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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형제+데릴글렌] Untitled

워킹데드x메이즈러너 크로스오버.

 한때 1일 1연성 하면서 즐겁게 썼던 워데 메런 크로스오버물...

그러나........(대참사)

이후에 손도 못 대고 있다. ㅠㅠ 




-



꿈자리가 안 좋다 했더니, 빌어먹을 알람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커튼을 잘 드리워놨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쩌면 형이 출근하기 전에 이 방에 들어와 커튼을 열어놨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희미하게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날카로운 햇살 때문에 채 뜨지도 않은 눈꺼풀 안쪽에 빨갛고 파란 얼룩이 생겼다. 민호는 결국 욕을 씹어 뱉으며 일어나고 만다.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끄고 시계를 보니 곧 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각이다. 귀찮아져 그냥 쨀까 싶었지만 곧 그 생각은 지워버렸다. 

                  

뒤통수를 긁적이며 계단을 내려온다. 집 안에는 이미 인기척이 없다. 대신 부엌에서 갓 구운 빵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깟 아침 따위 안 먹어도 상관없고, 어련히 알아서 잘 찾아 먹을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글렌은 그 말을 족족 무시했다. 정작 그러는 자신은 출근 시간에 늦어 빵 하나만 급하게 물고 나가는 일이 태반이라는 것을 민호도 알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식탁 위에는 시리얼이 담긴 그릇과 토스트 두 장이 담긴 접시가 올라와 있었다. 토스트 옆에는 달걀 프라이도 있다. 설거지는 그대로 개수대 안에 놓인 채였다. 민호는 냉장고를 열고 우유를 꺼냈다. 아직 뜯지도 않은 우유팩이 두 개나 들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우유는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상비하는 것이 글렌의 철칙이었다. 시리얼 그릇에 우유를 붓고, 달걀 프라이를 토스트 위에 올려 노른자를 포크로 찌르자 샛노란 노른자가 흘러나와 빵을 적신다. 빵은 따뜻하고, 달걀 프라이도 표면이 아직 촉촉했다. 적잖이 흡족해지는 기분에 아침의 저조한 컨디션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역시 글렌은, 자신의 형은 자신의 식습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아래쪽의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고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식탁에 놓인 쪽지에 눈길이 갔다. 


「아침 꼭 먹고 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저녁에 피자 가져올게. -글렌」


글자의 마지막 N 두 개는 형체를 간신히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문장이 간결한 것을 보니 할 말도 없었겠지만 아마 그보다도 시간이 더 없었던 모양이다. 캡을 눌러쓰고, 입에는 빵을 문 채 급하게 쪽지를 쓰는 형의 모습에 민호는 저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냉장고에 붙어 있던 알파벳 자석 중 N을 찾아 쪽지를 붙여 놓고, 민호는 개수대에 서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이 정도의 성의는 아침을 준비하고 나간 형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옆집에 꽤 오래 ‘매물’ 표지판이 서있었다는 것은 글렌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매일 출근할 때마다 그 집 방향으로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 동네 매물은 왓슨 부동산이 꽉 잡고 있고, 그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전에는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오며가며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아들 부부가 사는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감상은, ‘참 멀리도 간다.’였지만 글렌은 미소를 띠우며 어딜 가든 잘 될 거라는 인사를 했다. 노부부의 정겨운 포옹을 받고 문득 부모님이 아직까지 살아 계셨다면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 역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옷에서는 달큰한 향초 냄새가 났고, 그들이 키우는 고양이의 털이 묻어 있었다.


무심히 빈 집을 스쳐 지나가려던 글렌이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옆집의 매물 표지판이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다. 이 집이 세 달 만에 새 주인을 맞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일까. 꼬맹이는 꽤 좋아하니 어린 여자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였으면 좋겠다. 남자아이라면 역시 조금 시끄럽겠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당장 집에서 퍼질러 자고 있을 시커먼 남동생을 생각하니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글렌은 캡을 고쳐 쓰고 그 집 앞을 빠른 걸음으로 떠난다.


-


“나 왔어.”

“어서와.”


소파에 길게 누운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민호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들고 있던 피자를 부엌 식탁에 올려놓고, 자신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화장실에서 손까지 씻고 나오는 글렌을 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찬다. 여러모로 너무 바른 생활을 해도 안 좋은데. 물론 자신의 기준에서 말이다.


“옆집에 누구 이사왔나보던데.”

“아,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시끄럽더라.

”“누군지 봤어?”

“시커먼 남자.”


별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은 화면에 고정한 채 손에 든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민호가 대답했다. 글렌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하나 꺼냈다. 곧 저녁 먹을 시간이긴 하지만 퇴근 후에 마시는 맥주는 뭔가 모르게 각별한 맛이 있어 습관처럼 되어버린 일이다. 푸슛, 하고 풀탭을 잡아당기는 소리에 민호가 눈을 빛냈지만 곧 체념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마주본다. 이래저래 술을 마시기는 하겠지만 글렌은 민호가 자기 앞에서 술을 마시는 꼴을 보고 그냥 넘기지 못했다. 고지식하다면 고지식하고 그답다면 그다운 일이지만, 그럴 거면 자기도 참는 게 공평하지 않겠냐고 입속말을 투덜거리며 민호는 볼륨을 조금 더 높였다.


“시커먼 남자라니, 그쪽은 널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어.”

“뭐냐니, 한창 물오른 섹시한 남고생이라고 생각하겠지.”

“…….”


그 ‘시커먼’이라는 형용사를 바로 몇 시간 전에 민호에게 붙였던 자신을 떠올리며, 아무래도 이 얘기는 평생 하지 말아야겠다고 글렌은 생각했다. 대신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캔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다. 


“인사는 했고?”

“아니, 얼굴을 마주친 게 아니고 나도 흘끗 본 거라. 오늘은 짐만 옮겨둔 모양이던데?”

“그렇구나.”

“왜, 관심 있어?”

“아니, 그래도 일단은 이웃이니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글렌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피자는 아마 들고 오는 동안 다 식었을 것이다. 오븐에 데워야 한다. 콜라는 저번에 마시다 남은 게 냉장고 안에 들어있다. 한창 식욕이 왕성한 동생을 위해 피자 한 판을 전부 팬에 넣었다. 민호는 어느새 부엌으로 따라 들어왔는지,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학교는 어땠어?”

“그냥 그랬지.”

“오늘은 사고 안 쳤지?”

“날 뭘로 보는 거야, 글렌 형은.”

“음……. 한창 물오른 섹시한 남고생?”


민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픽 웃는다. 글렌은 오븐에 기대선 채 조금 더 크게 웃었다. 이런 소소한 저녁시간을 위해 참으로 엄청난 우연과 인연이 한꺼번에 작용했다는 것을, 자신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글렌과 민호는 입양아로서는 보기 드문 친형제였다. 어머니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아버지까지 같은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둘이 꽤 닮은 것으로 보아 아마 아버지도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글렌은 추측하고 있었다. 글렌은 어느 정도 철이 든 후 미국의 어머니로부터 사진을 한 장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사진에는 검은 머리카락의 젊은 동양인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와 민호의 친어머니란다.”


친어머니, 라는 억양은 너무나 낯설게 느껴져 글렌은 저도 모르게 입속으로 그 말을 한 번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혀에 익숙한 단어는 아니었다. 쌍꺼풀 없는 시원한 눈매와, 오똑한 콧대는 자신과 쏙 빼닮았다. 아니, 자신이 그녀를 빼닮은 것이다. 거의 태어나자마자 미국 입양이 결정된 글렌은 이 여자에게서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은 한국식 이름도 없을뿐더러, 한국에 그리 큰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비록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상대적으로 어두운 피부에 조금 키가 작을 뿐이지만 분명한 미국인이다.


하지만 민호는 달랐다. 글렌과 민호는 다섯 살 차이, 그러니까 글렌이 열두 살 때 일곱 살의 민호가 이어 입양되었다. 이미 둘의 친어머니가 같다는 사실은 입양처에서 확인해 주었다. 무슨 기구한 사연이 있어 둘째까지 이 먼 타향으로 입양을 보냈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보지도 못한 자신의 남동생이 가여웠다. 처음 공항에서 피켓을 들고 민호를 기다릴 때, 저 멀리서 걸어오는 실루엣만으로도 글렌은 직감했다. 그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의 ‘혈육’ 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 친어머니는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도 미혼모였고, 둘째만은 어떻게든 잘 키워보려고 애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례 절차가 끝날 때까지 끝끝내 친부라는 작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첫째를 미국으로 입양 보낸 기록 덕분에 어떻게 컨택이 닿았고, 이 미국의 부모라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에서인지는 잘 모르지만 민호까지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어린 글렌은 밤에 자다 깨 물을 마시러 부엌에 내려가다가, 혹은 화장실에 가다가 부엌 식탁에서 머리를 마주하고 고민하는 부모의 모습을 몇 번 보았다. 아마 글렌의 친동생을 좌시할 수 없다는 마음에서 나온 결정이었겠지만, 글렌은 그 때 이후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부모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때 아닌 과거 회상에 빠져 있다 보니 오븐 벨 소리도 못 들은 모양이다. 민호가 직접 오븐에서 피자를 꺼내고 있었다. 글렌은 허겁지겁 냉장고를 열어 콜라를 꺼내고, 찬장에서 유리잔 두 개를 꺼냈다. 글렌이 피자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필연적으로 그들은 일주일에 네 끼 정도의 저녁식사를 피자로 해결하고는 했다. 지나치게 고칼로리인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민호의 활동량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무난하다. 오늘은 하와이언 피자였다. 사실 글렌은 파인애플, 특히 구운 파인애플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민호가 파인애플을 유독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민호의 말에 화들짝 놀란 글렌이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포크로 피자 위의 파인애플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냥……. 너 처음 만났을 때 생각?”

“뭐야, 새삼스럽긴.”


민호는 피자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역시 한창 때인 남고생의 식성은 이길 수가 없다. 글렌은 픽 웃으며 파인애플 떼어 낸 피자를 입으로 옮겼다.


“너 공항에서 나올 때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어땠는데?”

“‘Holy shit America.’”


민호가 큭큭 웃는다. 


“날조하지 마, 난 영어라고는 한 마디도 못 하는 일곱 살짜리 꼬맹이였다고.”

“네 그 표정은 열 두 살짜리에게 그렇게 보였단 거지.”

“뭐 얼추 맞긴 하네. 정확한 감상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뭐든 빌어먹게 컸다는 건 기억나.

“그래. 그 꼬맹이가 이렇게 컸다니 십 년이 참 굉장하지?”

“정말 빌어먹게도 새삼스러운 얘기네. 그 파인애플 안 먹을 거지? 나 줘.”


툭 내뱉더니 민호는 글렌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앞접시를 빼앗아, 한 구석에 가득 담겨있던 파인애플을 모조리 자신의 접시로 옮겼다. 글렌은 턱을 괸 채 그 익숙한 풍경을 가만히 쳐다본다. 파인애플을 미어져라 입에 넣더니 민호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글렌을 쳐다봐온다.


“그러는 형은 어땠는지 알아?”

“어땠는데?”

“‘와, 비행기에서 내려서 본 사람들 중에 제일 작아.’”

“죽고 싶다는 소리를 십 년 만에 하는구나?”


짐짓 익살을 떨어 보이면서도 농담이라는 소리는 죽어도 하지 않는다. 글렌은 민호를 한 대 때릴까하다가 귀찮아져 결국 손을 내렸다. 


“내일은 뭐 해?”

“토마스랑 테니스 치기로 했는데.”

“학교 안 가?”

“내일은 토요일이야.”

“아, 맞네. 나도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구나.”

“그럼 형은 뭐 할 건데?”

“글쎄, 간만에 늦잠이나 늘어지게 자 볼까.”


피자 한 판을 깔끔하게 비운 민호가 종이 박스를 요령 좋게 접는다. 이미 몇 번이나 해온 일이라 박스 해체 솜씨가 거의 아르바이트 급이었다. 


