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조로산] Margarita

부분유료공개 (본편 무료 / 에필로그 유료)

제 두 번째 책이자, 첫 조로산 장편 Margarita입니다. 형사 조로 x 바텐더 상디.

사실 형사느와르물병은 여기서조차........ㅋㅋㅋㅋㅋㅋ

마지막 남은 책까지 통판하는 바람에 제게는 책이 없는 ㅠㅠㅠ 불운한 아이에요...


살인사건 언급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D




Margarita

Original : ONE-PIECE

Zoro X Sanji

Written by. 赤香

 

1.

 

“네? 아니 계장님, 아무리 그래도…….”

「진짜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 곧 간다니까. 가서 사정 청취만 좀 하고 있어봐.」

“계장님, 계장님?……아 씨, 이 양반이 진짜.”

패트럴 카에서 내린 조로가 거칠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롯폰기(六本木)의 새벽 두 시는 대낮보다도 활기차다. 다만 그 활기참은 생기보다는 불온함에 가깝다는 게 문제다. 취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차도를 횡단하기도 하고, 어두운 전봇대를 부여잡고 속을 게워내기도 하고, 여기저기 주저앉아있기도 하며 별세계를 만들어낸다. 여기저기서 점멸하는 네온사인과 LED간판은 이게 바로 빛 공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패트럴 카가 도로를 지나가면 취객들은 마치 길을 터주듯 옆으로 비켰다가도 다시 제자리에 모여 어깨동무를 하기 일쑤였다. 조로는 막간을 이용해 수트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빼곡히 들어선 빌딩 틈으로 보이는 하늘에 별 같은 것은 없었다. 그야 그렇다. 지상이 이렇게 밝은데 별까지 굳이 빛을 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잠시 차에 기대 서 담배 연기를 뱉어낸 조로를 향해 방금까지 운전석에 앉아 있던 후배 형사가 옆에 선 채로 말을 건다.

“뭐 그렇게 별나다는 듯 보고 계세요? 이 동네가 원래 그랬잖아요.”

“아니 동네가 아니라, 복귀하고 첫 날인 부하한테 현장을 맡기는 계장이 어디 있어?”

“그만큼 롤로노아 씨를 믿고 있는 거겠죠, 뭐.”

사람 좋게 웃는 부하 직원의 뒤통수를 살짝 치고, 조로는 사건 발생 장소를 다시 물었다. 아 그러니까, 사우전드 써니라는 바(Bar)라고 합니다. 여기서 걸어가야 해요. 피해자는 사사키 지로, 45세, 회사원입니다.

“엄청 평범한 이름이구만.”

“가구 매장에서 판매사원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가족관계는 없음.”

“사인이 뭐랬지?”

“바 매니저가 신고했는데, 칵테일을 마시다가 갑자기 쓰러졌답니다.”

“쓰러졌다고?”

“네. 일단 감식반이 먼저 출동해있습니다.”

휴대용 재떨이를 꺼내 담배를 비벼 끄고 조로는 바지 주머니를 뒤져 하얀 면장갑을 꺼냈다. 부하의 말을 들어서는 아무래도 음독사인 것 같아 함부로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하도 수첩을 입에 문 채 허겁지겁 장갑을 찾아 끼었다. 약 5분 정도 걸었을까, 몇 사람의 취객과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서 걷다보니 부하가 멈춰 섰다. 바는 지하에 있었다.

짤랑, 하고 문과 종이 부딪혀 내는 소리는 그다지 듣기에 좋지 않았다. 조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도 담배를 피우지만 대체 몇 사람의 것인지도 모를 담배 연기를 한 번에 맡고 있는 것은 가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감식반원 몇이 말없이 경례를 해온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 당시 있던 손님들은 총 열 명 정도로, 미리 도착한 인력이 손을 써 둔 것인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있었다. 불안하고도 불온한 공기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특기할 점이라고는 그 안에 여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무슨 모임이라도 있었던 건지. 어차피 조사해보면 곧 드러날 일이다. 일단 그 문제는 차치해두기로 하고 조로는 카운터 쪽을 쳐다보았다. 미리 도착한 형사 한 명이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이.”

“아, 롤로노아 씨 오셨습니까.”

“시신은 어딨어?”

“저 끝 스툴입니다. 계장님은요?”

“급한 일이 있어서 끝나고 온대.”

아직 감식반 전체가 온 것이 아니라 시신을 옮길 수는 없단다. 마치 엎드려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스툴에 앉아있었다. 이 쪽에서는 그 표정이 보이지 않음을 조로는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이 사람이 신고한 가게 매니저입니다.”

“내가 마저 사정청취를 할 테니 저 쪽에 가 봐.”

“넵.”

경례를 해 보인 후배 형사는 잰걸음으로 손님들을 향한다. 카운터에 서 있던 남자가 그 때 처음으로 조로를 쳐다보았다.

어둑한 호박빛 조명을 받아 그 눈은 청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금빛 앞머리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어서, 표정을 전부 읽을 수가 없었다. 특기할 점이라고는 보이는 눈썹의 끝이 돌돌 말려있다는 점일까. 요즘은 저런 눈썹이 유행하고 있는 건가, 하고 조로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니 유행한다고 하기에는 길거리의 젊은이들 중 저런 눈썹을 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의 오른손에는 무연히 연기를 피워내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광택 없는 검은색 베스트가 흰 와이셔츠 위에 단정하다. 끝까지 올려 채운 와이셔츠의 단추 위에는 검은색 넥타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손목 부분의 검은 커프스는 그가 굉장히 옷매무새에 신경을 쓰는 타입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경시청 제 1과 소속 롤로노아 조로 순사부장입니다. 성함은?”

“아까 저 형사님이 물어갔는데?”

“……계속 그런 식으로 하십시오, 공무방해죄로 쳐 넣는 수가 있으니까.”

“무섭기도 하지.”

그 입꼬리에 미소가 떠올랐다. 말과는 정반대로 전혀 무서운 표정이 아니었다. 얕잡아보였다는 느낌이 들어 조로는 미간을 좁혔다. 자기가 제일 주요 용의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걸까, 이 남자는.

“상디라고 해, 형사님.”

“피해자와의 관계는?”

“도대체 ‘무슨’ 관계를 궁금해 하는 거지? 별다른 관계는 없어. 주인과 손님이지.”

그는 담배를 한 모금 피워 물고 다시 조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실없게도, 그의 원래 눈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조금 당황하여 조로는 마주치고 있던 눈을 피해버렸다.

“그 때 상황을 다시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만.”

“재방송하는 기분이라 지겹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당신들한테 나는 제1용의자일 테니까.”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그를 보며 조로는 할 말을 잃었다. 다 알면서도 저렇게 뻔뻔하게 굴었던 것이라니, 자신과는 인종 자체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안주머니의 담배 한 개비가 간절해졌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공무수행 중에 흡연을 할 수는 없다. 대신 경찰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문득 그의 눈에 조금 흥미가 일었지만 곧 그 빛은 사라졌다. 탁하게 빛나는 청록색이 아주 먼 과거를 회상하기라도 하듯 비스듬히 위로 향한다.

“한 시 쯤이었나, 저 사람이 들어왔어. 종종 들르던 사람이라 별 이상한 기미는 없었지.”

“여기 오는 빈도는?”

“대략 일주일에 한 번 정도려나.”

“그래서요?”

“보통 혼자 오는 사람이니 당연히 스툴에 자리를 잡고 칵테일을 시켰지.”

“칵테일의 종류와 순서는?”

“처음에는 블랙 러시안, 그 다음은 코스모폴리탄, 생수 한 잔, 그리고 데킬라, 진, 버무스, 그러고 나서 리큐르를 한 병 땄어. 그건 나랑 주거니 받거니 했지.”

기억력이 좋은 것에 감탄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피해자와 매니저의 주량에 놀라야하는지 조로는 잠깐 고민했다. 보통 데킬라까지 마시고 나면 바에 온 목적 정도는 이루었을 텐데 그 이후에 리큐르를 땄다니, 꽤나 본격적인 술자리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저거야.”

“마르가리타죠?”

“뭐?”

지나가던 후배 형사가 끼어들어 칵테일 이름을 말했다. 조로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 반문했다. 매니저는 씩 웃으며 잘 아시네요, 라고 말한다. 그 때 조로는 매니저가 자신에게만 반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로의 조용하고도 매서운 시선을 받은 후배는 ‘그러고 보니 계장님한테 연락해야지’같은 딴소리를 늘어놓으며 자리를 피한다.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매니저는 시신 옆에 놓여있던 유리잔 쪽으로 손을 뻗었다. 맨손이었기에 조로가 제지하려 했으나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도 잔을 이 쪽으로 옮겨온다.

“어차피 지문 조사 같은 건 해 봐도 의미가 없을 거야.”

“무슨 뜻입니까?”

“마르가리타라는 칵테일이지.”

“…….”

“특이한 점이 있지 않아?”

조로는 장갑 낀 손으로 유리잔을 들었다. 잔의 주둥이에 무언가가 테두리 치듯 둘러져 있었다. 둔탁한 조명에 비추자 흐릿하게 빛나는 결정. 이 가루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칵테일보다는 소주나 맥주 파인 조로는 이런 칵테일을 본 적이 없었다. 혼란만 더할 뿐이다. 차분한 매니저의 목소리가 날아든다.

“솔트 프로스팅(salt frosting)이야. 주둥이에 소금을 묻힌 걸 말하지.”

“이거…….”

“맞아.”

조로는 잔을 내려놓고 매니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날카로운 빛이 더해진 것 같았다. 솔트 프로스팅은 두 군데 없어져 있었다. 잔 안의 칵테일은 거의 줄어있지 않았는데 프로스팅이 두 군데 없어졌다는 것은 단 하나의 사실만을 전하고 있었다.

“맞아, 나도 함께 마셨어. 물론 마신 건 내가 먼저야. 지문 조사도 그래서 필요 없을 거라 한 거고.”

“…….”

“꽤 골치 아파 지겠지, 롤로노아 형사님?”

그때서야 그 눈에 처음으로 웃음이 담겼다. 조로는 이유 모를 패배감에 이를 악물었다.




2.

 

“네가 왜…….”

“왜 또 네 눈앞에 나타났냐고 묻고 싶은 거지?”

소녀가 해맑게 웃었다. 푸른빛이 도는 흑발이 어깨쯤에서 물결치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는 티 없이 깨끗하고, 세상의 모든 순수(純粹)를 전부 품에 안은 것과도 같이 희뿌옇게 빛났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그의 앞에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어떻게 돼먹은 건가 싶은 전제였다. 20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마치 그녀는 세월을 잊은 것처럼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어쩌면 그저 똑같은 자리에 멈춰서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조로는 멍하니 할 말을 잃은 채 그녀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도 우그러뜨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가냘픔이 자신을 한껏 조롱하고 있다. 또 이 꿈이다.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똑바로 알고 있다. 조로는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목을 감쌌다. 영롱한 눈동자가 자신에게 똑바로 향하는 것을 그대로 쳐다보면서.

“내 숨통은 한 손으로도 끊을 수 있잖아? 굳이 두 손을 다 올릴 필요는 없지 않아? 아니면 뭐야, 맹수는 한 마리 토끼를 사냥할 때에도 온 힘을 다한다는 그거야? 대단해, 역시 조로야-”

“닥쳐. 이 세상 것도 아닌 게 조잘조잘 말도 많군.”

“뭐해? 조금만 더 힘을 넣어봐. 뚝, 하고 부러질걸? 그 순간을 다시 맛보기 위해 날 불러온 거잖아?”

“내가 불러오지 않았어.”

소녀의 미소는 천연덕스럽게도 밝아서 조로는 조금 슬퍼졌다. ‘그녀’는 이렇지 않았다. 적어도 20년 전 기억속의 그녀는 이런 목소리로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정도로 잔인하지 않았다. 이것은 20년 동안 반복되어오는 악몽이고, 자각몽이다. 끊임없이 꿈속에서 그녀를 죽여 왔다. 죽지 않는 이상 그녀의 꿈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조로는 조용히 손아귀에 힘을 넣었다. 작게 고동치는 따뜻함은 손 안에 생명줄이 잡혀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인위적으로 가르쳐주어, 오히려 이것이 현실이 아님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제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기계적으로 그녀를 죽이고 그녀에게서 빠져나오는 이 꿈은 그야말로 미궁이다. 앞으로 몇 번이나 그녀를 죽여야 이 엿 같은 악몽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를 악물고 점점 악력을 세게 해도 그녀는 하얗게 웃고만 있다. 몇 번이고 죽는 그녀는 몇 번이고 똑같이 웃어준다.

“몇 번을 죽여도, 몇 번이고 망설이는구나.”

“너한테서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조금만 더 힘을 넣어봐. 곧 죽을 테니까. ‘죽어줄’ 테니까.”

목이 졸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노래하듯 조로의 귓전에 스며들었다. 조로의 떨리는 손 위에 희고 작은 손이 겹쳤다. 따뜻한 목울대와 달리 그 손은 싸늘하고 차가웠다. 조로는 말없이 손에 힘을 더 넣었다. 무언가 투둑, 하고 끊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소녀의 동공이 크게 열리더니 곧 손이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또 죽였다. 이 꿈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또 그녀를 목 졸라 죽였다. 손을 풀자 소녀는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땅바닥에 풀썩 고꾸라졌다. 여전히 동공이 열려 있었지만 그 눈동자의 빛은 바래지 않았다. 조로는 자신의 손바닥을 눈높이로 들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몇 번이고 죄가 두껍게 덧칠해진 손. 자신을 죽여 달라던 소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았다. 발밑에서 지직, 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비현실적인 흰 공간이 깨지고 있었다. 조로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제 이 꿈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

 

“……빌어먹을.”

실눈을 뜨고 바라본 어둠 속에 시곗바늘이 만들어낸 둔각이 어슴푸레 보였다. 새벽 다섯 시, 자리에 눕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조로는 작게 욕을 씹어 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걸친 트레이닝팬츠가 식은땀으로 젖어 다리에 늘어붙는다.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둔 재킷과 넥타이가 중간에 거치적거리기에 발로 차서 옆으로 치우고 거실로 나왔다. 좁아터진 주제에 아무도 없는 거실에는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굳이 불을 켤 필요 없이 익숙한 걸음걸이로 냉장고로 향한다. 발밑의 바닥이 꽤 싸늘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아무리 봄이 가까워 와도 난방을 끄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로는 말없이 냉장고를 열어 캔 맥주 하나를 꺼냈다. 풀탭을 잡아당기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흘러넘치려 해서 재빨리 입을 갖다 대고 거품을 빨아들인다. 이런 꿈을 꾼 날에는 맨 정신으로 더 잘 수가 없다. 술기운을 빌려야만 그나마 두 시간 정도라도 더 잠을 잘 수 있는 것이다.

술. 조로는 문득 미간을 좁혔다. 바로 전까지 눈앞에 있었던 묘한 인상의 바텐더가 떠올랐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연달아 마르 뭐시기라는 이상한 이름의 칵테일과 잔에 발라져있던 소금, 남자뿐이었던 손님들, 자욱한 담배연기, 불쾌한 종소리, 사건 현장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제자리에 서서 약간의 편두통을 참아내던 조로는 결국 부엌 불을 켜고 테이블 의자에 걸터앉았다. 맥주 탄산의 기포가 터지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일 년 만에 복귀하자마자 골치 아픈 사건을 만나 버렸다. 수사본부가 설치된다는 소식은 들었고 아마 내일부터는 조를 짜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유족을 만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라고 무연히 생각하다가 곧 피해자는 연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함께 조를 짜게 될 파트너는 그렇게 불쾌한 사람만 아니면 상관없었다. 그리고 마이 웨이가 심한 조로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직장 내에서 크게 트러블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조로는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 맥주냄새가 부엌을 부유한다. 이 사건은 묘하게 불쾌했다. 모든 사건이 그렇지만 빨리 끝내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특히 그 바텐더와 깊이 엮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담배연기 속에서 탁하게나마 빛나던 눈동자가 떠올라 조로는 흠칫 놀랐다. 아까 꿈에서 본 소녀의 눈동자와 묘하게 오버랩되어 뇌리 한 구석에 짧고 차가운 자국을 만든다. 결국 테이블 위의 담뱃갑으로 손을 뻗은 조로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일어나 가스레인지로 다가갔다. 가스불로 담뱃불을 붙이는 건 집에서만 나오는 습관이었다. 작게 담배 끝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가스 불을 끄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멀찍이 떨어져있던 재떨이를 가까이 끌어당겨 언제든 담뱃재를 떨어낼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니코틴이 돌자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헤비스모커는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생각할 때는 담배를 피워 무는 안 좋은 버릇이 들어버렸다. 부엌의 공기에 맥주냄새에 담배냄새까지 떠돌고 있었다.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어 담배연기를 흩어낸다.

누가 범인일까? 재를 한 번 떨어내고 조로는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약 한 시간 이루어진 사정 청취에서 매니저는 피해자가 칵테일을 앞에 두고 화장실을 한 번 다녀왔다고 증언했다. 그 모습을 손님 중 한 명이 우연히 목격하였다고 진술하여 어느 정도 신빙성은 확보된 상태다. 그가 화장실을 간 동안 바텐더는 다른 손님의 말상대를 하느라 카운터석의 다른 쪽 끝에 머물러있었다고 한다. 그 손님 역시 바텐더의 말이 맞다고 진술했다. 그러니까 피해자가 화장실을 다녀 온 약 5분 간 칵테일에는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는 바꾸어 말해 ‘누구나’ 칵테일에 접근할 기회가 있었다는 뜻이다. 천장을 휘 훑어보던 조로가 감시카메라를 발견해 영상 제공을 요청하자 바텐더는 짧게 웃더니 “그거 가짜야.” 라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이해할 진 모르겠지만 우리 가게는 프라이버시가 생명이거든. 그런 데서 손님이 불쾌감을 느끼면 안 되니까, 일단은 형식상 달아 놓기만 한 거야. 실제로는 초등학생들도 안 가지고 놀 정도의 싸구려 모조품이지.”

가장 간단하게 범인을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 눈 뜬 장님이었다는 사실을 알자 조로는 적이 맥이 빠졌다. 입구에 설치된 진짜 카메라로는 누가 드나드는지 그 시간대와 순서밖에 알 도리가 없다. 물론 한 시쯤 가게에 피해자가 들어왔다는 바텐더의 증언은 입구의 카메라로 증명이 된 상황이었다. 나머지 손님들의 자기진술과 카메라에 찍힌 시각도 얼추 들어맞았다. 수사본부가 설치된다 해도 이렇게 상황증거가 적은 상황에서 뭘 더 조사하고 파헤칠 수 있을까. 피해자는 연고도 없었다하는데 인간관계를 뒤져본들 뭐가 나오기는 할까. 이렇게 막막한 사건은 처음이었다. 이래저래 생각하다보니 담배가 거의 필터까지 타들어갔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조로는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마셔버렸다. 거실이 아무리 싸늘해도 역시 냉장고에 비할 수는 없는 듯, 맥주는 상당히 미지근해져있었다.

 

***

 

“검안서가 나왔어.”

“사인은요?”

“마……. 뭐야, 그 칵테일?”

“마르…….”

“뭐야, 너도 몰라? 어제 현장에 출동까지 했으면서?”

“정리할 때 되니까 급하게 나타난 분이 할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또 싸우시네들. 그만 하세요. 계장님, 마르가리타요, 마르가리타.”

“아, 그래 그거.”

클립으로 묶인 흰 종이다발을 들고 계장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김에 조로의 속도 긁으려는 듯, 칵테일 이름을 모른다고 꽤 비아냥거린다. 이미 하루 이틀 대하는 그가 아니기에 조로도 시큰둥하게 받아쳤지만, 이 분위기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는지 신참 하나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칵테일 이름을 다시 말했다. 계장 역시 조로와 마찬가지로 칵테일보다는 소주와 맥주에 더 조예가 깊었기에 칵테일 이름을 기억하는 편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질 법한 위인이었다. 계장은 조로에게 휙 던지듯 검안서를 내밀었다. 조로 역시 낚아채듯 검안서를 받아든다.

“테트로도톡신?”

“그래, 복어 독 있잖아. 소금에 섞여있었던 건 아니고 칵테일 안에 들어있었다고 하는군.”

1과 사람들 모두의 눈이 검안서로 쏠렸다. 청산가리가 아니라 복어 독이었다니. 약간의 술렁거림이 방 안을 메운다. 계장은 검안서를 내려놓은 채 호출에 따라 나가버리고 말았다. 오후부터 수사본부가 설치될 예정이었다. 조로는 무거운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약간 시원해짐과 함께 빨갛고 파란 점들이 눈꺼풀 안쪽에 점멸한다. 독의 종류를 알아내었지만 그것으로 사태가 나아졌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눈을 뜨고 두어 번 깜박깜박한 후 다시 검안서를 들었다. 대부분이 전문 용어였지만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커피라도 마실까 싶어 조로는 검안서를 든 채 복도로 나왔다. 자판기를 향해 걸어가는데 이미 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늘씬한 실루엣은 분명 익숙한 여자의 것이었다. 1과에 함께 소속되어있는 로빈 주임이다. 그녀는 인기척을 알아챈 듯 조로 쪽을 한 번 보더니 손짓을 한다. 조로는 천천히 지갑을 꺼내들고 그 쪽으로 다가갔다. 로빈은 이미 자신의 몫으로 캔 홍차를 들고 있었기에 조로도 백 엔짜리 동전 두 개만 꺼내어 캔 커피를 뽑았다.

“그런데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 지독한 사람이네.”

“뭐?”

자신도 모르는 새에 로빈은 그의 검안서를 빼앗아 들었던 모양이다. 중얼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검안서는 이미 그녀의 손에 있었다. 조로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일도 잘하고 똑 부러진 데다 미인이기까지 해서 거의 경시청의 아이돌 급으로 인기가 많은 그녀는, 엘리트 출신이었더라면 지금쯤 아마 저 높은 곳에 있었으리라고 짐작될 정도로 유능하다는 것을 조로는 익히 알고 있었다. 나이가 엇비슷해 맨 처음 함께 경시청으로 배속 받은 이후로 쭉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로빈은 이거 봐, 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검안서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킨다. 사인은 독극물에 의한 중독사, 사용된 약물에는 ‘테트로도톡신’이라고 적혀 있었다.

