가려던 카게야마를 적발한 것이 원장이 아닌 쿠니미였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위태롭게 창틀에 매달린 카게야마의 뒷덜미를 누군가가 끌어내렸다. 화장실에 가려던 쿠니미였다. 쿠니미는 한숨을 한번 크게 쉬고는 아무 말도 없이 들어갔다. 그 다음 날부터 두 사람의 탈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보육원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데에는 결국 성공했지만, 바깥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도움을 청할 곳도 없다. 쿠니미와 카게야마에 앞서 잠시나마 탈출에 성공했던 아이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돌아온 후 겪은 일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탈출은 완벽해야 했다. 설령 밖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따뜻한 이불이 그리워질 때마다 두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시야가 가물거렸다. 찬 공기가 억지로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오려 애썼지만, 눈꺼풀이 아래로 떨어지는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저체온으로 죽고 싶지 않으면 절대 눈 감지 말랬는데. 그 말을 해 준 사람의 얼굴을 잠깐 떠올리는 순간, 누군가의 구둣발이 앞에 섰다.


오이카와 씨.


꿈이니까 알 수 있다. 카게야마의 앞에 선 사람은 오이카와다. 눈앞의 물체가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듯, 구둣발로 저를 이리저리 헤집는다. 딱딱한 구둣발이 천 아래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조차 제지할 수 없었다. 툭, 하고 손이 떨어진 때에야 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곧 사태파악을 했는지 오이카와는 넝마를 둘러업었다. 뛰쳐나가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그러고 보니 이 코트, 이후로는 다시 못 봤지. 카게야마는 느긋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땐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이었는데, 이제 와서 오이카와의 코트 같은 게 눈에 들어오다니.


그 장면은 거기서 끝났다. 그래서 다음으로 요유키에서 오이카와와 함께 있었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조금 기대했다. 잠시의 공백 후에 제 맞은편에 앉아 빤히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두 번째로 받아냈을 때, 그 기대는 너무 컸던 것이라 절감한다. 꿈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부분과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부분에는 아무래도 큰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곳을 떠나 노유키로 가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을 때다. 오이카와의 표정은 카게야마의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제3자의 시선으로 보는 제 표정은 꽤 우스웠다. 마침내 고개를 떨구던 자신.


오이카와 씨는 왜 나만 보낸 걸까.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던 질문이, 가장 안쪽으로 밀어 넣어 잊으려 했던 질문이 이 틈을 타 되살아난다. 7년이 흐른 지금은 물어볼 수 있을까. 오이카와는 대답해줄까. 쿠니미는, 이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을까. 이와이즈미는 이 결정에 찬성했을까. 요유키로 다시 온 지금은 이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여러 기억을 끄집어내던 머리는 이 질문을 만나자마자 기억의 펌프질을 멈추어버렸다.


“…….”


눈꺼풀이 잔뜩 흔들렸다. 역시 억지로 비집어 여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차라리 사고를 강제로 멈추는 편이 낫지. 그러려면 눈앞을 까마득하게 메운 암흑을 거둘 필요가 있었다. 천천히 흔들거리며 열린 시야에 낯선 천장이 가득 들어찼다. 숨을 들이쉬는 행위조차 낯설었다. 가습기가 틀어져 있는지, 공기는 다소 축축하다. 일단 눈을 뜨고 나니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던 카게야마의 동작을 멈춘 건, 통증과 동시에 날아든 낯익은 목소리였다.


“상처 벌어진다. 갑자기 움직이지 마.”
“……이와이즈미 씨?”
“제정신인가 보군. 오 년은 못 보고 살아온 내 얼굴을 알아보고.”
“제가 이와이즈미 씨를 어떻게 잊겠어요.”
“아서라, 아부는 됐다.”