“드라마 보자. 이제 그 좀비 나오는 드라마 할 시간이야.”

“‘The Walking Dead’? 넌 어째 시즌이 끝나도록 이름을 못 외우냐.”

“몰라, 그런 건. 재밌으면 됐지.”


컵을 개수대에 집어넣고 민호는 먼저 부엌을 나간다. 곧 텔레비전을 틀었는지 왁자지껄한 광고 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새로 광고하는 시리얼을 사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내일은 모처럼의 주말이니 근처 마트에 장을 보러 가야겠다. 우유도 나흘이면 다 먹을 테니 두어 개 쯤 더 사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아침에 자신이 급하게 휘갈겨 쓰고 나간 메모가 냉장고에 얌전히 붙어있는 것을 본 글렌이 미소 지었다. 이럴 때 보면 귀여운 동생이라니까.


“시작한다, 빨리 와!”

“알았어, 곧 갈게-”


거실을 향해 소리치고 글렌은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2.


일어나 보니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간밤에는 조금 과음을 했다. 하루 종일 뭘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민호는 드라마를 다 본 후 미련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딱히 뭔가를 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은 걸로 봐서 책을 읽었거나, 아니면 바로 잔 모양이다. 뭘 할까 고민하던 글렌은 결국 부엌으로 돌아가 새로 맥주를 땄다. 말상대도 없고 안주도 딱히 없었다. 술이 약한 글렌도 맥주는 꽤 좋아했다. 찬장에 굴러다니던 스낵 한 봉지와 함께 캔 맥주를 세 캔 비우고 나니 술기운이 올라 알딸딸해졌다. 그런 정신에도 착실하게 캔을 우그러뜨려 쓰레기통에 버리고 스낵 봉지도 접어서 버린 후 양치질까지 하고 침대에 누워 잔 것이다. 꿀꺽 침을 삼키자 쓴맛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아무래도 입가심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글렌은 벌떡 일어나버렸다.


“민호, 일어났어? 민호!”

민호의 방을 향해 크게 소리쳤는데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질 않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 반인데, 아직도 안 일어났을 리 없다. 층계참을 손으로 짚은 채 서서 들어가 볼까 말까 고민하던 순간, 토마스와 테니스를 치기로 했다는 말이 기억났다. Whatever. 어깨를 으쓱하며 글렌은 일단 부엌으로 들어섰다. 흰 리넨 커튼 너머로 들어온 햇빛 덕에 조리 기구들이 짧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쓰려오는 배를 부여잡으며 급한 대로 냉장고를 열어 우유팩을 꺼냈다. 뜯지 않은 우유팩은 하나. 컵에 따라 우유를 마시며 마트에 장을 보러 가야겠다는 어제의 다짐을 떠올린다.

왜 잠을 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옆집의 소음이 한 몫 했던 것 같다. 머리를 긁적이며 가스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식용유를 두른다. 한 손으로 익숙하게 달걀을 깨며 오늘 하루의 스케줄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오전은 날아갔고, 점심을 해결한 후에는 마을 도서관에라도 갈까. 민호가 있었다면 꼬여서 영화라도 볼까 했더니 형보다는 친구가 좋다고 낼름 나가버렸다. 동생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니까, 라고 노부인의 푸념 비슷한 것을 하다가 글렌은 픽 웃고 말았다.

부모는 이 년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 글렌이 정확히 스무 살, 민호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토스터에 식빵을 넣고, 시리얼을 그릇에 붓는데 평소보다 조금 부족한 양에서 딱 멈춰버렸다. Shit, 글렌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마트는 오늘의 필수 코스가 되어버릴 듯하다. 아무튼 당장은 어쩔 수 없으니 미리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놓고 토스터에서 식빵이 튀어나오길 기다렸다. 형제의 식성은 대체로 비슷하면서도 디테일에서 달랐다. 예를 들면 시리얼. 같은 상표의 같은 시리얼을 좋아하지만, 민호는 금방 우유를 부어 바삭한 시리얼을 좋아했고 글렌은 조금 눅눅해진 시리얼을 좋아했다. 그래서 글렌은 출근할 때 민호의 그릇에 우유를 부어놓지 않는다.

평소와 똑같은 메뉴로 점심을 먹고, 입가심을 하느라 냉장고에 있던 오렌지까지 까먹고 나니 더 이상 부엌에 볼 일이 없어졌다. 껍질을 개수대의 삼각 코너에 넣고, 설거지를 끝낸 후 부엌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으러 간다. 별 할 일이 없는 날이라도 결국 밖으로 나가게는 되어 있다. 이 점 만은 글렌과 민호가 백 퍼센트 일치하는 공통점이었다.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은근히(민호 같은 경우에는 은근히가 아니지만) 활동적이다. 이 점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걸까, 아버지에게서 받은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글렌이 픽 웃는다. 정말 쓸데없는 생각이었으니까.

청바지와 셔츠를 꿰어 입고 캡을 눌러쓴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뒷주머니에 지갑을 넣었기에 엉덩이 쪽이 두둑하다. 햇빛은 집 안에서 보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산산이 부서지는 여름 햇살이 모자 창을 거듭 누른다. 여기저기 낯익은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며 글렌은 정처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도 모르게 옆집에 눈길을 주었다. 확실히 뜰에 잡동사니가 널려있고, 차고에는 이 동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차 한 대가 들어 있었다. 카 매거진에서만 봐 오던 그 엠블럼을 보고 글렌은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환기를 하려는 듯 그 집의 창문은 전부 활짝 열려 있고, 현관문만 닫혀 있었다. 아직 생활감이 느껴지지는 않는 광경이다. 멍하니 서서 팔짱을 낀 채 그 집을 지켜보고 있던 글렌은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Hey,”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적당히 보기 좋게 기른 머리카락에, 상대적으로 막 자란 듯한 수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약간 작다 싶은 눈 안에는 푸른색 동공이 의심과 경계의 빛을 가득 담은 채 글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직감했다. 이 집의 새로운 주인, 민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시커먼 남자’가 바로 이 남자라는 것을.

“아, 미안해요. 이 집에 누가 이사 온다는 건 알았는데, 그러니까 내 말은…….”
“내 집에 뭐 볼 일 있어, kid?”
"Kid?"

콤플렉스를 ‘콱’ 찌르는 말투에 글렌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하지만 그러나 말거나 눈앞의 남자의 눈빛은 전혀 변함이 없다. 화가 치밀었지만 일단 남의 집 앞에서 감시하듯 서 있었던 자신의 잘못도 있기에 글렌은 일단 짜증을 밀어 넣었다. 사실 위협적인 어깨 너비에 겁을 좀 먹었기도 하고, 사실 눈빛이 이제까지 보던 험악함과는 조금 종류가 다른 빛을 띠고 있어서 무섭기도 하고, 사실은……. 그래, 자신이 먼저 잘못했으니까. 글렌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 옆집에 사는 사람이에요. Glenn.”
"글렌?"
“네. 어제부터 시끄럽기에 누가 이사 온다는 건 알았는데 오늘 보니 창문이 열려 있어서 지나가던 길에 잠깐 봤을 뿐이에요. 충분히 수상쩍어 보인다는 건 저도 알지만.”
“Hmm.”

남자는 영 마뜩찮은 눈길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저 손을 내밀어온다. 푸른 눈빛이 조금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얼결에 글렌은 그 손을 잡아버렸다. 조금 더 큰 손이 완벽하게 자신의 손을 감싸면서 잡는 느낌은 생각보다 싫거나 꺼림칙하지는 않았다.

“Daryl.”
"데릴."

짧은 한 마디만 툭 던지기에, 입으로 한 번 따라해 보고 나서야 그것이 그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꼬맹이라고 부른 건 사과하지. 뒤에서 봤을 땐 영락없이 동네 꼬맹이가 초인종이라도 누르고 튈 준비를 하는 줄 알았어.”
“그건 좀 실례네요. 이래봬도 스물 둘이나 먹었는데.”
“Shit, 끽해야 고등학생인 줄 알았더니.”
“그거 칭찬이죠?”
“Whatever.”

데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오른손을 들어 보이더니 다시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인사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해 조금 당황스러웠던 글렌도 그 자리를 뜨기로 했다. 수확이라면 일부러 찾아가서 인사할 수고를 덜었다는 것 정도일까. 조금 첫인상이 거칠기는 했지만 그리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글렌은 마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만났다고?”
“응. 우연히.”
“그 집 앞에서 멍때리고 있었던 건 아니지?”
“……넌 가끔 그 아무렇지 않은 추리가 정말 무섭더라.”
“형이 엉뚱한 데서 멍때리고 서 있는 게 하루 이틀인가.”

익숙하다는 듯 말하며 민호는 크림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더니 입으로 옮긴다. 오늘 저녁 식사 당번은 민호였다. 저녁 식사래야 파스타 면만 삶고, 마트에서 파는 시판 크림소스를 부어 달달 볶은 것뿐이지만 글렌은 맛있게 먹어주곤 했다. 대개 민호가 식사당번을 맡으면 이런 식사가 나오곤 한다. 민호의 컵에 따라 놓은 마운틴 듀에서 초록색 기포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역시 마트에서 사 온 피클이 작은 접시에 담겨있다. 이 정도 세팅이라니, 기특하다고 말해줘야 하나. 사실 장을 봐 온 사람은 글렌이지만.

“그래서, 어떤 사람인데?”
“그냥 뭐……. 데릴이라는 이름이었어.”
“데릴? 뭔가 특이하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민호가 말했지만, 그것은 별 의미 없는 습관이라는 것을 글렌은 잘 안다. 이 동네에서 이름 특이하기로는 너 만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운동을 하고 와서일까, 민호의 접시에 담긴 파스타 양이 평소보다 많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글렌은 잠자코 포크를 들어 자신의 몫 중 삼분의 일 정도를 민호의 접시에 덜었다.

“뭐야, 크림 파스타 별로야?”
“아니, 너 배고픈 것 같아서. 많이 먹으라고.”
“그렇게 안 먹으니까 키가 안 크지.”
“그 쓸데없는 말만 안하면 참 좋을 텐데.”

핀잔을 주면서도 민호는 싫지 않은지 돌려주지는 않았다. 그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파스타를 보며, 참 잘 먹는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했던가. 어느 새 어깨도 탄탄하게 벌어져있고, 팔 근육도 잘 붙었다. 키도 미국인들 못지않게 크다. 자신의 체격이 불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이라도 이렇게 자라 줘서 다행이라고 종종 생각하곤 했다. 이런 말을 하면 민호는 분명 미간을 찌푸릴 테지만.

“오늘 설거지는 형이 하는 거지?”
“내가 장도 봐왔는데?”
“에이 씨.”

투덜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내일은 뭐 하는데?”
“뉴트네 집에서 파티. 부모님이 여행 가셨다던데.”
“너…….”
“네, 네. 술도 담배도 여자도 안 합니다.”
“좋아.”
“아니, 술 정도는 좀 하면 안 돼? 그래 봐야 칵테일일 텐데.”
“그래. 단 만취 상태만 피해.”

글렌은 끄덕이며 접시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파스타 가닥을 입으로 옮겼다. 민호는 뭔가 투덜거리면서도 익숙한 듯 표정은 그리 변함이 없다. 술이라도 허락을 받은 게 어디냐는, 어딘가 안도한 느낌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이렇게 말로만 약속을 해도 동생이 분명 지킨다는 것은 글렌도 잘 알고 있다. 뉴트라면 아는 이름이다. 민호와 토마스의 친구라던가. 금발의 소년이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 집에 놀러 와서 피자를 대접한 기억도 있는데 집이 어딘지는 듣지 못했다. 아마 그리 멀지는 않을 것이다.

“차 키 빌려줘?”
“아니 됐어, 자전거면 돼.”