“보통 복어 독은 시간이 오래 흐르면 검출되지 않기도 하잖아? 그런데 굳이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살인을 저지르는데 테트로도톡신을 써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까? 차라리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둘만 남은 후에 살해해서 시신을 어디에 숨겨두거나 하면 훨씬 꼬리도 안 밟혔을 텐데. 시간도 오래 끌 수 있고.”

“입수한 독극물이 우연히 테트로도톡신이었을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지.”

“그렇지만 테트로도톡신은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쓰기 어려워. 적절한 초기 대응이 이루어지면 의외로 생존율도 있고. 카운터석에 항상 서 있는 바텐더가 눈앞에서 피해자를 지켜보고 있는데, 그 초기증상을 발견하고 응급처치를 할 경우도 범인은 생각했어야 하지 않을까?”

“…….”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정말 범인이 가지고 있던 약물이 테트로도톡신뿐이었거나, 아니면 죽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고통을 맛보여주고 싶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범인에게 피해자가 꼭 죽어야만 하는 건 아니었을 지도 몰라.”

로빈은 혼잣말이라도 하듯 작게, 그러나 빠르고 분명하게 문장을 끝냈다. 뒷장으로 넘겨 한참 보더니 도로 조로에게 내민다. 그녀의 말을 곱씹어보던 조로가 검안서를 받아 들고 읽기 시작했다. 마르가리타가 담겨있던 유리잔에 대한 소견서가 첨부되어있었다. 거의 알고 있거나 짐작하고 있던 내용어서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훑어 내려가던 조로의 시선이 어느 한 줄에 고정되었다. 누군가 후두부를 강하게 내려 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검안서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조로는 어깨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조로, 어디 가?! 곧 수사회의 시작한다고 했는데……?”

로빈 등 뒤에서 그를 불러 세웠지만 조로는 멈추지 않고 경시청 입구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여유작작한 바텐더의 얼굴이 뇌리에 선명했다. 이를 악물자 어금니 맞물리는 소리가 들린다.

“빌어먹을, 사람을 가지고 놀고 있어…….”

 

***

 

인적 파일에 바텐더의 집 주소가 적혀있었다. 이런 아침에, 그것도 어제 살인사건이 일어난 바가 영업을 할 리는 없다. 십중팔구 집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경시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조로는 걸어서 그 맨션까지 도착했다. 꽤나 돈도 많은 모양이지, 이런 중심가에 고급 맨션이라니. 저절로 입술이 비틀려오는 만큼 기분도 더러웠다. 얼마나 얕잡아보였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을까. 처음부터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던 눈빛도, 자신에게만 내뱉던 반말도, 잠시도 끄지 않았던 담배도. 그럼에도 계속해서 신경 쓰이는 것이 오히려 더 기분이 나빴다.

문 앞에 붙은 팻말을 확인하자마자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분명 몇 시간 전에 들었던 재수 없는 목소리다. 문 열어, 라고 조로가 말했다. 문 안쪽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려고 주먹을 들었을 때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10센티미터 정도 열렸다. 어제 새벽과 똑같은 얼굴의 바텐더가 똑같은 표정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똑같은 담배냄새가 훅 끼쳐왔다. 인상을 찌푸림과 동시에 조로는 재빨리 구둣발을 문 틈새로 밀어 넣어 그가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 바텐더가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잠깐 놀란 표정을 띠웠다. 그것도 잠시 바로 안색을 바꾸어 픽 웃어 보인다. 이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조로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으르렁대듯 말했다.

“왜 거짓말했어? 형사가 우스워 보여?”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시치미 떼지 마, 위증죄로 쳐 넣는 수가 있으니까.”

“당신은 어제부터 무슨 죄목으로 쳐 넣는다는 말만 하고 있네. 모든 게 다 죄목으로 보이나보지? 당신이 무슨 걸어 다니는 형법 사전이라도 돼?……휴일 아침부터 이웃한테 민폐야. 일단 들어와.”

그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꽤나 상식적인 말을 듣는 순간, 조로는 누가 누구를 추궁하러 온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실례, 라고 말하며 조로는 구두를 벗고 방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 넓은 방은 아니었지만 첫눈에 보아도 정갈했다. 있어야 할 모든 것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담배를 피울 땐 꼭 환기를 하는지 베란다 문이 열려 있었다. 순간 자신의 방을 떠올리고 머릿속으로 비교하던 조로가 황급히 자신의 방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남자를 향해 뒤돌았다. 그는 한 손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들고 있었다.

“어제 칵테일, 분명 피해자와 함께 마셨다고 했지. 솔트 프로스팅이 없어진 게 그 증거라고.”

“…….”

“검안서에 의하면 칵테일 잔에서 검출된 DNA는 피해자 한 사람의 것이었어. 네놈은 잔에 입도 대지 않았다고. 소금이 두 군데 없어진 건 피해자가 두 번 입을 댔기 때문이야.”

“……요즘 형사님들은 참 일도 빠릿빠릿하게 잘 한단 말이야. 그 새 검안서가 나왔다니.”

“서로 가서 얘기를 좀 듣고 싶군. 이렇게 형사를 우습게 보는 용의자는 처음 만나보는데.”

“그런데 형사님, 임의동행은 좀 봐 줬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일요일이고 나는 교회에 가 봐야 해.”

“뭐?”

“교회, 라고. 교회. 기도하는 데 말이야. 몰라?”

“…….”

상디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더니 웃었다. 조로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이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기나 할까? 알면서도 교회에 간다는 헛소리가 나올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오히려 입을 다물게 되는 아이러닉함을 난생 처음 겪어본다. 대범한 걸까, 생각이 없는 걸까.

“내가 도망칠까봐 걱정이 되면, 같이 가든지.”

“개소리.”

“그럼 다녀올게. 형사님은 수사회의에나 가 봐.”

“……?!”

“뭘 또 그렇게 기함하실까. 딱 봐도 지금쯤이면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높은 양반들이 쫄따구들 모아다가 회의랍시고 역할배분해 줄 때잖아? 그래서 이 시간에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 빨리 가 봐, 또 상관한테 혼나기 싫으면. 아, 문은 어차피 오토락이니까 잘 닫기만 하면 돼. 그럼 난 이만. 또 보자고.”

문이 닫힌 후에도 조로는 멍하니 서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분명 바텐더의 집이다. 그런데 자기 집에 생판 타인을, 그것도 자신을 추궁하러 온 형사만을 남겨놓고 외출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리고 경시청 내부 일을 어떻게 저렇게 잘 아는 거지? 단순히 형사 드라마를 많이 본 분위기가 아니다. 분명 경시청에 아는 사람이 있든지, 어떤 식으로든 경험을 해 본 사람의 어조였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경시청에서 이곳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와이셔츠 아래의 등줄기에 맺혀 있던 땀이 척추를 타고 주륵 흘러 내렸다. 열린 베란다 문틈으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 들어와 거실 한 가운데서 오싹, 추워지기 시작했다.




3.

 

“지금 뭐하자는 거야?”

“……주요 참고인의 진술에서 검안서와 모순된 부분을 찾아내서, 확인하러 다녀왔습니다.”

“주임이라는 사람이 수사회의에 빠져? 관리관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 거야? 수사 방향, 진척, 참고인 진술을 보고하는 게 누구 일인지는 알고 있는 거 맞지?”

“……죄송합니다. 경솔했습니다.”

조로는 계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약간 비끼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검안서가 눈에 띈다. 1과 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이렇게 계장이 성질을 부릴 때는 저절로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계장이 길길이 날뛰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유는 조로의 무단행동 때문이다. 조로가 자리를 뜬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수사회의가 시작되어버렸고, 사건 당일 출동했던 제1과 주임이 부재인 채로 수사회의가 이루어질 리 없었다. 10분 동안 조로 한 사람을 찾아내려 청이 발칵 뒤집어졌고 결국 불편한 표정으로 줄곧 기다리던 관리관이 자리를 뜸으로써 회의는 세 시간 연기되었다. 그런 사단이 있고 30분 후에 얼이 빠진 채 터덜터덜 들어온 조로를 계장이 가만히 둘 리가 만무했다.

“도대체 그 빌어먹을 모순이 뭐야? 확인은 된 거야?”

“바텐더 말입니다. 분명 사정 청취할 때는 칵테일을 함께 마셨다고 했는데 검안서에 의하면 칵테일 잔에서는 피해자의 DNA만 검출되었습니다. 거짓말로 확인되었습니다.”

“확실히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청 전원이 모이는 수사회의에 마음대로 결석하는 건 징계감이야. 사건 끝나고 처분이 내릴 지도 모르니까 각오해둬.”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조로는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기분이 더러웠다. 계장에게 단단히 혼난 건 자신의 잘못이라 치더라도, 맨션까지 달려가서 오히려 찜찜한 기분이 더해졌다는 게 더 문제였다. 대충 자리를 정리하고 앉으려다가 유유히 문을 열고 들어오던 로빈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 조금 커지다가 천천히 휘어지며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의자에 앉으려다가 조로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입구로 걸어갔다. 로빈은 마치 그를 기다리기라도 한 양 입구 근처에 그대로 서 있었다. 수트를 챙겨들고 나오는 조로를 좇아 나오는 그녀의 높지 않은 힐 소리가 경시청 복도를 울렸다. 옥상에 도착한 조로는 수트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좀 적당히 둘러 대줬으면 좋았잖아, 이 검은 마녀.”

“어머, 그 새 책임 전가하는 기술까지 익히셨나? 설명도 안하고 뛰쳐나간 게 누군데?”

“커버 쳐줄 줄 알고 믿고 나갔더니.”

로빈은 팔짱을 낀 채 난간에 기대 서 빙그레 웃는다. 조로는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끄무레한 하늘 탓에 잿빛 담배연기는 금방 자취를 감춘다.

“그래서 성과는 달성했어?”

“보통내기가 아니야, 그 자식.”

조로는 맨션에서 있었던 일을 로빈에게 설명했다. 자신의 흔치않은 실수담인지라 제아무리 로빈이라도 포복절도하리라고 약간은 기대했는데 말을 다 듣고 난 후 로빈의 표정은 아까보다 배는 심각했다. 열심히 말하다보니 담배는 이미 필터까지 타들어가 있었다. 옥상 바닥에 꽁초를 떨어뜨리고 구둣발로 밟아 끈 후 조로는 로빈의 어깨를 툭 쳤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약간 위를 쳐다보고 있던 로빈이 다시 조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일단 이 사건은 타살로 봐도 무방하다는 결론이었어. 테트로도톡신으로 공공장소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멍청이는 없을 거라는 게 수사본부의 여론이었지.”

“그런데?”

“당연히 용의자는 당신이 사정 청취를 한 바텐더와 손님 열 명 정도로 좁혀져.”

“그렇겠지.”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어. 손님 열 명은 이미 인적조사가 끝났고 차례차례 소환되어서 베테랑 형사들이 족치고 있는 중인데 제일 중요한 바텐더는 청에 한 번도 불러들이지 않았어. 물론 그가 칵테일 잔에 독을 넣을 겨를이 없었다는 게 증언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처음에 왜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잖아.”

“…….”

“당신, 바텐더의 이름은 알지?”

“상디, 라고 하던데.”

“성은?”

“……뭐?”

“성(姓) 말이야. 들었어?”

“그러고 보니…….”

“체크포인트.”

로빈은 검지를 들어 조로 쪽으로 향했다. 조로는 당혹했다. 기초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상식인데 까맣게 잊고 있던 자신이 한심했고 이어 의혹이 짙게 일었다. 조금 거칠게 부는 바람에 로빈의 까만 머리칼이 이리저리 흐트러지고 있었다. 왜 처음 만났을 때 이름만 툭 던지는 그에게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걸까.

“수사에 집중해, 롤로노아 순사부장. 이건 우리 관할이야.”

냉철한 로빈의 한 마디에 조로는 정신을 차렸다.

“굳이 하나 더 집어보자면.”

“또 뭐야?”

“당신, 걸어서 그 바텐더의 집으로 갔댔지? 그러면 이곳 카스미가세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랬지. 치요다 구 안이었으니까.”

“바텐더가 경시청의 내부 사정을 관계자처럼 꿰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

 

유리문에 종이 부딪혔다. 조로는 무의식중에 새벽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치 그 사우전드 써니라는 바에 다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 이곳은 다른 바였다. 아무리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 해도 그에게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수사회의에서 그 모순에 대해 말하자 돌아온 것은 관리관의 시큰둥한 표정뿐이었다. 리큐르를 같이 마셨다며? 착각한 거겠지. 그 한 문장으로 바텐더는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수긍하지 못한 것은 조로 혼자뿐인 것 같았다.

담배연기가 공중에 부옇게 떠 모든 것이 약간씩 붕 뜬 것처럼 보였다. 조로는 바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낯익은 금발을 발견했다. 스툴 맨 끝자리에서 혼자 이름 모를 칵테일을 손에 든 그 남자는 분명 바텐더였다. 물론 우연한 만남은 아니다. 일방적으로 조로가 그를 찾아다닌 것에 불과하다. 롯폰기 근처에 비슷한 분위기의 바를 닥치는 대로 조사해서 돌아다니면서 탐문조사를 하고 있었다. 조로가 기억하는 바가 맞다면 딱 여섯 번째 바다. 조로는 거침없이 그의 옆에 붙어 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 반쪽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떠올라있었다.

“어떻게?”

“궁금한 게 있어서.”

조로는 그가 권하지도 않은 옆자리에 냉큼 앉았다. 상디가 쓰게 웃으며 칵테일 잔을 들어 한 번 공중에서 돌린다. 무심코 그 모양을 쳐다보던 조로는 그 잔에서 낯익은 것을 발견했다. 잔의 입구에 흐릿하게 빛나는 결정. 기억하는 바가 맞다면 분명 그것은 솔트 프로스팅이었다.

“그거…….”

“맞아, 마르가리타야. 타이밍도 좋지.”

상디의 얼굴에 문득 쓴웃음이 어렸다. 바텐더가 앞으로 다가오기에, 조로는 블랙 러시안을 시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가 알던 유일한 칵테일이었다. 지금은 거기에 마르가리타라는 희한한 인연이 추가되었다. 올드 패션드 글라스에 바텐더가 보드카를 따르는 것을 곁눈질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르가리타를 천천히 마시던 상디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잔을 내려놓고 조로를 쳐다본다.

“그래서, 뭔가 찾아냈어?”

“뭐?”

“뭐야, 일부러 자리를 비워준 건데 설마 그냥 돌아가 버렸어?”

“……가택 수색은 영장이 나와야 할 수 있다.”

“허어. 수사회의도 내팽개치고 나와서 성과도 없이 돌아갔으니 제대로 혼났겠군.”

뭐 이런 답답한 놈이 다 있나, 하고 내뱉기라도 할 눈빛으로 상디는 조로를 쳐다봤다. 분명 절차에 맞는 정당한 수사를 했을 따름인데 숙맥 취급받는 것 같아 막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심지어 돌아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마치 본 사람마냥 훤히 꿰고 있다. 그에 대해서 캐물으려고 작정했을 때 바텐더가 그의 앞에 글라스를 내려놓는다. 투박하게 생긴 유리잔에 이름처럼 어두운 칵테일이 담겨 있었다. 거짓말 한 건 미안하지만, 난 범인이 아니야. 바텐더가 작게 내뱉었다. 조로는 듣는 둥 마는 둥했다. 그의 말을 믿어 줄만한 증거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거짓말을 왜 했는지 물어보아도 왠지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마신 칵테일은 끈적할 정도로 달았다.

“내가 진짜 교회에 나갈 것처럼 생겼나보지?”

“…….”

“아, 아이리시 위스키 한 병. 온더락으로.”

자신의 잔을 비운 상디가 제멋대로 위스키를 한 병 시켰다. 얼음이 담긴 유리잔 두 개와 함께 위스키가 한 병, 그들의 앞에 놓였다. 블랙 러시안의 단맛에 질리던 차라 조로로서는 그 위스키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대체 용의자와 나란히 앉아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다가도 유리잔 안에 갈색 액체가 부어지는 것을 보자 그 회의감은 간 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두운 조명을 받아 유리잔 안의 얼음이 빛났다. 이렇게 된 이상 오늘은 술동무나 해줘야겠어, 하고 상디가 작게 웃었다.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조로는 잔을 들었다. 건배할 생각은 없었는데 상디가 잔을 부딪혀와 조금 놀란다. 여러 사람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여기저기서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희뿌연 연기에 녹아들어 있었다. 위스키는 생각보다 맛있었고, 여흥은 생각보다 부족하지 않았다.

 

***

 

“…….”

깨어질 듯한 머리를 싸맨 채 눈을 떴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 것 마냥 목이 말라왔다. 대체 어젯밤엔 얼마나 마셨던 걸까, 하고 떠올리던 그의 등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튕기듯 벌떡 일어나 앉는다. 이미 목이 마른 건 까맣게 잊힌 지 오래였다. 그는 퀸 사이즈의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확인할 것도 없이 자신은 나체였다. 피부에 와 닿는 이불의 촉감은 빌어먹게도 부드러워서 이곳이 꽤나 비싼 호텔이라는 사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른손을 뻗어 옆 탁자를 더듬더듬 만져보니 자신의 핸드폰이 잡혔다. 다행히 출근 시간이 되려면 한 시간 정도 남았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손을 뻗자 이번에는 금방 따라놓은 듯 차가운 유리컵이 만져졌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유리컵을 들어 안에 있던 물을 남김없이 마셨다. 그러고 나자 조금 정신이 들었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차가운 물을 한 번에 마신 탓인지 머리가 띵했다. 아니, 굳이 물 탓으로 돌릴 것도 없이 숙취 덕에 고개를 제대로 드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끼긱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침대 옆은 비어 있었다.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야말로 ‘멘탈’이 산산조각 났을 만한 상황이다. 옷은 술기운에 벗어 던진 듯 침대 아래에 아무렇게나 흩어져있었다. 벌떡 일어난 조로는 옷가지를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

그리고 깨달았다. 제일 중요한 한 가지가 아무리 찾아도 눈에 보이질 않는다. 침대 밑까지 들여다보고 화장실까지 가 보았지만 가장 먼저 입어야 할 옷가지가 없었다. 이제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하, 하하. 하하하. 쓸데없이 잘 꾸며놓은 방 한가운데에 서서 조로는 헛웃음을 흘린다. 이 방에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가 없는 것은 약 20여분에 걸친 수색으로 밝혀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 뿐이다. 이 방에 함께 있던 사람이 들고 떠난 것 외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함께 있던 사람은 어제 새벽까지 부어라마셔라했던 금발의 용의자 한 사람 뿐이었다.

“이 미친 새끼가…….”

미처 보지 못했던 침대 옆자리에는 곱게 두 번 접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방 값은 내가 계산했다. 잃어버린 게 있으면 찾으러 오든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그 두 문장을 세 번 반복하여 읽어 내린 조로는 일단 체념하고 바지부터 꿰어 입기 시작했다. 아무리 긴급한 상황이어도, 출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평소 귀찮아서라도 안 하는 온갖 욕이 그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뻔뻔한 면상, 그 중에서도 돌돌 말린 눈썹이 눈에 선하다.




4.

 

“이게 뭡니까?”

“보면 몰라? 캔 커피지.”

“아니 그건 보면 아는데……. 이걸 왜 저한테?”

“싫으면 내놔, 임마.”

“감삽니다.”

조로가 허공에 툭하니 던져 올린 캔 커피를, 후배형사는 일부러 과장된 동작으로 잡아낸다.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더니 풀탭을 잡아당겨 바로 꿀꺽꿀꺽 마신다. 그 모양을 잠깐 쳐다보던 조로는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오른손에 든 편의점 로고의 검은 봉투에는 한 가지가 더 들어 있었다. 사실 급한 출근길에 굳이 편의점에 들른 이유는 캔 커피보다도 이 쪽이었다. 왠지 모르게 뭐라도 하나 더 사야 별 의심을 안 받을 것 같아서 급한 마음에 고른 게 자신은 마시지 않는 브랜드의 캔 커피였다. 적선이라도 할 겸, 요즘 페어를 이루어 함께 다니는 일이 많은 후배-사실은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보인 얼굴이었지만-에게 건넨 것이다. 후배는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으로 되었다. 요즘 편의점엔 별 걸 다 판단 말이야, 라고 생각하며 조로는 화장실 한 칸으로 들어가 봉투를 뒤적인다. 곧 그 손에 딸려 나온 것은 남성용 속옷이었다.

‘안 찝히게 올리느라 귀찮아 죽는 줄 알았네.’

복장을 단정히(?)한 후 화장실에서 나오던 그가 맞닥뜨린 것은 로빈이었다. 그녀도 화장실에서 나오는 듯, 물기 묻은 손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려는데 그녀가 조로를 불러 세운다.

“롤로노아 주임, 어제 집에 안 들어갔어?”

“뭐?”

“아니, 넥타이가 어제 그대로길래.”

“……늦잠을 자서 대충 집히는 걸로 했더니.”

여자의 눈썰미는 쓸데없이 좋아서, 설마 어제와 똑같은 넥타이라는 걸 지적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애초에 넥타이 같은 것에 별 취미가 없어 두 세 개 정도를 돌려쓰고 있었는데 용케도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자신의 넥타이 사이클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소소한 의심이 조로의 번뇌 속에 뾰족이 고개를 든다. 급하게 꺼낸 변명을 믿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로빈은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자리를 뜬다. 왜 편의점에서는 속옷은 팔면서 넥타이를 팔지 않는 것인지, 괜히 애꿎은 편의점을 탓하며 조로는 옥상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하도 다급하게 움직이다보니 아직 담배를 한 대도 피우지 못했다. 뇌가 니코틴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쓸데없이 날이 좋았다. 화창한 햇빛이 금속 난간에 부딪혀 눈을 아프게 찔러오기에 조로는 약간 비껴 서서 담배를 빼어 물었다. 찰칵, 하는 라이터 소리와 함께 담배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옥상 한 구석에 놓아둔 재떨이 대용 맥주 캔을 들어다 바로 발치에 내려놓고 난간에 기대어 선다. 폐 속 깊이 연기를 마시고 다시 뱉어내는 일련의 동작 속에도 조로의 머리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일부러 집을 비워줬다, 라…….”