이와이즈미가 간이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다가, 이내 신문을 두 번 접어 협탁 위에 올려둔다. 신문 옆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들어 버튼을 누르고는 귀에 가져다 댔다. 두 번의 신호음이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저쪽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이와이즈미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차분하다. 응, 일어났어. 그래라. 짧은 대화였지만 핸드폰 저편에 누가 있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이곳은 요유키고, 이곳을 찾아온 건 다름 아닌 자신이니. 물론 이곳으로 가라고 지시한 건 히라츠카였지만. 마지막 통화를 떠올린 순간 카게야마의 몸이 굳었다. 자신에게 떠나라 말한 후 그대로 연락이 끊긴 보스.


“!”
“뭐, 궁금한 거 있냐.”
“히라츠카 씨는…….”
“어떻게 됐냐고?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


그 후로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으나, 분명 한두 시간은 아닐 테다. 창밖으로 희미하게나마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의 눈을 잠깐 바라보고, 곧 고개를 푹 숙였다. 주먹 안에서 흰 시트가 볼품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악문 어금니에서 불쾌한 소리가 났다. 상정할 수 있는 결과는 단 하나뿐.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이 세계의 바닥을 잘 알고 있는 카게야마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이즈미의 반문에도 분명 그 뜻이 담겨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이와이즈미가 팔짱을 꼈지만, 그 입에서 나온 건 질책이나 우려가 아니라 한숨 한 토막이었다.


“그 후로 얼마나 지났나요?”
“네가 요유키 앞에 쓰러져있다는 오이카와의 전화를 받고 내가 온 게 열세 시간 전이야.”
“그러면 열세 시간 이상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거군요.”
“……그걸로 끝난 게 천운이라는 생각은 안 드냐?”


손등에 꽂혀있던 링거 바늘을 알아챈 건 그때였다. 멍하니 제 손등을 바라보는 카게야마에게, 이와이즈미가 툭 하니 말을 던졌다.


“그쪽에서도 구르기는 엄청 굴렀나 보더라. 츠키시마가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데.”
“아, 네, 뭐……. 제가 일을 가려 받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으니까요.”
“히라츠카로부터 신망을 얻었다며.”
“…….”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허공에서 이와이즈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카게야마는 애써 웃어 보이려 했으나, 입꼬리는 도무지 주인의 뜻대로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츠키시마란 의사의 이름이다. 번듯한 개업의지만 무슨 인연이 닿은 건지 요유키와 노유키, 즉 뒷골목 야쿠자들의 진료를 봐주고는 했다. 역시 카게야마가 대하기 편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이 링거도 온몸에 감긴 붕대도 츠키시마의 작품이다. 츠키시마 특유의 붕대 매듭이 몸 곳곳에 남아있었다. 눈을 잔뜩 찌푸린 채 가위질을 하는 츠키시마의 얼굴을 잠깐 떠올리고, 카게야마는 힘없이 대답했다.


“지금 와서는 다 부질없는 것들이죠.”


씹어뱉듯 끝맺은 문장이 혀끝에 씁쓸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이와이즈미가 상체를 이쪽으로 숙인 바로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토비오.”


오이카와보다 그 뒤의 쿠니미와 먼저 눈이 마주쳤다. 눈짓으로 인사를 나눈 후에야 카게야마는 오이카와 쪽을 본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검은 코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이카와 씨.”
“…….”


누군가 한숨을 쉬었지만, 그것이 오이카와의 것인지, 이와이즈미의 것인지, 아니면 쿠니미의 것인지 카게야마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이와쨩, 쿠니미쨩. 잠깐 자리 좀 비워줘.”


오이카와의 지시에 토를 다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아마 모두에게 자리를 비워달라 했다면, 카게야마조차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이 경우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와이즈미와 쿠니미는 당연하다는 듯 문밖으로 사라졌다. 제 손으로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건 후, 오이카와는 아까까지 이와이즈미가 앉았던 의자 위에 걸터앉는다. 제 손으로 깍지를 낀 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두는 습관은 여전하다. 카게야마는 문득 현기증을 느꼈다. 이렇게 오이카와와 마주 보는 일은 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기억이 아직 시퍼런 날을 세우고 있는데.