민호가 선선히 대답했다. 글렌과 민호의 집 차고에도 차가 들어 있다. 하지만 차에 그리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두 형제 모두 발을 직접 이용하는 편을 좋아해 굳이 꺼내는 일은 없었다. 차 키는 거실의 키 홀더에 든 채 얌전히 잠들어 있다. 그러고 보니 자동차 정비를 해야 할 때가 됐는데. 식탁에 놓여 있던 탁상용 캘린더를 들어 휙휙 넘기자 확실히 두 달 전에 마지막 정비를 했다. 파티는 내일 오후부터일 테니 그 전에 민호더러 자동차를 정비소에 맡기고 오라고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글렌은 캘린더를 있던 자리로 밀어 놓는다. 어느 새 민호의 그릇도 깨끗이 비어 있었다.

“너 그럼 내일 자동차 좀 정비소에 맡기고 와.”
“내일 일요일인데?”
“Shit. 깜박했네.”

마을의 자동차 정비소는 일요일에 쉬곤 했다. 다시 일 주일이 시작되면 형제는 각각의 스케줄에 치여 자동차 정비소에 들를 시간이 없어진다. 어쩔 수없이 내일 손세차를 하고 대충 손볼 수 있는 만큼은 손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민호의 식기까지 한꺼번에 개수대에 넣고, 글렌은 다시 냉장고에서 캔 맥주 하나를 꺼내 테이블로 돌아간다. 민호는 군말 없이 설거지를 시작했다. 쏴아, 하는 물소리에 섞여 수세미로 그릇을 문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물 틀어 놓고 설거지하지 말라니까, 하고 잔소리 하려다가 또 무슨 응대가 돌아올지 몰라 글렌은 그냥 입을 다물고 맥주를 마셨다.

“나 내일 뉴트네 집에서 파티 준비 도와주기로 해서 좀 일찍 나가야돼.”
“하여간 집에 붙어있는 날이 없지.”
“미안, 미안. 대신 설거지도 하잖아.”
“내가 졌다.”

두 손을 들어 보이며 글렌은 중얼거렸다. 민호는 씩 웃더니 다시 개수대를 향해 뒤돌았다.


-


계단을 올라와 각자의 방에 들어가면서, 형제는 마지막으로 눈인사를 나누었다. 십 년 동안 이 층의 각각 다른 방을 사용하면서 생긴 습관이다. 둘 다 집 안에 있는 날은 하루도 빼먹고 지나간 적이 없다. 익숙한 자신의 방에 들어와, 익숙하게 불을 켜고 글렌은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포근한 이불의 감촉을 등으로 느끼며 오늘 처음 만나게 된 인연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일 세차에 대해 생각하다가, 라디오를 들을까 그냥 잘까 잠깐 고민했다. 일 센티미터 정도 열어 둔 창문을 통해 여름 밤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밤이라 역시 바람은 서늘하지만, 낮 동안 공기가 품어둔 열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창문을 조금 더 크게 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반쯤 내려와 있던 블라인드를 끝까지 올리자 낯익으면서도 낯선 풍경이 보였다. 요 세 달 동안 옆집의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하필 자신의 방 창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방에 불이 켜져 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가 저 방을 침실로 쓰는 걸까. 언젠가 저녁 식사에 초대되어 갔던 저 집도 꽤나 넓었는데, 저 집에 남자 혼자가 산다니 조금 적적할 것 같기도 하다. 왜 오늘 처음 만난 남자의 기분을 신경 쓰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자신에 웃음이 났다. 블라인드를 내리려는 찰나 또 다시 몸이 얼어붙는다. 어느 샌가 창가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표정마저 보일만큼 가까운 거리. 하필 두 방 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두 사람의 어색한 침묵 사이에 밤바람이 스친다. 러닝셔츠 하나만 걸친 데릴의 어깨는 아까 낮에 봤을 때보다도 듬직해보였고, 금방 씻었는지 수염 끝에 매달린 물방울마저 빌어먹도록 선명하게 보인다. 글렌은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뭔가 할 말을 열심히 찾았다. 그에 비해 남자의 표정은 무심하다 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다. 어, 아, 어 그러니까……. 글렌이 체념한 표정으로 결국 두 팔을 벌려 보이자 데릴이 픽 웃었다. 지금 웃은 건가? 좀, 잘 생긴 것 같기도 하고.

“Good night, kid.”
“I'm not a fucking…….”

항변의 문장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저쪽 방의 창문이 닫히고 이어 커튼이 닫혔다. 얼이 빠진 채 글렌은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불이 꺼진다. 아무래도 저 남자는 자신을 이름으로 부를 생각이 없는 듯하다. 옆집에 사는데 마주칠 때마다 꼬맹이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 다음에 만나면 꼭 kid라는 단어에 대한 심각성을 주지시키고 자신의 이름 다섯 글자를 머리에 때려 박아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글렌은 짜증 섞인 손짓으로 블라인드를 내렸다.






3.


자동차 열쇠를 오른손 검지에 건 채 빙빙 돌리면서 글렌은 차고로 향한다. 왼손에는 양동이가 들려 있었다. 늦잠을 잔 민호는 대충 점심을 먹여서 내보냈다.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라는, 다소 아침스러운 메뉴를 택한 이유는 장보기 전까지 냉장고에 남아 있던 식재료를 다 써버리기 위함이었다. 민호는 군소리 없이 그릇을 싹 비우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갔다. 글렌은 민호에게 오늘 하루 외박을 허락해주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나이는 되었으니 그 정도의 자유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꼭 오늘이 아니라도 친구의 집에 초대받았다거나 협동 과제를 해야 한다고 할 때는 선선히 외박을 허락해주고는 했다.


여름 들어 잔디밭의 스프링클러는 하루에 한 번씩 꼭 돌렸다. 평소 글렌보다 일찍 귀가하는 민호의 몫이지만 오늘은 민호가 없으니 글렌이 돌려야 한다. 스위치를 켜자 공중에서 물방울이 흩어졌다. 쨍쨍한 여름 햇빛이 물방울마다 올라타 사방으로 난무한다. 손 그늘을 만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글렌은 도로 들어가 캡을 가지고 나왔다. 하여간 여름이란, 모자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계절이다. 구름 하나 없이 파란 하늘이 눈 안쪽에 잔상을 남겼다.

자주색 캡은 글렌이 소중하게 여기던 것이다. 딱히 무슨 의미가 있어서는 아니고, 십 년 전쯤일까, 백화점에 갔다가 한 눈에 마음에 들어 그 자리에서 잠깐 멈추어 섰다. 하지만 사달라고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아 가격만 보아 두었다가 용돈을 모아 사기로 마음먹었다. 두 달 정도 용돈을 착실히 모으면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돈을 받는 족족 저금통에 넣는 그를 보고 어머니가 돈의 용도를 묻자,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That's really, really good idea, Glenn.’

That's really, really good idea. 글렌은 입속으로 그 말을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머리를 쓰다듬건 그 손의 온기가 지금도 마치 새겨 넣은 것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부모는 그에게 자립심을 키워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버지는 세차를 도와줄 때마다 글렌의 저금통에 돈을 넣어 주었다. 예상을 훨씬 앞당겨, 글렌은 한 달 만에 그 모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방의 곰 인형에게 모자를 씌워 주고 감상했다. 밖에 쓰고 나갔다가 잃어버리거나 망가진다면 너무나 슬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그 캡을 쓰고 나간 것은 그로부터 팔 년 후, 부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다음이었다.

차를 차고 밖으로 꺼낸 후, 차고 한 구석에 있던 세차용 도구들을 꺼냈다. 차고 바깥에 설치한 펌프로 양동이에 물을 받는다. 옛날엔 이 양동이 하나도 낑낑거리며 양손으로 들고 다녔는데, 지금은 한 손에 두 개씩도 들 수 있으니 세월은 이런 곳에서 실감하게 되는 모양이다. 글렌은 문득 혼자 픽 웃었다. 민호가 있었다면 세차도 더 금방 끝났을 텐데. 동생의 부재가 조금 아쉽긴 하다.

양동이의 물을 차체에 네 번 정도 끼얹고, 새로 받은 물에 카 샴푸를 풀어 잔뜩 거품을 낸다. 하얀 비누거품이 잔디밭에 뚝뚝 떨어졌다. 스펀지로 차체를 꼼꼼하게 닦는 것은 세차 중에서 글렌이 가장 좋아하는 과정이었다. 스펀지로 차를 닦고 있다 보면 어느 샌가 고민거리도 사라지고, 마음 한 구석이 개운해온다. 휠 클리너로 휠을 닦는 과정도 나름 재미있다. 차를 끌고 나간 적이 없어 차 아래쪽에 타르가 붙어있지도 않았고, 딱히 컴파운드를 사용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양동이에 깨끗한 물을 받으면서 슬슬 굳어오는 허리를 쫙 편 순간 담장 너머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뭐 해요?”
“그냥 구경.”

어깨를 으쓱하는 데릴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검은색 티셔츠가 보이고, 그 아래로는 담장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아마 편한 차림인 것 같다. 그나저나, 어제 자기 집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 험상궂은 목소리로 불러대더니 오늘은 이 무슨 적반하장인지. 어이가 없어진 글렌이 스펀지를 내려놓은 채 허리에 양 손을 얹었다. 남자는 담장에 손을 짚더니 솜씨도 좋게 휙, 하고 높은 담장에 걸터앉는다. 운동신경 좀 괜찮다는 글렌도 떨어지는 게 무서워 시도해본 적 없는 일인데, 그 집에 산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남자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해버려 약간 자존심도 상했다.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약간의 운동신경과 순발력만 있으면 간단하지.”
“……네네, 부럽기도 하네요.”

혼잣말처럼 투덜거리며 글렌은 캡을 벗었다. 다음에는 민호에게 시켜봐야지. 역시 땡볕 아래 움직였더니 땀이 안 날래야 안 날 수는 없다.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들러붙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남자는 아직도 그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글렌은 캡을 선반에 올렸다.

“뭐 볼 일 있어요?”
“아니, 요즘도 손세차를 하는 사람이 있나 신기해서.”
“보통은 이렇게 귀찮은 짓 잘 안 하죠. 정비소가 일요일에는 문을 닫으니까.”
“으흠.”

남자는 면도도 안 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절대 할 일 없어서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 건 안 물어봤는데.”
“어쨌든요.”

또 할 말이 궁해져 괜히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고 후회하며 글렌은 양동이의 깨끗한 물을 차체에 들이부었다. 저음의 목소리는 신경을 안 쓰면 안 들릴 법도 한데 이상하게 귀에 들어오고야 만다.

“아까 나가던 소년은 동생?”
“어떻게 알았어요?”
“이 동네에 동양인이 그리 흔한 건 아니지.”
“…….”

왠지 또 별로 좋지 않은 오해를 살 것 같은 기분에 글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간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는 호의적인 시선을 사기 어렵다. 누가 봐도 ‘동양에서 왔어요’ 하고 광고하는 자신의 외모는 이럴 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 때도 별 엿 같은 꼴을 다 당했기에 이제 익숙해진 지 오래지만. 글렌과 민호 형제를 보는 동네 사람들의 눈길이 모나지 않게 된 것은 부모의 역할도 컸겠지만 분명 십 년이라는 세월 덕분일 것이라고, 글렌은 생각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트가 어딘지는 알아요?”
“모르는데.”

스펀지를 깨끗하게 헹궈서 양동이에 집어넣는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스펀지가 양동이 바닥에 떨어지며 철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깔끔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고개를 들었는데 그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다. 이제부터 이 동네에 살려면 가장 가까운 마트가 어딘지 정도는 알아둬야 하는 것 아닐까.

“내비게이션 없어요?”
“전에 살던 집에서 아직 안 가져왔어.”