상디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집을 조사하면 뭐가 나오긴 하는 걸까? 영장을 들고 가려 해도, 아무런 혐의가 없는 그의 가택 수색 영장이 나올 리가 없다. 오히려 표적수사로 윗선에게 불려가지만 않으면 다행일지 모른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당장 그 바텐더와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속옷을 들고 간 건, 나중에 적당히 몇 번 메다 꽂아주면 될 일이다. 다만 몇 가지 계속해서 신경을 건드리는 것들이 있었다. 씁쓸한 담배 맛이 입맛을 더 쓰게 만든다. 화창하기만 한 날씨는 막 다가오는 봄을 알리고 있었다.

 

***

 

“아…….”

“롤로노아 주임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잠깐 졸았는데 악몽을 꿨어.”

“그러게 집에 가셨을 때 푹 주무셔야지 말입니다. 엎드려서 자면 안 좋아요.”

“네가 내 엄마냐.”

조로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손을 휘휘 내저어보였다. 사람이 걱정을 해줘도 참, 이라고 구시렁거리며 후배 형사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 책상으로 고개를 돌리니 보고서 한 묶음이 모로 놓여있었다. 클립으로 묶인 보고서 더미를 집어 드니 대충 피해자의 주변 탐문조사 내용이다. 흐릿한 눈길로 봤을 때는 꽤 두꺼운 줄 알았는데 정작 내용은 세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뭐야, 이게. 당장 초중고등학교 동창과 직장 동료 탐문만 해도 열 장은 우습게 나오는데 세 장밖에 되지 않는 주변 탐문 보고서는 조로가 형사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 보는 생경한 것이었다.

“…….”

보고서를 넘기는데 갑자기 또 두통이 도졌다. 사실 아까는 후배가 제대로 본 것이다. 조로는 전혀 졸지 않았다. 만성 편두통이 심하게 도져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을 뿐이다. 두통이 또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가늘게 눈을 뜨고 보고서를 노려보니 글자들이 제멋대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화선지에 금방 떨어뜨린 먹물처럼 글자가 뿌옇게 번지고 있었다. 보고서를 내던지듯 내려놓고 조로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20년 전부터 악몽과 함께 자신을 괴롭히는 이 두통은 잊을 만하면 찾아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렇게 생각한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ㅡ그대로 쏘면 돼.’

멀어져가는 정신을 붙잡기라도 하듯 귓가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와, 등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마치 누군가가 얼음물을 뒤집어씌운 듯 소름이 끼쳐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는 와이셔츠에 튄 흙탕물처럼 거슬렸고 신경을 뒤집어놓는다. 아득해졌던 정신은 어느 새 돌아와, 조로는 새삼 자신이 제1과 사무실 한가운데 놓인 자신의 의자에 앉아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꺼번에 날아갔다고 생각했던 생활음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팩스 소리, 보고서를 작성하는 키보드 소리, 포트에 물 끓는 소리와 인스턴트커피의 향기가 났다. 이 평범한 장면들이 낯설었다. 오른손에 다른 누군가의 손이 얹혔던 것처럼 차가운 감촉이 묻어 있었다.

“…….”

두통은 사라져있었다. 조로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다시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이쯤 되면 평범한 샐러리맨이 아니라,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일만한 인간관계다. 대충 훑어본 글들은 모두 평범, 조금 음침할 정도로 얌전하거나 조용하다는 묘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인터뷰이가 고심하면서 단어를 고른 티가 역력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인터뷰이가 모두 그에 대해 무언가를 숨기느라 고민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사사키 지로라는 사람은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만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이었다면 ‘지나가던 사람 A’ 정도 되는 인생을 살았을까. 무심히 보고서를 오른손 검지로 톡톡 두드리던 조로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야, 따라 나와.”

“네?”

“탐문조사 다시 한다.”

“네에?”

“내가 확인해봐야 알 것 같아. 얌전히 따라 나와.”

“주임님~!”

대답을 듣지 않고 재킷을 어깨에 걸친 채 바람처럼 사무실을 나가는 조로의 뒷모습을 로빈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 나서는 후배형사를, 그의 동료가 위안이 담긴 시선으로 쳐다본다. 어느 정도 진행된 수사를 조로가 뒤엎는 건 그리 드문 장면이 아니었기에, 1과 사람들은 그저 그 희생양이 된 후배형사를 동정할 뿐이었다.

 

***

 

“~제가 그랬잖아요, 진짜 제대로 했다니까요.”

“그런 것 같군.”

“그런 것 같군, 이 아니죠! 제 시간, 체력 다 어떻게 책임지실 거예요. 저녁이라도 사주세요.”

“시끄러워. 아까 캔 커피 마셨잖아.”

“캔 커피 하나로 지금 다섯 시간 재탐문조사를 넘어가시려는 겁니까?”

“거 참. 어쩌라는 거야.”

“저녁! 불고기! 맥주!”

“……몇 년이 지나도 철이 안 드냐. 따라와.”

조로는 담배를 지져 끄고 걸음을 뗐다. 후배 역시 담배를 끄고 재빨리 조로를 따라 나선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정식집이었다. 히가와리 정식을 둘 시키고 조로는 다시 담배를 빼 문다. 그러다 진짜 폐암 걸립니다, 라고 빈정거리는 후배를 한 번 노려보고 불을 붙인다. 눈에 익은 여주인이 물컵과 손수건을 날라 온다. 종일 돌아다녀 먼지를 뒤집어 쓴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 씻으라고 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시커멓게 묻어나온 먼지에 기함한 표정의 후배가 손수건을 하나 더 줄 수 있냐며 여주인에게 부탁하고는 맞은편의 조로를 쳐다봐왔다.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다.

“주임님 근데 하나 여쭤 봐도 됩니까?”

“뭔데. 싱거운 거면 없어.”

“아니……. 일 년 전 인질극 때 말입니다. 왜 범인을 바로 쏴 버리셨는지 궁금해서요.”

“…….”

조로는 무연히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 여주인은 그들의 대화에 거슬리지 않도록 텔레비전의 볼륨을 낮추고 있었다. 사이타마에서 화재가 났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칼을 들고 있긴 했지만 거의 항복 일보 직전이었고, 상부에서도 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잖습니까.”

“그랬지.”

“근데 근신 처분을 받을 걸 뻔히 알면서도 쏘셨잖아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

“그러니까 왜 굳이 그러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아, 물어보면 안 되는 건가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조로는 손을 들어 재떨이를 부탁한다. 재떨이를 상에 내려놓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는 여주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너희까지는 얘기가 안 돌았나보군.”

“예?”

“그 때 인질도 기억하나?”

“네,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였죠.”

“그래. 사실 나도 어릴 때 인질이 된 경험이 있어.”

“예?!”

조로는 다시 담뱃갑을 끌어당겨 담배를 한 개비 빼내고 불을 붙였다. 기억은 20년 전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손을 대면 마치 그 때의 기억을 누군가가 거칠게 칼로 잘라낸 듯 울퉁불퉁한 단면만이 만져진다. 20년 전 납치인질극 사건의 인질은 두 명이었다. 조로와, 이름 모를 소녀. 그리고 그녀는 아직까지도 조로의 꿈에 방문하고 있다. 조로가 두 번째 담배연기를 내뱉을 때, 정식이 상에 놓였다. 몇 번 피우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조로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아직까지도 멍청히 입을 벌린 채 그를 쳐다보고 있는 후배에게 숟가락 드는 시늉을 해 보이고 조로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후배도 숟가락을 들었지만 여전히 시선은 그에게 고정된 채였다.

“범인은 인질 두 명을 폐허에 가둬둔 채 도주, 그가 마시던 생수병에서 그의 지문과 타액을 검출해냈지만 초범이었던 모양인지 전혀 데이터베이스에 남은 게 없었어. 인질 중 소녀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고, 경찰이 들이닥쳤을 땐 이미 사후 세 시간이 지난 상태였지. 아마 즉사였을 거라는 군.”

“……아, 그 사건. 그게…….”

“그래, 워낙 유명한 미결 사건이니까 형사인 네가 모르는 게 이상하지. 나는 살아 있었지만, 왜 살았는지도 모르고 함께 있던 인질이 왜 죽었는지도 몰라. 앞뒤 기억이 날아가 버렸거든.”

“……죄송합니다.”

“뭐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인데.”

조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입 안으로 밥을 가득 밀어 넣었다. 몇 번 씹다가 미소장국으로 흘려보내고 반찬으로 딸려 나온 생선구이를 젓가락으로 해체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꼭지가 돌아서 쏴 버렸던 거지. 무전기로 계장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는데.”

“그럴 만하네요.”

“형사가 이런 거에 공감해서 어쩌자는 거야.”

조로가 픽 웃었지만 후배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럼 그대로 시효가 끝나버린 겁니까?”

“당시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 물론 이후에 시효가 폐지되었지만 소급적용이 안 되니 이미 살인사건으로서의 시효는 끝난 지 오래지.”

“참…….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래도 그 사건 덕분에 형사 나부랭이가 되기로 마음먹은 거니까.”

“근신은 한 달이었는데 그 다음에 휴직계를 내시지 않았습니까?”

“쏘고 나서 후폭풍이 왔어. 아마 그 충격으로 기억이 좀 돌아온 걸지도 모르지.”

“예?”

“ㅡ라고는 해도, 그 기억도 흐릿하기만 해. 그냥 그 폐허의 모습만 조금 떠오를 뿐이야. 다 먹었으면 나가자. 밤에 갈 데가 있어서.”

 

***

 

맨션 현관을 열고, 상디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자신의 것이 아닌 담배 냄새가 집 안에 가득했다. 이 냄새는 맡아 본 기억이 있다. 그것도 지겹게. 거실은 암흑과 침묵에 싸여 있었지만 불청객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빌어먹게도 잘 알 수 있었다. 분명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것도 상디의 예상이 맞다면, 불청객은 이 상황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일부러 문을 세게 닫고 거실의 불을 켰다. 거실 한켠의 흔들의자에 익숙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마치 집주인이라도 되는 양 편안히 앉은 모양새가 더 아니꼽게 느껴졌다. 담배 냄새의 주인은 상디를 보고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이, 뭐 하러 온 거야.”

“애송이가 말하는 본새 한 번 여전하군.”

“당신이 넘긴 맨션이라고 해서 당신 거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텐데.”

“팬티바람으로 쫓겨나고 싶으면 더 떠들어 봐라, 마음껏.”

“……망할 영감.”

제프가 씩 웃었다. 상디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라이터를 찾느라 다른 주머니를 뒤지는데 무언가가 휙 날아왔다. 오른쪽 눈을 정확히 겨냥했지만, 그걸 놓칠 상디는 아니었다. 천천히 눈앞에서 오른손을 펴자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제프를 노려보고 상디는 그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제대로 불이 붙은 걸 확인하고 똑같이 제프의 오른쪽 눈을 향해 라이터를 던졌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라이터는 제프의 왼손에 들려 있었다. 이미 예상한 결과라 그리 실망할 것도 없었다.

“눈에 띄는 짓 좀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냐.”

“이제 당신 인생과는 상관없지 않습니까, 제프 관리관?”

“…….”

제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빈정거림 가득한 어조는 상디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비딱선을 타온 건 알지만 같잖은 어른 티가 묻어나기 시작한 이십 대 초반부터는 그가 알아오던 상디가 맞는지 몇 번 의심이 될 정도였다. 거실 한복판에 서서 담배를 피워대는 상디는 몇 번을 보아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자신과는 상관없으니 이제 그만 참견하라는 뜻이다. 평소였으면 발로 몇 번은 차 올렸을 테지만 오늘 찾아온 용건은 끝내야 하기에 가만히 화를 삭이고 다시 침착한 어조로 말을 꺼낸다.

“왜 거짓말을 한 거야? 더 의심받게 됐잖냐.”

“착각한 거야. 그런 일이 한 두 번이어야지.”

“……형사를 너무 우습게보면 안 될 텐데. 큰 코 다친다.”

“다쳐도 내 코가 다치지.”

“애송이는 닥쳐. 수사회의에서 네 이름이 계속 나오는 걸 막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그것 참 빌어먹게도 고맙군.”

제프가 흔들의자에서 일어선다. 상디는 어느 새 현관으로 향하는 복도에 서서 어서 나가달라는 듯 공손한 태도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스쳐 지나가려다 제프가 다시 자리에 멈춰 섰다.

“너……. 혹시 아직 그 남자와 연락하고 있나?”

“내 의붓아버지를 말하는 거라면 이미 백 년 전에 연락은 끊겼어. 낯짝도 안 본지 꽤 됐지, 아마.”

“롤로노아 조로라는 형사가 왔었지?”

“뭐?”

그 때 처음으로 상디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의 표정을 제프는 놓치지 않았다. 작은 눈 사이로 서늘한 안광이 번쩍거렸다.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엄중한 경고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간다. 앞으로는 연락 하고 찾아오도록 하지.”

“……빌어먹을 영감탱이.”

 

***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상디가 현관문을 노려본다. 망할 영감이 뭐라도 놓고 갔나 싶어 거칠게 문을 열어젖힌 순간, 또 다른 담배 냄새가 확 끼쳐들었다. 오늘 아침에 거하게 놀려 준 남자가 서 있었다.

“내놔.”

“……줄줄이도 찾아오는군. 들어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상디는 도로 거실로 향했다. 현관문이 닫히고 그가 신발을 벗는 소리까지 들렸다. 성큼성큼, 발소리가 이어지고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거실 한가운데에 선 조로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속셈이야?”

“'기약'?”

“…….”

험상궂은 눈초리로 쳐다보는 그에게 상디는 소파에 편히 앉은 채 말없이 거실 한구석에 놓아두었던 그의 속옷을 뭉쳐 던졌다. 나이스 캐치라는 말이 잘 어울리게도 그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자신의 속옷을 받아든다.

“속옷만 찾으러 온 거야?”

“방값도 반 나누지.”

“됐어, 모양 빠져.”

정말 지갑을 꺼내 돈을 세는 조로를 저지하고 나선다. 그보다 여기 와서 좀 앉지, 라는 상디의 말에 조로는 잠깐 망설이다가도 그의 옆에 앉았다. 문득 그를 조심하라던 제프의 말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그에게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담배 연기 자욱한 바에, 약간 눈썹을 치켜 올린 채 들어오던 그 때의 조로가 생각났다. 누가 보아도 ‘난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는 않아?”

“……둘 다 남잔데 무슨 일이 있어 봤자겠지.”

“뭘 모르시는군. 남자‘라서’ 무슨 일이 있었을 수도 있어.”

“……뭐?”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조로의 멍청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상디가 픽 웃는다.

“사우전드 써니 기억하지?”

“사건 현장 말하는 건가.”

“내 직장이 형사에게는 사건 현장이군. 그래, 그 곳 말이야. 손님들 기억해?”

“이시다 카즈요시 30세, 우타다 미즈히코 28세, 쿠라이 켄 34세…….”

“그건 됐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들의 공통점이야.”

“공통점……. 남자?”

딩동댕, 정답입니다. 상디는 전에 없이 유쾌한 목소리로 정답을 외쳤다. 한동안 상황파악을 못 하고 있던 조로의 얼굴에 낭패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야 사우전드 써니가 어떤 곳이었는지 눈치를 챈 모양이다. 답지 않게 순진한 면이 있는 형사님이라니까, 라고 생각하며 상디는 웃음을 흘렸다. 설마 정말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조금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가 답지 않게 귀여운 탓이리라. 상디는 이렇게 자신을 정당화했다. 앞으로 하려는 행동도 아주 약간의 여흥이다. 나쁜 짓을 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간밤에 우리가 이런 일을 했을 수도 있는 거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무방비한 조로의 무릎에 손을 살짝 올렸다가, 그대로 체중을 실어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 입술에 묻어 있던 낯선 담배 맛이 숨결을 통해 그대로 전해져온다. 그리 싫지는 않았다. 상디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거칠고 투박해보이던 입술은 의외로 따뜻했다. 그러다 세상이 빙글 도는 느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숨이 모자라 잠깐 떨어졌던 입술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자신은 소파 위에 누워 있었고, 그 위에 형사가 자신의 손목을 잡은 채 자리하고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썹이 단호함과 망설임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여과 없이 내비친다. 5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혼란스러운 마음도, 일시적인 욕망도 모두 그 곳에 온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픽 웃은 상디가 자유로운 손으로 조로의 뒤통수를 살짝 누름과 동시에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5.

 

“아…….”

“뭐야?”

성실하게 일어나 샤워까지 마치고 옷을 주섬주섬 꿰어 입던 조로가 저도 모르게 한 마디를 흘렸다. 침대 위에 엎드려있던 상디가 마뜩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금방 일어난 탓인지 목이 잔뜩 잠겨 있었다. 반듯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아침에 약한 타입인 듯, 그는 조로가 샤워를 끝마칠 때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흰 침대 시트 위에서도 적당히 잔근육이 잡힌 흰 등이 눈에 띄었다. 그 잠긴 목소리와 졸음 묻은 눈동자를 대하는 것만으로도 어젯밤이 생각나 조로는 애써 자신의 넥타이로 시선을 돌린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그 등 위에 머물러 있다. 상디는 그 새 침대 옆 장식장에 놓여 있던 재떨이를 가까이 잡아당기고 그 옆의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빼내어 불을 붙이고 있던 참이었다. 바지와 와이셔츠까지 입은 조로는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은색 넥타이를 들고 있었다.

“또 넥타이가 같아.”

“뭐? 무슨 뜻이야?”

한 쪽밖에 보이지 않는 눈썹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상디가 되묻는다. 그 입에는 장초가 물려 있다. 조로는 머뭇하다 넥타이와 외박 발각의 상대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잠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상디가 보기 드물게 폭소했다. 담배 끝에 미처 떨어내지 못한 재가 매달려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시트에 구멍 난다, 하고 조로가 조용히 말하자 상디는 황급히 재떨이를 들고 재를 떨어냈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상디가 오른손 검지를 들어 방 한 쪽의 옷장을 가리킨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조로에게 아직까지 채 풀리지 못한 목소리가 말했다.

“열고, 하나 가져와.”

옷장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색색의 와이셔츠와 넥타이에 조로는 순간 이 남자는 확실히 자신과 다른 인종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와이셔츠는 대충 눈대중으로 세어 보아도 스무 벌은 넘어 보였다. 넥타이는 색깔별로 정리된 채 걸려 있었는데 서른 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숫자에 압도되어 조로가 가만히 서 있자 뒤에서 아무거나 하나 가져오라니까, 라는 목소리가 날아든다. 그런 말을 들어도 이렇게 선택지가 많으면 망설일 수밖에 없다. 옷가게에서 넥타이를 하나 사 오라는 미션보다도 고난이도였다. 괜히 하나를 만지작거리는데 뒤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조로는 결국 손에 잡히는 넥타이를 색깔도 보지 않고 집어와 버렸다. 상디는 여전히 침대 위에 엎드린 채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있었다. 허리 언저리에 느슨하게 이불이 덮여 있다.

“핫핑크가 취향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

조로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넥타이를 받아 든 상디가 까딱까딱 손짓을 했다. 무슨 의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조로는 허리를 깊게 숙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담배 냄새가 확 끼쳐든다. 흰 손끝이 넥타이를 조로의 목에 걸고 세심하게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꽤 불편한 자세일 텐데도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는다. 완성된 것은 매일 가장 쉬운 포인 핸드 노트를 고수하던 조로에게는 조금 생소한 매듭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어떤 식으로 했는지도 알 수 없어 다음부터는 절대 접하지 못할 터였다. 사실 매듭지어지는 모양보다도 조로가 눈으로 좇았던 것은 섬세하게 움직이는 상디의 손끝이었다. 매듭이 지어지고 상디의 손끝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이 마주쳤다.

“…….”

픽 웃은 상디가 그대로 넥타이의 끝을 잡아당겼다. 조로는 그에 응해 침대에 손을 받치고 허리를 조금 더 숙였다. 코끝에 와 닿는 담배 냄새가 조금 더 강해졌다.

 

***

 

“넥타이 취향이 바뀌었나봐. 혹시 ‘그녀’?”

“그런 거 아니야.”

두 개비 째 담배를 캔에 비벼 끄며 조로가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약간 죄책감은 있었지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는 아니었으니까. 로빈은 말없이 빙긋 웃고만 있었다. 똑같은 넥타이보다도 갑자기 화려해진 넥타이가 더 눈에 띄기 쉽다는 사실을 왜 간과했을까. 검은색, 짙은 감색, 짙은 붉은색 딱 세 개였던 조로의 넥타이가 느닷없는 핫핑크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아침부터 1과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 충격은 다음엔 의심 가득한 눈길로 바뀌어 조로에게 다른 바뀐 점은 없는지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되었다. 잠시 그러다가 결국 다른 변화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디선가 선물 받았나보다, 하는 묘한 체념의 분위기가 1과에 떠돌았다. 이렇든 저렇든 신경 쓸 일은 없었지만, 자꾸 지나치는 녀석마다 넥타이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적잖이 거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색깔 정도는 보고 골라오는 거였는데, 하고 후회해 봐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쪽은 진전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테트로도톡신의 출처를 조사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특정하기는 힘든가봐.”

로빈 팀은 독극물과 출처 쪽을 파헤치고 있었다. 과수연과 함께 일하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계속해서 묘한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을 후배 형사가 물어온 적이 있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싶어 굳이 그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과수연에서는 일단 한 번 가공된 형태의 독극물이었을 거라고는 하는데, 칵테일에서 검출된 정도로는 성분 분석이 힘든 모양이야.”

“테트로도톡신은 비교적 입수하기가 쉬우니까.”

“그래서, 그쪽은? 인간관계에서 뭔가 알아낸 건 있어?”

“전혀.”

조로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정말 요만큼도 파고들어갈 만한 것이 없었다. 후배 형사의 탐문조사가 부실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오판이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이 정도로 좁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주변 탐문조사로 무연히 흘려보낸 이틀을 상기하며 조로는 거칠게 뒷머리를 긁었다.