“몸은 어때.”
“아…….”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물어오는 안부 인사가 더 아팠다. 물을 마셨는데도 입이 바짝 말라와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축였다. 고개를 차마 들지도 떨구지도 못하는 탓에, 카게야마의 시야에는 흰 와이셔츠 위를 떨어져 내리는 검은 넥타이만이 가득하다. 오이카와는 대답이 느린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성급하다거나 인내심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뭐든 빠릿한 걸 선호하기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쿠니미를 자신보다 더 예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니미는 재빠르지는 않았으나 모든 일에 완벽했고, 자신은 속도와 혈기에 못 이겨 종종 일을 그르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자신만 보내진 걸까.


“언제 대답해줄 셈이야?”
“괜찮, 습니다. 아마도.”


언뜻 듣기에 부드러운 재촉을 외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오이카와의 마지막 말에 물음표가 찍히기도 전에 카게야마의 입은 자동으로 대답을 꺼내고 있었다. 요유키에 있었던 이 년의 시간은 짧다면 짧지만, 이 정도의 훈육을 잊지 않을 정도로는 길었다. 오이카와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진다.


“츠키시마가 새벽에 왔다 갔어. 한 상자 가득 가져온 붕대를 다 써서 결국 조직의 비상용 구급상자까지 다 털어야 했지. 지혈용 탈지면은 아마 이 방을 꽉 채우고도 남을걸.”
“…….”
“일어나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네게 물으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
“네? 그게 무슨.”
“세 시간 전에 히랏치의 시신이 발견됐거든. 이노카시라 공원에서.”
“…….”


이미 알고 있었다. 다른 결말은 상상한 적도 없을뿐더러, 혹여 다른 결말이 허락된다 해도 그것은 지나친 사치였다. 조직의 보스가 제 부하를 피신시키고, 다른 부하에게 배신당했다면 결말은 하나뿐이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떠도 오이카와는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응시하고 있다. 단정한 이목구비와, 그 위를 감싼 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표정. 어떤 때에도 감정의 동요를 쉽사리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은 오이카와에 항상 따라붙는 소개다.


오이카와와 히라츠카의 관계는 뒷세계에서도 꽤 유명했다. 그래서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히라츠카에게 떠맡겼을 때에도 의심의 눈길 같은 것은 없었다. 카게야마의 포텐셜을 아는 사람들은 왜 오이카와가 그런 아까운 짓을 했을까, 하고 의아해하기도 했다. 노유키 내에서 입지가 밀린 기존 조직원들이야 카게야마에게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냈지만.


“역시 그랬군요.”
“시신의 상태는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해.”
“……네.”


오이카와가 눈을 깜박였다. 카게야마가 지나치게 침착한 것에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의 기억 속 소년은 조금 더 제멋대로였고, 감정을 쉽게 억누르지 못했다. 이쪽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달고 있는 크고 작은 흉터가 어깨에도, 팔뚝에도, 복부에도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7년 전 그날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왔다면 카게야마의 앞날은 어땠을까. 지금쯤 예쁜 여자친구도 사귀고,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해나가며 사회인으로 사는 삶을 살고 있진 않았을까. 어쩌면 그런 삶을 선택할 기회를 한 번은 더 줘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시궁창을 구르며 시도 때도 없이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삶을 준 건 자신이다. 매일매일 쿠니미를 볼 때도 들지 않았던 생각이, 우습게도 카게야마를 마주한 순간 떠올랐다.


“몸을 추스르는 대로 나가줬으면 해.”


그래서 말은 더 뾰족하고 차가워졌다. 시선은 그보다도 더 차가워야 했다. 카게야마가 고개를 들었다. 서운하다거나 놀란 기색이 조금이라도 번져있을 줄 알았는데, 마주친 눈빛에는 별다른 감정이 스며있지 않다. 카게야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오이카와는 작게 심호흡한다.


“많이 컸네.”
“칭찬인가요?”
“그런 건 알아서 걸러 들어.”


오이카와는 무릎을 두어 번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걸이에서 코트를 꺼내는 동안 뒤통수에 카게야마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오이카와 씨.”
“뭐.”
“……아니, 아니에요.”
“식사해도 되는지는 츠키시마에게 물어볼게. 일단 좀 더 쉬어 둬. 몸이 말이 아니더라.”