연극적으로 어깨를 으쓱. 글렌은 순간 눈앞의 이 남자가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했다. 설마 정말 배우일까?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은 없고, 글렌보다 텔레비전을 좋아하는 민호도 그를 아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는 아닌 것 같고. 연극배우? 근육을 봐서는 운동을 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그러나 글렌은 사람 보는 눈썰미가 그리 뛰어나지 않았고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추리는 그쯤 하기로 하고 글렌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같이 가 줄까요?”
“……왜?”
“마트 어딘지 모른다면서요. 뭐 먹고 사는데요, 그럼?”
“어제 편의점에서 사 온 것들.”
“그거 건강에 진짜 안 좋은데. 스스로는 안 해 먹어요?”
“Sometimes.”
“아하. 마트는 같이 안 가 줘도 돼요?”
“다음에 필요하면.”

마트까지 함께 가는 그 어색한 분위기를 이길 자신이 없으면서, 옆집의 이 이웃이 끝내주게 hot한 미녀라면 또 모르겠는데 왜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꺼냈는지. 그럼에도 너무 깔끔한 거절에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OK, 다음에 필요하면 말해요.”

대화의 끝을 알렸다고 생각했지만 차를 도로 차고에 넣고 나와 양동이를 들 때까지 남자는 그곳에 그대로 앉아 있다.

“날도 더운데, 들어가죠?”
“또 보자고, kid.”

또 담장 너머로 휙 사라지는 그 뒤통수를 가만 쳐다보다가 글렌은 양동이를 내팽개쳤다. 저 호칭에 맛들인 게 틀림없다. 분명 다음에 만났을 때 ‘GLENN’ 이 다섯 글자를 머리에 쑤셔 박아 주겠다고 한 어제의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형은 가끔 진짜 어리숙해.’ 라고 정면에서 말해오던 민호의 따끔한 말이 머릿속에서 살아났다. 남이사, 중얼거리며 글렌은 발치에 나동그라진 양동이를 다시 주워 들고, 아직까지 돌아가던 스프링클러 스위치를 끈 후 집 안으로 들어갔다.


-


혹여나 방에서 자고 있을 형을 깨울까 조심하며 민호는 현관문을 열었다. 집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술은 다 깼지만 뉴트의 집에서 여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목이 너무도 말라 민호는 일단 부엌으로 들어섰다. 사실 외박 허락을 받긴 했지만 내일 학교도 가야하니 애초에 외박을 할 생각은 없었다. 부엌 불을 켜고 냉장고를 열어 탄산음료를 꺼내 한 입에 다 마셔버렸다. 형한테 혼나기는 싫으니 빈 병은 잘 우그러뜨려 쓰레기통에 버리고, 불을 끄며 나오려다가 거실을 보고 흠칫 놀랐다. 민호가 소파에서 잘 때 그렇게 질색을 하며 등을 때려서라도 방으로 쫓아 보내던 그 글렌이 한 손에 리모컨을 쥔 채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던 것이다.

“형, 왜 이런 데서 자고 있어. 일어나 봐.”
“으음…….”

뒤척거리면서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형을 보며 민호는 한숨을 쉰다. 거실의 유리 테이블 위에는 애지중지하는 자주색 캡이 놓여 있다. 좀 자려면 똑바로 누워서 다리를 쭉 펼 것이지, 불쌍하게 모로 누워 등을 구부리고 있어 안 그래도 크지 않은 체구가 더 작아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 뒤통수를 한 대 맞겠지만.

“으, 귀찮게.”

글렌의 왼손에 들려있던 테이블을 유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민호는 글렌을 업었다. 자주색 캡은 자신이 썼다. 모로 누워 있어 업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역시 휘청 하는 발걸음은 그래도 자신 위에 얹힌 이 물체가 이십 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임을 일깨워준다. 들어오면서 문단속을 했지만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민호는 층계를 올라간다. 자꾸 힘이 없어 주륵 미끄러지려는 형을 고쳐 업을 때마다 저절로 욕이 튀어나온다.

“I'm not a fucking…….”
"뭐라는 거야?"
“……fucking, kid…….”
"뭐? 빌어먹을 꼬맹이가 아니라고?"

뜻 모를 잠꼬대를 하던 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반쯤 올라온 상태에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떼며 민호는 잠꼬대의 의미를 잠깐 생각했지만 곧 귀찮아져 그만 두었다. 방문을 열고 불은 켜지 않은 채 복도 불빛에 의지해 형을 침대 위에 눕혔다. 자신이 쓰고 있던 캡은 탁상시계 옆에 두었다. 옷을 갈아입히는 것까지는 역시 너무 귀찮아 눕히는 것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어디서 바람이 들어온다 했더니 옆집 쪽으로 난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친 후 민호는 방을 나갔다. 형도 자신도 참 답지 않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새어나왔다.


-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대충 저녁을 때운 후 할 것도 없고 해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깜빡 잠들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언제 방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설마 민호가 돌아와서 옮겨 놨나? 간만에 외박까지 허락해줬는데 집으로 돌아왔다니. 매일 자신보고 너무 착실하게 살지 말라고 한 소리 하면서 따지고 보면 민호가 훨씬 더 착실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람을 끄고 나니 그 옆에 얌전히 놓인 캡이 눈에 띄었다. 간만에 예쁜 짓을 하는 걸 보니 용돈이 모자랐나 싶기도 하지만 백 퍼센트 순수한 선의일 거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평소 하는 것처럼 아침을 급하게 먹고, 민호의 아침까지 차린 후 캡을 눌러 쓰면서 집을 나온다. 간밤에 한 짓이 기특해서 용돈 삼십 달러도 쪽지와 함께 놓아두었다. 그리 넉넉하진 않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놀 때 한 번쯤은 보탤 수 있으리라. 여름의 아침 공기는 어딘가 부하게 들뜬 채 뺨에 닿아온다. 그러고 보니 또 주말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곧 또 여름마저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고.

정신을 차려보니 또 옆집을 쳐다보고 있었다. 옆집은 불이 전부 꺼져 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나갔을 리는 없는데. 또 쓸데없이 남을 신경 쓰는 이런 것도 병이라면 병이다. 지나치게 쌀쌀맞았는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그가 이 동네에 대해 무언가를 물어온다면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글렌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4.


“빌어먹을, 대체 이게 몇 번째야?”

“뭘 그렇게 열을 내고 그러냐, 동생아.”
“내가 뼈 빠지게 벌어서 갖다 주는 돈을 저 년에 박아 넣는 게 하루 이틀이냐고!”
“박아 넣는 게 돈만은 아니지.”

분위기 파악을 하고는 있는 건지, 실실 웃으며 신경을 닥닥 긁어대는 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느라 데릴은 몸을 떨었다. 옆의 쓰레기통을 걷어차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쓰레기통은 여자의 바로 옆까지 굴러가서 멈췄다. 즉석식품 껍질, 찌그러진 담뱃갑, 뭔지 모를 액체, 휴지와 일회용 주사기 같은 것들이 방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다. 멀은 시답잖은 농담으로 넘기려고 하지만 이미 그 여자의 약값에까지 자신의 돈이 흘러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데릴은 그럴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침대 위에서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는 여자의 금빛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엉켜있고, 꿈이라도 꾸는 듯 나른한 표정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겹다.

“못 해먹겠다, 젠장. 형이고 지랄이고 다 좆 까.”
“뭐?”
“저 년이랑 둘이 쳐 살라고, 난 꺼질 테니까.”
“가족을 떠나겠다는 거야?”

데릴은 숨을 몰아쉰다.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형의 등 뒤에서 이 쪽을 지켜보는 여자의 파란 시선이 못내 불편했다.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아마 시내 술집에서 질펀하게 놀고 마시다가 붙어 온 작부일 것이다. 데릴은 멀을 제치고 뚜벅뚜벅 방 한복판까지 걸어갔다. 여전히 침대에 앉은 채 데릴을 올려보는 여자의 어깨가, 흰 시트 위에서도 하얗게 떠올랐다. 그 시선을 피한 채 입술을 깨물고 데릴은 벽에 걸어 두었던 자신의 보스턴백을 잡아채어 자신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쑤셔 넣는다. 물건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 난잡한 방 안에 데릴의 물건이라고는 옷가지 몇 벌과 지갑이 전부였지만.

“어이 동생,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화 좀 풀고…….”
“진짜 한 대 후려치기 전에, 이 빌어먹을 손 떼.”

이를 갈며 내뱉는 데릴의 저음은 멀조차 멈칫하게 만드는 위력이 있다. 어깨 위에 얹힌 손을 탁 떨쳐 내고 데릴은 보스턴백을 어깨에 둘러멘다. 역시 멀도 더 이상 잡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집구석은 언젠가 나가려고 조금 멀다 싶은 동네에 새 집도 알아두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더 지체할 필요가 없다. 채 식지 않은 차 엔진에 다시 시동을 걸고, 보스턴백을 뒷좌석에 던져 넣었다. 운전석에 앉은 후 차창을 열고 담배를 피워 문다. 라이터 기름이 거의 다 떨어졌는지 찰칵, 찰칵 하는 공허한 소리만 내기에 옆 좌석에 던져 넣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일회용 라이터를 꺼냈다. 하늘은 욕이 나올 만큼 파랗고, 햇볕도 쨍하다. 활짝 열린 차창으로 미지근한 여름 바람이 들어왔다. 희미한 습기가 묻어난다.

딕슨 형제는 부모가 없다. 물론 있어야 할 나이는 아니다. 아버지라는 작자는 한창 때부터 술과 약에 절어 살더니 급성 약물 중독으로 허무하게 뒈져 버렸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강에 뿌려지기 전, 딕슨 형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것도 보지 않고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를 했다. 그렇고 그런, 뒤져 보면 너무 흔해서 쓴 맛이 배어나오는 인생이다. 데릴은 저도 모르게 필터를 씹었다. 멀이 갱의 끄나풀로 일하다가 교도소를 간 이후로 데릴은 정신을 차렸다. 둘러보니 자신의 주변에는 멀밖에 없었다. 그 멀도 교도소로 가 버렸다. 삼 년 형을 받았지만 그 동안 손만 빨면서 기다릴 수는 없다. 자신은 스무 살이었고, 아직 너무나 젊었다. 지금 와서 무언가를 시작하려니 너무 막막했고 머리를 쓰는 직업은 죽어도 선택할 수 없었다. 결국 어찌저찌 수입은 괜찮은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출소해서 여전히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형의 뒤치다꺼리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삼십 분 정도 운전했을까, 그래도 몇 번 와 봤다고 낯익은 공인중개사 표지판이 보였다. 볼드체로 적힌 Watson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데릴은 차에서 내렸다. 사람 좋아 보이는 부인이 아메리카노를 가져다주었고, 조금 깐깐해 보이는 왓슨 씨는 선뜻 집 열쇠를 내어 주었다. 그 집은 빈 지 오래라 들어갈 수 있으면 바로 들어가도 된다는 말과 함께. 전에 살던 노부부가 공인중개사에 집 관리까지 일임해둔 상태라 청소도 바로 저번 주에 했다고 한다. 데릴은 숨을 한 번 몰아쉬고 열쇠를 건네받았다. 낯선 금속이 손바닥 안에 자리 잡았다. 꼭 말아 쥐자 곧 그의 체온 때문에 열쇠는 미지근해졌다.