“매듭이 참 예쁘네.”

“뭐?”

“발터스 노트. 그리 흔하지도 않고, 예쁘게 매기도 쉽지 않은 매듭인데 누가 했는지 몰라도 반듯하게 잘 했어.”

싱긋 웃는 로빈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조로는 무연히 세 개비 째의 담배를 빼어 물었다. 부드러운 여자의 눈이기도 했지만, 그 눈빛은 모든 걸 다 알면서 추궁하는 형사의 눈이었다. 쓸데없는 얘기를 했다가는 어디까지 들킬지 알 수가 없다. 어설프게 둘러댔다가 나중에 더 큰 곤경을 만날 확률이 엄청나보였다. 여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조로이지만 그 정도 예상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확실하게 입을 다물기로 했다.

“사촌동생이 시험 삼아 매 줬어. 넥타이도 그 녀석 취향이고. 참 별 거 아닌 데에 다들 관심만 많다니까.”

“롤로노아 조로 주임의 넥타이 사이클이 달라졌는데 그 누가 놀라지 않겠어?”

난 먼저 가볼게, 슬슬 과수연에서 팩스가 올 시간이라서. 다음엔 하프 윈저 노트도 한 번 매 달라고 해 봐, 라고 말하며 로빈은 난간에 기대어 있던 상체를 뗀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진담인지 알 수가 없는 말투였다. 3센티미터 정도 될까 싶은 하이힐이 콘크리트 건물 바닥과 또닥또닥 마주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옥상을 내려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로가 다시 한 번 거칠게 머리를 긁적였다.

“…….”

분위기에 휩쓸렸다, 고도 말할 수 있었다. 바텐더의 입술이 가볍게 와 닿는 순간 몸 안에서 무언가가 격렬하게 뒤끓었다. 남자끼리 그런 게 가능하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첫 키스는 아니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약 이 년 간 사귀던 여자 친구와 이미 갈 데까지는 가 보았으니 아예 기본지식도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입술과 마주치는 순간 느꼈던 감정은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그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냥 시건방지고 짜증나는 놈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빙글 말린 눈썹도, 가끔은 멍하니 초점이 사라지는 푸른 눈도, 반쪽을 가린 답답한 면상도 짜증났지만 가장 짜증나는 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작작한 그 말투였다. 가지고 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 장난스러운 입술이 와 닿는 순간 분위기고 뭐고 면상을 한 대 강하게 갈겼을 텐데 그 후의 자신은 바텐더를 다시 소파에 쓰러뜨렸다. 그 순간 깜짝 놀라 커진 눈동자에는 약간 승리의 도취감과 정복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후 빙긋 웃으며 다시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길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무엇을 느낄 겨를도 없었으리라.

문득 어젯밤으로 달리는 기억을 억지로 멈추느라 조로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사실 알리바이만 증명되었다 뿐이지 여전히 그는 이 사건의 주요 참고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사람과 이런 관계를 맺어버렸다는 게 알려지면 근신으로는 끝날 문제가 아니다. 어젯밤의 자신도 분명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선을 넘어버린 것은 그런 것보다도 우선하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기가 가득 담긴 차가운 벽안이 바로 자신의 아래에 자리 잡음을,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땀으로 젖어 미끄러운 손가락 하나하나에 내리 입 맞추며, 애인에게도 못 할 낯부끄러운 행위를 반복하던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신음소리. 어젯밤을 떠올리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던 조로는 결국 욕을 나직이 씹어 뱉으며 새 담배를 입에 물고 말았다.

여자도 아닌 사내놈을 데리고 간밤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지금 와서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그리고 정말 큰일은, 앞으로 그런 ‘실수’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반성 같은 건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내심 그런 반성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 조로는 분을 못 이겨 발치에 놓인 캔을 발로 차버렸다. 깡, 하는 소리를 내며 캔은 저 멀리 굴러가고 있었다. 그 안에 담겼던 담뱃재들이 옥상 바닥 위에 새까만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

 

며칠이 지나도 수사에 진척이 없자 윗선에서도 적잖이 손을 놓은 기색이었다. 수사본부는 현판이 9할이었고, 그나마 경시청에 차지한 공간이 무색하게도 그 안에 상주하는 인원은 적었다. 하루가 멀다고 들들 볶였지만 결국 최대한으로 부풀려도 다섯 장이 최대인 주변 탐문 조사 보고서를 받은 후에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한 모양이다. 윗선이 돌아가는 기색은 알 수 없지만 조로는 그런 인상을 받았다. 매스컴도 조용해져서, 이대로 사건은 잊혀가는 듯했다. 파헤칠 건수라도 나와야 어떻게든 억지로 파고들어서 무언가를 끄집어낼 텐데, 그런 ‘건수’ 자체가 잡히질 않았다. 그나마 건져낸 거라고는 피해자는 대인 관계가 매우 약한 사람이었다는 것과, 독극물 테트로도톡신이 자연 상태가 아니라 한 번 가공된 상태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사실 뿐이었다. 이 보고서를 받고 계장이 코웃음 친 것이 바로 두 시간 전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제일 수상한 건 그 바텐더인데.”

“그렇습니까?”

“그렇잖아. 가장 앞에 있었고, 또 계속 보고 있었을 텐데 신고가 늦어서 결국 피해자가 사망한 것도 그렇고.”

“그런데 다른 손님이 알리바이를 확인해 준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칵테일을 만들 때 독을 탔을 수도 있잖아.”

“출동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소지품검사와 주변 검사를 했습니다. 독극물은 흔적도 없었습니다.”

계장의 의구심과 후배 형사의 반박을 들으며 조로는 안심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내심 놀랐다. 형사로서의 인생이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세월 동안에도 수사에 예단(豫斷)을 가지고 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 바텐더에게서 의심이 거둬질 때마다 안심하는 자신이라니. 갑자기 화가 치밀어 괜히 보고서를 치는 손길이 거칠어졌다. 타이밍 좋게도 찾아온 침묵 속에 조로의 타자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다. 쟤 왜 저래? 라는 듯이 계장이 후배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후배 역시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롤로노아 주임, 그러다 키보드 부서지겠어.”

역시 그를 멈춘 것은 로빈의 뼈있는 한 마디였다. 눈에 띄게 줄어든 키보드 소리에 괜히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봐 조마조마하던 1과 사람들이 안심하는 기색을 내비친다. 말없이 자판과 씨름하는 조로의 불퉁한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로빈이 턱을 괸 채 미소 지었다.

 

***

 

“그래서, 흐지부지 되어가고 있다고?”

“외부인에게 수사에 대해 말할 수는 없어.”

“방금까지 재잘재잘 잘도 말해놓고 뻔뻔하시기도.”

이쪽을 등진 채 설거지를 하고 있던 상디가 유쾌하게 내뱉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이런 기묘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주로 조로가 퇴근길에 상디의 맨션에 들러 함께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한 편 보고, 내키면 함께 침대로 가는 것이 그 날의 일과였다. 어느 샌가 익숙해진 일상이었지만, 분명 비일상이다. 조로는 말없이 담배를 빼어 물려다 멈칫했다. 품이 큰 티셔츠를 입은 바람에 앞치마 끈 사이로 보이는 흰 어깨가 시선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 또 모를 텐데, 접시를 닦느라 살짝 숙인 고개 옆으로 금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조로는 문득 묵직해오는 명치 께에 그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쉰다. 그러고는 탁자 의자에서 일어나 그 뒤로 다가갔다.

“맥주는 방금 넣어놨으니까 좀 기다…… 읏.”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로는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채 끝맺지 못한 말이 억눌린 신음소리로 변해 튀어나왔다. 조로는 그대로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세게 내리누른다. 고무장갑을 낀 팔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상디는 접시를 내려놓고 개수대에 손을 짚은 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불의의 공격에 미처 가다듬지 못한 자세가 더 위태롭다. 뭐, 하는 거, 한 음절 한 음절이 뚝뚝 끊겨 나왔지만 조로는 개의치 않는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로 왼손을 들어 등 부근의 앞치마 매듭을 풀어 내렸다. 너무나도 쉽게 풀려오는 매듭에 오히려 풀어주기를 기다린 것이 아닐까 하는 심술궂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를 사랑하냐고 물으면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눈앞의 이 금발 남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조로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원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었다. 자신은 원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그랬다. 가벼운 입맞춤으로 자신을 도발하는 거라고 알면서도 오히려 그 도발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냉큼 넘어가버린 자신이 있었다. 그 날부터 굳이 욕망을 숨길 필요는 없었다.

헐렁한 티셔츠 아래쪽으로 불쑥 손이 들어가자 조로에게 기댄 상디의 몸이 움찔했다. 목덜미에서 배회하던 뜨거운 입술이 어깨로 내려가는 순간 손은 조금 더 올라갔다. 상디는 이미 제 다리로 버티고 서 있을 수 없는 상태였다. 개수대와 조로 사이에 끼어 억지로 일으켜진 모양새다.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자세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조로의 명치에 순간 묵직한 고통이 와 닿았다. 상디의 팔꿈치가 정확히 조로의 명치에 꽂혀 있었다. 조로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입술을 뗀다. 어느 순간 재주 좋게도 상디가 뒤돌아 있었다. 화난 것 같으면서도 열기에 젖은 그 눈동자가 조로의 시선을 똑바로 잡아채었다. 무언가에 옭매인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로가 자신의 목에 그의 팔이 둘러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상디의 입술이 먼저 다가왔다. 목에 감긴 팔이 풀렸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 손가락이 바쁘게 자신의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가 자신의 와이셔츠를 벗겨내기 쉽도록 조로는 몸을 조금 틀었다. 흰 와이셔츠가 부질없이 부엌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입술을 뗀 조로가 급하게 숨을 쉬며 그에게서 앞치마를 벗겨냈다. 그 다음 그들의 행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바쁘게 서로의 몸을 더듬는 와중에 오가는 것이라고는 거친 숨뿐이다. 엎치락뒤치락 어떻게든 움직여 침대에 다다랐을 때 먼저 상대방을 침대에 밀친 것은 상디였다.

“이제 어떻게 하게?”

“잡아먹을까.”

“퍽이나.”

불그스름한 스탠드 빛에 비친 그 푸른 눈에 서린 열기에 조로는 다시 그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조로의 허리 위에 걸터앉아있던 상디가 중심을 잃은 채 다시 그 위에 쓰러진다. 이제 조로의 숨소리는 숫제 그렁거림과 다르지 않았다. 척추를 따라 바쁘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손길에 상디는 움찔움찔하면서도 윗자리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끝에 조로는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고 벌떡 상체를 일으켜 상하 위치 관계를 역전시킨다. 역시 아래에 있을 때 이 얼굴은 더 보기 좋다니까, 그런 태평한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6.

 

“왜 이게 지금 생각났을까요?”

“뭔데.”

“그 바텐더 말이에요.”

무심하게 파일철을 넘기던 조로의 손이 멈췄다. 후배 형사는 자신의 발상이 놀라운 듯 꽤나 뿌듯한 표정으로 조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칭찬해달라는 어린아이의 눈빛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로는 미간을 좁힌다. 그러거나 말거나 후배 형사의 손동작이 커진 것을 보면 상당히 유니크한 발상이기는 한 것 같다. 들어보자는 식으로 조로는 말없이 팔짱을 꼈다.

“바텐더가 범인이라면 애초에 신고하기 전에 그 칵테일을 버리고 잔을 씻지 않았을까요?”

“뭐?”

“그러면 완벽하게 숨길 수 있잖아요. 지금 범행 현장이 그 바라는 게 기정사실화된 것이 시신 앞에 마가리타 잔이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그걸.”

“네?”

“그걸 지금 알았냐?”

“……네?”

“하여간 몇 년이 지나도. 됐으니까 가서 점심이나 먹고 와.”

눈에 띄게 낯빛이 흐려져 구시렁거리는 후배 형사의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조로는 다시 파일철로 눈을 돌렸다. 그런 것 정도는 처음 검안서가 나왔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조로에게 바텐더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된 지 오래다. 사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씌워진 의심의 그림자를 거둘 수 있을까하는 것이 조로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에 대해서 무엇을 확신할 수 있지? 애초에 조로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름마저 가명인지 실명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경시청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던 것도, 쓸데없이 마가리타를 함께 마셨다는 거짓말을 한 것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무언가를 감추고 싶을 때다. 그러면 그는 자신에게 무엇을 감추려하는가?

“…….”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검지를 대고 숨을 고르자 편두통이 가라앉는다. 요 며칠 악몽과 편두통은 평소에 비하면 대단히 얌전한 상태였다. 특히 상디의 집에 머무는 날은 신기할 정도로 악몽을 꾸지 않는다. 이걸 말하면 무슨 반응이 돌아올지 예상할 수 없어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쩌면 자신부터, 그 바텐더가 이렇게 큰 의미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릴 때도 부리지 않던 치기가 왜 서른이 넘은 이제야 나타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드리운 안개가 묘하게 습기를 머금고 있다. 그 때 핸드폰의 램프가 깜박였다. 무심코 집어 들자 액정에는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어, 웬일이냐.”

「변함없이 무뚝뚝한 남자야. 뭐해, 오늘 저녁.」

“딱히 스케줄 없는데.”

이 와중에도 떠오르는 밉상스러운 얼굴을 황급히 지우고 조로는 책상에 놓인 캘린더를 들었다. 캘린더는 민망스러울 정도로 깨끗하다. 사실 스케줄이 생긴다고 일일이 적어서 관리하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거니와, 요즘은 스마트폰의 스케줄 관리 기능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면 밤에 술이나 마시자, 는 제안이 들어와 조로는 굳이 거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응했다. 그녀가 부르는 술집 주소를 적으며, 또 롯폰기네, 라고 속으로 투덜거려보았지만 수화기 너머로 자신의 생각이 들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 그 때 보자, 라고 말하며 조로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롤로노아 주임.”

“엉?”

어깨에 부드러운 감촉이 와 닿음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로빈임을 알 수 있다. 뒤돌아보자 로빈은 검지를 세우고 먼저 등을 돌려 걷기 시작한다. 옥상으로 오라는 신호임을 조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의자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른다. 비스듬히 비친 옆얼굴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조여오는 느낌에 조로는 미리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찾았다. 생각해보니 담배를 마지막으로 피운 것이 출근 직후였으니 세 시간이 지났다. 이 정도면 꽤 오래 참았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미리 담배갑 위로 하나를 툭, 띄워낸다.

 

***

 

로빈은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그렇다고 흡연에 대해 꼬치꼬치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도 아니었다. 조로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양새를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다. 두어 모금 빨아들일 때까지 로빈은 그를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테트로도톡신 조사는 잘 돼가?”

“그리 잘 되어간다고 할 수는 없겠지. 수입처를 약 210곳 정도로 줄여낸 정도니까.”

“그거 줄였다고 할 수 있는 거야?”

로빈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어느 새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운 조로가 발치에 놓인 캔을 집어 들어 꽁초를 집어넣었다.

“그래서, 할 말은 뭐야.”

“바텐더에 대해 개인적으로 조사를 좀 해 봤어.”

“뭐?”

“물론 피해자 주변 인물 조사는 당신 팀 일이니까, 월권이라면 월권이지만.”

“…….”

눈가에 떠오른 당황을 숨기기 위해 조로는 괜히 눈을 비빈다. 억지스러움이 가득 묻어난 동작임을 자신조차 알고 있는데, 눈앞의 검은 마녀에게 숨길 수는 없었으리라. 담배를 물고 있지 않았던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놀라서 담배를 떨어뜨리기라도 했으면 그거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의심의 시작이었을 테니.

“그래서? 따로 불러냈을 정도면 뭔가 중요한 걸 알아냈을 거 같은데?”

“내가 전에 얘기한 적 있지? 경시청을 속속들이 아는 걸 보면 뭔가 있을 거라고.”

“그랬지.”

목이 말라왔다. 견디지 못하고 조로는 다시 담뱃갑을 손에 들었다. 로빈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흰 종이 한 장을 꺼내든다. 경시청 마크가 찍혀있는 것으로 보아 경시청 인적 파일을 인쇄한 종이인 듯했다. 조로에게 그 종이를 건네는 손짓에 망설임이 가득했다. 조로는 종이를 받아 들고, 일단 펴지는 않는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그녀에게서 듣는 것이 나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시청과 그의 커넥션에 대해 알아냈어.”

“커넥션? 그렇게 거창한 단어를 쓸 법한 일인가?”

“경우에 따라선 그것보다 더할 수도 있지.”

“뭔데?”

“제프 관리관.”

“엉?”

“바텐더는 제프 관리관의 외손자야. 둘도 없는.”

 

***

 

닭튀김과 맥주의 궁합은 이루 말할 수 없지, 라고 말하며 쿠이나가 먼저 건배를 청했다. 시원한 맥주가 식도를 타고 흐르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크으, 소리를 조로는 굳이 막지 않았다. 입가에 묻어난 흰 거품을 냅킨으로 닦아내고 이번에는 닭튀김에 젓가락을 뻗는다. 바삭거리는 닭튀김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가게를 둘러보니 수트 차림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퇴근한 후의 맥주 한 잔은 사람을 막론하고 좋은 치유다. 조로도 가끔 구미가 당기면 혼자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거나 아예 캔맥주를 사서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샐러리맨들의 왁자지껄한 대화는 이 가게의 술안주중 하나라고, 쿠이나가 웃으며 변명하듯 말했지만 조로는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이런 시끌벅적한 분위기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오랜만에도 본다. 무심해가지고 아주.”

“요즘 바빠서.”

“뭐가 그리 바쁜데?”

“살인 사건 수사중이거든.”

“그거야 네 일이니까.”

“그러는 너는?”

“아버지 도장에서 견습. 가끔 시범도 보이고, 꼬맹이들 데리고 수련도 하고.”

“좋네.”

“좋지.”

쿠이나가 자신의 잔을 조로의 잔에 부딪히더니 맥주를 원샷했다. 조로는 말없이 샐러드를 뒤적거린다.

“근데 얼굴이 좋아졌다? 연애하나봐?”

“무슨.”

“아닌데, 확실히 뭔가 표정이 부드러워졌어.”

쿠이나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로는 조용히 검지로 그녀의 이마를 밀어낸다.

“처음 봤을 땐 이만한 꼬맹이였는데.”

“넌 뭐 엄청 컸던 것처럼 말한다?”

“정신연령 상으로는 한참 누나였을걸?”

“말을 말아야지.”

“하긴 꼬맹이치고 표정이 좀 무섭기는 했지.”

사건 직후의 이야기다. 조로는 문득 긴장을 느꼈다. 사건의 여파로 말을 잃은 아들을, 아버지는 검술 도장에 등록시켰다. 사실 그것은 조로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충격이 가시고 남은 것은 분노뿐이었다. 하루 빨리 자신을 단련하여 범인을 찾아 똑같은 고통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열심히 훈련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 검술 도장 사범의 딸이 쿠이나였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걸고 챙겨주었지만 조로는 그녀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모든 것은 방해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친해진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때까지도 조로는 검술 도장에 계속 다니고 있었고, 유망주라는 소리를 들었다. 누구나 그는 검도 쪽으로 진학할 거라고 말했지만 조로의 장래희망은 그 때부터 오직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검술을 계속 익히지 않을 거라고 말했더니 누구보다 서운해했던 것이 쿠이나와 그 아버지였다.

“우리 아빠는 네가 나랑 결혼해서 도장을 잇길 바랐나봐.”

“뭐?”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순간 닭튀김이 역류할 뻔했다. 간신히 맥주로 밀어 넣고 조로는 그녀를 멍청히 쳐다본다. 씩 웃고 있었다.

“뭐 옛날 얘기지.”

“그렇지.”

“사실은, 나 연애해.”

“오. 축하한다. 누군데?”

“검술 도장에 다니던 사람. 취미로 하고 있었는데 꽤나 잘 해.”

“다음에 한 번 소개해줘.”

“네 애인도 데리고 오면.”

“연애 같은 거 안 한다니까?”

“얼굴에 쓰여 있는데, 뭐. ‘나 연애합니다.’ 이렇게.”

“참, 나.”

실없게 웃고 조로는 마지막 닭튀김을 집어 들었다. 쿠이나가 손을 들어 생맥주와 메뉴판을 부탁하는 것을 지켜보는 중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지우려 애를 썼지만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

 

“어디서 술을 이렇게 마시고 들어온 거야?”

“친구랑 좀.”

“솔직히 말해. 여기가 당신네 집보다 경시청에서 가까우니까 여기로 온 거지?”

“그렇기도 하고.”

“그리고?”

“롯폰기에서도 가깝고.”

냉수 한 잔을 떠오더니 상디는 타박조로 말을 꺼냈다. 별로 마시지도 않았다고 말할까 했지만 그냥 변명처럼 들릴 듯하여 조로는 말없이 소파에 앉아 넥타이를 끄른다. 생각해보니 맥주 후에 신이 나서 소주도 몇 병 달렸다. 쿠이나를 호텔 앞까지 데려다주었는데 괜히 빈 집에 들어가기 싫어 조로는 다시 택시를 탔다. 행선지는 정해져 있었다. 투덜거리며 주방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내린다. 오늘 로빈을 통해 들은 이야기를 할까 했는데, 말한다고 뭔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관리관의 손자였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커넥션이었다. 이것도 상디가 숨기려고 한 사실일까? 아니, ‘사실 중의 하나’일까? 술기운이 돌아 슬슬 어지러운 눈앞에 상디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질 않아, 조로는 상디의 뒤통수를 끌어당겨 입 맞추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가 피식 웃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 이후로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지독한 갈증에 문득 눈을 떴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시계를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시계는 흐릿한 직각을 만들고 있었다. 세 시구나. 그때서야 조로는 자신이 거실 소파에 누워있음을 알았다. 위에는 모포가 덮여 있었다.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려 한 찰나, 베란다에 누군가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디, 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아니, 아직은 잘 몰라.”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니었다. 눈을 찌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상디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통화를 방해하는 것도 뭐해 조로는 눈을 뜬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닌데 거실이 하도 조용해서 베란다의 통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전화를 하는 상대는 누구일까. 아닌 척해도 마음 한 구석에서 뾰족한 가시가 자라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조로는 괜히 뒤척여본다. 하지만 뒤돌아있는 그는 그 기척을 못 들은 것 같았다.