끝까지 시선은 맞추지 않고 오이카와는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침대에 조금 더 몸을 깊숙이 파묻는 데에도 꽤 시간이 오래 걸린다. 모로 눕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결국, 뻣뻣이 굳은 자세 그대로 이불만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이불 안에 스미는 자신의 숨결이 평소보다 조금 뜨겁다. 그날 밤 하도 비를 맞았으니, 감기에 걸렸어도 이상하지 않기는 하지. 이틀 정도만 가볍게 앓고 지나가는 감기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어지럽게 흩어지던 기억의 마지막에 방금 방문을 나서던 오이카와의 검은 뒷모습이 찍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이 상처가 완벽히 나을 때까지 여기에 붙어있을 수는 없다. 분명 이쪽에도 큰 민폐를 끼칠 테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이 반란의 주도자는 야마다일 것이다. 대충 순서대로 떠오르는 얼굴들을 짜 맞추자 하극상의 구도가 떠오른다. 이제껏 해온 세월이 있기 때문에 히라츠카에 대한 충성도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안일한 방심이었던 모양이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문다. 어금니가 서로 맞닿아 천천히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이고 짓씹은 입 안쪽의 여린 살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일단은 회복하는 게 최우선이다. 이 몸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뻔했다. 한 잠 자고 나면 감기는 조금 나아지겠지. 오이카와의 마지막 조언을 떠올리며 카게야마는 천천히 눈꺼풀을 떨어뜨렸다.


*



“어떡할 거냐고, 안 물어봐?”
“오이카와 씨가 열심히 생각하고 계시는데 제가 물어서 뭐 하겠어요.”
“하하.”


오이카와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웃었다.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답이라 더 즐거웠다. 이 상황에 즐겁다는 말을 써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이카와가 조언을 요청하기 전에 쿠니미가 먼저 입을 여는 일은 거의 없다. 쿠니미는 나설 자리를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대외적인 일이든, 오이카와와 둘만 있는 사석이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오이카와는 바운더리가 있는 사람이고, 쿠니미는 바운더리를 지키는 데에는 신물이 날 정도로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오이카와는 언젠가 쿠니미에게 이야기를 꺼낼 테니 굳이 먼저 물어볼 필요가 없다.


“토비오 건은 고민 중이야.”
“네.”
“시신은 확실한 거지?”
“네, 경시청 빨대가 확인해줬습니다. 히라츠카 소이치로, 전과 26범이라고요.”


오이카와가 희미하게 웃었다. 26범이라니, 젊은 시절 히랏치가 좀 여기저기 날아다니기는 했지. 담배 연기와 함께 자조적인 농담이 허공으로 뿌옇게 흩어진다.


“예상대로 ‘덩치’가 새 보스야?”
“네. 일단은요. 그렇지만 대개 이런 쿠데타의 경우, 또 불만을 품은 끄나풀들의 연쇄적인 항명으로 이어지는 일이 잦습니다.”
“그건 그렇지.”
“아직 주시할 만한 움직임이 있는 건 아니지만요. 아, 그리고.”
“응?”
“이번 사태로 우리 쪽에서 꽂아놨던 빨대가 제거됐습니다.”
“……가족은?”
“노모가 한 명, 홋카이도에 있다고 합니다. 챙겨둘까요?”
“응. 저쪽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해서 부탁해.”
“네. 새 빨대는 꽂아뒀습니다.”
“벌써?”

“‘덩치’가 미친 듯이 세력을 확장하는 틈을 타 하나 더 꽂아뒀죠. 들어간 지 일주일 정도 됐습니다.”
“역시 빈틈없네. 쿠니미쨩이 내 부하라 다행이야.”


쿠니미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평소였다면 칭찬으로 가볍게 듣고 흘렸겠지만,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침대에 신세 지고 있는 지금은 역시 조금 무리다. 오이카와는 어느새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있었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거슬렸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연다.