자신의 것도 아닌 담배 냄새와 약 기운에 절어 사는 삶은 이제 사양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고, 어머니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렇게 살다가 문득 사람 냄새를 맡고 싶다고 생각한 건, 삼십 대에 들어 선 첫 날의 일이었다.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은 집인가 싶기도 했다. 이 층짜리 집에 방이 아직 몇 개 인지는 세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공인중개사의 말이 허풍은 아니었던 듯, 바닥도 깨끗하고 창틀에 먼지도 없었다. 빌트인 냉장고 안에는 물이 한 병 들어 있고, 찬장은 비어 있었다. 혹시나 싶어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지만 역시 먼지는 묻어나오지 않는다. 사실 먼지 몇 톨 정도 있는 것이 그리 큰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충 후후 불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니까. 데릴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가지고 온 짐은 이 층 가장 구석진 곳의 방에 대충 풀었다. 오는 길에 보아둔 홈 센터에서 침대 시트와 이불, 카펫과 텔레비전 등 대충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을 전부 시켰더니 트럭으로 배달을 해 준다, 세상 참 살기 편해졌다고 입속말을 하며 데릴은 사 온 물건들을 대충 정리했다. 살풍경한 집이 조금 사람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 집에서 살게 된 지 이틀이 되었다. 담배나 좀 피우고 동네 구경 좀 할까 싶어 담뱃갑과 일회용 라이터만 가지고 다시 집을 나선다.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동네였지만, 그렇기에 데릴에게는 더욱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욱한 담배냄새와 여자의 낮은 웃음소리, 형의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햇빛냄새와 동네 아이들이 공원에서 노는 자잘한 소리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데릴은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휴지통에 던져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터벅터벅 마이 홈에 들어가려는데, 그 앞을 서성이는 조막만한 뒤통수가 보인다. 자주색 캡을 야무지게 눌러 쓴 모습에 십중팔구 동네 꼬맹이라고 생각해 “Hey,"하고 불렀다. 생각보다 위협적인 목소리가 나와 버려 데릴은 혼자 조금 당황했다. 그런데 뒤를 돌아 본 그 얼굴에는 데릴보다도 더 당황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아, 미안해요. 이 집에 누가 이사 온다는 건 알았는데, 그러니까 내 말은…….”

적잖이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요란스러운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필사적으로 변명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 꼬맹이는 아닌 것 같고, 고등학생 정도 될까.

“내 집에 뭐 볼 일 있어, kid?”
"Kid?"

꼬맹이라는 말에 확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 때 처음으로 그 앳된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수염도 하나 없고 솜털만 보송한 얼굴이라 꼬맹이만큼 잘 어울리는 호칭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성깔이 있는 꼬맹이였던 모양이다. 데릴은 잠자코 수염을 쓰다듬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이 옆집에 사는 사람이에요. Glenn.”
"글렌?"
“네. 어제부터 시끄럽기에 누가 이사 온다는 건 알았는데 오늘 보니 창문이 열려 있어서 지나가던 길에 잠깐 봤을 뿐이에요. 충분히 수상쩍어 보인다는 건 저도 알지만.”
“Hmm.”

수상쩍어 보인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는 걸 보니 엄청 되바라진 꼬맹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주색 캡 아래로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는 그가 동양계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미국식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영어 발음이 매끄러운 걸로 보아 미국에 온 지는 꽤 오래 되었으리라. 전에 살던 곳에도 동양인은 있었다. 그는 멀과 함께 일했고, 데릴은 그와 직접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멀이 그를 ‘chinese’라고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아무래도 그 어감이 별로 좋지 않아 데릴은 멀이 그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조금씩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정작 본인은 별 생각 없이 대답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 사내도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왔을까. 사실 동양 하면 중국과 일본 정도밖에 몰라서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기도 그랬다. 전혀 모르는 나라 이름이 튀어나오면 당황할까봐. 데릴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글렌도 잠시 멈칫하더니 악수에 응한다.

“Daryl.”
"데릴."

옆집에 사는데 통성명도 안 할 순 없을 것이고, 데릴은 짤막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글렌은 정확한 발음으로 그의 이름을 다시 말한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의심과 경계가 일상이 된 생활 속에 이런 사심(邪心) 없는 눈길을 얼마 만에 마주하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꼬맹이라고 부른 건 사과하지. 뒤에서 봤을 땐 영락없이 동네 꼬맹이가 초인종이라도 누르고 튈 준비를 하는 줄 알았어.”
“그건 좀 실례네요. 이래봬도 스물 둘이나 먹었는데.”
“Shit, 끽해야 고등학생인 줄 알았더니.”
“그거 칭찬이죠?”
“Whatever.”

스물 둘이라는 나이에 조금 놀라 본심을 말해버렸다. 다행히 그리 불쾌해하지는 않는 듯하다. 스물 둘이면 자신과는 아홉 살 차이일까. 꼬맹이라는 호칭이 안 어울릴 수가 없는 나이 차이다. 아무튼 첫인사는 이 정도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데릴은 오른손을 한 번 들어보이곤 집으로 향했다. 좋든 싫든 살면서 몇 번은 마주치게 될 사람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았던 과거가 생각남과 동시에 아직도 여자를 끼고 약을 하고 있을 형의 모습이 떠올라 진저리를 치며, 데릴은 볼 것도 없는 텔레비전을 켰다.


-


세차를 하는 손길이 제법 야무졌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라고, 담장 너머로 글렌을 지켜보며 데릴은 그런 생각을 했다. 누가 지켜보는 것도 모르고 세차를 하던 글렌이 담장 쪽을 올려보기까지 몇 분이 걸렸을까. 뜨거운 여름 햇빛을 잊을 정도로 데릴은 별 것 아닌 그 동작들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형이 봤다면 정신 차리라며 뒤통수라도 쳤을 법하다.

끽해봐야 두 번 마주친 타인에게, 아무리 옆집 사는 이웃이라지만 마트를 데려다 주겠다는 저 제안은 대체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 걸까. 데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친절이 몸에 밴 건지, 아니면 자신이 그렇게 챙겨줘야 할 사람처럼 생긴 건지. 그러나 그 의문을 소리 내어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데릴은 그의 제안을 거절해버렸다. 딱히 깊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은 아니다. 청년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아쉬워한다거나 거북해하는 느낌은 없었다. 저마저 몸에 익어버린 친절인지도 모른다. 성장 과정부터 자신과는 백 팔십 도 다른 인생을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저절로 비틀려오는 마음 한 구석은 아직도 스무 살, 아니 열 살의 자신과 변하지 않았다. 쓴웃음을 지으며 냉장고를 열어 캔 맥주를 꺼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캔이 손바닥에 잠깐 들러붙었다 곧 떨어졌다.


-


“……뭐야?”
“딜리버리요.”

여전히 자주색 캡을 눌러 쓴 채, 어떤 야구팀의 유니폼 같은 것을 셔츠 위에 걸친 글렌이 피자 박스를 들고 서 있었다. 현관에 선 채 데릴은 머리를 긁는다. 하필 이 꼬맹이가 그 피자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살짝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그 와중에 피자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았기에 위장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데릴이 지갑을 꺼내 피자를 계산했고, 글렌은 주머니에서 잔돈을 꺼냈다. 돈을 주고받을 때 손가락이 살짝 스쳤다. 박스를 건네고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 글렌의 뒤통수에 대고 데릴이 입을 열었다.

“Hey kid, 피자 같이 먹지 않을래?”
“……?”
“……남은 걸 데우는 건 번거로워서 싫어.”

돌아 본 얼굴엔 의아함이 가득 담겨있다. 쓸데없는 말을 했나 싶어 후회가 됐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데릴은 팔짱을 낀 채 꼬맹이의 입이 열리길 기다린다. 그 입 끝에 옅은 미소가 담긴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친절한 제안을 할 정도로 자신이 이 동네에 녹아든 걸까. 아니면 눈앞의 청년의 친절에 닿아버린 탓일까. 아무튼 환경이 사람을 바꾸는 건 확실한 듯하다. 마지막 말은 변명에 가까웠고, 서글서글한 눈매의 동양인 청년도 그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데릴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건 저번에 마트를 같이 가 준다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 대신 베푸는 호의라고 생각했지만 이 마저도 변명처럼 느껴지는 건 무엇 때문일지.

“민호도 저녁 초대 받아서 나갔으니 뭐, 하루쯤 어울려 줄게요.”
“Minho?”
“아, 전에 본 동생이요.”

낯선 억양에 데릴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글렌은 선선히 대답한다. 형은 미국식 이름인데 왜 동생은 다른 나라 이름일까. 그게 일본 이름인지 중국 이름인지 분간할 수는 없지만 영어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바이크는 반납하고 퇴근해야 한다며 글렌은 다시 바이크를 타고 떠나버렸다. 박스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며 데릴은 자신의 머리를 긁었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는지 알 수 없다.


-


피자를 시키면서 콜라를 안 시키는 건 말도 안 된다며 쫑알거리더니 글렌은 들고 있던 봉투에서 콜라병을 꺼냈다. 가게에서 가져온 것 같았다. 당연히 맥주와 함께 먹을 생각이었던 데릴은 그저 입을 다물고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왔다. 글렌의 눈이 잠깐 반짝이는 것 같았는데 끝까지 술을 달라는 말은 안 한다. 전혀 못 마시는 건 아닐 텐데.

“맥주 안 마셔?”
“아, 술이 약해요. 남 앞에서 마시면 실수하기 쉬워서.”
“그랬군.”

억지로 마시게 하는 것도 뭣하고, 데릴은 고개를 끄덕인다. 피자는 조금 식었지만 그래도 혼자 먹는 것보다는 낫다. 아무리 그래도 이 집은 너무 넓었고 그렇다고 여자를 부를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가 부른다고 달려 올 여자도 없지만.

“원래 뭐 하던 사람이에요?”
“뭐? 왜 알고 싶은데?”
“아니……. 이런 질문은 실례인가? 그냥 궁금해서요.”

피자를 우물거리며 글렌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치면 자신도 이 청년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다. 데릴은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약 밀수업자.”
“네?!”

뒤로 넘어갈 기세로 놀라는 글렌의 눈이 평소의 배로 커졌다. 설마 이 말을 진짜로 믿은 걸까. 데릴의 표정을 보고 거짓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글렌은 들고 있던 콜라 잔을 쾅 내려놓았다. 아 쫌, 놀랐잖아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어떻게 알았어요?”
“마킹 안 한 유니폼이잖아. 나도 한 때 좋아했지.”

한 때 꿈이 야구선수였던 적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꼬맹이는 그마저도 농담으로 받아들일 게 빤하니까. 눈을 빛내며 야구팀에 대해 쫑알거리는 글렌을 곁눈질로 쳐다보며 데릴은 피자를 마저 먹었다. 사실 피자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제일 빨리 오는 음식으로 대충 시키다 보니 걸린 게 피자였는데 그 딜리버리맨이 옆집의 동양인 청년이었다니. 아마 그 우연 탓인지도 모른다, 답지도 않은 변덕을 부리고 만 것은.

“미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됐어?”
“어, 음. 좀 개인적인 일인데요.”
“아.”

무심코 던진 질문에 우물거리는 그를 보고 데릴은 뭔가 실수했다는 걸 느꼈다. 고개를 살짝 숙였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표정이 어둡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려주면 이름 제대로 부를래요?”
“……뭐?”
“I'm not a fucking kid, I'm Glenn. G-L-E-N-N.”

글렌은 친절하게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알파벳 다섯 개를 썼다. 데릴은 잠자코 그 손가락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다. 첫 만남부터 느꼈지만, kid라는 호칭은 역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입에 붙어버린 이 호칭이 쉽사리 떨어질 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데릴은 고개를 끄덕인다. 왜 자신이 이렇게 고분고분해진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맥주 밖에 탓할 것이 없다.

“안되겠다, 나도 맥주 하나 마셔도 되죠?”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글렌은 냉장고 앞에 서서 문을 열고 있다. 흠, 하는 콧소리를 내며 데릴은 의자에 조금 더 깊게 기대어 앉는다. 흑맥주 으, 이건 써서 싫더라. 혼잣말과 함께 냉장고 문이 닫힌다. 써서 싫지만 그것밖에 없으니 그거라도 마셔야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듯, 캔 맥주를 단단히 감싼 다섯 개의 손가락이 보였다. 부엌의 백열등 빛이 그 손가락 위에서 춤추듯 부유한다.

“I'm Korean.”

Korea? 그건 어디 있는 나라냐고 묻는 데릴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글렌은 작게 중국과 일본 사이의 나라라고 덧붙였다. 일단 동양이 맞긴 한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두 나라와도 그리 멀지 않았다. 분단국가라는 덧붙임에 흘러가는 뉴스 자락에서 그 이름을 들은 것 같은 기억이 스쳤다. 글렌은 맥주를 따더니 크게 한 모금 마셨다.