“응. 당분간은 잘 숨어 있어. 또 연락할게.”

베란다 문이 열렸다. 이유도 모른 채 조로는 자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자신이 깨어있는 티를 내면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발소리는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소파 옆에서 잠시 멈추었다. 부자연스럽게 숨 쉴 것만 같아, 조로는 최대한 숨을 멈춘다. 머리카락 사이로 익숙한 손길이 파고든다. 조로는 크게 마음먹고 왼손으로 그 손목을 부여잡았다.

“안 자고 있었어?”

“아니, 방금 깼다. 물 좀.”

“기다려.”

발소리는 부엌으로 향하더니 정수기에서 물을 받는 소리가 이어졌다. 조로는 몸을 일으켜 물컵을 받는다. 손에서부터 느껴지는 차가움에 드디어 살 것만 같았다.

“침대로 갈래? 당신은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나 혼자는 못 옮기겠더라.”

“그러지.”

상디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았다가 조로는 확 끌어당긴다. 반동에 상디가 풀썩 그의 위로 고꾸라졌다. 소파가 비좁군, 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조금 때늦은 후회였다. 익숙하게 입술이 맞닿는다. 뭔가에 화가 나고 있었다. 그의 뒤통수에 손을 대고 조금 더 강하게 끌어 당겨, 뒤로 뺄 수 없게 한다. 자신도 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는 주제에, 그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속이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또 화가 났다. 코끝에 익숙한 담배 냄새가 스쳤다. 언제쯤 두 사람의 기만이 끝나게 될까. 자신조차 확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7.

 

“내일은 못 들를 거야.”

“언제는 예고하고 오신 것처럼 말하는데?”

“……아무튼, 그렇다는 거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본가에 가게 돼서.”

‘과거를 되짚는 여행’이라는 조금 낯 뜨거운 단어는 도저히 내뱉을 수 없었다. 스툴에 앉은 채 조로는 소주가 담긴 글라스에 차가운 물을 조금 따랐다. 그 모습을 보던 상디가 피식 웃는다. 술에 물을 타는 건 술에 대한 모욕이라며 진지하게 거부하던 조로가 미즈와리를 처음 마신 곳도 상디의 집이었다. 이젠 제법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미즈와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낀 조로가 문득 고개를 들고 이마에 주름을 만들어 보인다. 왜, 뭐 떫냐. 라는 표정이었다. 카운터석에 선 채 상디는 막 설거지한 글라스를 흰 천으로 닦아내어 다른 쪽에 쌓는다. ‘사우전드 서니’의 마감 시간이 다가옴을 알리는 작업이다. 카운터석 뒤쪽에 걸린 벽시계가 새벽 세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네 시면 글라스들을 진열장에 넣어두고 퇴근할 수 있다. 당연히 스툴에 앉은 조로 외의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본가 좋네. 돌아갈 본가도 있고.”

“비꼬는 거냐?”

“아니, 순수한 부러움이지. 받아들이는 쪽이 꼬였구만. 본가가 어느 쪽인데?”

“그리 멀지도 않아. 사이타마.”

“뭐?”

순간 상디의 시선이 똑바로 조로를 향했지만 미즈와리에 꽤나 정신을 쏟던 조로는 그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조로가 무언가를 의식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상디는 평범하게 마지막 글라스를 집어 들고 있었다.

“……기구하네.”

“뭐라고?”

“아니, 아무 말도 아니야. 조금만 기다려, 곧 끝나가니까. 그럼 휴가 낸 건가?”

“사흘 동안.”

“꽤나 할 일도 없나보네.”

“그건 네 놈의 외할아버지도 마찬가지겠지.”

두 사람의 시선이 이번에야말로 허공에서 똑바로 마주쳤다. 조로는 지그시 상디의 벽안을 쳐다보았다. 한 점의 일렁임도 없는, 맑은 눈빛이 탁한 담배연기 너머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표정을 숨기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남자라는 것을 첫 만남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그 후로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표정을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는 자신의 형사 능력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일말의 동요라도 내보였으면 그나마 숨기고 있었다는 것에 죄책을 느끼고 있었다는 판단이라도 가능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 눈빛은 평소와 ‘너무도’ 똑같았다. 마치 외할아버지에 대해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 사람처럼. 조로는 내심 혀를 찼다. 도대체 몇 꺼풀을 벗겨내고, 몇 꺼풀을 드러내야 이 남자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될까.

“지휘자는 언제나 바쁘게 마련이지.”

“수사 회의 마음대로 펑크 내서 죄송하다고 전해줘.”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의 낯짝은 나보다 네가 더 자주 볼 것 같은데?”

“참 건조한 조손관계군.”

“현대 사회의 비정한 일면이라고 표현해 주면 좋겠어.”

더 이상 이 남자를 말로 이길 수가 없다. 조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새어나온 웃음을 갈무리하느라 애쓴다. 처음에는 솔직히 그가 ‘대놓고’ 자신을 엿 먹이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나 곧 더 생각하기 귀찮아져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자신도 그에게 모든 것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대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 역시 하나의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고, 하나를 받으면 영을 주려하는 이 관계의 종착역은 도대체 어디일까 하는 순수한 의문만이 그 자리를 메운다. 뜨뜻미지근하면서도 입 속의 모래처럼 깔깔하고 기분 나쁜. 그러나 뱉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살을 맞댈수록, 눈을 바라볼수록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골치 아프다는 하나의 단어로 정리해버린 채 조로는 더 이상 그 무언가와 대면하는 것을 멈추었다.

“퇴근할까?”

“그러지.”

어느 새 조로가 마시던 미즈와리 잔까지 치운 상디가 바 너머로 상체를 길게 빼 조로의 얼굴 높이에서 시선을 맞춘다. 호박빛 조명 아래 빛나는 청록색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분명 처음 만난 날이다. 다음 순간 조로는 저도 모르게 그의 넥타이를 잡아끄는 자신의 손길을 눈치 챘다. 이미 입술은 맞닿은 후였다. 소주 때문에 뜨거워진 자신의 체온에 비해 그의 입술은 턱없이 차가웠다. 한 순간 솟아난 이질감은 곧 두 사람의 체온이 서로 녹아들면서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

 

「그래서 사흘 동안 휴가를 냈다고?」

“엉. 어차피 할 일도 별로 없고. 뭐 가까우니까 긴급 호출이 있으면 금방 돌아갈 수도 있지.”

「뭐 하러 간 거야, 사이타마는?」

“오랜만에 집에도 좀 들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저기.」

“너희 아버지께도 오랜만에 인사 좀 드리고.”

「새삼스러운 거짓말은 하지 말지.」

“너 눈치 많이 빨라졌구나.”

「누굴 바보 취급해?!」

조로는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했다. 전파로 귀를 찌를 수 있다면 아마 지금쯤 자신의 귀는 성하지 못했으리라는, 조금쯤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쿠이나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그 소리를 들으며 조로는 소꿉친구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뭘 좀 찾아보러 가는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어린애도 아니고, 난 형사잖아.”

「…….」

여전히 미덥지 못한지, 핸드폰 너머에서는 그녀가 숨을 고르는 기척만이 들려온다.

“이미 내렸고.”

「하여간, 정말 의논 없이 일 벌리는 데에는 선수야.」

“칭찬 고맙다.”

「아버지한테 꼭 들러. 너 많이 궁금해하시더라.」

“그래.”

「오는 길에 그 옆 가게에서 양갱도 좀 사와. 먹고 싶으니까.」

“어차피 곧 다시 사이타마로 돌아간다며? 집 옆에 있는데 뭘 또 굳이 포장까지 해 오래.”

「그래도, 먹고 싶으니까.」

“알았다. 끊어.”

통화를 끊자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로빈으로부터다. 휴가 한 번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다니, 복 받은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조로는 발신 버튼을 꾹 누른다. 역전의 풍경이 눈에 익었다. 경시청에 다니게 된 후로는 처음 오는 고향이었다. 한참 신호음이 가기에 자리를 비웠나 싶어 끊으려는 순간 전화를 받는 기척이 났다. 여보세요, 라는 말 대신 처음으로 조로를 맞이한 것은 비꼼의 뉘앙스가 가득한 한 문장이었다.

「이 와중에 희희낙락 휴가를 떠나시겠다?」

“이 와중?”

「이렇게 수사가 지지부진하고 범인은 누군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이 와중에? 전담 주임님께서 자리를 비우신다?」

“어이, 좀 봐달라고. 며칠을 철야로 일했으니까.”

「뭐, 형사의 복지도 중요하니까. 그래서, 어딜 간 건데? 책상에 이렇게나 쌓인 보고서를 뒤로하고.」

“보고서가 그렇게나 쌓였어?”

「농담이야. 어딜 갔냐고.」

“……사이타마. 본가야.”

왜 다들 행선지를 밝히면 조용해지는 건지 조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왜 그런지 알고 있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는 로빈이 떠올랐다.

「갑자기 연어라도 된 셈이야?」

“그거, 농담인가?”

「당연히 농담이지. 대충 당신 목적은 알 것 같고. 충격에 못 돌아오면 어쩌려 그래?」

“……그냥 넌 과수연이랑 싸우면서 수사하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건너편 모 형사는 본가로 치유 여행을 떠난 것 같아서 불쾌하고 짜증나고 괴롭히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어때?”

「어머, 이제 독심술까지 익히셨나보네. 아니면 내 마음의 소리가 너무 컸던 걸까?」

“말을 말아야지.”

「그래. 몸조심 마음조심하고. 올 때 맛있는 것도 좀 사오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줘. 끊는다.”

로빈이 강조한 ‘마음조심’이 무슨 뜻인지 조로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전차에서 내리자마자 조로가 향한 곳은 본가가 아니었다. 사실은 이 쪽에 목적이 있었으므로, 이 쪽부터 들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관할서에 연락을 할까 했지만 이미 시효가 한참 지난 일을 경시청 형사가 들쑤시는 것이 관할서로서도 과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 일이 경시청으로 흘러 들어가면 더욱 질책을 받을 수도 있었다. 결국 관할서의 협조는 포기하기로 하고 어디까지나 본가에 들르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했다. 사이타마 현은 꽤나 넓어서, 같은 사이타마 안이라도 조로의 본가와 현장은 꽤 멀리 떨어져있었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조로가 생전 처음 온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생소한 곳이었다.

“……!”

건물을 올려다 본 조로의 눈이 커졌다. 분명 번지수는 맞게 찾아왔을 터이다. 그런데 건물은 그가 생각하던 것과는, 그리고 사진으로 봐오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여기저기 그을음이 묻은 건물 자재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미 지은 지 꽤 된 건물은 누가 보아도 명확하게 화재를 당한 상태였다. 그을음의 상태로 보아 최근에 일어났음에 틀림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방치되다니. 도심에서 떨어진 곳이라 빠른 대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조로는 기억을 더듬어, 며칠 전 후배 형사와 밥을 먹다가 무심코 흘려들은 사이타마 화재 사건을 떠올려낸다. ‘사이타마’라는 지명만 듣고 굳이 귀담아 듣지 않았는데 설마 이 건물이 불에 탔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미 폐허가 된 건물에 불이라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단 큰 길 쪽으로 나온다. 담배를 피워 물까 하다가 ‘흡연금지’ 팻말을 보고 그마저도 포기해버렸다. 그런 조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슈퍼마켓이었다.

“어서 오세요.”

드링크제를 집어 들고 계산대에 선 조로를 맞이한 것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였다. 지방 출신은 아닌지 깔끔한 도쿄말이다. 얼마나 오래 이 곳에서 장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화재의 목격자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여 조로는 말을 붙여 보았다.

“저 실례지만, 저쪽 건물이 얼마 전에 불에 탄 거 맞나요?”

“아마 맞을 거예요. 그 때는 내 손주가 가게를 보고 있어서 나는 못 봤지만.”

“불이 왜 났던가요?”

“꼬맹이들이 안에 들어가서 불장난을 했다지 뭐예요. 어른들 눈도 없겠다, 종종 그 건물 안에서 불장난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애들은 안 다쳤고요?”

“다행히 그 중에 그나마 똑똑한 애가 있었나봐요. 경미한 화상만 입고 다들 무사히 도망쳤다고는 하던데, 잘은 모르겠네요. 근데 왜 물어보는 거죠?”

“아, 너무 흉물스럽게 방치가 돼 있어서요. 사람도 꽤 다니는 덴데, 아직도 저러고 있는 게 좀 보는 입장에서 그러네요.”

드링크제 하나로 너무 많은 정보를 끌어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조로는 계산대에 기대어 선 채로 담배 두 갑을 더 샀다. 이 정도면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긴, 저긴 워낙 흉흉해야지.”

“네?”

“총각은 몰랐나보네. 한 이십 년 전인가, 저기에서 인질 사건이 있었어요.”

“…….”

물론 빌딩을 화제로 삼을 때부터 각오는 했던 것이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요점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조로는 먹은 것도 없이 사레가 들릴 뻔했다. 황급히 기색을 지우고 주인 할머니와 눈을 맞추었다. 굳이 무엇을 더 사지 않아도 기꺼이 이야기해줄 것만 같은 표정이다. 어쩌면 많이 적적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3자가 본 사건은 어떤 양상이었을까. 흔치 않은 기회다.

“안됐지, 어린 것들이. 두 명이 인질로 잡혔다가 결국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살았다지만. 얼마나 트라우마가 클까.”

“PTSD가 심각하겠죠.”

“그래요, 그거.”

순간 나이에 비해 전문 용어를 너무 쉽게 알아듣는 할머니에게 조로는 놀라움이 담긴 시선을 보내버렸다. 그 시선을 깨달았는지 할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손주가 심리학 공부를 하는데, 책을 읽다가 종종 재밌는 게 나오면 얘기해주곤 한다고 말했다.

“범인은 결국 못 잡았다지만 참 안타깝고 그래요. 범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꼭 벌 받을 거예요.”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형사가 되었는걸요, 라는 뒷말은 꼭꼭 씹어 삼키고 조로는 담뱃갑과 드링크제를 손에 들었다. 주인 할머니는 못내 아쉬운 듯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가게를 나오자 길 건너편의 빌딩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순간 두통이 도졌다. 시야가 순식간에 새까맣게 물들더니 환한 빛이 비쳤다. 마치 기억 한 구석에 묻어두었던 영상처럼 기억의 한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자신의 뒷덜미를 잡는 우악스러운 손길. 아니, 우악스럽지 않다. 오히려 일말의 망설임이 느껴진다. 열 살의 조로가 반항하려면 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가느다란 팔에는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이의 뒷덜미를 잡은 탓에 잔뜩 솟은 힘줄이 그나마 남자의 팔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흰 팔에 파란 핏줄이 도드라져있다. 우습게도 기억은 제3자의 시선에서 찾아왔다. 투둑, 소리가 들리더니 노이즈가 가득 들어찬다.

다음에 나타난 것은 꿈에 방문하는 그 소녀였다. 꿈에서 볼 때처럼 불가사의하게 빛나지는 않는다. 대신 겁에 질려,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입을 벙긋거리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꼭 들어야만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픈 와중에도 조로는 그녀를 불러보았다. 물론 이름 따위 알 턱이 없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면 그녀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감촉과 함께 눈앞의 영상이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져버렸다.

“으헉.”

“괜찮아요?”

식은땀이 굉장하다는 것은 굳이 살피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온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조로 자신은 보도 한쪽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슈퍼 주인 할머니가 그를 들여다보고 있다. 저도 모르게 힘이 빠져 조로는 보도에 철푸덕 앉아버렸다. 이쯤 되면 체면이고 부끄러움이고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총각이 빌딩 얘기를 해서, 갑자기 신경 쓰여서 내다 봤더니 총각이 갑자기 주저앉더라고. 걱정돼서 나와 봤어요. 혹시 어디 불편한 건가?”

“……아니, 아닙니다. 갑자기 햇빛을 봐서 현기증이.”

“그런 거라면 괜찮지만. 잠깐 쉬었다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아뇨, 집이 근처라 괜찮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몸조심해요, 건장한 청년이 종잇장처럼 픽 쓰러지길래 얼마나 놀랐는지.”

“고맙습니다, 할머니.”

간신히 감사 인사를 하고, 고개까지 숙여 보인 후 조로는 빠른 걸음으로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썰물처럼 밀려온 기억에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심박수는 최고치를 경신하려는 듯 매우 세차게 올라가고, 땀에 젖은 옷은 그를 무겁게 휘감는다. 이제는 그냥 본가로 들어가 깨끗이 씻고 푹 자고만 싶었다. 로빈이 마음조심을 하라고 한 이유를 새삼 깨달으며, 조로는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서야 왼손에서 달랑거리는 슈퍼마켓 봉투를 깨달았다.

 

***

 

“맛있는 것도 안 사오고 왜 불러내는 거야?”

“참 답지 않게 쪼잔하네. 할 말이 있으니까 불렀겠지.”

“뭔데? 곧 과수연에서 팩스 오기로 했어. 본론만 짧게 말해.”

평소보다 배는 까칠하게 구는 로빈을 보며, 엔간히도 삐쳤구만,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면 나오는 응대를 예상할 수 없어 조로는 얌전히 입을 다문다. 이래서야 담배를 빼어 물 시간도 없겠다. 결국 담배는 로빈이 내려간 후 느긋하게 피우기로 결심하고 조로가 입을 열었다.

“기억을 조금 되찾았어. 물론 후폭풍이 좀 세긴 했지.”

“뭐? 그 때 기억 말이야?”

“응. 어떤 남자의 팔이 나를 잡아끌던 거랑, 그리고 어떤 여자애.”

“여자애라면 함께 인질로 잡혔던 그?”

“아마 확실할 거라고 생각해. 배경이 그 폐허였으니까.”

그리고 사실 20년 동안 꿈 속에서 지겹게도 봐 온 얼굴이니까, 라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선 로빈의 눈매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그거 말고 다른 건? 범인의 얼굴이라든가, 아니면 조금 더 구체적인 상황이라든가.”

“안타깝게도 저게 전부야. 그것만으로도 감당하느라 애 많이 먹었다고.”

“하긴 그랬을 법해. 영상이라면 꽤나 세밀하게 떠올랐을 텐데 뇌가 애를 많이 썼겠어.”

“그 빌딩, 꼬맹이들이 불장난을 하는 바람에 거의 전소 지경이더라고.”

“그런 것도 조사 안 하고 갔단 말이야? 뉴스에 꽤 여러 번 나왔는데.”

“뉴스를 언뜻 듣기는 했지만 그 빌딩인 줄은 몰랐지.”

과수연에서 팩스가 오기로 했다더니 로빈은 그 자리에서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조로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 이후로 더 돌아온 기억은 없지만 이 정도만 해도 꽤 큰 소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본 쿠이나의 아버지는 변함없이 사람 좋은 미소로 그를 맞이했고, 그 옆의 양갱 가게도 변함없는 주인과 변함없는 포장으로 조로를 반겼다. 물론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조로는 쿠이나와 로빈을 위해 두 박스만 따로 포장을 부탁했다. 그러다 결국 한 박스를 더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쿠이나는 도쿄로 온 뒤 바로 만나 그날 주었고, 로빈의 것은 좀 이따 책상에 슬그머니 올려두면 된다. 나머지 한 박스는…….

“그래, 어찌 되었든 기억 조각을 찾은 건 축하할 일이야.”

“더 찾아봐야지. 시효는 지났지만, 뭔가 기억에 누락된 부분이 있다는 건 꽤 불쾌해서.”

“힘 내. 최대한 빨리 퍼즐을 완성하길 바랄게.”

조로는 말없이 발치에 놓인 캔을 들어 담배를 비벼 껐다. 아차, 팩스. 라고 말하며 로빈은 급하게 몸을 돌려 내려간다. 아무래도 팩스가 온다는 말은 진짜였던 것 같다. 자신도 이제 적당히 농땡이피우고 할 일을 마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리를 비운 사흘 사이에 뭐 엄청난 진전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후배가 어느 정도 건수는 잡아놓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아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봄 냄새가 조금 더 짙어진 것은 기분 탓일까. 카스미가세키에도 진짜 봄이 오고 있었다.

 

***

 

“뭐야, 이게?”

“기껏 사왔더니 표정하고는.”

“아니……. 아무리 봐도 너랑은 안 어울리잖아. 이 묘하게 섬세한 포장하며, 캘리그라피에서부터 느껴지는 단맛하며.”

“싫으면 먹지 말든가.”

“그렇게는 말 안했지.”

짐짓 타박을 주면서도 싫지는 않은지 상디는 찬장을 뒤져 다기를 꺼내고 있었다. 양갱엔 역시 일본차지, 라는 혼잣말이 들려온다. 단맛을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조로는 쯧, 혀를 찼다. 등을 돌린 상디에게는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캔맥주 덕분에 손바닥 전체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수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지지부진. 진퇴양난. 사면초가.”

“그냥 안 좋은 한자 단어는 다 갖다 붙인 것 같은데.”

“사실인걸.”

자세한 진척은 알려줄 수 없고, 뭉뚱그려 말하니 역시나 톡 쏘는 대답이 들려온다. 조로는 더 길게 말하지 않고 캔맥주를 마저 마셨다. 손아귀에서 우그러지는 캔의 느낌은 썩 좋지 않다. 어느새 김 오르는 찻잔을 들고 상디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예쁘게 잘린 양갱이 접시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고 포크도 두 개 놓여있었지만 조로는 굳이 포크를 들 마음이 들지 않았다. 상디도 별로 신경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밤에 이런 단 것을 먹기에는 부담스러운지 양갱은 거의 한 사람 몫도 안 되어 보인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왔고?”

“맛있는 것…….”

왜 그 때 슈퍼에서 산 드링크제가 떠올랐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조로는 또 머릿속에 그려지려 하는 기억 영상을 재빨리 지우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상디는 별 생각 없는 듯 아, 그래. 라고 대답하며 양갱을 적당히 잘라 입에 넣었다.

“맛있네, 양갱.”

“거의 60년 가까이 영업해온 집이니까.”

“전통의 맛이군.”