“오이카와 씨.”
“응?”
“침대가 없어져서 어떡하죠.”
“그러게. 장소를 옮겨야 하나. 어쩌면 좋지?”


그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말조차 대답을 바라고 시작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쿠니미는 고개를 조금 내려, 오이카와의 입술을 찾았다. 불의의 습격에 잠깐 당황한 듯 굳어있던 입술이 이내 대답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


몇 시간이나 더 눈을 붙였을까. 한 번의 뒤척거림도 없이 잤는지, 일어났을 때도 여전히 이불은 얼굴 위에 덮여있었다. 갑갑함도 느끼지 못하고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몸이 지쳐있었다는 의미다. 아직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목이 말랐다. 상체를 일으켜 협탁 위에 놓여있던 물병을 들고 남은 물을 한 번에 마셨다. 난방이 되고 있는지 방 안은 제법 훈훈했고 불도 켜져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 위에 이불만 덮어도 이 날씨에 추위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고 보니 여긴 누가 쓰는 침대일까. 이제껏 생각할 여유도 없던 의문이 또 떠오른다. 주인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할 텐데. 누군가 들어온다면 이 침대의 주인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카게야마는 물병을 한 손으로 찌그러뜨렸다. 볼품없이 우그러지는 플라스틱의 촉감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창밖은 어두웠다. 협탁 위에 놓인 시계는 저녁 여덟 시 십오 분을 가리킨다. 하루 정도 누워있었으니 슬슬 운신해도 될 것이다. 이런 저를 보면 분명 의사 츠키시마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빨리 죽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라고 말할 테지만. 그렇게 깎아 먹은 수명이 몇 년 분일까. 어쩌면 오이카와 씨보다 빨리 죽는 건 아닐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카게야마는 픽 웃고 말았다. 상처를 입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수명이 깎인다면 아마 자신은 오십 년도 채 못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침대 아래 슬리퍼가 놓여있었다. 아무리 실내라 해도 맨발로 돌아다니는 것에는 저항감이 있다. 누구의 슬리퍼인지도 알 수 없지만 카게야마는 일단 감사하는 마음으로 발을 꿰었다. 거진 하루 동안 신세를 진 방인데 제대로 둘러보는 건 이게 처음이다. 작은 냉장고와 협탁, 꽤 고급스러운 침대와 옷걸이. 책꽂이가 있지만 책이 꽂혀있지는 않다. 생활에 꼭 필요한 도구 외에 번잡스러운 것은 없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코끝에 맺히는 낯익은 냄새가 자꾸 신경 쓰였다. 굳이 따지자면 침대 속에 있을 때부터.


카게야마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온몸을 날카로운 고통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이내 무덤덤해졌다. 따지고 보면 이보다 심각한 상처를 입은 적도 있었다. 그때는 사흘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츠키시마의 병원 특실에 입원해있었다. 두 시간의 사투 끝에 뒷문으로 빠져나와 달리는 그 순간까지 이 정도 상처로 끝난 게 그나마 고마운 일이다. 통증이 조금 오래 고인 옆구리 쪽에 손을 댄 채 카게야마는 고개를 두어 번 좌우로 젓는다.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던 탓에 상당히 뻐근했다.


방에는 문이 세 개 있었다. 하나는 아예 복도로 나가는 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와이즈미도 쿠니미도, 오이카와도 저 문으로 사라졌다. 또 하나는 화장실이다. 그러나 다른 문 하나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창고라기엔 뜬금없는 위치다. 그 문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 순간 떠올랐다. 여기는 오이카와의 개인 사무실과 연결되는 문이다. 오이카와의 사무실에도 문이 두 개 있었다. 괜히 오이카와와 마주쳐서 그리 좋을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뒤돌려는 카게야마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


기척을 살피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잔뜩 숨을 죽인 누군가의 말소리. 두 사람 정도의 기척인 것 같았다. 그리 많은 인원은 아니다. 이 시간에 오이카와와 밀담을 나눌 위치의 사람이라면 마츠카와 내지는 하나마키, 혹은 쿠니미 정도. 마지막에 쿠니미의 얼굴을 떠올린 카게야마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입술을 짓씹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이 느낌은, 분명 히라츠카의 심부름으로 이곳에 왔을 때 느낀 적이 있다. 제 앞에서 오이카와와 쿠니미가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빤히 바라보면서. 어쩌면 열등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 카게야마의 손은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다.