“입양아예요. 그리 드물지 않은 케이스죠.”

그러면 동생은 뭐냐고 물으려다가, 데릴은 그마저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동생은 친동생이 맞아요. 운 좋게 같은 집에 입양된 거예요. 이건 매우 드문 케이스라고 하던데요. 데릴도 형제가 있어요?”
“……빌어먹을 형이 하나 있지.”
“어쨌든, 우리는 우리가 굉장히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타향에서 같이 살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됐겠어요? 유년기는 함께 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죠. 미국의 부모님들이 아니었으면 남동생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을 테니까.”

입가를 슥 닦고 글렌은 픽 웃었다. 그 형제가 원수라면? 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데릴은 맥주와 함께 삼켜냈다. 확실히 친형제가 한 가정에 입양되는 일이 그리 흔할 것 같지는 않았다. 거꾸로 말하자면 두 형제를 모두 미국에 입양 보내야 할 만한 사정이 그 집에 있었다는 뜻이리라. 멀의 생사조차 모르는 자신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데릴은 그 때 문득 눈앞의 새파란 꼬마가 조금 의젓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동생과 자신의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함일까. 자신이 통장에 부어주는 돈을 그대로 여자의 가슴에 꽂아 넣는 원수 같은 형과는 다른 ‘형’인지도 모른다. 그 머리를 쓰다듬고 잘 버텼다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다 식어빠진 피자 마지막 조각을 손에 들었다.

“어, 야구 할 시간이다. 저 이제 가봐야겠어요. 오늘 중계 봐야 해서.”
“여기서 보고 가.”
“……그래도 돼요? 진짜로?”
“어차피 혼자 할 것도 없고, 야구는 나도 보려던 거니까.”
“사실 데릴이 가진 텔레비전이 우리 집에 있는 것보다 넓더라구요.”

살짝 붉어진 얼굴은 큰 텔레비전을 발견한 기쁨일까, 아니면 그의 말대로 술을 잘 못 마신 사람이 캔 하나를 비워 낸 결과인 걸까. 텔레비전은 또 언제 봤냐고 말하려다가 데릴은 문득 웃었다. 횡재했다는 듯 서둘러 거실로 가는 뒤통수를 지켜보다가 냉장고를 열어 캔 맥주 두 개를 더 꺼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에, 시끌벅적한 저녁의 흔적이 남고 있었다.





5.


“뉴트, 축구화 있어?”

“있긴 한데 왜 묻는 거야? 혹시 안 가져왔어?”
“응, 주말에 빨아 놓고 가져온다는 게 그대로 널어두고 나왔어. 형도 잊어버렸나봐. 안 챙겨줬네.”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민호에게, 뉴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라커를 열고 신발주머니를 꺼냈다. 민호는 씩 웃으며 Thanx, 한 마디를 중얼거리고 주머니를 받아 든다. 고전에 이어 지리 시간이라 라커에서 교재를 꺼내는 학생들의 바쁜 발소리와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민호의 라커는 거의 바닥 쪽이라 주저앉다시피 한 채 교재를 찾는다. 키는 큰데 하필 아래쪽을 배정받는 바람에 라커에 올 때마다 고생이다. 눈높이에 딱 맞는 라커를 배정받은 자신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뉴트는 지리 교재를 한 손에 들고 민호를 내려다본다. 다행히 지리 교재는 있는지 민호도 지리 교재를 든 채 일어서고 있었다.

“주장이 모범을 보여야지.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야.”
“나 자격 박탈이야?”
“그거 알아? 내가 축구부였으면 벌써 쿠데타를 일으켰을걸.”
“아쉽네.”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 민호를 보고 뉴트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툭 친다.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야야, 하고 엄살을 떠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답지 않다. 오히려 그래서 더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동양인에 대해 완벽히 편견 없는 상태에서 그를 처음 대했다고 할 수는 없다. 뉴트의 기억에 초등학생 때의 민호는 꽤나 신경질적이었다. 날카로운 눈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영어를 잘 못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누군가에게 절대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표정을 누그러뜨리지도 않았다. 그런 민호와 어떻게 친해졌더라.

“뭐 해, 멍 때리고? 가자.”
“아, 응.”

민호는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뉴트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 옆에 섰다.

“오늘 방과 후에 연습 있다고 했지?”
“응. 신입생들 실력 좀 보게. 기다릴 거야?”
“음……. 글쎄, 도서관 서가 정리를 해야 돼서 더 늦게 끝날 수도 있는데.”
“그럼 내가 기다려도 되고.”
“토마스는?”
“토마스는 오늘 일이 있어서 신입생들도 못 보고 갈 걸?”
“그랬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어느 새 지리 담당 클라크 선생의 교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수업 시작 종이 울리기 일 분 전에 그들은 가까스로 착석했다.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왼손으로는 턱을 괴고 오른손으로 펜을 돌리는 민호의 옆얼굴을 보다가, 뉴트는 선생의 말을 따라 교재를 편다. 저번 시간에 이어 시차를 공부할 차례인 모양이다. 뉴트는 지리 과목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시차 계산 같은 것은 영 쥐약이었다. 뉴트의 왼쪽에 앉은 민호는 공부할 생각조차 없는 듯 교재 한 구석에 끄적끄적 무언가 낙서를 하고 있다. 뉴트의 오른쪽에 앉은 토마스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칠판을 보고 있었다. 셋 중에 한 명이라도 집중을 하고 있다면 된 것 아닐까. 물론 이 교실 전체의 비율을 따지자면 이 노선생의 수업에 진짜 집중을 하는 사람은 셋 중 하나도 안 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뉴트는 그들의 어릴 적을 떠올렸다.


-


그 때만 해도 민호는 매우 작았다. 동양인이라면 다들 이렇게 작은 건가, 싶을 정도로 키가 작았던 것을 뉴트는 기억한다. 꼭 다물린 입술, 쌍꺼풀 없는 눈매와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 집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지 꼭 필요한 말은 영어로 했지만 그리 유창한 발음은 아니었다. 꼭 그 나이 대의 잔혹함으로 다른 아이들은 민호가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사용해 그를 모욕하곤 했다. 눈이 찢어졌다든가, 냄새가 난다든가 하는 인신공격이 대부분이었고, 툭툭 치는 등 신체적인 괴롭힘도 분명 있었다. 뉴트가 민호와 처음 같은 클래스로 배정받은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동양인이 전학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명백한 괴롭힘을 다 참아 내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나니 한편으로는 그 작은 남자 아이가 굉장히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 자신의 일은 아니었고, 괜히 끼어들었다가 학교생활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덩치가 큰 짐은 남자 아이들도 무서워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날도 민호는 꿋꿋이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동자 격의 남자 아이가 건들거리며 또 민호의 주변에 다가가는 것을 보고 뉴트의 머릿속에서 위험 신호가 울렸다. 민호는 묵묵히 그 모욕을 다 받아내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수많은 모욕성 단어가 민호 위로 쏟아졌고, 그 중 비꼼이 가득한 jap이라는 단어가 뉴트의 귀를 찔렀다. 그 때 의자 옆으로 늘어진 민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고 뉴트는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지만.

“짐, 그 쯤 하고 이제 그만…….”

다음 순간 여자아이들의 째지는 비명 소리가 들리기에 결국 일이 터졌구나 싶었다. 분명 민호가 무언가 말대꾸를 하는 바람에 열 받은 짐이 그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패대기쳤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닥에 뒹구는 사람은 뉴트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민호는 여전히 주먹을 꼭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할 말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무심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민호의 그 때 그 표정이 정확히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다음에 민호가 정확한 발음으로 씹어 내뱉은 한 문장은 오 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뉴트의 귓가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I'm Korean.”

민호는 교장실로 호출되었다. 누구든 민호에 대해 할 말이 있는 사람은 교장실로 오라기에 뉴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교장실로 향했다. 은발이라고 표현해도 어울릴 백발을 반듯하게 올린 미세스 그린은 뉴트를 보고 살짝 의외라는 듯 웃었다. 그 때까지 부루퉁한 표정으로 교장실 구석의 응접세트 앞에 앉아 있던 민호도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그의 앞에는 백인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뉴트는 그 때 처음으로 민호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았다.

“뉴트 군은 민호 군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죠?”
“네, 교장 선생님.”
“민호 군 앞에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요?”
“물론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라오는 입술을 혀로 축이고 뉴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짐이 민호보고 ‘jap’이라고 했어요.”

교장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민호의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가렸고,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민호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전 그 단어가 굉장히 나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민호 군이 짐을 때렸다는 이야기인가요?”
“상황으로 보자면, 네.”

미세스 그린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만년필을 든 손으로 백지 위에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딱히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잠겼을 때 무의식중에 나오는 그녀의 습관인 듯했다. 이윽고 그 손이 멈추더니,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가 뉴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고마워요, 뉴트 군.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만 나가줘도 괜찮을까요?”
“……짐 패거리는 민호를 계속 괴롭혔어요. 전 민호가 이만큼 참은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의견 들려줘서 고마워요. 이제 교실로 돌아가 봐요.”

미세스 그린은 이미 무언가를 마음속으로 결정한 듯했다. 마지막 말은 상냥했지만 약간의 강제성을 띠고 있었다. 이미 방과 후라는 사실은 굳이 그녀에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뉴트는 조용히 교장실을 나왔다. 독서 클럽 활동도 없는 날이라 운동장 스탠드에 걸터앉아 축구하는 아이들을 구경하다 가기로 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누군가 어깨를 툭 치기에 돌아봤더니 예상대로 민호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뚝뚝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조금 누그러진 것도 같았다. 말없이 무언가를 내밀기에 받아 봤더니 자판기 콜라였다. 다른 손에도 콜라를 들고 있는 걸로 봐서 아마 그건 자기 몫인 듯 했다. 얼떨결에 그 콜라를 받아 들자 그것을 이야기를 들어 주겠다는 신호라고 받아 들였는지 민호는 뉴트 옆에 걸터앉았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콜라지. 보면 모르냐.”
“이걸 왜 나한테?”
“고맙다는 표시인지, 몰라. 엄마가 널 한 번 초대하라던데.”
“미세스 그린은 뭐래?”
“인종차별 발언으로 짐의 부모님과 심각하게 의논을 할 거라던데. 이럴 거면 진작 교장한테 꼰지를 걸 그랬어.”

덤덤하게 말하며 민호는 제 몫의 콜라를 땄다. 그 동안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상당히 유창한 발음이다. 분명 처음 전학 왔을 땐 굉장히 어눌했는데. 시간이 흘렀다 쳐도 준수했다. 의외로 이 녀석의 학습 능력은 대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뉴트도 자신의 콜라를 땄다. 자잘한 기포가 얼굴에 튀고, 콜라 특유의 단내가 훅 끼쳤다.

“너 그 때 일어서 있었지?”
“뭐?”

깜짝 놀란 뉴트는 멍하니 민호를 쳐다본다. 민호도 뉴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짐이 나한테 jap이라고 한 그 때 말이야. 너 일어서 있었잖아. 아니 그 좀 전부터.”
“…….”

그건 언제 또 봤을까. 뉴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콜라를 마셨다. 패스를 하라는 둥, 더 멀리 차라는 둥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웠어.”
“…….”
“나랑 같이 화내 준 멍청한 녀석은 네가 처음이거든.”