어깨를 으쓱해보이더니 상디는 차를 마신다. 호록, 하는 소리가 들려 조로는 무심코 웃고 싶어졌다. 이 우스꽝스러운 티타임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자신이지만, 맞은편의 남자도 못지않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 왜 양갱을 포장할 때 이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영문을 모를 일이다. 아니,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또 마음이 편해졌다. 어쩌면 이렇게 고착화되어버린 관계가 두 사람에게 가장 편한 것일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하자면, 가장 편한 관계가 고착화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쪽이 일그러지면 결국 어디에선가 일그러지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다면 두 쪽 모두 일그러졌을 때는? 이라는 부질없는 의문이 마음속에 고개를 들고 마는 것이다.



8.

 

“……이걸로 죽었다고?”

“네. 리볼버네요.”

“그 정도는 나도 보면 알아. 근데…….”

조로는 장갑 낀 손으로 탄창을 열어 남은 탄환을 확인했다. 여섯 발 중 네 발이 장전되어 있다.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다.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야, 이거…….”

“아무래도 롤로노아 씨 생각이 맞는 것 같네요.”

“얘네가 원래 이런 식으로 ‘처형’하던가?”

“네. 비슷한 전례가 있습니다.”

“뭔데요?”

감식반원 한 명이 그들 근처로 다가온다. 조로는 탄창을 도로 닫고 총을 감식반원에게 건넸다. 감식반원은 증거품 주머니에 총을 넣고는 조로와 후배를 쳐다봤다. 조로와 후배가 동시에 서로를 마주본다. 굳이 그 단어를 사용하며 설명한다는 게 조금 꺼림칙해서 서로에게 떠맡기고 싶은 눈치가 역력했다. 짧게 한숨을 쉬고 조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러시안룰렛은 뭔지 알죠?”

“한 발만 장전해서 쏘게 하는 거 아닙니까? 6분의 1 확률로 죽게 되는.”

“그것의 반대라고 할까, 좀 더 확실하게 죽이는 방법이 있어요. 카프카스룰렛이라는 겁니다.”

“그런 것도 있습니까?”

“여기서는 여섯 발 중에 다섯 발을 장전해요. 황천으로 갈 확률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거죠.”

그거 참 고약하네요, 라는 문장 끝에 쯧, 하고 혀를 차며 감식반원은 자리를 떴다. 아마 배신을 했거나 조직을 나가려는 똘마니였을 것이다. 남자 한 명이 그들의 발치에 엎드려있었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라 조로는 결국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다른 사망보다도 총기 사고가 훨씬 보기 힘들다. 아마 이 트라우마는 앞으로 몇 년이 지나도 회복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묵직하게 스며들어오는 두통에 장갑 낀 채 관자놀이를 짚는다. 약 83퍼센트의 확률로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대고 쏜 이 남자의 기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토기가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았다.

“이 일대가 야쿠자 ‘서유회’의 구역입니다. 얼굴이 낯선 걸로 봐서 아마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거나 허드렛일만 도맡아 하던 놈 같아요.”

“여기가 언제부터 서유회 구역이었어? 신림회였잖아? 재작년에 신림회 똘마니 하나가 길거리에서 난동부리는 바람에 출동했던 것 같은데.”

“아, 롤로노아 씨가 휴직 중이던 작년 일이네요. ‘신림회’랑 ‘서유회’랑 한 탕 했는데, 그 때 서유회가 여길 ‘접수’했습니다. 꽤 여럿 죽고 다쳐서 공안까지 난리였어요. 조직범죄대책부에 있는 동기가 며칠 아주 죽상이었죠.”

아무래도 자신이 유유자적하던 1년 동안 경시청에는 꽤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조로는 입을 다문 채 팔짱을 낀다.

“대충 정리하고 가자. 야쿠자 일이면 맡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아, 네. 나미 씨한테 연락할까요?”

“내가 할게.”

조로는 건물 밖으로 나와 장갑을 벗고 핸드폰을 꺼냈다. 몇 번 신호음이 가더니 예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네, 나미입니다.」

“경부님, 아무래도 이 쪽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거 참 딱딱하게도 말하네. 경부님이라니, 닭살이 다 돋는다. 내가 필요하단 건, 야쿠자 관련 일이라는 거겠지?」

“……일단 규칙은 지켜야하지 않겠습니까. 서유회 관련 일인 것 같습니다. 주소 불러드리겠습니다. 감식반만 남기고 1과는 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가 봐. 다음에 밥이라도 한 끼 하자.」

“수고하십쇼.”

전화를 끊고 조로는 픽 웃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나미는 1급 시험에 합격한, 그야말로 흔히 말하는 ‘캐리어’였다. 입사한 시기는 비슷한데 지위는 자신보다 한참 높다. 고등학교 때부터 워낙 공부를 잘 해서 학교 안팎으로 유명했는데 설마 자신과 같은 길을 선택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사석에서야 고등학교 동창생 나미지만,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언제나 경부님이다. 둘의 관계는 경시청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었다. 따라 나온 후배가 눈짓하기에 조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철수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또 이 방식을 쓸 거라고는 생각 못 했네요.”

“마지막으로 이 방식이 쓰인 게 언제야?”

“작년 가을이요. 그 때도 똘마니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걸로 살아남는 놈이 있다면 정말 기가 막히게도 운이 좋은 녀석이겠군.”

“17%의 확률을 뚫는 거죠.”

후배는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빵야, 하고 쏘는 시늉을 했다. 점잖지 못한 녀석이라고 조로가 눈을 흘기자 금방 손을 거둔다. 이런 해괴망측한 처형방법에 카프카스룰렛, 이라는 ‘있어 보이는’ 이름이 있다는 게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머리 한 구석에서 웅웅거리는, 벌레 날갯짓 같은 소리가 계속 신경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무언가가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씨, 롤로노아 씨!”

“어?”

“왜 또 길 한복판에서 멍때리고 그러세요. 다칩니다.”

“아, 잠깐 머리가 아파서. 가자.”

“병원이라도 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요즘 머리가 자주 아픈 것 같은데요.”

“별 거 아니라니깐.”

“그 김에 담배도 좀 줄이시면 좋겠네요.”

“……거 진짜, 우리 엄마래도 믿겠다.”

 

***

 

“나는 네 머리에만 살고 있어.”

“넌…….”

또 다시 하얀 공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소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꽤 오랜만에 꾸는 꿈이라 잠시 당혹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녀는 여느 때와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이목구비가 조금 더 선명해보였다. 기억의 편린을 찾은 덕일까. 안개가 낀 듯 멍한 머리로 조로는 간신히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를 찾아줘서 고마워.”

“아니, 그건.”

“조로의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나는 뚜렷해지니까.”

소녀는 무엇이 재밌는지 만족스럽게 웃었다. 희고 깨끗한 치아가 드러난다. 하지만 조로는 웃을 수 없었다. 꿈속에서조차 머리가 너무나 아파서 눈을 뜨고 서 있는 것이 고작이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좌우로 흔들어대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아프다. 소녀는 싱긋 웃고만 있었다.

“이제 조금씩 더 찾을 때가 됐잖아? 퍼즐은 빨리 맞추는 편이 좋을 거야.”

“대체 뭘…… 어떻게…….”

“뒤집고, 파헤치고, 쑤셔봐야지. 특기잖아, 롤로노아 조로 형사님.”

“…….”

“그리고 날 죽여야 하잖아.”

“……!”

가물가물 흐려지는 시야에, 리볼버를 든 소녀가 서 있었다. 철컥, 하는 장전음이 들린다. 쇳소리는 현실에서 듣는 것보다도 둔중하고 차갑게 귀를 찌른다. 왜 자신의 등골에 소름이 달리는지 조로는 알 수 없었다. 소녀는 눈앞으로 다가와 직접 조로의 주먹을 열었다. 자신의 억센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는 희고 가는 손가락을, 조로는 왠지 모르게 멍청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장전된 리볼버가 조로의 손에 쥐어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확실하게 와 닿는 그 순간, 뇌리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번개같이 내리치는 격통 속에서 조로는 꿈속이라는 것도 잊고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렸다.

“어이, 정신 차려봐.”

양 뺨이 뜨거웠다. 조로는 튕겨나듯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있다. 점차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새벽빛으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상디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졸음이 묻어있었지만, 그보다 걱정이 가득하다. 조로는 저도 모르게 상디의 뒤통수를 감싸 안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방금까지 쇠가 잡혀있던 손에 들어찬 것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다. 상디의 체온이 손바닥 금 하나하나를 통해 스며들고 있었다. 적잖이 안심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조로는 발밑의 땅이 꺼지는 듯한 자괴감에 휩싸인다.

“악몽을, 꿔서.”

“형사 중에 사건의 영향으로 PTSD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아니, 그게 아니야.”

“그럼?”

“PTSD는 맞는데, 형사로서는 아니야. 개인적인 일이지.”

“놔 봐, 담배 좀 피우게.”

상디가 윗몸을 일으켰다. 잠옷 대용으로 쓰는 흰 티셔츠에 새벽 달빛이 묻어있다. 침대 옆 장식장에 놓여 있던 재떨이를 끌어당기고 담배에 불을 붙인 상디가 침대 헤드에 기대앉는다. 조로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 그대로 누운 상태였다. 왼손으로는 담배를 피우고 오른손으로는 조로의 목덜미를 만지는 상디의 옆얼굴이 조로의 시야 비스듬히 들어찬다. 곧 익숙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한 담배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는 신호라는 느낌이 들어 조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네 녀석 이야기부터 듣고 싶었지만, 이제 별 상관이 없어졌어.”

“…….”

“20년 전에 납치, 아니 유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아무튼 어디론가로 끌려간 적이 있어.”

“……!”

“나는 사이타마에 살고 있었지. 피해자는 나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어. 나보다 조금 어릴까, 까만 머리카락의 소녀야.”

옆의 상디가 숨을 삼키는 기척이 있었다. 목덜미에 와 닿는 손길이 멈추었다. 조로는 눈을 감는다.

“범인의 몽타주는 눈에 시리도록 봤어. 언제 어디서나 스쳐지나갈 법한 평범한 남자야. 실제로 이렇다 할 특징이 없어서 몽타주 담당도 꽤나 애를 먹었다더군. 아무튼, 그런 사람이 나와 여자애 둘을 납치해서 당시 아무도 안 들어가던 빌딩에 가둬두었어. 목적이 뭔지는 아무도 몰라. 아동 성애자였는지, 단순한 미친놈이었는지.”

상디가 가만히 담배연기를 뱉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여자애는 죽었고, 나 혼자 멍청하게 앉아있었다고 해. 총이 떨어져있었고, 범인은 도주. 물병에서 지문과 타액이 검출되었지만 데이터베이스에 남은 게 없었던 걸로 봐서 초범인 것 같고.”

어느 새 목덜미에 와 닿던 손길이 멈추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보아 담배 하나를 다 피우고 새로 꺼내는 모양이다. 자신 못지않은 헤비스모커라는 생각을 하며 조로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후로 20년 동안 꿈에서 강제로 만나고 있어. 어지간히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야. 잊지도 않고 찾아오더군. 얼마 전에 사이타마에서 그 빌딩을 보고 왔는데 그 이후로 더해. 조금 사그라졌다고 생각했더니.”

“어딘가 불안정해보이는 모습은 그것 때문이었군.”

“내가? 나한테는 네가 더 불안정해보였는데.”

“원래 사람은 불안정한 상태라 균형을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존재니까.”

“가만 보면 참 현학적인 구석이 있다니까.”

“당신만 할까.”

가만히 웃는 조로의 입술에 담배냄새가 스몄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의 뒤통수를 받쳐 더 깊게 입술을 맞댄다. 체중이 조심스럽게 그의 위로 옮겨지고 있었다.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그의 허리에 손을 대자 움찔, 하는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참 노골적인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에 조로는 그의 티셔츠 속으로 손가락을 움직인다. 체온이 맞닿아있는 것만으로도 안정해버린다. 불안정한 한쪽은, 이런 소소한 것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시건방지면서도 어딘가 고요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 남자여야만 했다. 그것은 익히 알고 있다.

점점 가빠오는 숨결을 익숙하게 받아내면서, 아마 자신의 숨결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은 소리를 내고 있을 거라고 조로는 생각했다. 그럴수록 머리 한 쪽은 맑아져온다. 왜 자신이 소녀를 죽여야 꿈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방금 소녀가 자신의 손에 쥐어준 리볼버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일 년 전에 마지막으로 펼쳤던 사건 파일이 아직 열락에 젖지 않은 머리 한구석에서 열심히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낮에 출동했던 사건 현장의 생경한 낯익음까지. 기억의 물결이 너울거리며 자신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역시, 여기까지는 아직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자신의 손가락 끝에 와 닿는 따뜻하고 축축한 느낌과 함께 조로는 생각줄을 놓아 버렸다.

 

***

 

시끄럽게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옆자리는 이미 사람이 뜬 지 오래인 듯 차갑기만 했다. 정신 차린 조로가 전화를 받기 전에 시계부터 확인한다. 출근을 하려면 아직 두 시간 정도 남았다. 벌써부터 호출인가, 성가시게. 눈을 따갑게 찔러오는 아침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조로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다.

“……전화 받았습니다.”

「롤로노아, 지금 어디야?」

“어디냐니, 집이지.”

로빈의 목소리가 묘하게 흥분해있었다. 평소에 잘 느낄 수 없는 하이톤의 목소리다. 조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을 일으킨다. 무언가가 있었다. 그 와중에도 다른 쪽 귀로는 열심히 상디의 기척을 찾았지만 부엌 쪽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걸로 봐서 이미 외출한 듯했다. 이런 아침 일찍 무슨 볼일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해 잠시 갸웃했으나 일단 이쪽 일이 더 중요하다. 잠시 간격을 두고 로빈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빨리 와봐. 중요한 일이 생겼어.」

“중요한 일이라니, 뭔데. 말부터 해봐.”

「하도 진척이 없기에 답답해서 이번 테트로도톡신 피해자의 DNA를 데이터베이스에 넣어봤어. 그랬더니 이게 정말…….」

“뭔데 그래.”

「놀라지 마. 이번 피해자는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었어.」

“그럼 뭔가 범죄를 저지른 전과가 있다는 소리야?”

「전과가 있지. 아주 화려한.」

의미심장한 로빈의 목소리가 조로의 오른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초조해진 조로가 입술을 축이고 로빈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몇 초가 지났지만 극도의 흥분 상태인 조로에게는 새까맣게 긴 시간이 지난 것만 같았다. 로빈의 다음 말이 핸드폰 너머로 들어온 순간 조로는 이미 침대를 박차고 나오고 있었다.

「……이번 피해자의 DNA가 20년 전 사이타마 납치인질극 사건 용의자의 DNA와 99%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어.」



9.

 

-오늘 비 온대. 우산 가져 가.-

담담한 필체가 흰 종이 위를 달리고 있었다. 쪽지의 주인은 굳이 시간을 들여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텐더 녀석이다. 조로는 급하게 구두만 꿰어 신고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군청색 우산이 단정히 접혀 신발장 위에 놓여 있다. 일각이 아까운 이 시점에 쪽지가 눈에 들어와 멈출 정도로 여유가 남아 있었던 자신에게 혀를 찬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우산을 잡아챘다. 문이 쾅 닫히고, 도어락의 전자음이 귓가에 잠시 남았다. 맨션 복도를 울리는 구두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리라는 걱정은 잠시 접어두었다. 확실히 민폐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수 있는 때가 아니다. 사이타마, 테트로도톡신, 사우전드 써니, 롯폰기, 소녀……. 시간도 장소도 엉망진창 뒤죽박죽으로 섞인 단어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기억 속에서 수많은 종이들이 펄럭이고, 얼굴도 모를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갔다. 계속해서 신경을 긁는, 미약한 두통은 충격 앞에서는 아무런 효과도 나타내질 못했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를수록 차갑게 식는 머릿속이 있었다. 그래, 그렇게 뒈져버렸다 이거지. 조로는 잇새로 욕을 씹어 뱉었다.

도쿄의 아침이란 상당히 부산스러운 것이라, 아직 여덟 시도 되지 않았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있었다. 봄이라곤 해도 아직 차가운 아침 공기가 볼을 사정없이 갈겨댄다. 모두가 앞만 본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허겁지겁 뛰어가는 조로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 그렇다. 이 사람들에게는 사이타마 인질극도, 사우전드 써니 독살 사건도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평소의 반도 안 되는 시간을 들여 경시청 앞에 선 후 숨을 골랐다.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자신의 와이셔츠에서 흐릿하게 수증기 냄새가 난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멍한 머리 한가운데, 거실에서 TV를 보며 와이셔츠 다림질을 하던 낯익은 그 등이 떠오른다. 웃기지도 않은 개그맨의 콩트에 아하하, 실없이 웃으며 와이셔츠를 섬세하게 접어 다리미를 가져다대던 그 손길도 떠올랐다. 정신을 차려보자 오른손에 들린 우산이 그를 망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본 독살 피해자의 사진을 조로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왜, 어째서 자신은 저 사진에서 아무런 기억도 떠올리지 못한 것일까. 희미하게나마 중요한 것을 떠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시점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분에 못 이겨 자판기를 발로 찬다. 지나가던 여경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괴감. 한심함. 경악이 가시고 난 자리에 남은 것은 자신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기억해냈어도 일을 이렇게 오래 끌어오지는 않았으리라. 이번엔 벽에 세게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팔은 누군가의 손에 강하게 잡혀 있었다.

“…….”

“그쯤 해둬.”

평소보다도 훨씬 차갑고 차분한 로빈의 검은 시선이 조로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 박동이 내려간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자애롭다면 자애로운 눈빛에 조로는 저도 모르게 온 몸의 힘을 뺐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그 눈빛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하게 잡았던 악력이 조금씩 약해짐이 느껴진다. 조로는 말없이 팔을 내렸다. 로빈의 뒤에 익숙한 얼굴의 형사 두 명이 서 있다. 그 표정은 읽어낼 수 없었다.

 

***

 

“3월 28일 토요일 새벽 세 시쯤 어디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두 시 반까지 서에서 대기하다가 출동 명령을 받고 롯폰기의 ‘사우전드 써니’로 향했습니다.”

“알리바이를 확인해 줄 사람이 있나요?”

“수사 1과 스기하라 계장이 제게 출동 명령을 내렸고, 같은 계 후배 히라츠카와 함께 서에서 대기하다 출동했으니 그가 확인해줄 겁니다. 뭣하면 경시청 CCTV를 조회해도 됩니다.”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로에게는 니코틴이 절실했지만 피워 물 수는 없었다.

“왜 두 시까지 서에서 대기하고 계셨습니까?”

“우리 계 신참 후배의 보고서 작성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후배의 잔업을 많이 도와주는 편입니까?”

“그야 후배 형사들에게 물어보면 알겠지요.”

“한 시부터 자리를 비우신 적은 없는 거고요?”

“길게 자리를 비운 기억은 없습니다만, 화장실을 두어 번 정도 간 것 같긴 합니다.”

느낄 틈 없었던 피곤이 이제야 몰려오고 있었다. 조로는 오른손을 들어 눈덩이를 꾹 눌렀다. 눈앞의 형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잇는다. 따지고 보면 로빈의 계일 뿐 이 형사도 조로의 후배이긴 마찬가지다. 야근하는 모습을 두어 번 본 적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형식적인 질문을 계속하는 것은, 매직미러 너머로 관리관이 취조실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모든 것이 우스워졌다. 사정(私情)을 배제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조로와 함께 일하는 형사들은 전부 다른 사건에 배속되어버렸다. 적어도 이 취조실 근처에는 다가올 수 없게 된 것이다. 형사가 취조를 받는다는 아이러니뿐만 아니라,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문득 이제껏 자신이 이 취조실에서 취조했던 용의자들이 모두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궁금해진다.

“20년 전 그 사건 이후로 사사키 용의자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얼굴도 기억 못했는데 만났는지는 어떻게 알겠습니까.”

“기억상실증을 보증해줄 사람이 있나요? 치료는 꾸준히 받아 왔죠?”

“전담 정신과 전문의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많이 나아져서 반년에 한 번 들르는 정도입니다. 경시청에서 운영하는 PTSD 치료 프로그램도 이용했고요. 이쪽은 한 달에 한 번이군요.”

“잘 알겠습니다.”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넣는다. 조로의 앞에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커피가 있지만 굳이 마실 기분은 들지 않았다. 갈색 수면에 비친 흐릿한 자신의 모습이 더없이 한심해서 커피 잔을 조금 멀리 밀어버린다. 알리바이 확인이 끝났으니 일단 취조는 여기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라는 형식적인 말을 마치고 형사는 수첩을 덮었다. 조로는 의자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들고 일어섰다. 문을 나오자 밖에 로빈이 벽에 기댄 채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 피우러 가지?”

“…….”

“가자.”

익숙하게 앞서 나가는 등을 따라 조로도 옥상으로 향했다. 어느 새 완연한 봄이었다. 그러고 보니 경시청의 별명이 사쿠라다몬(桜田門)이었지, 하는 태평한 생각이 들 정도로 공기가 따뜻하다. 로빈은 여느 때처럼 난간에 기대어 언제 뽑았는지 모를 캔 홍차를 들고 있었다. 조로는 안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낸다. 하루 종일 정신이 없어 아침에 일어난 후 한 개비도 피우질 못했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긴장이 조금 풀린다. 이래서 담배를 끊을 수가 없다니까.

“바깥은 아주 난리야. 당신은 오늘 하루를 취조실에서 보내서 잘 모르겠지만.”

“그거야 어느 정도 짐작은 가. 나라도 난리를 쳤을 테니.”

“경시청 전화통이 특히 큰일이지. 사이타마 현경본부는 말할 것도 없고. 하여간 경시청에 출입하는 사회부 기자인구가 이렇게 많았나, 다른 세상 일처럼 생각하게 되어 버린다니까.”

로빈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조로는 말없이 담배 연기를 한 번 더 깊숙이 빨아들이고, 다시 내뱉었다. 기계적으로 되풀이되는 동작에, 머릿속에도 무언가 희끄무레한 연기가 퍼지고 있었다.