호기심이라는 것은 되도록 누를수록 좋다는 히라츠카의 가르침이 뇌리를 스쳤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지금에서야 떠올랐다는 것부터가, 그 가르침은 이런 상황에서 그리 효과가 없다는 뜻이다. 회의할 때 쓰는 긴 테이블에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오이카와의 책상 쪽에 누군가의 모습이 있다. 정확히는 책상이 아니고 의자 위다. 이쪽을 등진 채 누군가 앉아있었다. 너무 부자연스러운 자세라 카게야마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뜬다. 한번 흐려졌던 시야가 다시 선명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흰 와이셔츠를 걸친 뒷모습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아래는 책상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다. 오른쪽 어깨는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뒤통수의 위치가 최저점에 달했을 때, 그 아래에 또 누군가가 겹쳐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저도 모르게 말아쥔 주먹 안에 땀이 잔뜩 고였다. 이미 머리는 무슨 상황인지,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둘 중 누구라도 알아채기 전에 빨리 문을 닫아야 한다. 익숙한 갈색 머리카락이 위아래로 흔들릴 때마다, 그 사이를 틈타 검은 머리카락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각각 목덜미와 허리를 짚은 손가락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옷깃 스치는 소리, 의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누군가의 잔뜩 억누른 신음이 귓가에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아니, 어지러운 건 제 머리다. 카게야마는 문을 짚은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했다. ‘쿠니미쨩, 더, 세게,’따위를 중얼거리는 쉰 목소리는 낯익지만 낯설다. 분명 물을 마셨는데도 목이 탔다. 마른침을 모아 삼킬 수조차 없었다. 오이카와의 한쪽 팔이 제 등 뒤의 책상을 짚는 순간 허리가 잔뜩 휘어졌다. 쿠니미의 얼굴이 조금 더 크게 나타났다. 다행히 쿠니미는 오이카와 쪽만 바라보고 있느라 이쪽 문이 열린 건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 더 오래 서 있을 용기는 없었고, 문을 닫고 돌아서야 한다는 판단력 정도가 간신히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돌아왔다. 들리지 않게 조심히 문을 닫으려는 그 순간,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쿠니미는 분명 이쪽을 봤다. 까맣게 흐려진 시선이 이쪽을 똑바로 향하고는, 살짝 가늘어졌다. 무언가 특별히 다른 액션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저, 방해하지 말라는 듯 눈을 한 번 찌푸려 보이고는 다시 오이카와의 허리를 두 손으로 고쳐 잡았을 뿐이다. 앞으로 무너지듯 자세를 고치는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카게야마는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선 여전히 희미한 기척이 끊이지 않는다. 묘하게 들뜬 방 안의 열기에 가벼운 현기증마저 느낀다. 카게야마는 입을 틀어막은 채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


두 사람의 시선 교환이 불쾌했던 이유는 이것이었나. 두 사람 사이에 육체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시점에도 두 사람은 이런 관계였다. 뒷골목에서 구르며 잔뜩 별러진 자신의 육감은 쓸데없는 곳에서 백 퍼센트의 확률을 자랑한다. 배신감인지 열등감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뱃속을 긁어내린다. 카게야마는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았다. 먹은 게 없어 역류하는 위액만이 물 위에 노랗게 떨어져 내린다. 시고 떫고 짠 입을 물로 헹굴 생각도 못 한 채 카게야마는 그대로 타일 위에 주저앉았다. 자신을 바라보던 쿠니미의 표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쿠니미쨩’을 애타게 부르던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귓가에 눌어붙었다. 카게야마는 결국, 다시 변기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카게오이 + 쿠니오이 + 기타 오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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