뉴트는 그 때 처음으로 민호의 환한 웃음을 보았다. 쌍꺼풀이 없어서 그런지 그의 눈은 거의 사라져 있었지만 충분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리고 너 봤냐, 그 새끼 얼굴? 나가 떨어져서 울더라. 찌질하긴.”
“왜 진작 받아치지 않은 거야?”
“내가 나대봤자 부모님한테 좋은 게 없잖아. 그냥 얌전하게 있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음, 조금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민호는 남은 콜라를 한 번에 다 마셨고, 뉴트도 그를 따라 콜라 캔을 비웠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금 떨어진 쓰레기통에 캔을 던졌고, 캔은 두 개 모두 멋지게 쓰레기통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둘은 마주보고 조금 크게 웃었다. 그 이후로 뉴트와 민호는 친해졌고, 중학생 때 토마스가 이사를 오면서 셋이 함께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덕분에 지금 고등학교에서 셋은 유명했다. 그러나 뉴트가 민호의 부모님을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 일로부터 몇 년 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둘 다 운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


“어서 와, 민호. 잠깐 이리 와봐. 이건 뭐라고 읽어?”
“‘컴퓨터’네. 음, computer 말이야.”
“아, 이게 ‘퓨’구나. 재밌게 생긴 글자네.”

평소 쓰지도 않는 안경을 쓰고 웬 종이 쪼가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했다. 스포츠 백을 내려놓고 민호는 글렌이 손짓하는 대로 소파에 걸터앉았다. 글렌이 보고 있던 것은 어디서 주워왔는지도 모를 한국어 광고지였다. 글자가 귀엽다느니 뭐라느니 중얼거리며 글렌은 볼펜으로 광고지 귀퉁이에 ‘퓨’를 몇 번 썼다. 썼다기보다는 그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민호는 빼앗듯 광고지를 건네받았다.

“‘최신 사양 컴퓨터가 단돈 85달러. 견적 맞춰드립니다.’ 이런 건 어디서 가져왔어?”
“길 가다가 주웠어.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한국어인 것 같아서.”
“읽지도 못하면서 무슨.”

세 살 때 바로 미국으로 입양된 글렌은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사랑해요 등 어디서나 기본적으로 들을 수 있는 회화 외에는 의사소통에 한국어를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덟 살까지 한국에서 살다 온 민호는 달랐다. 그는 기본적으로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었다. 유치원에서 기본적인 한글은 다 뗀 후에 미국으로 왔기 때문이다. 글렌은 한국 드라마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종종 자막 달린 드라마를 보곤 했다. 매일 내용이 똑같다고 욕하면서도 보게 되는 게 한국 드라마의 묘한 매력이라고 투덜거리며. 아주 화면으로 들어가지 그러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민호도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곤 했다. 그러면 적어도 듣기 능력 정도는 유지할 수 있으니까.

“민호, 우리도 텔레비전 바꿀까?”
“갑자기 왜?”
“아니, 큰 화면으로 보면 좋잖아. 야구도 축구도.”

형제의 디테일은 시리얼뿐만 아니라 운동 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글렌은 고등학생 시절 야구부 소속이었다. 유격수를 주로 맡아 했는데, 체격은 작으면서도 날쌔고 민첩성이 좋아 주전 멤버로 활약하곤 했다. 프로 선수로서의 진로도 잠시 고려했던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불확실한 길이라 그런지 곧 그만두었다. 그러나 글렌은 지구력이 좋지 않아서 90분 내내 그라운드를 돌아다녀야 하는 축구는 영 젬병이었다. 민호는 그 반대다. 민첩성보다는 지구력이 좋았고, 한 경기를 풀로 소화해도 버틸 수 있었다. 오히려 야구를 하려고 하면 가만히 서있지를 못하고 자꾸 도루를 시도하다가 견제사를 당하곤 했다. 지금은 어엿한 축구부 주장을 맡고 있다.

“이것도 충분히 큰데.”
“아냐. 내가 어제 이것보다 더 큰 화면으로 야구 중계를 봤는데, 진짜 죽이더라.”
“뭐? 더 큰 화면? 어디서?”

저녁 당번이라 프라이팬에 냉동 치킨을 올리다가 반사적으로 민호는 뒤를 돌았다. 글렌은 어깨를 으쓱한다.

“……데릴 집에서.”
“……Seriously?”
“안될 게 뭐 있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데?”

민호는 불을 끄고 아예 뒤돌아서 허리에 손을 짚은 채 형을 가만히 쳐다본다. 글렌은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더니 살짝 숨을 내뱉었다.

“아니, 우연히 그 집에 피자 배달을 하게 됐어.”
“그래서.”
“데릴이 같이 먹지 않겠냐고 물어서 퇴근하고 그 집으로 갔지. 그것뿐이야.”
“Holy shit, 진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네.”
“바로 옆집이고 나도 이렇게 건장한데 뭘.”

형이랑 그 남자 어깨 너비부터 좀 비교하지 그래?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으나 민호는 간신히 삼켰다. 아마 이 얘기를 하면 일 년 동안은 삐쳐있을 테니까. 장담할 수 있다. 물론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생기도록 가만히 내버려둘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워낙 흉흉한 세상이라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민호의 표정을 본 글렌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뭘 걱정하는 거야, 민호?”

“그 사람 형한테 흑심 있는 거 아냐? 수작 부리는 거 아니냐고.”
“말도 안 돼. 그 사람이 그럴 리가. 흑심이 있다면 내가 있지.”
“…….”
“……Oh.”
“What the…….”

민호의 눈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무심코 마음의 소리를 뱉어 버린 글렌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민호의 눈치를 보며 슬슬 자리에서 일어난다. 뱀 앞의 개구리가 이런 표정일까.

“어딜 도망가. 안 앉아?”
“……미안.”

깨갱하며 글렌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민호는 지금 당장이라도 손에 든 뒤집개로 형을 쥐어 패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내고 대신 다시 프라이팬에 불을 켰다. 글렌이 눈치를 보는 게 등 뒤로도 느껴졌지만 일부러 묵묵히 치킨을 뒤집었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와 민호는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짚는다. 평생 연애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적어도 그쪽 방면으로는 누구보다도 순진한 형이 갑자기 옆집 남자에게 흑심이 있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아직도 머리가 엉망진창이라 아무런 정보도 순순히 들어오질 않는다. 뒤집개를 꼭 쥔 채 심호흡을 한다. 자신이 만들어 낸 바람에 잘 세팅해 놓은 앞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6.


“민호, 패스!”

“…….”
“주장, 패스, 패스하라구요!”
“……어엉?”

얼빠진 소리를 내며 민호가 고개를 드는 순간, 오른쪽에서 튀어 나온 공격수가 그의 발끝에 멈춰 서 있던 공을 가로챘다. 깜짝 놀라 공이 보이는 쪽으로 발을 뻗어 보았지만 이미 실점한 후였다. 방금 민호에게 패스했던, 노란색 조끼의 토마스가 무릎에 손을 짚은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뜨린다. 완벽한 어시스트 상황이었는데 그만 다른 생각을 하다가 공을 뺏겨버린 것이다. 점수 집계를 맡은 뉴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BLUE팀 쪽의 종이를 한 장 넘겼다. 축구부 내 연습 시합이라 부원을 반으로 나눠 실제처럼 경기를 하는 도중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토마스의 패스를 받자마자 바로 골로 연결시켰어야 한다. 민호는 자신의 노란색 조끼를 내려다보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파란 조끼 차림의 1학년 데이빗이 풋내 나는 드리블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미안!”

누가 들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외쳐보고 민호는 공을 좇았다. 주장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자 1학년은 눈에 띄게 당황해 헛발을 디디고 말았다. 가볍게 공을 빼앗아 옆을 마크하던 토마스에게 패스했고, 중앙공격형 미드필더인 토마스는 특기인 중거리 슛으로 득점했다. 1대 1, 동점 상황에서 경기가 끝났다. 미니 게임이라 금방 끝난 편이지만 아무래도 부원들이 다들 지쳐있기에 민호는 별다른 마무리 없이 그 자리에서 해산을 외쳤고, 다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돗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여름 햇빛 아래 꼬박 삼십 분을 뛰었으니 다들 시원한 물이 그리웠을 테다.

“야아, 아까랑 속도가 너무 다른 거 아냐? 아주 펄펄 나는데?”
“누군들 안 그렇겠냐.”

달려가는 부원들을 보며 토마스가 비아냥거림을 섞어 한 마디 던졌고, 뉴트가 너무 뭐라 하지 말라는 듯 한 마디를 보탠다. 점수 집계만 도와줬기에 딱히 움직이지 않은 뉴트의 머리카락 끝에도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거, 마셔도 돼?”
“응. 얼마 안 남았지만.”

뉴트 옆에 있던 물병을 가리키며 민호가 물었다. 사실 뉴트의 답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 물병은 민호의 입에 닿아 있었다. 얼마 안 남았다더니, 정말 두 모금 정도밖에 없었다. 심판을 보면서도 더위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시작할 때 냉동고에서 꺼내 온 것이라 시원했지만. 토마스는 허리를 굽히더니 아예 머리카락을 탈탈 털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카락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졌다. 뉴트가 살짝 몸을 틀어 토마스의 땀 세례를 피하는 장면은 축구 경기가 끝나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민호, 아까 왜 경기 중에 멍 때리고 있었던 거야?”

물통을 탈탈 털어 얻어 낸 마지막 모금을 꿀꺽 삼키고 민호는 쓴웃음을 띤다. 뉴트가 분명 그것에 대해 물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생각대로 말해 주는 걸 보면 헛사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도 머리 털기를 멈추고 민호를 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자신이 물어보려 했는데 뉴트가 물어봐서 수고를 덜었다는 표정이다. 웬만큼 물놀이는 끝냈는지, 수돗가 쪽에서 들려오던 왁자지껄한 소음이 사라지고 없다. 말 할까, 말까 고민하던 민호는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너희, 우리 형 알지?”
“글렌?”
“응.”
“왜?”
“……어…….”

운은 띄워 놓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심각한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그를 둘러 싼 뉴트와 토마스의 표정이 점차 이상해지고 있다. 한참 고민하던 민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신음했고, 깜짝 놀란 뉴트가 그를 뜯어 말렸다.

“민호 너 머리카락 숱 많다고 너무 함부로 쓰는 거 아니야?”
“뉴트, 지금 그 말은 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봐. 글렌이 뭐 어쨌다고?”
“둘 중에 오늘 집 비는 데 있어?”
“우리 집 비어. 엄마 아빠가 오늘 데이트 나가시거든.”
“좋아. 그럼 일단 토마스네 집으로 가자.”

제멋대로 결정을 내리더니 민호는 뚜벅뚜벅, 라커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뒤에서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던 뉴트와 토마스는 뒤늦게 그를 좇는다.


-


「오늘도 늦게 온다고? 저녁은?」
“토마스네 집에서 먹기로 했어. 형 알아서 챙겨 먹어.”
「올 때 콜라 좀 사 와.」
“알았어. 끊는다.”

형제의 통화를 숨죽여 듣고 있던 토마스와 뉴트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들고 있던 과자 봉지를 찢기 시작했다. 사실 과자 봉지야 언제든 좍좍 찢을 수 있는 것인데도 왠지 글렌이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뉴트와 토마스가 각각 자신의 몫으로 캔 맥주를 따는 장면을 잠깐 서글픈 눈빛으로 쳐다보던 민호가 캔 콜라를 땄다. 술에 대한 글렌의 태도를 잘 아는 두 사람은 말없이 민호를 눈빛으로만 위로해주었다. 애먼 콜라를 험상궂은 눈으로 노려보던 민호가 콜라를 한 모금 꿀꺽 마신 후 크래커를 하나 집어 든다.

“그래서 하려던 얘기가 뭐야? 글렌이 왜?”
“형이 연애를 하는 것 같아.”
“축하할 얘기잖아.”

뉴트가 말문을 트고, 맥주를 마시면서 토마스가 가볍게 받아 넘겼다. 그래, 축하할 얘기지. 그게 쉽게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라면.

“근데……. 연상이야.”
“몇 살이나?”
“다섯 살, 아니 정확히는 몰라. 이건 그냥 지레짐작이야. 더 날 수도 있고. 설마 열 살 씩이나 나지는 않겠지.”
“요즘 시대에 연상인 게 그렇게 큰일인가? 브라더 콤플렉스도 아니고.”