“당신은 아마 이번 수사에서 제외될 거야. 아무리 알리바이가 확인되었다 해도 독살인 이상 혐의가 완전히 벗겨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 또한 예상하던 바다. 조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로빈의 올곧은 눈길이 조로를 향해 있다.

“이건 개인적인 질문이야. 친구로서 들어줬으면 좋겠어.”

“…….”

“당신이 한 짓이야?”

고개를 들어 바라본 로빈의 눈길에는 의심이 담겨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봐 넘겨줄 만큼 따뜻한 것도 아니었다. 직업인의 눈이다. 믿고 의지하는 동료이지만, 있는 대로 모든 것을 털어 고백할 수는 없다. 조로는 그 눈길을 똑바로 받으며, 똑바로 대답했다.

“내가 한 짓이 아니야.”

“그래.”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봄바람이 그녀의 귀밑머리를 살짝 흔들고 지나간다. 조로는 묵묵히 담배를 마저 피웠다. 평소와 똑같을 카스미가세키의 경치가 한없이 낯설다.

“앞으로 수사 방향은 어떻게 정해졌지?”

니코틴에 젖어 까끌한 목소리가 나왔다. 로빈은 예상한 질문이라는 듯 냉랭한 표정으로 천천히 홍차 캔을 우그러뜨린다. 금속의 마찰음이 조로의 신경을 있는 힘껏 긁었다. 여기서 모든 내용을 말해주는 것은 순전히 로빈의 선의다. 이 수사에서 제외된 이상 조로에게 앞으로의 수사 방침을 물을 수 있는 권리는 전혀 없었다. 이제까지 쌓아온 얄팍한 인연에 기대어 그녀에게 수사 기밀을 물어보았지만 대답해주지 않아도 그녀를 원망할 수는 없다. 알려주지 않으면, 알아보면 될 뿐인 일이기도 하다. 잿빛 담배 연기가 봄바람 사이로 섞여들었다. 쓸데없이 화창한 봄 햇빛이 로빈의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투명하게 감긴다. 이 와중에도 와이셔츠의 수증기 냄새는 사정없이 조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애써 기억에서 떨치려 해도 떨칠 수 없는, 다림질하는 뒷모습.

“모르고 질문하는 것 같진 않은데.”

“…….”

“당시 피해자 한 명 쪽의 알리바이가 확실해졌다면, 나머지 한 쪽을 찾을 뿐이지. 이 정도는 기본 아니야? 굳이 나에게 질문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걸.”

“가끔 네 관찰안에는 소름이 끼친다니까.”

솔직한 조로의 한 마디에 로빈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는다.

“뭐, 하루 이틀 같이 한 게 아니니까.”

“그건 그렇다만.”

“20년 전 사이타마 인질극 사건의 소녀 쪽 집을 더듬어봤어. 사건으로부터 5년 후에 모친이 세상을 떴다는군. 사건의 충격 때문에 정신과에 다닌 기록이 있어. 사인은 추락사.”

“추락사?”

“자살이라는 거지.”

“…….”

“부친은 현재 실종 상태야. 언제부터 실종 상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 현재 경찰은 도주의 가능성까지 포함해서 수색 중이야. 그리고…….”

“됐어.”

조로는 손을 내밀어 로빈을 제지했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던 로빈은 그대로 입을 다문다.

“난 휴가를 낼 거야.”

로빈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걱정할 만한 일은 벌이지 않을 테니 안심해. 집에 처박혀 있을 거니까.”

“그럼 왜?”

“자꾸 기억의 단편이 돌아와. 밖을 나돌아다니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래.”

“……그 말 자체는 믿어주겠지만, 그게 휴가의 이유일 거라는 생각은 안 드네.”

“저번에 사 줬던 양갱, 맛있었어?”

허를 찔린 듯 로빈의 눈이 조금 커졌다. 조로의 장난스런 미소를 마주친 그녀가 픽 웃는다.

“맛있긴 했는데, 너무 달더라. 내 입맛엔 좀 그래.”

“그래, 그럼 좀 덜 단 걸로 사올게.”

“이번엔 길바닥에서 정신 놓지 말고.”

그래, 라고 말하며 무심히 넘기려던 조로의 뇌리에 묵직한 충격이 와 닿았다. 길바닥에 정신을 놓지 말라니, 그 장면을 본 사람은 한 명 뿐이었을 텐데. 깜짝 놀라 뒤돌아본 그곳에는 평소처럼 무심한 표정의 로빈이 서 있다.

“……어떻게 알았어?”

“굳이 말을 안 했을 뿐이긴 한데, 그 슈퍼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야.”

“너…… 이…….”

“이렇게 무승부인가?”

로빈은 팔을 벌린 채 어깨를 으쓱했다. 배신감이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경악이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린 채 조로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만 보고 있다. 심리학을 공부하며, 화재 당일 슈퍼를 잠깐 봐 준 그 손주가 눈앞의 이 검은 마녀일 줄이야.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 심리학을 전공했다는 말을 술자리에서 흘려들은 것도 같다. 거하게 한 방 먹었군, 이라고 생각하며 조로는 재떨이 캔 안에 담배꽁초를 구겨 넣었다. 자신의 표정도 함께 구겨지고 있었다.

“느낌이 안 좋아.”

“뭐?”

“이번 사건. 느낌이 굉장히 안 좋다고. 부디 몸 사리도록 해. 이 직관은 믿어도 좋아.”

그 진지한 표정에 조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대체 어딜 간 거야?”

사우전드 써니는 오늘도 문을 닫았다. 칠흑 같은 유리문 안쪽으로 매달린 <CLOSED> 간판을 보고 조로는 혀를 찼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고백한 그 날 새벽 이후로 못 본지 사흘은 되었다.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는 롯폰기 클럽가를 노려보던 조로가 발걸음을 돌린다. 맨션에도 가게에도, 밉살스러운 말린 눈썹은 없었다. 길가에 주저앉아 고래고래 소리치는 취객 하나를 근처 파출소에 데려다주고 나와 앞으로의 행선지에 대해 생각한다. 연락이나 얼굴 보는 것에 죽고 못 사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마음이 황폐할 때 갑자기 사라져버리니 조금은 화도 났다. 몇 번씩 핸드폰을 꺼냈다가 이제까지 번호 교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용히 집어넣는 일의 반복이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걱정 같은 건 들지 않지만 그래도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해 주면 좋잖은가. 하다못해 맨션 현관에 쪽지를 붙여 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혹시 자신이 그를 찾지 않을 거라 단정하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인가. 가로등 아래 멍청히 멈춰선 채 조로는 밀려오는 씁쓸함을 곱씹었다.

휴가는 생각보다 길게 받을 수 있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계장을, 조로는 의심 가득한 눈길로 응시했다.

“얌마, 이건 사실상 근신이야.”

“네?”

“네가 당시 피해자라는 사실은 경시청의 극히 소수 인원밖에 모르지만, 밖에 알려지면 대소동이니까. 웬만하면 집에서 자중하고 있으라는 게 윗선 분부야.”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너무 속보인다고 해야 하는지.”

“그냥 좋은 휴가 얻은 셈 치고 푹 쉬기나 해. 쓸데없이 돌아다니다가 사고치지 말고.”

“예이.”

“자식, 맘에도 없는 대답 잘 한다.”

고개를 까닥여보고 조로는 대강 자리를 정리했다. 일주일의 근신 기간 동안 자신은 뭘 알아내고,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서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멍하니 앉아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면서 돌아다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자꾸만 자신을 재촉하고 있다. 조로는 알고 있었다. 설령 이 이야기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이라 해도 자신은 그 끝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고, 속죄였다. 왼손아귀에 잡힌 담뱃갑이 허무하게 구겨지는 느낌에 치를 떨며, 조로는 경시청을 뒤로했다.




10.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 맞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말해.”

「……네. 형님, 근데 이거 진짜 괜찮은 겁니까?」

“안 괜찮은 것 같으면 안 가르쳐주면 될 것 아니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또 제가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어요.」

“알았으니까 그만 종알거리고 알아낸 거나 말 해봐.”

「아 씨, 진짜 아닌 것 같은데…….」

“남한테 걸릴 것 같은 단어는 적당히 필터링해. 내가 말할 테니까.”

조로는 입을 다문 채 수화기의 정적이 멎기를 기다렸다. 크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수화기에 불어 닥친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그대로 귓가에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나마 믿을 만하고, 이번 사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후배에게 한 가지를 의뢰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익숙한 풍경은 이제 곧 사이타마 역에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왼손에 생수병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핸드폰을 든 채, 조로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실제로는 삼, 사초 정도밖에 되지 않을 간격이었지만 꽤 멀게 느껴진 것으로 보아 자신의 인내심도 참 바닥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그 맨션, ‘그 분’ 소유가 맞습니다.」

“‘그 분’은 제프 관리관을 말하는 것 맞지?”

「네. 매입은 재작년 12월 3일,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건 작년 1월 경으로 보입니다. 맨션 관리인에게 확인하고 왔습니다.」

“잘했어. 그 술집은?”

「이건 본인 명의가 맞습니다. 건물 매입은 마찬가지로 작년 1월이고, 개업은 3월이었습니다. 2개월 정도 준비 기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좋아. 제일 중요한 건?”

「이건 정말 제 양심을 걸고 말씀드리는데, 아무런 진척이 없습니다. 아니, 저한테까지는 안 들어오는 걸 수도 있지만…….」

이는 예상하던 바라 굳이 면박을 줄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주눅이 든 목소리에 자신과 관련되어 덤터기를 쓰고 만 것은 아닌지 조금 미안해지기까지 했으니.

“알았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쪽에서 연락하지.”

「아, 잠깐만요 형님. 이거 중요한 건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 주요 참고인이니까.」

“바텐더 말하는 거지? 뭔데?”

‘주요 참고인’이라는 말에서 조로의 등 근육이 뻣뻣이 굳었다. 누구의 이야기가 나올지 잘 알고 있다. 혹여나 자신이 아는 것 외에 다른 사실이 밝혀진 것은 아닐까. 그 사건과의 연결고리가 될 만한 무언가가.

「집에도 가게에도 사람 기척이 없답니다. 가게는 한 일주일, 집은 닷새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가게는 건물 관리인, 집은 맨션 관리인을 통해 들었습니다. 집 우편함에 나흘 전에 온 카드 명세서가 꽂혀 있었으니 아마 얼추 들어맞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움직임은?”

「아직 우리 쪽 사람들은 모릅니다. 아마 '그 분'의 손자니까 쉬쉬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제가 독단으로 조사한 거라서요. 이거 들키면 저 아마 형님처럼 집에서 야구 중계나 봐야 될 지도 모르겠어요. 하하.」

“조심해. 내 꼴 나면 쓰겠냐.”

「형님이야말로, 조심하세요. 이 사건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쁩니다. 범위가 감이 잡히질 않아요. 20년 전 사건이랑 연결되어있다는 것도 그렇고, ‘그 분’도 그렇고요.」

“내가 애냐.”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투에, 괜히 이쪽의 목소리는 더 투박해진다. 적잖이 멋쩍은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으나 전차 안이라 그럴 수가 없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속은 채워 놓아야 할 것 같아 역에서 사 두었던 주먹밥 도시락을 꺼냈다. 열차 시간에 맞춰 급하게 사느라 손에 잡히는 녀석으로 골라왔는데 다행히 우메보시 맛이다. 우메보시는 싫어하지 않았다. 주먹밥을 한 입 물자 시큼한 매실즙이 터져 나왔다. 참기름 맛이 나는 손가락 끝을 핥으며 물을 마시려던 순간 오른쪽 의자에 내려놓았던 핸드폰이 갑작스러운 진동을 시작했다.

“여보세요?”

「나야, 쿠이나.」

“어. 웬일이냐?”

「아빠가 사이타마 한 번 안 오냐고 물어보셔서, 바쁜 줄은 알지만.」

“나 별로 안 바빠.”

「그런 중차대한 살인사건을 맡아 놓고 왜 안 바빠? 너 혹시.」

“엉?”

「그러게 내가 상사한테 성질 좀 그만 내랬지?!」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뭔데? 휴가라도 냈어?」

“사실 지금 사이타마로 가는 중이야.”

「에엥?」

“이번 살인 사건 피해자가, 내게 이 직업 선택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래.”

「…….」

조로의 눈에, 핸드폰을 든 채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할 말을 찾는 쿠이나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당차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여리고, 매일 타박만 주는 것 같아도 누구보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은 이런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조로는 저도 모르게 입가가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심으로 걱정시켜버렸지만, 그래도 역시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조로.」

“응?”

「빨리 이리 와. 널 한번 안아주고 싶어졌어.」

“……그래, 곧 갈게.”

조로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방금 통화한 두 사람은 자신을 진정으로 믿고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에 헛살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이 퍼진다. 사람이란 순도 백 퍼센트의 어둠 속에서 찾아낸 한 알갱이의 빛으로도 이런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생물이다. 순간 이 사건은 굉장히 느낌이 좋지 않다며 조심하라던 로빈의 한 마디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동시에 밉살스러운 바텐더의 얼굴도.

“그 자식은…….”

대체 어딜 간 거야, 라는 말은 꾹 눌러 삼켰다. 피차 애가 아닌 것을 알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머리 한 구석으로 자연스럽게 밀어 두었던 그 면상은 후배 형사로부터 그가 행적을 감추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닷새 간 행방불명. 그러고 보니 닷새 전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그 맨션에서 나온 날이다. 새벽부터 비어 있었던 듯 차가운 침대 옆 자리가 새삼스럽게 신경이 쓰였다. 사사키 지로라는 그 평범한 남자가 알고 보니 20년 전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몇 시간 전 새벽에 자신은 상디에게 자신과 관련된 모든 과거를 전부 말했었다. 꽤 감정의 기복이 있고 즉흥적인 것도 좋아하는 남자니 내키는 대로 여행이라도 갔으려니, 하는 것이 마음 편하리라.

하지만 역시 창문을 바라보니 마침 터널로 들어가 새까만 차창에는 석연찮은 자신이 비치고 있었다. 이런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을 줄도 알았던가. 분명 이제껏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이런 얼굴을 보면 놀랄 것이다. 어쨌든 자기 자신도 놀랐을 정도니까. 면도가 제대로 안 된 턱을 쓰다듬는 순간 스피커에서는 사이타마 역 도착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곧 전차가 터널을 빠져 나왔다. 하루 종일 꾸물거리던 잿빛 하늘이 드디어 비를 뿌려 대는 모양인지 차창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를 보고 우산을 챙겨 오기를 잘 했다.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끌어 당겨 그 안에서 우산을 확인한다.

 

***

 

“……그 정도 진척이야. 그래서, 앞으로는 어쩔 셈이야?”

“네?”

“그 남자 말이야. 이대로 가지고 놀다가 끝?”

“하하, 로빈 양 말씀 안에 가시가 이만큼 박혀 있는데요.”

“그래, 내 소중한 동료니까.”

천천히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로빈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상디가 살짝 웃었다. 살면서 여러 여자를 만나 봤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우아한 손동작으로 커피를 마시는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아름답게 감긴 가운데 세 손가락, 컵을 지탱하는 엄지, 그리고 당당하게 치켜 올라간 새끼손가락까지. 언뜻 냉철하게만 보이는 그녀 안에도 동료애라는 것이 존재하던 모양이다. 적어도 자신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니까.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흐르는 뉴에이지와 비 오는 날의 카페란 로맨틱한 조합이지만, 안타깝게도 눈앞의 이 미녀와는 그런 로맨스를 기대할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무뚝뚝한 얼굴에 상디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일종의…… 줄다리기겠죠.”

“줄다리기.”

“네. 누가 먼저 말하느냐, 아니면 먼저 밝혀내느냐.”

“그는 이미 꽤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나? 아직 당신의 손에 남은 줄이 훨씬 길어 보이는데.”

“제게 모든 걸 말할 의무 같은 건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상디는 다시 한 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로빈은 한숨을 내쉬듯 웃었다. 하지만 그 미간에 잔뜩 어린 심려를, 상디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저 만났다는 말씀은 하시면 안 돼요, 물론 그렇겠지만.”

“걱정 마.”

“계산은 제가 하고 갈 테니 천천히 있다가 가셔도 됩니다. 할아버지한테 고맙다는 말이랑, 안부 전해주세요.”

“……스스로 하는 게 어때?”

“일이 정리가 좀 되면요.”

그녀에게 싱긋 웃어 보인 후 상디는 옆 자리에 놓아두었던 캡을 깊게 눌러썼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로빈이 내밀었던 서류봉투를 오른손에 든다. 로빈은 눈짓으로 배웅하듯 이쪽을 가만히 쳐다봐온다. 살짝 목례를 한 후 카페를 뒤로 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서류봉투가 푹 젖을 정도는 아니라 발걸음을 조금 빠르게 했다. 젖기 시작한 아스팔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

 

“대체 얼마나 태워먹은 거야.”

건물 뒤편까지 쳐져 있는 폴리스라인을 넘으며 조로가 중얼거렸다. 철없는 꼬맹이들의 장난이라고 여기기엔 건물은 거의 전소 상태에 가까웠다. 사건 당시에도 절대 새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정도로 낡은 건물이기는 했지만 대체 소방서는 뭘 하고 있었기에 이 큰 건물이 이렇게 새까맣게 타버렸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폴리스라인이 없어도 굳이 누군가 이 건물에 들어오려 하지는 않을 텐데. 그렇다 해도 한낮에 다 큰 어른이 이런 흉한 건물에 폴리스라인을 넘어 들어오는 꼴을 굳이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뒷문을 선택했다. 철거 안내판이 저 멀리 나동그라진 채 쓸쓸히 빗물을 담고 있었다. 이 건물에 들어가는 게 맞는 걸까. 뒷문에 선 채, 자신의 발밑에서 유리창 파편이 우그러지는 소리를 멍하니 듣다가 조로는 정신을 차렸다.

이 문을 여는 행위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자신의 트라우마의 원천을 더듬는다는 것이 어찌 두렵지 않을까. 하지만 동시에, 이곳에 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산을 접어 한 번 털고 녹슨 쇠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소리는 귓가를 넘어 신경까지 긁었다.

원래 조금 큰 부동산 회사로 쓰이던 건물이라고 했다. 구겨지고 찢어진 종잇조각이나,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무 용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비 오는 날의 습한 공기와 그을음이 만들어내는 특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유리창이 있어야 할 곳은 텅 비어 밖에서 들어오는 습한 공기가 여지없이 건물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유리창도 커튼도 없는 덕분에 불을 켜지 않아도 건물 안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만에 하나에 대비해 조로는 가방에 넣어 두었던 손전등을 꺼낸다.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어 눈에 띄지 않을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을 억지로 끌어 모아 주위를 둘러보니 낯익은 계단이 눈에 띄었다. 저기로 올라가면 무엇이 나오는지 알고 있다. 자신과 소녀가 갇혀 있던 방. 페트병에 담긴 물을 마시던 어떤 남자의 신경질적인 손짓.

조로는 무언가에 끌리듯 계단을 올랐다. 자신의 발소리가 건물 안에 공명했다. 메마른 잿빛이 어디까지나 이어질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 채 아래만 보고 계속 걸었다. 손전등 빛이 눈앞을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소녀의 웃음소리, 남자의 기침소리가 뇌리를 태우고 있다. 역시 혼자 오는 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꼴을 누구의 웃음거리로 만든단 말인가. 더 오를 곳이 없어 흠칫 놀라 고개를 드니 이미 계단은 끝나 있었다. 눈앞에는 아까와 똑같이 생긴 문이 있다. 오른손에는 손전등이 들려 있으니 왼손으로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벽에 의지해 걸어온 흔적으로 왼손바닥은 그을음투성이였다.

이곳이야말로 20년 전의 사건현장이다. 조로는 목이 타 가방에서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다리는 생각보다 굳건히 바닥에 버티고 서 있었지만, 아까부터 신경을 살살 건드리던 현기증과 이명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층은 책상과 의자 몇 개 빼고는 깨끗했다. 아마 그 이후로는 사건현장으로 보존되었을 테니 당시의 배치 그대로일 것이다. 조로는 밖에서는 안 보일 위치에 풀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격렬히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버틸 수가 없어, 라고 작게 중얼거린 그 순간 눈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니, 저건 자신이다. 20년 전의 자신과 그 앞에 마주보고 앉은 소녀. 너, 하고 불러보았지만 그 둘은 이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둘 다 손목이 뒤로 묶인 채 앉아 있었다.

“그러면 조로는 엄마 아빠랑 셋이서만 살아?”

소녀가 물었다. 천진난만한 목소리는 20년 동안 꿈에서 들어오던 목소리와 똑같다. 어린 자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이타마에서 쭉 살았어. 집은 여기랑 조금 떨어져있지만.”

“와, 나는 얼마 전에 도쿄에서 이사 왔어. 엄마랑 오빠가 여기에 살고 있었거든.”

“왜 떨어져 살았던 거야?”

하지만 소녀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조로의 옆쪽에 있던 문이 쾅, 열렸다. 순간 그 쪽을 돌아본 조로는 경악을 숨길 수 없었다. 20년 젊은 사사키 지로가 그곳에 서 있었다. 얼굴에는 지친 듯한 미소가 떠 있다. 확실히 사진으로만 보던 것보다 주름도 적고 수염도 없다. 하지만 특유의 파리한 기색은 그대로 남아 있다. 당장 가서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이곳은 자신의 기억 안이다. 자신은 이곳에서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당장 손가락도 구부릴 수 없는데 어찌 그를 붙잡는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이미 죽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망령일 뿐이다. 조로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깊숙이 박힌다.

“꼬맹이들, 재밌게 놀고 있었냐?”

“…….”

“우리 재밌는 게임 하나 할까?”

마치 옆집 오빠가 부르듯 친근한 목소리였지만 소녀의 얼굴에는 명백히 공포의 빛이 번지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도 그리 다르지 않다. 조로는 자신이 20년 동안 이 기억을 깊이깊이 묻어두고 있었던 이유를 통감했다. 이런 기억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뇌는 생각보다 주인을 배려하고 있었다.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을 덮치던 급격한 두통과 피로는 뇌가 보내는 경고였다. 아니, 20년 전의 자신이 보내는 경고였던 것이다.

“자, 이거 뭔지 알지? 총이야. 너흰 만져본 일도 없겠지만.”