찌릿, 하는 민호의 눈총을 받고 토마스가 입을 다물었다. 뉴트는 잠깐 눈동자를 굴리더니 “우리 저녁은 어떡해?” 하고 딴소리를 한다. 토마스가 자연스럽게 피자 전단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민호는 “야, 우리 형이 아르바이트하는 데는 안 돼. 알지?” 라고 말했고, 토마스는 손으로 OK 사인을 만들어 보인 후 피자 주문 전화를 시작한다. 민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 채 바닥에 누웠다. 서늘한 대리석 바닥이 피부에 직접 닿는 느낌이 상쾌하다.

“네가 진짜 걱정하는 게 뭐야, 민호?”
“음, 그러니까. 우리 형은 연애도 처음이고. 사람이 너무 착해 빠졌고…….”“그 애인이라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엉?”
“그 사람도 착한 사람이면 된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거 말고도 내가 걱정하는 게 또 있어.”
“내가 말했잖아. ‘진짜’ 걱정하는 게 뭐냐고.”
“아직 사귀는 게 아니고 짝사랑이야.”

하와이안 페퍼로니 피자 엑스트라라지 사이즈의 주문을 끝낸 토마스가 제 자리로 돌아왔다. 민호는 벌떡 일어나 제 머리를 마구 헤집는다. 차라리 데릴의 손을 잡고 와서 “이 사람이 내 애인이야.” 라고 말했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았을 텐데, 왜 하필 짝사랑이란 말인지. 혹시 그 사람이 인종차별주의자라면? 호모포비아라면? 착해 빠진 글렌이 받게 될지도 모르는 상처가 민호는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고민을 친구들에게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뭣보다 글렌의 프라이버시가 달린 문제다. 민호는 결국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민호, 나는 정확히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응?”
“부딪혀보지도 않고 뭔가를 겁내는 건 너나 글렌답지 않아.”
“…….”
“그건 나도 뉴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음.”
“형이 생애 첫 연애를 하고 있는데 동생이 축하해줘야지. 글렌이 아무 생각 없이 뭔가를 할 사람이 아닌 건 네가 가장 잘 알잖아.”
“그건…… 맞아.”

마뜩찮은 표정으로 민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뉴트는 살짝 웃고 있었다. 토마스는 어느 새 자신 몫의 맥주를 다 마시고 새 캔을 딴다. 명쾌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글렌의 연애를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를 제시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민호는 조금 머리가 맑아졌다. 뭣보다 뉴트의 마지막 말이 가장 와 닿았다. 글렌은, 자신의 형은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다름 아닌 민호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것도 사실이다. 왜 그런 간단한 사실을 잊고 있었는지, 자신을 멍청이라고 부르는 형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 것 같은 기분에 민호는 조금 창피해졌다.

“나중에 우리도 소개받으면 좋겠다.”
“너희가 왜?”
“그냥, 글렌의 애인이라고 하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 앞에 선 네가 어떤 표정일지도 궁금하고.”
“나 브라더 콤플렉스 아니거든.”
“난 그런 말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뉴트는 특유의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괜히 진 듯한 느낌에 민호는 콜라를 전부 마셔버렸다. 타이밍 좋게도 현관 차임벨이 울렸고 토마스가 지갑을 든 채 일어선다. 이렇게 셋이 모여 피자를 먹는 일이 많았기에 계산은 돌아가면서 하고 있었다. 메뉴도 거의 바뀌는 일이 없어 계산이 어려워지지도 않는다. 꽤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민호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토마스의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피자 냄새가 진해진다. 그러고 보니 아까 꼬박 한 시간을 운동장에서 뛰었구나, 싶은 마음과 동시에 엄청난 허기가 민호를 덮쳤다. 글렌과 데릴에 대한 생각은 일단 머리 한 구석으로 밀어 놓고 두 손을 벌려 오늘의 물주 토마스와 그의 손에 들린 피자를 반긴다.


-


“……웬일이야?”
“저녁 먹었어요?”
“네 알 바 아니잖아.”

오후 다섯 시,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주색 캡을 눌러 쓴 글렌이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까닭 없이 등 뒤로 숨기며 데릴은 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그럼에도 동양인 청년의 얼굴에는 구김살 하나지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이렇게 서글서글한 인상은 천성인지도 모른다. 에이 또 그런다 또, 라고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글렌은 오른손에 든 봉투를 내밀었다.

“아스파라거스 샐러드예요. 아스파라거스 좋아해요?”
“……그다지.”
“민호랑 똑같네. 난 좋아하거든요. 오늘은 민호가 없는 저녁이라 만들어봤어요. 그랬더니 좀 남아서, 음. 아무래도 계량을 실수한 것 같네요.”

얼떨결에 봉투를 받아든 데릴은 자신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부자연스럽게 굳은 입가 근육이 신경 쓰였다.

“피자 같은 걸로 대충 때우고 있을까봐 좀 가져다주려 왔어요. 싫으면 그냥 가져가고.”
“아니, 싫다고는 안 했는데.”
“다행이네요.”
“…….”

Good bye, 라고 말하며 미련 없이 뒤돌아가는 글렌의 뒷모습을 데릴은 그 자리에 선 채 잠시 쳐다보았다. 바로 옆집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아스파라거스 샐러드라니, 웬 구닥다리 같은 메뉴냐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글렌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락앤락에 담겨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을 텐데 기분 탓인지 마요네즈 소스 냄새가 데릴의 코를 찔렀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현관문을 닫은 데릴은 부엌 식탁에 앉는다. 글렌은 바로 그저께 이 맞은 자리에서 피자를 먹고, 거실의 소파에서 야구 중계까지 보고 갔다. 아쉽게도 그가 응원하는 팀이 역전패를 당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풍부한 리액션에 옆에서 보던 데릴이 오히려 더 놀랐다.

“좀 조용하네.”

말해놓고 데릴은 지레 놀랐다. 몇 년 만의 혼잣말일까. 그동안은 혼잣말을 할 정신도 없이 살아왔다. 주변에는 항상 시끄럽게 하는 놈들만 있었고, 그 시끄러움은 외로움을 해소하는 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하루하루 마음에 뚫린 큰 구멍은 그 크기를 더해갔고 그럴 때마다 데릴은 미친 듯 일에 열중했다. 퇴근 후에도 짐에 남아 운동을 하면서 스트레스와 울분을 날리곤 했다. 데릴에게 침묵은 금이었다. 오히려 조용할수록 마음은 안정되었다. 쓸데없는 소음을 듣지 않아도 될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조용함을 못 이겨 혼잣말을 한 것이다.

“Shit.”

적응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데릴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 모든 원인이 옆집의 말끔한 청년이라는 생각은 지우려도 지울 수 없었다. 데릴은 결국 담뱃갑을 꺼내 불을 붙이고 말았다. 부엌을 메우기 시작한 잿빛 연기를 따라 마음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


“나 왔어.”
“어서 와, 일찍 왔네?”
“저녁 먹자마자 바로 왔어.”

어깨에 메고 있던 스포츠 백을 내려놓으며 민호는 여느 때처럼 집에 들어섰다. 글렌의 목소리가 주방에서 나는 걸 보아 아직 저녁을 먹는 중인 모양이다. 희미하게 뭔가 다른 목소리가 섞여 들리고 있는데 설마 부엌에서 야구 중계를 보고 있는 걸까.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일곱 시밖에 안 되었다. 확실히 운동을 하고 나니 피자를 먹는 속도도 빨랐고, 그 이후에 딱히 할 것도 없어 그대로 헤어졌더니 평소 외출 후 귀가보다는 조금 이른 때였다. 뭐라도 마실까 싶어 민호는 형의 목소리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글렌은 핸드폰을 앞에 둔 채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볼 것도 없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경기다.

“텔레비전으로 보지, 이 작은 화면으로 중계를 보고 있어?”
“텔레비전 앞에서 밥 먹는 건 싫으니까.”

하여간 올림픽에 병신처럼 바른 생활 부문이 있다면 형이 금메달일 거야, 라고 중얼거리며 민호는 맞은편에 앉았다. 민호가 뭐라 중얼거리든 글렌의 시선은 핸드폰 화면에 고정되어있다. 설마 오늘도 데릴 집에서 밥을 먹고 있는 건 아닐까 잠깐 걱정했지만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왜 자신이 살짝 안도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민호는 테이블 위에 턱을 괴었다. 야구를 볼 때 글렌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의 표정만 보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유리한 상황인지 아닌지를 꽤 간단히 파악할 수 있다. 굉장히 심각한 표정이지만 입 꼬리가 비죽비죽 올라갈 준비를 하는 게, 아마 중요한 득점 찬스일 것이다.

“저녁은 먹었고?”
“먹고 온다고 말했잖아.”
“아, 맞다. 콜라는?”
“사 왔어.”

정확히는 내 몫으로 사 들고 갔던 콜라가 남은 거지만, 이라는 말은 결국 삼켜버린 민호가 콜라 캔을 따서 내밀었다. 글렌은 고맙다는 인사를 웅얼거리더니 콜라를 한 모금 크게 마셨다. 목이 탈 만큼 긴장되는 상황인 건가. 확인해볼까 싶었지만 굳이 고개를 빼면서까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지는 않아 민호는 의자에 조금 더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중계는 애틀랜타의 4번 타자 등판을 알리고 있었다.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이제 어떻게든 판가름이 날 시점이다. ‘삼유간을 꿰뚫는 날카로운 적시타’라는 캐스터의 흥분 어린 목소리보다도 글렌이 주먹을 치켜드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아싸!”

이럴 때의 글렌은 십 년 전 자신을 공항으로 마중 나왔던 열두 살 꼬마와 똑같다. 민호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이제야 동생이 보이는지, 글렌이 화면에서 눈을 떼고 민호를 쳐다본다. 상대팀이 투수를 교체하는지 CF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스파라거스 샐러드라니, 노인네.”
“내가 뭘 먹든.”
“형, 내가 생각해봤는데.”
“응?”
“역시……. 형이 좋으면 그냥 난 좋아.”

순간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글렌의 눈이 살짝 커졌다. 민호는 턱을 괸 채 시선을 비스듬히 떨어뜨린다. 안 어울리게 아스파라거스 샐러드를 좋아하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주제에 캔 맥주를 좋아하고, 그러면서도 동생이 술 마시는 꼴은 절대 못 보는 자신의 형. 형제가 타지에서 만나기까지는 기구한 운명이 작동했지만, 이후의 모든 생활은 형제가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에 다른 사람이나 사정이 낀 적은 없었다. 민호는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글렌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한 것보다 침묵이 길게 흘러 살짝 불안해진 민호가 고개를 들었다. 묘한 표정의 글렌이 민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왜.”
“그냥, 많이 컸다 싶어서.”

평소 같았다면 bullshit, 한 마디로 일축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민호는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곧 다시 형을 마주보았다. 입 꼬리에 떠오른 미소를 보고서야 민호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형과 멀어지는 건 싫다. 팔 년 만에 만나서 십 년 동안 함께 하고 있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

왓, 하는 사이에 글렌의 손이 민호의 앞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뭐 하는 거야, 라고 민호가 소리쳤지만 글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싱긋 웃는다. 산발이 된 앞머리를 슥슥 정리하고 민호는 글렌을 노려보았다. 서글한 눈매. 선명한 검은 눈동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있었다.

“잘 되면 얘기해줘야 해?”
“Shut up.”

조금 거친 손짓으로 그릇을 개수대에 넣고 글렌이 부엌을 먼저 나갔다. 남이 보면 화난 줄 알겠지만, 민호는 돌아서는 그 순간 살짝 붉어진 그의 귀를 보았다. 저렇게 수줍어하는 글렌도 참 오랜만에 본다. 아르바이트에 지쳐 억지로 꾸며낸 것 같은 미소는 여러 번 봤지만. 다음에 데릴을 만나면 꼭 유심히 뜯어보고 인사라도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민호는 냉장고로 향했다.

카게오이 + 쿠니오이 + 기타 오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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