“…….”

삐이이익.

마치 물이 다 끓은 주전자에서 나는 경고음 같은 것이 조로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에 결국 조로는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확 채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자신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꾸라져 있었다. 들리지 않던 빗소리가 점점 가까워온다. 적어도 이곳을 찾아온 건 헛수고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옆에 나동그라진 손전등을 챙겨 방을 한 번 더 휙 둘러본 후 빠르게 빠져나왔다. 목적을 이룬 이상 굳이 더 이곳에 머무를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잿빛 하늘은 무겁게 머리 위로 늘어져 있었고 날카로운 기억의 파편 같은 유리조각들이 땅에 박혀 있다. 이 빌어먹을 이야기의 끝에서 자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지 고민해보아도 아마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예감만이 들 뿐이었다.

 

***

 

「자료는 잘 받았나?」

“자료도, 덤도 잘 받았지. 미녀 씨로부터.”

「네 말대로 이번 일은 모두 너에게 맡겼지만, 너무 나대다가는…….」

“예,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주머니 겉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확인하면서 상디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정적이 흘렀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는 제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료는 제대로 파기했고, 덤은 잘 가지고 있다가 언젠가 돌려주러 갈게. 그 때까지 경시청에 영감 자리가 남아 있다면 말이야.”

「하나 뿐인 손자 녀석 말본새가 이 모양인 건 내 업보로 생각하지.」

“하하. 건강 잘 챙기라고. 먹는 것도 조심 하고.”

「너…….」

“몹쓸 손자 녀석 다시 볼 때까지 안 뒈져있으면 좋겠네.”

「……조심해서 다녀와라.」

“응. 다녀올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후 상디는 발걸음을 옮겼다. 우산 위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밤이었다. 그가 오늘 사이타마로 향했다는 것은 이미 로빈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다. 지금쯤 옛 소꿉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도. 저번에 다림질을 하는 척 그의 바지에서 몰래 꺼내 두었던 열쇠 복사본은 주머니에 들어 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나, 싶은 마음에 헛웃음이 났다. 사이타마에 산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는 조심하라는 제프의 경고가 무슨 뜻인지 확실히 감이 오지는 않았다. 결국 이런 날을 맞이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백에 무슨 반응을 보일까. 20년 전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로서, 사사키 지로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담당 형사로서, 그리고 자신의…….

아니, 아니다. 상디는 그쯤에서 사고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괜히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잡념을 떨쳤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었지만 어찌 될지 몰라 일단은 참기로 했다. 어느 샌가 멈춰 있던 발걸음을 다시 뗀다. 철퍽, 신발 코끝으로 물방울이 튕겨났다.

 

***

 

운 좋게도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있었다. 마치 자신을 반겨주는 것 같아 조로는 픽 웃는다. 쿠이나의 본가에서 오랜만에 마신 일본주는 생각보다 취기가 깔끔하게 올라왔다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오랜만에 자고 가라는 쿠이나의 아버지도 거절하고 결국 도쿄로 와 버렸다. 전차 안에서 잠이 들어버렸지만 다행히 지나치지 않고 도쿄에 잘 내릴 수 있었다. 지하철 막차도 끊이지 않은 시각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계를 보니 열두 시 반. 이러다 정말 백수 생활에 익숙해져버려서 아침에 못 일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사실 들고 있었다.

아무리 한봄이라고는 해도 역시 비 오는 저녁나절의 텅 빈 집은 싸늘하다. 보일러를 틀어놓고 나오지 않아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평소 습관대로 복도의 불은 켜지 않고 그대로 거실까지 나아갔다. 그 순간, 공기에 옅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상표의 담배 냄새. 너무 생각한 나머지 환후(幻嗅)를 느껴버린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뒤통수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와 닿았다. 생각할 것도 없다. 숨조차 쉬지 못하는 조로를 놀리듯, 차가운 말이 와 닿았다.

 

“오랜만이야, 롤로노아 조로 순사부장.”




Finale.

 

S#1 조로의 맨션 / 비 오는 밤

 

화면이 조금 밝아지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빗소리만이 들려온다. 열려 있는 베란다 문, 달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방.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뒤통수에 총을 들이대고 있다. 인사를 받은 사람이 도로 인사를 되돌려주지 않아 무거운 침묵만이 흐른다. 뒤통수에 총이 닿아 있는 남자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쉰다. 하지만 뒤통수에 들이밀어진 총구는 떨어질 기미가 없다.

 

조로 : 일주일 만에 하는 인사치고 꽤나 성대하군. 머리에 총이라니, 살면서 두 번은 겪지 않을 경험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상디 : 한 번은 겪어본 적이 있단 말인가?

조로 : (나직이 한숨)…….

 

끊임없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소리. 간간이 초침 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여전히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디. 조로는 눈을 크게 감았다 도로 뜬다. 섀시에 빛과 빗방울이 섞여 얼룩져있다.

 

상디 : (눈을 가늘게 뜨며) 기억이 전부 돌아온 모양이군.

조로 : 아아, 그랬지. 내가 왜 이제껏 제일 중요한 기억을 잃고 살아야만 했는지 통감했어.

상디 : 사람의 뇌란 신기하지? 주인을 보호할 줄도 알고.

조로 : 그리고 그 기억을 단 일 퍼센트의 손상도 없이 한 구석에 전부 저장하기도 하고.

상디 : (빈정거리듯) 그 기억에 일 퍼센트의 손상도 없다는 건 어떻게 보장하는데?

조로 : (깔끔하게) 내 직감.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는 상디. 조로는 조용히 심호흡을 한다.

 

상디 :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해냈는지 들어보실까.

조로 : 네놈에게 설명할 의무는 없는데.

상디 : 아니, 있을걸?

조로 : 왜, 네놈이 그 기억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나?

상디 : 내가 20년 전 유괴살인사건의 유족이니까.

 

한 순간 모든 소리가 날아간다. 다시 멀리서 들려오듯 점점 커지는 빗소리. 숨을 삼킨 조로의 뒤통수에는 아직도 총구가 닿아 있다.

 

조로 : 난 네놈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는데.

상디 : 허?

조로 : (단호하게) 난 얼마 전 일어난 롯폰기 살인사건 담당 형사니까.

상디 : ……피차 물어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많았군.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떨어지는 총구. 조로는 팔짱을 풀어 양 주머니에 손을 꽂는다.

 

상디 : 너와 함께 갇혀있던 그 소녀는 내 의붓동생이야. 아버지가 데려 온 자식이지.

조로 : …….

상디 : 뭐 그리 오래 같이 산 것도 아니고, 특별히 큰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야. 다만 어린 나이에 아깝게 갔다 싶었던 정도지.

조로 : 그 ‘오빠’란 사람이 너였군.

상디 : 그 아이가 내 얘기까지 했었단 말이야?

조로 : 오늘 떠오른 기억이야.

 

상디, 총을 든 오른손을 내려뜨린다. 조금 약해지나 싶더니 더 강해지는 빗소리.

 

상디 : 사건 현장에는 총이 떨어져 있었지?

조로 : (자포자기의 미소) ……그랬지.

상디 : 당시 보고서를 봤어. 그 총에서는 단 한 사람의 지문만이 검출되었다고 쓰여 있었지.

조로 : …….

상디 : 범인이 아니라, 바로 네 지문이었어.

 

조로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인다. 하지만 올 것이 왔다는 표정. 딱히 놀라는 표정은 없다.

 

조로 : (툭하니) 게임을 하자고 하더군.

상디 : ……뭐?

조로 : 게임, 말이야. 총을 이용한 간단한 게임. 확률 생존 게임인 거지.

상디 : …….

조로 : 믿겨?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에게 서로 총을 겨누게 한다는 그 발상이.

상디 : (경악에 찬 눈빛) …….

조로 : 그 흔한 러시안룰렛도 아니야. 카프카스룰렛이라는 거였지. 한 발만을 비워놓는 거야.

상디 : …….

 

다시 정적. 조로는 가만히 한숨을 몰아쉰다. 낮에 떠올린 영상을 곱씹으며 신중하게 말을 고른다.

 

조로 : 남자는 다른 총을 손에 든 채, 리볼버 하나를 우리 앞으로 던졌어. 안 하면 둘 다 죽이겠다는 뜻이었겠지. 우리 손에 묶었던 매듭을 칼로 끊었고.

상디 : …….

조로 : (담담하게) 먼저 그 여자아이가 내게 총을 겨눴어. 방아쇠를 당겼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이게 무슨 뜻인지는 열 살짜리 꼬맹이들도 알 거야. 그 때 그 표정.

 

조로의 등 뒤에서 어금니를 꽉 깨무는 소리가 들린다. 어깨를 떨어뜨리는 조로. 주먹을 꼭 말아 쥐고 있다.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목소리 한 구석에서 느껴지는 동요와 혼란. 빗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약해져있다.

 

조로 : ……내 차례가 왔고, 난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말았어. 열 살짜리 꼬맹이에겐 별다른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았던 거지. 그래, 이런 기억이 있으니 뇌가 기억을 봉인하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했을 거야.

상디 : …….

조로 : 그 미친놈은, 그 광경을 보고 싶었던 거야. 여자아이가 죽은 걸 확인하자마자 소름끼치게 웃더군. 그러고 방을 나가버렸어. 나는 싸늘히 식어가는 소녀와 함께 세 시간을 있었던 거야. 그 후로 경찰이 들어왔고, 나는 실신해버렸지. 눈을 뜨니 병원 응급실이더군. 내리 일주일 동안 사경을 헤맸다고 해. 별다른 외상도 없었는데 말이야. 그 동안 뇌가 기억을 강제로 봉인했지 싶어.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담뱃갑에서 담배를 하나 빼어 무는 소리. 조로는 천천히 뒤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상대방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암흑 속에서 가녀린 라이터 불이 반짝, 피어올랐다 사라진다. 상디는 두 개비의 담배를 한꺼번에 물고 불을 붙인 후 하나를 조로에게 내민다. 조로는 사양 않고 하나를 받아 입에 문다.

 

조로 : (연기를 한 모금 내뱉고 씁쓸하게)……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의식까지 봉인할 수는 없었던 거야. 20년 동안 줄기차게 꿈속에서 그 여자아이를 다시 죽여 왔으니까.

 

상디가 말없이 연기를 빨아들이고, 천천히 내뱉는다. 빗소리가 사라진 공간에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조로 : 내 기억은, 그리고 20년 전의 사건에 대해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야. 이제 롯폰기 사건에 대해 말해 줄 차례라고 생각하는데.

상디 : (까끌한 목소리로) ……그래야겠지.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뱉는 소리. 조로는 거실 장식장 위에 놓여 있던 재떨이를 가져다 재를 떨어내고는 소파에 앉는다. 멈칫하더니 바닥에 앉는 기척.

 

조로 : 먼저, 왜 내게 거짓말을 했지? 마르가리타를 둘이 마셨다는 거짓말 말이야.

상디 : (힘없이 웃는 소리) ……형사에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 아니겠어? 범행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든가, 진범을 숨겨주려 한다든가.

조로 : ……그래서 네 경우는?

상디 : 숨겨줘야 했지. 내 의붓아버지를.

조로 : …….

 

대충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젓는 조로.

 

상디 : 그 자식이 20년 전의 진범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단골이 된 후로 술이 취하면 내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으니까. 아마 본인은 내게 말했다는 사실도 잊고 있을 거야. 고주망태가 된 상태에서 딱 한 번, 이야기했거든.

조로 : …….

상디 : 이미 공소시효도 한참 지났고,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어. 20년 전 내 의붓동생을 죽였다고 해서 복수할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다혈질인 것도 아니야. 내 실수는, 그 사실을 의붓아버지에게 말해버렸다는 것뿐이지.

 

조로,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끈다. 상디는 이미 한 개비를 다 피운 후 또 새로운 담배를 꺼내고 있다.

 

상디 : 한 대 더?

조로 : 아니, 난 이제 됐어.

 

혼자라도 피우겠다는 듯 다시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상디. 찰칵, 하는 라이터 소리와 함께 입매가 살짝 비친다.

 

상디 : 뒷문에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의붓아버지도 잘 알고 있었어. 종종 와서 일을 거들곤 했거든. 다행히 그 날 온 손님 중에는 의붓아버지를 아는 사람도 없었고.

 

조로, 신경질적으로 무릎을 두드린다.

 

상디 : (헛기침을 하고) 기억하지? 피해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내가 다른 손님의 말상대를 하고 있었다는 증언 말이야.

조로 : ……그게.

상디 : 맞아, 바로 그 손님이 내 의붓아버지야. 미즈나시 소이치로, 59세. 나이가 너무 많다는 점에 착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모양이야. 아마 경시청에 소환되어 조사도 받았겠지. 내가 입적되지 않은 상태였으니 나와의 연관성은 제로. 내가 떠오를 일도 없었던 거야.

조로 : (어금니를 꽉 깨문다)

상디 : 나중에 캐물어보니 자살할 때 쓰려고 소지하던 독이었다더군. 참 나, 멍청한 영감이야. 그 독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알지도 못하고. 아무튼 나도 멍청한 놈이지. 20년 동안 다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자식 잃은 아비의 슬픔이 그리 쉽게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말이야.

조로 : …….

 

상디의 담뱃불이 명멸한다.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부드럽게 알린다.

 

상디 : 한 잔 더 마시고 가라고 했더니 자기는 가봐야겠다는 거야. 이미 사사키는 제 자리로 돌아온 상태였고. 뭔가 표정이 이상해서 뒷문까지 따라갔지. 엄청난 얘기를 하더군. 내가 뒤돌아서 컵을 정리하는 사이에 그의 잔에 독을 넣었다고.

조로 : (침묵)

상디 : 깜짝 놀라 내다보니 이미 사사키는 칵테일을 다시 한 번 입에 댄 상태였어.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야. 난 일단 경찰에 신고를 해야만 했고. 아버지에게 갑자기 사라지면 더 의심받을 테니 일단 가게에 눌러앉아 있으라고 말했어. 그 이후로는 당신이 와서 본 대로야.

조로 : (빈정거리듯) 부자간의 환상적인 호흡이었군.

상디 : (쓰게 웃으며) 말하자면, 그런 거지.

조로 : 우리 팀은 그 호흡에 놀아났고.

상디 : (필터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며) 경시청 간부 중에 친족이 있다는 건 참 다행이야, 그렇지 않아?

 

조로, 한숨을 토해내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끄른다.

 

상디 : 내일 자수하러 가기로 했어. 경시청에 바로 출두할 거야. 지서에 자수하면 경시청으로 송환되는 과정에서 각종 매스컴들이 떠들썩할 게 뻔하니까. 피곤한 건 싫거든.

조로 : …….

상디 : 나도 같이 갈 거고. 범인은닉죄에 증거인멸죄 정도가 적용되려나. 한 이 년 정도는 각오해야겠지.

조로 : …….

 

어느 새 빗소리가 완전히 그치고, 구름마저 걷힌 듯 베란다로 약한 달빛이 새어 든다. 어둠에 익숙해진 두 사람의 눈에 서로가 비치고 있다.

 

상디 : 우리 할아버지가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은 공표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엄청나게 고생을 많이 한 양반이거든.

조로 : 내 권한은 아니야.

상디 : 당신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는 사람도 없겠지.

조로 : ……내 동료 중 하나가 이미 알고 있어.

상디 : (싱긋 웃으며) 로빈 양 말하는 거야?

 

순간 커지는 조로의 눈동자. 상디는 말없이 웃고만 있다. 조로의 눈이 점점 가늘어진다.

 

조로 : 그래, 네 조력자였군.

상디 : 조력자라기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랄까. 그런 관계지. 내 할아버지 이야기를 당신에게 해준 걸 보면 완전히 내 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조로가 한숨을 토해내며 소파에 파묻힌다. 상디는 자신의 무릎을 감싸 안은 모양새로 앉아 있다.

 

상디 : 많이 혼났으니까 그녀를 너무 질책하지는 마.

조로 : …….

상디 : 자수하기 전에 모든 걸 말하고, 얼굴이라도 많이 봐 두려고 왔어.

조로 : …….

 

상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볍게 던진다. 조로의 주먹 안에 잡힌 무언가. 천천히 주먹을 열자 그 안에 자리 잡은 열쇠가 보인다.

 

상디 : 멋대로 복사해서 미안해. 이렇게 쓸 날이 올 것 같아서 미리 복사해뒀어. 총을 들이댄 것도 마찬가지야. 일종의 충격요법이라고 생각했지. 아직 기억을 찾지 못했다면, 강제로라도 되돌리려고 했어. 그래도…… 미리 돌아와 있어서 다행이야.

조로 : (입술을 깨물고) ……다림질.

상디 : (당황한 듯) 뭐?

조로 : 다림질을 하던 네 모습이 자꾸 떠올랐었다.

상디 : …….

조로 : (한숨을 섞어) 나 스스로는 이성적인 인간이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너와 엮이면 그게 잘 되지 않았어. 너와 만나고 조금 더……인간답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상디 :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침묵)

조로 : (한숨) 얄궂기도 하군.

상디 : (힘없이 웃음)

조로 : ……미안하다. 네 동생 일. 속죄하며 살아갈 일이겠지.

 

상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무릎걸음으로 조로에게 다가간다. 조용히 마주치는 두 사람의 눈동자. 천천히 일어선 상디가 팔을 뻗어 조로의 머리를 끌어안는다. 약하게 끼치는 똑같은 담배냄새.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는 상디.

 

상디 : 마르가리타의 기원을 말해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조로 : …….

상디 : 죽은 연인을 기리기 위한 칵테일이야. 마르가리타는 죽은 그녀의 이름이고. 참고로 죽은 그 아이의 이름이 마리였고, 마르가리타는 내 의붓아버지가 자주 마시던 칵테일이었지.

조로 : ……그랬나.

상디 : 한 번쯤은 알려주고 싶었어. 마실 때 마시더라도 이야기는 알고 마시라고.

조로 : (픽 웃으며) 그것 참, 빌어먹게도 고맙군.

상디 : (자신에게 들려주듯 나지막이)……다 지난 일이니까.

 

마주 보고 힘없이 웃는 두 사람. 조금 더 선명해진 달빛이 두 사람의 어깨에 묻어 있다.





After Talk.
 

안녕하세요, 적향입니다♥ 두 번째 책으로 인사드립니다. 절 원피스 개미지옥으로 이끈 기념비적인 커플 조로산!

사실 이 책의 시작도 미약하기 그지없네요ㅋㅋㅋ 옛날 친구가 ‘형사 조로와 나른한 매력의 바텐더 상디’로 리퀘를 줬는데, 그만 제 취향에 취향을 더하고 끼얹다보니 나른한 상디는 어디가고.,,,,..8ㅅ8 추리범죄수사물만 남았.......죄송합니다......T_T

사실 쓰면서 제 자신을 많이 원망했어요. 왜 배경은 현대 일본이며(일본은 3년 전 2박3일로 칸사이 쪽 여행해본 게 전부인데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아직도 모르겠...) 왜 독을 테트로도톡신으로 설정했으며(인터넷에 자료도 많이 없던...그냥 흔한 청산가리 할걸...) 왜 조로의 직업은 형사인가...... 경시청 수사1과... 일본 경시청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며 최대한 비슷하게 써 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얕은 지식의 밑천이 드러나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제 능력 부족이려니 생각해주세요...ㅠㅅㅠ 책 좀 더 읽을걸...

사실 이 글을 쓰면서 2015년 한 해 동안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너무나 많아 참 이래저래 회의가 많이 들었습니다.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싶은 고민도 많았어요. 그래도 격려해주고, 글 올릴 때마다 피드백 남겨주신 분들 덕분에 제가 이 후기까지 쓰고 있습니다. 2010년에 시작했던 글을, 한 지인분(제가 많이 사랑합니다...♥)의 형사 조로산 덕분에 퍼올려서 1편부터 다시 완결까지 써내려가고 있는 이 시점이 참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한 기분이네요.

이거 그래도... 팬픽인데... 얘네 너무 연애를 안하네요... 제 탓입니다. 절 매우 치세요ㅠㅠ 사실 제가 이 구역의 연애고자입니다. 수위물은커녕 연애도 못시키는 제가... 흑..흐흑... 너무 마이너한 설정이라 쓰면서도 걱정이 많이 되었는데, 다음에 또 기회가 있다면 정말 보는 사람이 다 오그라들 정도로 닭살 돋는 연애물을 한 번 써보고 싶습니다. 조로산이 될지 루산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아니 책이 또 나오긴 할까...?)

결말 부분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시나리오 형식에 도전을 한 번 해 보았습니다. 여기서도 조언 주신 많은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에 드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또 다른 색다른 경험이 되었어요. 대사 양이 너무 많아 이 형식이 아니면 커버를 칠 수 없었을 것 같았...큽...ㅠㅠ

현실과 다른 부분(특히 일본 지리나, 경시청 구조, 독에 대한 묘사 등), 혹은 떡밥 회수 실패, 혹은 전개 모순 같은 점이 보인다면... 너그러이 용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ㅠㅜ 최대한 AS중이긴 한데... 이게 머리가 안 좋으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전형인걸까요...?ㅋㅋㅋㅋㅋㅋ (주륵) 글을 계획성 없이 쓰고 싶은 때에 쓰고 싶은 대로 쓰다 보니 구멍이 여기저기 엄청나게 많을 것 같습니다. 제보해주신 분께는 소정의 사례를...(이거 아님

많은 분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싶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했는데.. 이게 한계였네요.... 다음부턴 능력 한계 안에서 일을 벌리는 걸로....(주륵2) 1여 년에 걸친 연재를 함께 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특히 이 후기를 읽고 계신 분들께는 더더욱요!

 

ps. 블로그/트위터를 통한 피드백 항상 감사합니다! XD

ps2. 표지가 제발 예쁘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내 아침잠...

 

2015. 12. 16

적향赤香 드림



결제선 아래는 읽으셔도 안읽으셔도 무방한 에필로그 두 개입니다. 두 사람의 후일담이에요.

이까지 무료로 공개하기엔 당시 소장본을 구입해주신 분들께 죄송해서 후기는 유료로 공개합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세요? 이 포스트를 구매하시면 아래에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텍스트4,199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